503화 신이 원하는 것 (1)
오랫동안 자신을 감추고 있던 봄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봄은 도로 옆의 들판과 나뭇가지에서 초록빛으로 끓어오르는 데 그치지 않았다.
피어오른 꽃들을 스치는 바람은 온도도,습도도,소리마저 달랐다.
더 포근하고 살갑게 불며 소년을 감싸안았다.
흩날리는 꽃씨들이 하나하나 선명 하게 보일 만큼 맑은 날씨.
하지만 그 환한 햇빛과 투명한 공기는 닥쳐을 죽음까지 선명하게 돋보이게 하는 것 같았다.
- 저벅. 저벅. 저벅.
이미 너댓 개의 물집이 잡힌 발이 쓰라렸다.
“준비하라! 목적지는 사십 분 뒤다!” 하사관의 목소리가 울려퍼진다.
대로를 걷던 소년은 까마득히 보이는 평야가 너무 가깝다고 생각했다.
그건 죽음과 소년의 거리였다.
40분이라니.
일단 전투가 개시된 뒤.
함성을 지르며 달려나가는 시간을 제외하면 운이 좋아도 고작 1분을 살아남기가 어려울 것이다.
40분이라니!
그는 열다섯 살이었다.
웬만큼 방만하게 살았더라도 사십 년은 더 살 수 있었을 텐데.
갑작스럽게 일어난 전쟁 때문에, 그의 수명은 터무니없이 줄어들어 버렸다.
세 달 전까지만 해도 같이 있던 부모님이 생각났다.
아버지는 나무를 하다가 도끼를 잘못 휘둘러서 한쪽 다리를 잘 쓰지 못하는 분이셨다.
그래도 항상 성실하게 소를 먹이고 밭을 가셨다.
소년이 전쟁이 차출됐을 때 먹먹한 표정으로 말없이 바라만 보던 그 모습이 자꾸 떠올랐다.
입술이 조금 떨렸던 것 같기도 했다.
한참을 간 뒤에 돌아봤지만,아버지의 실루엣은 계속 그 자리에 있었다.
다리가 불편한 아버지 대신 힘쓰는 일을 도맡아 하셨던 어머니가 생각 났다.
종일 운 탓에 얼굴이 퉁퉁 부어, 안 그래도 둥근 얼굴이 한층 더 부풀어 오른 마지막 모습을 떠올렸다.
그 모습을 생각하자 소년의 눈앞도 흐릿해지는 것 같았다.
배고플 때마다 울어서 소년이 웃겨 주려고 깡충깡충 뛰어다녔던 여동생, 얼마 전에 새끼를 두 마리나 낳은 누렁이도 생각났다.
그들이 앞에 있는 것 같았다.
모두를 껴안고 싶었다.
빵을 구우며 부르는 어머니의 콧노래를 듣고 싶었다.
같이 밥을 먹고 손을 잡고 재미없는
농담에 웃고 싶었다.
동생에게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었다.
늦잠을 자고 혼나고 싶었다.
당장이라도 돌아가서, 자르버가 왔다고.
안 다치고 돌아왔다고 외치고 싶었다.
자기가 여기서 죽었다는 사실을 가족들이 알면 어떻게 될까?
소년은 이를 꽉 물었다.
- 저벅. 저벅.
늦어지면 뒤의 병사들에게 떠밀리고,
얼굴도 모르는 황제에 대한 충성 따위를 지껄이는 하사관의 감시를 당하며,멍하니 앞으로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다 보니 결국 소년은 이곳까지 도착해 버렸다.
이대로 계속 앞으로 나아가야 할까? 아직 연합의 철인에게 짓밟히지도. 살이 뚫리고 뼈가 부러지지도.
핏물이나 내장이 흘러내리지도 않았는데 이미 소년은 죽음에 대한 공포에 압도당해 버렸다.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갈 때마다 소년은 발 대신 머리를 땅에 처박고 싶었다.
디디는 땅 아래로 파고들어 사라지고 싶었다.
소년에게는 제대로 된 보호 장구도, 적군의 선두에 설 철인들에게 한 방을 먹일 무기 따위도 준비되지 않았다.
손에 든 것은 철인들에게 약간의 대미지라도 주기 위해 갈고리에 묶인 조잡한 폭탄이었다.
선두에 설 적의 철인들의 관절 부위에 갈고리를 건 뒤 당겨서 작동 시키는 것이다.
당연히 제대로 쓰기 힘들고,설령 폭파에 성공한다고 해도 병사 본인이 즉사할 확률이 압도적이기 때문에 그 조잡한 갈고리 폭탄마저 병사당
하나씩밖에 제공되지 않았다.
철인의 관절을 조금 삐걱거리게 만들고 죽는 게 제국 징집병들의 쓸모 전부였다.
그들이 각자 어떤 역사를,감정을, 세계관을 가지고 있고.
자기 자신에 대해서 어떤 평가를 내리건.
전장에서 그들의 존재 가치는 그게 전부였다.
제국 에레데일 출신의 열다섯 살 소년은 주위를 돌아봤다.
소년은 잠깐 동안 세계의 부조리함에 탈영이라는 방식으로 대항하려는
꿈을 꾸고 있었다.
하지만 징집병인 그의 위치는 높은 도주 가능성과,아무런 의미 없이 죽어가기 위한 목적에 걸맞게 1열에 있었다.
후열의 병사들과 양익의 기병대를 뚫고 탈영할 수 가능성은 아예 없다.
지금 도주하는 건 사십 분이라는 소년의 남은 생애를 더 짧게 만들 뿐.
적전敵前탈영은 말할 것도 없이 즉결 처분이다.
하사관의 창끝 위에 꿰어져 전시되는 제 얼굴을 상상하는 건 전혀 어렵지 않았다.
소년은 속이 메스꺼웠다.
아무리 이성적으로 생각해 봐도, 살 수 있는 방법이 없다.
가만히 걷고만 있는데 호흡이 진정 되지 않았다.
눈앞이 캄캄하고 목에서 신물이 올라왔다.
토하기 직전.
소년은 이성을 버리고 영웅주의로 도피했다.
애초에 지휘부가 징집병들에게 원하는 바이기도 했고,소년의 입장 에서 보아도 어차피 40분밖에 남지 않은 삶이라면 환각에 빠져 드는 편이
현명했다.
어차피 다른 선택지는 없었다.
소년은 제국의 역사에 쓰여 있던 전쟁 영응들의 이름을 떠올렸다. 역대 황제들과 신이 자기를 보호해 줄 거라고 믿었다. 전장에서 공을 세운 뒤 유명해서 고향에 귀환했을 때를 상상했다.
그렇게.
소년이 무리해서 자신의 피를 끓여 가려던 순간이었다.
‘저게 뭐지?’
대로 가운데.
적들의 피가 뿌려질 평야로 접어드는
곳에 굵고 거대한 선이 보였다. 가까워질수록 선은 점점 굵어 보였다.
‘여기서 이 정도라면……
“잠깐……. 전군 정지!”
“전군 정지!”
“전군 정지!”
지휘관의 지시를 복창하는 소리가 울려퍼졌다.
* * *
- 다그닥! 다그닥!
돌아온 정찰병이 헐떡이며 외쳤다.
“전방에 균열입니다!”
반백의 머리칼을 흩날리는 지휘관이 인상을 찡그렸다.
“보고 있다. 그래서,우회로는?”
“그게… 없습니다. 평야로 접어드는 구간에서 최소한 20미터 이상의 폭으로 대균열이 발생해 있습니다. 깊이는 측정 불가입니다.”
“대체 언제부터 이런 게 생겨난 거지?”
지휘관의 중얼거림에,부관이 머리에 손을 짚었다.
“작년에 갱신된 지도까지만 해도
없던 지형입니다. 연합에서 만들 었을까요?”
“자넨 상식이라는 게 없나? 폭약 따위로 이런 걸 만들어 낼 수 있을 것 같아? 그럴 수 있었으면 우리가 지나가고 있을 때 했겠지.”
“하지만 계속 반복되는 일이라……
“그래도 추론을 하려면 똑바로 하란 말이야. 무엇보다 우리만 막히는 게 아니잖나.”
지휘관이 목소리를 낮췄다.
“적들의 주력도 속속들이 막히고 있다는 정보는 자네도 알고 있지 않나? 지형이 이렇게 망가지면 오히려 철인들이 기동하기 불리해질 테지.
기사 제이드! 머리를 좀 쓰게.”
“죄송합니다.”
푸른 갑옷을 입은 부관이 머리를 긁적였다.
“역시,푸른 사자 출신들은 개판 이라니까.”
역시 귀족 출신이긴 하지만.
변방에서 수없이 경험을 쌓아 온 지휘관은,귀족 자제놈들에게 작위나 주기 위해 만들어진 푸른 사자 기사단의 존재 자체가 몹시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들을 관리하던 로랑스 공작도 어느새 완전히 손을 놓아 버려서.
그곳에 속해 있던 기사들은 이곳저곳 흩어져 배분된 상태.
경력을 쌓기 위해 제 부관으로 들어온 제이드에게 괜히 짜증을 낸 지휘관이 다시 지시를 내렸다.
“회군한다!”
♦ * *
“회군… 이라고?”
에레데일 출신의 소년병.
자르버는 멍하니 중얼거렸다.
위액과 함께 번들거리는 공포에서
도망쳐 애써 영응주의에 도취되기도 전에 회군 지시가 떨어졌다.
사십 분짜리 수명이 다시 크게 늘어난 것이다.
살아남았다는 현실감이,
- 딱.
소년의 이마를 때렸다.
‘아니……
그의 이마를 때린 건 숭숭 털이 난 늙은 손가락이었다.
“뭐야,왜 때려요?”
자르버는 곁에 서 있던 아저씨에게 따졌다.
자기처럼 1열에 서 있고.
역시 변변찮은 무장이라곤 없이, 갈고리 폭탄 하나 든 주제에.
이상할 만큼 긴장이라곤 하나도 하지 않던 50대 중반의 아저씨였다.
“클클……. 이 녀석,너 쫄았지? 아주 한 걸음 한 걸음마다 낯짝이 새파래졌다 하얘졌다 가관이더만.”
“쫄긴 누가!”
발끈하려던 자르버는 빙긋 웃는 아저씨의 얼굴에 곧 한숨을 내쉬었다.
“아씨…. 당연히 무서웠죠. 아저씨는
어차피 죽을 때 돼서 아무렇지도 않았던 거예요?”
“얼씨구? 요 맹랑한 자식 말쁜새 보소. 안 죽을 걸 알았으니까 그렇지.”
“네?”
전투 직전이라고 생각한 순간.
최고로 긴장이 고조되고,북소리도, 심장 박동도 빨라졌는데.
뜻밖의 회군 지시가 내려진 탓에 모두가 맥이 탁 풀려 버린 상태였다.
잡담을 나누는 병사들이 있어도 가혹한 하사관들조차 별다른 제지를 가하지 않았다.
“안 죽을 걸 알았다뇨? 그게 무슨
소리예요,아저씨?”
“페더록 헤이븐에서는 산사태가 일어났지. 멧돼지 초원에서는 그 곁을 흐르던 강이 범람했어. 노스레인 고원에서는 여기와 비슷한 대균열이 있었고.”
”그래서,이번에도……?”
반백의 징집병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주름살이 잡힌 손으로 소년에게 뭔가를 쥐어 주었다. 까끌한 감촉을 느끼며 소년은 아래를 내려다봤다.
“달.2”
그곳에는 나무로 깎인 자그마한 하현의 달이 소년을 마주봤다. 그건
비유가 아니었다. 도톰하게 깎인 달의 중간에 신경 써서 새겨진 눈이 제법 인상적이 었다.
“쉿.”
“뭐죠?”
“이런 기적이 벌어지는 날은 항상 달이 환하게 빛나거든…. 슬쩍 왼쪽 하늘을 보렴. 태양을 뚫고… 달이 보이지 않니?”
그 말대로였다.
가리킨 방향을 보면 달은 환한 봄의 태양에도 지워지지 않고 또렷이 자신을 나타내고 있었다.
새하얀 달은 창백하다기보다 신성해
보였다.
“분명 달의 신께서 싸움을 막으신 거야.”
자르버는 달의 신 같은 건 없잖아요, 라는 말을 꿀꺽 삼켰다.
게다가 전쟁을 막는 신 따위는 없다.
빛의 신 일리엔.
불의 신 비르폰.
참회의 신 예메라 이외의 다른 숭배는 모두 이단이다.
세 여신의 사제들은 모두 적극적인 주전파.
전쟁에서 공을 세운 자들에게 구원이 있을 것이라며 신도들을 전쟁에
내모는 종교들이다.
눈앞의 남자가 믿는 건,분명히.
‘이단……
그리고 남자는,
‘사교도.’
악마, 화형,고문,이단재판,인신 공양 같은 단어들이 연달아 떠올랐다.
수없이 학습된 거부감과 공포가 솟아오른다.
하지만.
소년의 이성과 본능이 동시에 외치고 있었다.
인신공양은.
신도들을 죽음으로 내모는 세 여신이 하고 있는 게 아닌가?
전쟁이야말로 악마가 하는 짓이 아닐까?
정말 그들을 믿고 따라도 되는 걸까?
그 순간이었다.
반대편에 있는 40대 초반의 남자가 소년의 어깨를 두드렸다.
“달이야말로 우리를 감싸 안는 민중의 신이지.”
“어라,아저씨도……?”
“그래.”
남자는 달 조각이 걸려 있는 목걸 이를 슬쩍 가슴 밖으로 꺼내 보였다.
“이건 신이 반대하는 전쟁이야.” 하루에도 몇 번씩 꿈이 바뀌는 나이답게.
매일 탈영을 꿈꾸다가,영응주의로 도피하기로 했던 소년의 심장은.
이제 신앙심으로 다시 힘차게 뛰고 있었다.
또렷하게 하늘에 박힌 달이 아름 다웠다.
저게 신이라면.
자신을 살린 신이라면.
충분히 믿어 볼 만하지 않겠는가?
자르버는 손에 쥔 달 조각을 꼭 움켜쥐었다.
어쩌면,달의 신님은.
그리고 그분의 가장 용감한 사제는.
저 거대한 균열 어딘가에서 자애로운 미소를 짓고 계시지 않을까?
‘예쁜 누나였으면 좋겠다. 나는 서른 살까지 괜찮은데…. 아니야, 신성한 사제님이니까 나이도 천천히 먹겠지? 마흔 살까지 외모는 20대 초반일지도? 그럼 숫자는 상관없지…. 개인적으로 머리카락은 허리까지 길게….’
- 파드득!
소년의 망상을 싣고 날아가듯.
새 한 마리가 균열 너머로 날개를 퍼덕거렸다.
* * *
- 번쩍!
매끄러운 것에 부딪혀 정면으로 반사되는 햇빛을 맞고.
날아가던 새가 잠시 허공에서 휘청 거렸다.
바람에 누운 긴 갈대들이 다시
그것을 덮자 새는 퍼덕거리며 다시 멀리 날아갔다.
- 딱딱.
머리를 간지럽힌 갈대를 쳐내고.
나는 살짝 이빨을 부딪쳤다.
‘후우… 힘드네……:
새벽이 되기 전까지.
수 킬로미터에 걸쳐 지진을 일으킨 탓에 마력이 쑥 빠져나가 있었다.
- 달그락.
너무 무리해서 어디 뼈라도 부러졌 는지 모른다.
풀숲에 누워 멍하니 하늘을 바라봤다.
달의 힘을 빌려 쓴 날이면 해가 뜬 뒤에도 달은 허공에 선명하게 제 윤곽을 드리우고 있었다.
항상 단조롭게 하면 너무 눈에 될까 싶어 강을 범람시키고,산사태를 일으키고. 군함이 가는 길을 얼리는 등.
다양한 짓을 해봤지만.
어차피 저런 식으로 표가 나버린다.
‘어쨌던,벌써 서른 번을 채웠나.’
이제 좀 균열을 계획대로 만들어
낼 수 있게 되었다.
만들어 낸 폭이나 깊이를 생각한다면 양쪽 다 싸움을 단념하고 군대를 물렸을 거다.
하지만.
’아직이군.’
〈그들>이 움직이려면 얼마나 이 짓을 더 해야 할까.
벌써 1년.
여전히 반응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