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해골병사는 던전을 지키지 못했다-420화 (420/458)

504화 신이 원하는 것 (2)

1년 전.

— :철 온적...

내가 만들어 낸 얼음이 바다 위에 출렁거리며 떠다닌다.

그 위로 빛살이 파문을 일으켰다.

복제된 바다에도 한계가 있지 않을까 싶어 앞으로 계속 나아갔다.

나는 그들의 싸움에 낄 자격도

없단 말인가?

하지만 바다는 끝없이 반복될 뿐 이었다.

어느 순간.

해가 기울었다.

일몰의 붉은 혓바닥이 수평선 아래로 가라앉고.

달도 없는 밤,시커먼 바다만 보인다.

내가 동쪽으로 가고 있는지 어떤지도 확신할 수 없었다.

어쩌면 한 바퀴 빙 돌아서 다시 서쪽으로 가는 게 아닐까?

다시 돌아갈 수는 있는 걸까?

한참 달리던 나는 내가 뭘 향해

달리는지 깨달았다.

일출이 었다.

다행인지 시간만은 흐르고 있다.

파도 끝에서 일어나는 흰 거품들이 부스스 투명해졌고,햇빛이 이렇게 반가운 건지 처음 느꼈다.

바다 위에서 두 팔을 벌리고 햇빛을 받았다.

그리고.

‘돌아가자.’

결심했다.

계속 해를 향해 달려 봤자 끝도 없는 쳇바퀴에 갇혀 있을 뿐이었다.

서쪽으로 갈 때는 달리지도 않고

천천히 이동했지만, 놀랍게도 해가 가운데 걸리기도 전에 곧 해안이 나왔다.

마치 이쪽에는 복제가 적용되지 않는다는 것처럼.

살짝 달궈지기 시작한 모래 위에 선 나는 한참 동안 멍하니 언덕을 올려다봤다.

이걸 무사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동방이 파악도 안 되는 결계로 막힌 걸 보면 내 예상은 더 분명해진다.

레안드로가 위기에 처한 걸 알면서도. 나는 녀석에게 경고조차 주지 못했다. 저 너머에서 소멸되더라도, 어떤

간섭도 하지 못하고 되돌아왔다.

‘나는……

기껏 아지트에서 밖으로 나와서 대체 뭘 한 거지?

내게 휘말려 미치고,다리를 잃고, 눈을 잃은 인간이 있다.

‘함께 있으면 안전할 거라고 말했 는데.’

애슈턴에게 휘둘리기 싫어서 시나 리오를 무시하려고 했지만.

그 시나리오 때문에 나에게 집착하는 카린을 생각하자 씁쓸함이 을라왔다.

‘이번 생은,어차피 클리어할 수도 없는 시나리오인데.’

그 사실에 우스음과 서글픔을 느꼈다.

카린을 가주로 만드는 게 시나리오의 목표지만.

현 가주에게 빙의한 존재를 생각하면 그녀는 아예 가문에 돌아갈 수조차 없다.

이런 상황에서 살아 돌아간다면 본격적인 취조가 이뤄질 거고,기지를 발휘하는 것 따위로 넘어가는 건 무리.

마음만 먹으면 인간의 머릿속 정도는

충분히 헤집을 수 있을 법한 자들 이므로,취조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내 존재도 밝혀지게 된다.

결심은 어렵지 않았다.

“이 둘은 가문에 돌아갈 수 없다. 앞으로 돌봐줄 수 있을까?”

“물론입니다. 의안,의수에서부터 새로운 신분을 만드는 것까지 맡겨 주시죠. 그런데 귀하께서는 앞으로 어떻게 지낼 계획이십니까?”

“일단 아지트에 머물러 있지.”

어렵잖게 대답했다.

‘세상을… 지켜봐야겠지.’

시나리오도 클리어할 수 없으며.

노바가 망가진 이상,천계로 향할 수도 없고.

레안드로를 도울 수도 없었다.

세계 위에서 흔들리던 몇 개의 부표가 사라졌으므로.

지나가는 게 밀물인지,썰물인지조차 모르게 되어 버렸다.

‘루비아의 정보라도… 찾을까…… 마음속으로 고개를 저었다.

내가 〈정보를 찾는다>라는 행위 자체가 루비아에게 어떤 식으로든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칠 가능성이 있다.

‘가만히 있자.’

세계와 나 사이에 선을 긋고.

철저한 관찰자로 남는다.

처음 마음먹은 대로 30년 뒤의 미래를 알아내기 위해서.

아지트에 처박혀 있는 동안은 수련을 했다.

레안드로가 마지막에 보여 준 모습을 움켜잡으려 노력했지만, 하릴없이 시간만 지나고 별다른 성과는 없었다.

아지트는 적막했고,지하에 흐르는 공기는 담백하다기보다 허무해졌다.

관찰이 체념이라고 생각한 적은 없지만 어쩐지 좀 쓸쓸했다.

요청하지 않았으나 넥스몬드는 매주 정보를 보냈다.

비행정에서 뛰어내려 바다를 향해 달려가던 모습을 본 탓인지,넥스 몬드는 나를 돕는 걸 아예 자신의 주 직업으로 삼으려고 하고 있었다.

‘어차피 도움도 안 될 텐데.’

이번 생에는 아무것도 안 할 거니까.

안타까운 마음도 들었지만,그냥 호의를 받았다.

수련에 아무 진전도 없이 가만히 있다 보니 가끔은 내가 바라는 게 뭔지도 희미해졌다.

멍하니 보고서나 읽었다.

신분 세탁 뒤,카린은 넥스몬드의 지원을 받아 트로핀 여단과 상인 연합

양쪽에서.

의족과 의안을 장착한 루이는 연합군 철인 파일럿으로 역시 신분을 숨기고 종군했다.

어차피 정말 중요한 때 지켜 주지 못했다는 트라우마를 안은 루이는, 카린의 명령을 듣고 순순히 그녀와 떨어져 연합군에서 종군하며 정보를 수집하는 모양이었다.

‘다들 나 없이도 잘 살고 있군.’

가문의 후광이 없이도 충분히 역량 있는 인간들이다.

오히려 내가 그녀들의 인생에 끼어 들어 방해가 된 게 아닐까?

소식을 듣다 보니 슬며시 죄책감이 올라왔다.

매주 전해 오는 보고서를 내가 월간으로 달라고 한 뒤.

두 번째 보고서에서,

전쟁이 시작됐고.

세 번째 보고서에서,

엠버가 멸망했다.

[엠버 핵심 인물 현황 보고.]

[단독 의장 브람 - 자폭.]

[글로리아 - 실종.]

쭉 시선을 내렸다.

[상인연합 지부 - 51명 사망,8명 생존.]

[트로핀 여단 지부 - 133명 사망, 11명 생존.]

[제국 전력에 이상징후 감지됨.]

‘레드 플레이크는… 없군.’

물리적으로 엠버 내부에 존재하지만.

본부의 은폐 기능에 압도적인 자신감을 갖고 있던 레드 플레이크의 단원들이 떠올랐다.

정말 피해를 입지 않았거나, 상인 연합이 그들을 감지하지 못한 거겠지.

- 스륵.

숫자부터 기록된 첫 번째 페이지를 넘겼다. 보고서는 어떻게 소수의 전력으로 제국이 엠버메어의 해안을 뚫었는지,브람이 어떻게 제 도시와 핵심 시설들을 붕괴시켰는지 자세히 기록해 놓고 있었다.

나는 멍하니 마지막 페이지를 바라

보고 서 있었다.

과거와 조금도 흐름이 다르지 않다.

저번 생에 내가 직접 처리했던 글로리아가 ‘실종’ 처리된 것만 제외 한다면.

모든 것이 똑같이 진행되고 있었다.

예상대로라면,예상대로.

그런데도.

계속 평온한 척 서 있기 어려웠다.

등골이 서늘해지고 다리가 떨려 왔다.

모두 지나가려 했다.

최소한 30년은 살아남으려고 했다.

그러나.

이런 순간순간의 멸망을 참을 수 없었다.

이름밖에 모르던 첫 번째 생과는 전혀 다르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이제 작은 골목길까지 하나하나 알던 것들이었다.

모두가 소각되고 무너졌다는 소식이 견디기 어려웠다.

지나칠 수 있다고 생각했어도.

엠버의 멸망을 말하는 글귀 한 줄 한 줄이 괴로웠다.

끝까지 책임감을 갖던 단독의장 브람.

무관심하게 스쳐 지나가던 시민들의 시선들.

‘그곳에서는……

내 종족에 별다른 관심이 없었다.

인간의 도시에서 관심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는 것은.

생각보다 훨씬 더 멋진 일이었다.

엘프, 드워프,반요半妖와 수인, 리자드맨과 날아다니는 나비족까지 구성원인 곳.

그리움이나 상실감이라고 해도 될지 몰랐다.

레안드로도 돕지 못하고 엠버의 멸망도 막지 못한다.

내 존재는 한없이 왜소해져 갔다.

마음을 지탱하던 것들이 투둑 무너져 내리는 기분이었다.

‘이상징후……

보고서의 그 단어를 곱씹었다.

제국의 이상징후.

엠버메어를 멸망시킬 만한 전력.

나는 그게 뭔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

빙의된 공작.

망토의 목소리.

비역에서 나온 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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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득 뭔가 중요한 걸 깨달은 기분이

들었다.

나의 죽음이,삶이 반복되고, 세계선은 줄곧 변해 왔지만.

‘진짜 바뀐 건… 없어.’

그 어느 때보다 강해진 지금조차도.

허공에 명령을 새기는 그들은 결국 ‘정해진 대로’ 계획을 진행하고 있다.

제국의 수뇌부에게 명령을 내리지만. 과감하게 개입하기도 하는 존재.

아이작과 나냐우,레나를 사라지게 만들고, 기스-제-라이를 쫓고, 레안드로를 공격했던 그자들은 모두 무언가를 준비하려는 게 느껴졌다.

나의 첫 번째 삶이.

그리고 지하에 처박혀 숨죽여 살아 가는 이번 생이.

브람이 자폭한 지금이.

모두 그들의 계획대로 흘러가고 있었다.

연합과 제국의 전쟁을 질질 끌고, 피와 절규가 대륙에 가득 흐르고, 마왕이 강림하고,

‘용사들이 나타나겠지.’

그들의 계획은,내가 살았던 첫 번째 삶 같은 것.

내가 아무것도 하지 못했던 그때의 흐름대로.

이제 분명하게 와닿는다.

그걸 끝까지 방치해야 할까?

여태까지의 삶은,생존.

강해지는 것.

뭐 새로운 게 뜰까 싶어 노심초사 상태창만 확인하고 있던 나는.

동료를 잃지 않기 위해서만 애써 왔던 나는.

더 이상 절뚝거리며 도망치기만 하는 것을 관두기로 했다.

숨고 도망쳐서 어디까지 갈 수 있단 말인가?

동방조차 안전하지 않다.

얼마나 어두운 곳까지.

얼마나 가파르고 텅 빈 곳까지 내몰려야 하는 걸까?

결국 내 삶에 달라진 건 없는 걸까.

‘그게 나에게 강요되는 역할이라면….’

[동화율이 떨어집니다…….]

[45.58%…….]

세계가,크게 흔들린다.

눈앞에 떠오르는 메시지를 보며 생각한다.

동화율.

뭔지 알 것 같다는 느낌도 든다.

‘해골병사로서의 동화율이라는 건가.’ 그런 역할 따윈 얼마든지 버리겠다. 바라지도 요청하지도 않은 역할이다. 두 손에 아무것도 쥐지 못하고, 모든 걸 포기해야 하는 역할.

가장 하찮게 보여지고,사냥감이 되고,전리품이 되는 게 당연한 역할.

그런 세상을 뒤엎겠다며 마왕이 강림하고 나서조차도 아무렇게나 소모되어도 괜찮은 역할을 강요받았다.

당연한 듯 까마득히 내려다보는 시선이 어딘가에서 느껴지는 듯하다.

이 흐름에 따라가는 이상.

삶은 순간순간이 비참하다.

회귀하면,모두 없었던 일이 된다고 하더 라도.

다시,태어나고,또다시 태어나도.

모든 순간을 저항하며 살겠다.

그들의 원하는 세계선을 하나라도 늘리고 싶지 않았다.

‘무슨 속셈이든,방해해 주마.’

이 세계의 부귀영화 따윈 전혀 관심이 없어 보였고.

오직 ‘흐름’을 만들어 내는 걸 원하고 있다면.

내가 바로 그 흐름을 산산이 부수고 비웃어 주겠다.

- 파앗!

그날.

앞으로의 계획을 정한 나는 넥스몬드 에게 적당히 사정을 설명하고 곧장 전장으로 뛰어들었다.

‘일단 전쟁부터다.’

〈그들〉과 결탁한 황실 수뇌부가 전쟁을 일으키려 한 것만 봐도.

이걸 방해하는 게 옳다.

격전지를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연합과 제국 모두에 끈이 있는 상인 연합은,커다란 전장 정도는 쉽게 알려 줬다.

굳이 그들의 도움이 아니라도 괜찮다. 나 역시 군대의 흔적을 쫓는 것 정도는 간단했다.

발자국만 보면 언제 얼마나 되는 인간이 어디로 향했는지는 곧장 알 수 있으니까.

군대가 얼마나 빽빽하게 붙어 갔는지, 얼마나 되는 짐을 지고 이동했는지.

얼마나 행군과 싸움에 익숙한 병력 인지도 읽힌다.

수레에 뭘 실었는지까지도.

과장을 좀 보태면 발자국에서는 인간들의 얼굴색까지 읽을 수 있다.

얼마나 전선으로 들어가기 싫어

하는지, 얼마나 두려워하는지가 느껴진다.

‘어젯밤에 지나갔나.’

자욱한 안개 속에 피우고 간 모닥불에 아직 온기가 남아 있다.

결국 매 순간은 나에게 이런 흔적 으로 남는다.

온기로 기억될 건지.

서늘한 악몽으로 기억될 건지는 내 행동 나름이다.

탐지 범위를 넓힌다.

몇 군데 무거운 대포와 탄약을 싣고 간 흔적.

싸움은 12시간 정도 후 평야에서 펼쳐진다.

의외로 탈영의 흔적은 없다.

이렇게 안개가 낀 날이라면 도망칠 만하지 않을까 싶은데도.

수많은 병사의 발걸음에서 두려움과 미숙함이 느껴지는데도 그러했다.

‘저것 때문인가.’

둔중한 소리를 내며 땅을 짓밟았을 철인의 발자국.

백 명의 정병을 100 대 0의 소모비로 베어내는 괴물을 믿어서일까.

아니면 살육을 위한 대규모의 군대에 속해 있으면,전선이라는 것은.

도망갈 수 없도록 그들을 자석처럼 끌어들여 버리는 걸까.

- 달그락.

병사들의 발자국을 따라 걸었다.

바알의 군대에서 언제나 최전선을 맡아 온 나는,그들의 흔적을 보며 일종의 동질감을 느끼고 있었다.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사선死線에 서 봤자 얻을 건 공허한 치하 정도가 전부일,어쩌면 그것마저도 얻을 수 없는 자들과의 유대감이었다.

몇 시간이 지나지 않아 먼저 도착한 진지가 보였다.

- 꽝! 꽝!

셋이 한 조로 땅을 파고 진형 양옆에 말뚝을 박아 기병대의 습격을 대비한다.

전방은 철인이 장악하고,적의 본진에 대포를 쏟아부어도.

양익이 제국 기사들에게 휩쓸리면 보병대는 속절없이 무너지므로.

깊이 박은 말뚝에 철조망까지 얼기 설기 몇 겹 휘감은 걸 보니 웬만한

기병대는 얼씬도 못 할 것 같았다.

뛰어넘으려 하다간 자칫 몸이 누더기가 되어 버리겠지.

검기를 운용하는 기사들이 앞장서서 칼질을 한다면 얇은 종이처럼 찢기 겠지만,그 정도의 기사들은 연대 하나에 몇 명도 되지 않고, 무엇보다 전방의 철인들을 상대하기 바쁘다.

‘나쁘지 않지만……

장갑이 찢겨 가며 말뚝과 철조망을 설치하는 병사들의 노고가 무색하게도, 싸움은 벌어지지 않을 것이다.

나는 작업 중인 병사들을 지나쳐 평야로 나아간다.

‘여기군.’

익숙한 냄새다.

예상했던 마왕의 제단.

‘각인은… 또 푸르손인가.’

서열은 몰라도 인간계에서의 영향력 만큼은 확실히 대단한 녀석이다.

나무,암석,지하,숲.

온갖 표식이 새겨져 있다.

아이작과 함께 몇 번씩 해 본 이상 어렵지는 않다.

‘내가 탐지한 것만 이 정도라면.’

이 일대가 전부 제단이다.

마왕을 추종하는 무리는 꿈도 꾸지

못하겠지만,이것 역시 크렉소르 가주나 로랑스에게 빙의한〈그들〉이 만든 계획의 일부일 터.

그 자리에 서서 제단을 보며 생각 했다.

여유롭게 용사들이 나타나길 기다릴 생각도,하나하나 이 세계가 깨부숴 지는 걸 기다릴 자신도 없다.

브람이 살았던 엠버메어에 이어.

루비아가 영주로 있고.

수많은 인연이 살아가는 대륙이 부서지길 여유롭게 관망하는 건 역시 무리다.

한 번의 삶이라도,토막이라도

다음을 위한 거라며 내버리고 싶지 않았다.

피해를 입은 자들이 다음 생에 다시 살아난다고 해도.

끔찍한 고통을 겪을 이 순간은 지금 여기 있으니까.

마음은 이미 기울었다.

달을 보고.

‘시작할까……

판을 당긴다.

—드드드드드드드드

베트라스의 차가운 달.

인력은 내 편이다.

땅이 찢어진다. 제단을 지우기 위함이라면 바람이나 번개 정도로도 충분하지만,내가 지워 버리려는 건 아예 전장 그 자체.

땅 위에 머물러 있던 안개까지 찢어진 땅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수 킬로미터 거리에서 식사 중인 병사들의 비명이 들려온다.

초승달이지만,더없이 밝다.

달이 가까워진 상태에서 힘을 발휘 하는 탓인지 달의 인력이 평소보다 훨씬 더 민감하게 느껴진다.

감각이 날카롭게 곤두서 있고, 그만큼 땅은 쫙쫙 벌어진다.

특별히 희열이나 기쁨 같은 건 없다.

묘하게도 그냥 해야 할 일을 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건 안정된 만족감이었다.

- 구우우우우… 쿠구구…….

몇 번의 여진.

연합군도,제국군도 몇 날 며칠을 행군해서 다가온 장소지만.

이제 저들은 만나지 못하겠지.

- 파앗!

나는 가볍게 전장에서 이탈한다.

매번 매번이 위험한 곡예.

푸르손의 무리가 나를 알고 쫓을 가능성은 극히 낮다.

지금 내 힘이 사슴 아에자르나 그 휘하의 녀석들이 추적할 수 있는 수준은 아니니까.

결국 ‘그들’의 반응을 알기 위함이다. 직설적인 도발이고,어쩌면 충동적 으로 위험에 뛰어드는 일.

하지만 특별히 무모하다고는 생각 하지 않았다.

그들이 내 눈앞에 나타난다면.

가설이 검증된 걸로 하고 자살하는 선택지도 있다.

〈일리엔의 왼손>도 저항하지 못하는 허공의 글자들에 나는 묘하게도 거의 영향을 받지 않았다.

‘나만 할 수 있었어.’

아이작도 나냐우도 무력하게 복종한 글자에 오직 나만이 저항할 수 있었다.

자살할 틈 정도는 충분히 만들 수 있겠지.

그렇게 다시 시작된 세계에서.

나는 또다시 그들과 싸우며 살아갈 것이다.

결의를 떠올리며 길을 걸었다.

‘다음은……

넥스몬드가 조사한 전투 예정지를 찾아가는 데는 일주일 정도가 걸렸다.

굳이 서두르지 않고,군대보다 살짝 먼저 도착하게 발을 맞춘 탓이다.

드드득!

- 쾨•과•과•과•과•:라:라!

다음,그리고 다음.

정찰병이 미리 알고 길을 돌리게 하지 않았다.

언제나 싸움이 최대한 늘어지게 만들었다.

일은 밤일 때도,새벽일 때도 있었다.

태양이 강해지면 힘이 잘 듣지 않으므로 한낮은 곤란했다.

지진을 일으키고.

강을 범람시켰다.

마왕의 제단과 함께 전장 그 자체를

쓸어버렸다.

그 대신 인간의 목숨은 쓸려 나가지 않았다.

험한 산의 오솔길을 지나는 공작 부대들 앞에 산사태를 일으켜 길을 아예 막아 버리기도 했다.

양쪽의 기세는 꺾이고 소규모 교전만 지속됐다.

과거의 기억을 떠올렸다.

‘내가 병사들이라면……

싫을 리야 없겠지.

답답해할 양측의 수뇌부를 생각하니 조금 상쾌한 기분이 든다.

하지만 그러기를 세 달이 지나도.

내가 기다리던 ‘반응’은 오지 않았다.

‘훼방 놓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할 리가… 없는데.’

그럴 가능성은 없다.

각각의 부대라면 몰라도.

정보를 취합하는 양측 수뇌부라면 당연히 이 현상을 알 테고.

제국 쪽 수뇌부에도,연합쪽 수뇌부 에도 그들이 자리 잡고 있다.

하지만 별다른 움직임은 없었다.

기껏 한 각오가 무색해진다.

‘혹시 내가 충분히 잘 숨어 다니는 건가?’

당연히 들킬 이유야 없어서,몸을 최대한 숨기고 있긴 해도.

어쩌면,혹시 전쟁이 〈그들〉의 계획이 아닐지도 모른다.

이상할 만큼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자 오히려 그게 더 신경 쓰였지만.

작업 자체가 편안한 건 사실이었다.

‘일단 계속해 보자.’

이렇게만 간다면 마왕도,용사도 등장하지 않겠지.

전쟁을 저지하는 것 자체가 나쁠 리야 없다.

더욱 탐지에 신경 쓰고,이제는 아예 내 쪽에서 적극적으로 수상한 흔적 같은 걸 찾아다니며 전장을 헤맸다.

‘결국 언제 터지냐의 문제겠지.’

그렇게 다시 세 달이 지났다.

제국과 연합은 대규모 충돌은커녕 변변한 국지전조차 제대로 일으키지 못하고 있는 사이.

그다지 달이 가깝지도 않은 날.

나는 정작 엉뚱한 변화를 느꼈다.

- 쿠과과과과!

‘가볍게 일으킨 범람인데.’

생각보다 훨씬 커다란 진동이었다.

걸음을 멈췄다.

강 아래의 땅이 흔들렸다.

연달아 지각이 영향을 받으며 언덕 위의 암석들이 아래로 굴러떨어졌다.

급격한 경사가 만들어지고,벌어진 틈의 폭은 생각했던 것보다도 훨씬 더 넓었다. 깊은 곳에 흐르던 지하수 들이 분출하는 소리가 들렸다.

‘착각인가?’

다시 한번 시험해 봐야 했다.

나는 달과 찢어진 땅을 번갈아 바라봤다.

‘베트라스의……

그리고 다시 인력으로 땅을 당겼다.

- 구구구구구구구구구……!

곧바로 더 깊은 아래에서 무언가 끊어지며 지맥이 난동을 부렸다. 그 위험한 기운에 나는 인력을 곧바로 중단시켰다.

확실하다.

의심의 여지 없이,달의 힘은 여섯 달 전보다 훨씬 더 강해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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