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해골병사는 던전을 지키지 못했다-422화 (422/458)

506화 신이 원하는 것 (4)

‘왜 카린이 내게 편지를 쓴 거지?’

넥스몬드에게 소식은 간간이 듣는다.

빠른 회복 이후 트로핀 여단과 상인 연합에서 활동한다고 했다.

나와의 악몽 같은 기억은 깨끗하게 잊고 자신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줄 알았는데.

- 스륵.

편지를 뜯으려니 몸이 살짝 굳는다.

9개월 만의 편지.

‘꽤 두꺼운데.’

왠지 긴장이 된다.

원망이라도 하는 걸까.

하긴,동굴에 들어가기 전 호언장담한 것과 반대로 악몽만을 안겨 줬으니까.

심복인 루이는 한쪽 눈과 다리까지 잃었고.

그래도 읽어야 한다.

원망을 한다면,받아 준다.

각오해야 할 일이니까.

하지만,편지의 내용은.

상상과 다르게 몹시 건조했다.

‘이게 대체……/

그건 정보 보고서였다.

사적인 감정이나 신변잡기,하소연 같은 건 한 글자도 적혀 있지 않은 보고서.

넥스몬드의 보고서와 다른 점은 주제의 구성.

만만찮게 두꺼웠지만 선택과 집중이 느껴진다.

차례대로.

1. 지금까지 포착한 마왕 추종자들의 동향.

2. 자유 연합 주전파와 제국 수뇌 부의 사전 내통 가능성

3. 자연 재해가 막고 있는 전쟁.

4. 새롭게 생겨나는 신앙.

넥스몬드가 보내는 정보와 겹치지 않으면서도.

나의 관심사에 대해 머릿속을 그대로 읽었다고밖에 생각할 수 없는 주제 들이다.

처음 목차를 훑을 때도 놀랐지만.

실제로 내용을 보면서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 이렇게까지……

주제 선택뿐만 아니다.

첫 번째 주제.

마왕 추종자들의 동향에서 카린 크렉소르는 바알을 필두로 한 16좌의 명단을 빠짐없이 차례대로 거론하고 있었다.

움직임을 포착한 것은 몇몇 마왕의 추종자들뿐이지만 .

보티스나 푸르손 같이 인간계에 꽤 손을 뻗은 녀석들에 대해서는 세세한 상징과 이명,세력도, 신전까지 자세히 꿰뚫고 있었다.

‘믿을 수가 없군.’

지금까지 보인 움직임 및 향후 동향

예측에 이르러선,카린이 한참 전부터 마왕에 대해 연구하고 있던 게 아니 었나 싶을 정도로 자세하다.

20년 뒤의 세상에서는 상식이 되는 내용들.

그러나 지금은 금기 중의 금기이며, 사법 중의 사법.

이 시기의 인간이 여기까지 파헤친 건 놀라울 수밖에 없다.

두 번째 주제.

연합 주전파와 제국의 사전 내통 가능성.

‘연합 내부에서도,반전파와 주전 파가 있다라……

단순히 크렉소르 가문의 핵심이기에 얻을 수 있는 정보들이라고 볼 수도 없고,그걸 토대로 해서 자신이 깊이 조사하기도 했겠지.

몰랐던 사실들이 섞인 날카로운 추론.

새롭게 눈을 뜨는 기분이다.

기스-제-라이에게 의회가 황제 암살을 의뢰한 이상, 연합은 어떻게든 전쟁을 원하지 않는 줄 알았는데.

비역에 있었던 제국의 수뇌부들 같은 무리가 연합 내부에도 존재할지 모른다.

‘이놈들이라는 거지.’

자유 연합의 주전파 인사들을 하나

하나 기억했다.

세 번째, 네 번째 주제는.

역시 지금 내가 뭘 하고 있는지 지켜보고 있다는 걸까.

‘좀 민망하군.’

전쟁을 막고 있는 걸 안다는 듯 썼다.

‘그런데,달의 신앙이라……

재밌는 일이다.

반전 신앙이라면 역시 내 활동과 관련이 있는 걸까?

정작 병사들과 마주칠 일이 없으니 어떻게 생각하는지야 알 수 없었다.

‘뭐,나쁠 거야 없겠지.’

어쨌거나.

건조하게 쓰인 보고서는.

지금까지의 9개월.

나와 떨어져서 지내는 시간 동안 그녀가 나에게 닿으려고 노력한 흔적이 었다.

기괴할 만큼 내가 관련된 핵심만을 짚은 정보들.

대체 혼자 얼마나 나에 대해 많이 생각하고 조사한 걸까?

마지막은,

당신이 걷고 있는 길을 함께 걷고 싶습니다. 저를 사용해 주세요.

- 트로핀 여단 지부장,카린.

이라고 몹시 불길하게 끝났다.

트로핀 여단과 상인 연합에서 잘 활동하고 있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벌써 한자리를 차지했을 줄이야.

레나가 떠오르지 않을 수 없었다.

‘…게다가 지부장이라니.’

생생히 기억난다.

레나가 어떻게 사라졌는지.

‘관두라고 해야겠군.’

부담스럽고.

죄책감까지 느껴진다.

이번 생에 그녀는 가주도 되지 못하고.

부서져 버린 노바를 재가동시켜 천계의 열쇠를 활용할 수도 없다.

다음 생,다다음 생애의 카린 크렉 소르.

내가 성공적으로 도와줘서 시나 리오를 클리어한 카린 크렉소르라면 모르겠지만.

‘이번 생의 그녀는……:

기껏 살아남았으니,부디 평온하게 제 삶을 살아가길 바랄 뿐인데.

뭐라고 해야 할까?

편지를 들고 망설였다.

관두라는 답장에 더 끓어오를지도 모른다.

‘아예 보내질 말아야겠어.’

내 침묵을 철저한 무관심으로 해석 하고.

얌전히 있어 주길 바랄 뿐이다.

- 스륵.

연합군과 제국군의 이동 상황을 정리한 넥스몬드의 보고서를 읽은 뒤.

나는 ‘재해’를 일으킬 다음 지점으로 향했다.

* * *

세 달 뒤.

제국 동부의 깊은 산자락에 여느 곳처럼 평온하게 달빛이 비췄다.

그곳에는 사람의 흔적이 느껴지는 것들이 있었다.

계곡에 놓인 징검다리라든지 표지판 같은 것들.

자그마한 부락이 있다는 증거였다.

산골 마을마다 은밀히 다니며 화전 민을 몰살하는 사교도들이 있다는 흉흉한 소문이 한동안 돌았고,이 마을은 그 소문의 진행로에 있었지만.

어째서인지 타깃은 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마을에 생기라고는 전혀 없었다.

입구에 가까운 나무집.

“엄마……

그 안에서 작은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여덟 살이나 먹었을까.

꾀죄죄하게 마른 소녀는 벽에 몸을 기대고 있는 여자를 쓰다듬었다.

엄마였던 것을 몇 번이고 반복해 손을,손목을,팔을 쓰다듬었다.

하지만 아무런 반응은 없다.

여자의 눈 위에서 응크렸던 구더기가, 시선을 보내듯 소녀 쪽을 향해 기어갈 뿐이었다.

“엄마……

죽은 지 며칠은 지났을 시체.

피가 굳고 파리가 꼬이지만.

냄새도 느끼지 못하는 건지,소녀는 다시 한번 엄마를 쓰다듬는다.

하지만 이상한 건 아니다.

아이의 팔에도,다리도.

얼굴에도 무언가가 번져 있다.

나무 껍질처럼 우둘투둘한 흑갈색 반점.

쩍쩍 갈라진 그 피부는 안쪽부터 썩어가고 있었다.

“엄마……

다행인지 불행인지 아빠는 없었다.

이런 곳까지 찾아서 제국은 빠짐없이 병사를 차출했기에 끌려간 지 오래였다.

게다가 다른 집들은 모두 문이 닫혀 있다.

어느 누구도 아이를 도와주러 오지 않았다.

마흔 명 정도 남은 마을에 순식간에

번진 전염병.

이미 열 명이 넘게 시체로 변했고.

병에 걸리지 않은 자들은 모두 황급히 이곳을 떠났다.

남은 환자는 문을 닫고 죽음을 기다리는 상태.

이곳의 모두가 죽기까지 짧으면 사흘, 길면 열흘 정도 버틸 수 있을 거다.

병의 진행은 하루면 온몸을 뒤덮고.

가끔은 한나절 만에 사망하는 자도 나온다.

마법사도 의사도 없는 마을.

그들이 ‘갈라지는 죽음’에 저항할 방법은 없었다.

세게 기대면 무너질까 봐,소녀는 눈을 감고 엄마를 살포시 쓰다듬었다. 우물이 파인 듯 옴푹 들어간 뺨이 소녀의 가슴을 아프게 했다. 엄마는 왜 잠에서 깨어나지 않는 걸까? 아빠도 이제 없는데,엄마는 어디로 간 걸까?

그때 였다.

一 덜컥.

강한 바람에 판자로 된 문이 밀려 났다.

그 자리로 달이 비친다.

달빛은 눈꺼풀을 내린 소녀의 안구 까지 촉촉하게 적셔 줄 만큼 환했다.

소녀는 눈을 떴다.

맑고 깨끗한 달빛이 집안의 그늘을 먹어댔다.

병에 걸린 소녀도 가슴이 두근거릴 만큼 환한 달빛이었다.

엄마의 눈동자 속 구더기들이 바닥에 툭툭 떨어졌다.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초승달이다.

“달님…. 도와주세요….”

엄마를 쓰다듬던 소녀는 썩어 버린 왼쪽 다리를 질질 끌고 밖으로 나갔다. 오른쪽 다리도 온전치 못했기에

소녀는 털썩,바닥에 쓰러졌다.

더 이상 무엇을 향해서도 걸을 수 없는 채로,그녀는 달빛을 향해 두 팔을 벌렸다.

보름날도 아닌데,입에 침이 고일 만큼 환한 달빛.

그렇게 환하고 맑은 무언가가 되고 싶었다.

굶주리고 겁먹고 아프고 썩는 것이 아니라.

바로 지금 비치는 달빛처럼 되고 싶었다.

자그맣게 썩어가는 두 팔이.

결국 힘을 미치지 못하고 털썩,

흙 위에 떨어진 순간이었다.

달빛이 그녀에게 ‘닿았다.’

“달님……?”

갈라진 피부 위로 젖은 달빛이 홀렸다.

주저앉았던 소녀가 자리에서 일어 났다.

다리가 아프지 않았다.

소녀의 몸에 번지던 ‘갈라지던 죽음’이 흐릿하게 지워졌다.

온몸의 상처는 아물고,피는 멎었다.

심지어 태양에 탄 흔적마저,잡티나 주근깨마저도 깨끗이 사라졌다.

소녀의 몸을 뒤적거리듯 한차례

샅샅히 돌았던 달빛은 이제 머리를 감쌌다.

“달…님을…? 믿으… 라고요…? 신앙… 전파…?”

자그마한 손가락에 새하얀 빛이 어렸다.

그리고 그 끝에 살아 있는 끈처럼 빙빙 돌기 시작했다.

“베르…카스…. 치유…. 네….”

일어난 소녀의 눈빛이 묘하게 번뜩 였다.

- 사박.

“죽은 자는 어쩔 수 없지만…. 밖으로…. 나오세요….”

아이는 제 어머니가 죽은 집을 지나쳐서,다른 집들의 문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구원…. 받으세요….”

* * *

‘이 방향은……

후방의 전쟁 무기를 부수기 위해 미리 걸어가며 생각한다.

시간에 맞춰 가려면 그곳을 정면으로 가로지르게 된다.

에라스트.

그녀가 영주인 도시.

루비아에게 해가 될까 싶어 찾아가지 않았지만.

일부러 돌아가는 것도 이상하다.

‘이대로 가자.’

만약 누군가 나를 추적한다면.

오히려 에라스트에 시선이 쏠리게 된다.

멀리서 익숙한 회색빛 성과 가옥들이 보였다.

평온해 보인다.

처음 볼 때보다 훌쩍 높이 올라간 성.

넓어진 농장과 촘촘한 가옥들.

회귀를 반복하며 만들어 낸 풍경이다.

게다가 꾸준히 전쟁을 방해한 탓인지, 성 안쪽은 물론 바깥 지역도 전화 戰火의 연기에서 벗어나 있었다.

아직까지 밖을 돌아다니는 몇몇 주민들을 보자 괜히 뿌듯한 마음이 들었다.

‘루비아도 잘 지내고 있겠지.’

첫 번째 삶처럼 무력하게 죽어나가는 존재가 아니다.

저런 성의 주인이고.

능력도 걸맞게 훌륭하니까.

에라스트에 좋은 것만 있는 건 아니다.

터무니없게도 유령 내사과가 잠복해 있는 도시이기도 하며.

기스-제-라이의 죽음 이후,공작에 빙의된 바깥의 존재가 샅샅이 뒤졌던 근방이 다.

‘시계의 모래가 흡수되고 나를 못 찾았었지……

지금은 엠버에 가 있는 녀석이지만.

파면 팔수록 뭐가 나을지 알 수 없던 곳.

조심하자.

최대한 몸을 숨기고.

걸리는 게 있으면 들리도록 감각 범위를 최대로 키웠다.

그때.

“우리 이렇게 다녀도 되는 건가? 전쟁이 벌어졌다면서?”

“정작 큰 싸움은 하나도 일어

난다고 들었어. 싸울 법하면 자꾸

지진이네,산사태니 하는 일어

난다고 그러던데?”

밀밭에서 두런거리는 두 명의 목소

리가 들렸다.

농민 두 명이다.

“지진? 산사태?”

“그렇다니까. 별의별 일이 다 일어나. 후방에 가져오던 무기들이 싹 다 사라졌다고도 하구……

“세상에…. 어찌 그런 일이 있어?” 귀가 기울여진다.

내 이야기이니만큼,어느새 그들의 대화에 몰입하고 있었다.

“이 소식을 알면 전 영주님께서 참으로 기뻐하실 텐데……

“아이고……. 당연한 소리 아녀. 그런 훌륭하신 분께서 그리 일찍 돌아가실 줄 누가 알았나……

전 영주님이라면 레이 백작.

루비아의 부친도 꽤 괜찮은 영주였다. 그 순간.

생각하지 못한 말이 튀어나왔다.

“벌써 반년이 훌쩍 넘어가네 그려. 저 하늘에서도 우리 영주님처럼 뛰어난 능력을 가진 분이 필요한 게지. 그런 게야.”

뭔가 이상하다.

레이 백작이 죽은 건 지금으로부터 2년 전이다.

루비아가 영주로 시작하는 세계선 으로 만든 이상 그보다 빨리 죽었을 수도 있다.

그런데 반년 전이라고?

왜 저런 시기가 나오는 거지?

세계선이 뒤틀린 걸까?

중년 여성이 말을 이었다.

“우리 영주님처럼…. 아름답고…. 현명하신 분이 세상 어디 있다고….”

그다음 이야기를 듣고.

나는 홀린 듯 천천히 자리에서 멈췄다.

“루비아 영주님…. 어떻게 꽃같은 스무 살에 돌아가실 수가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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