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해골병사는 던전을 지키지 못했다-423화 (423/458)

507화 신이 원하는 것 (5)

다리가 움직여지지 않았다.

‘이번에도… 죽었다고?’

레이 루비아는 죽었다.

나를 무덤에서 일으켜 준,함께 동굴을 헤쳐 나왔던,꽃을 꽂아 주고 눈을 던져 줬던,처음으로 갑옷을 만들어 줬던 루비아는 죽었다.

처음부터 만나지 않아도 내 꿈을 꾸고, 갑작스럽게 만나도 나를 익숙하게 대하고,어째서인지 나와 함께 있는 걸 가장 좋아했던 루비아는 죽었다.

없던 일은 아니다.

그녀의 죽음을 몇 번이고 경험했다.

고정된 것처럼 특정한 시간대에 죽기도 했고,잠깐 살려 놓아도 죽어 버리기도 했다.

슬픈 마음이 곧 의문으로 변한다.

답답했다.

알 수 없다.

루비아라는 한 인간이.

그녀의 죽음이 이 세계에 그렇게 중요할까?

기스-제-라이 같은 불세출의 네크로 멘서도,레안드로 같은 초월적인 재능의 검사도 아니지 않은가.

그런 여자 한 명 정도는 살아남게 하더라도 상관없을 텐데.

그래봤자 달라지는 건 없을 텐데.

아예 예상하지 못한 건 아니다.

‘죽을 수야 있다고 생각했지만……

이번 생은 일부러 접근하지 않았다.

어떤 식으로든 돕거나 얽히지 않으 려고 했다.

뒤를 밟혀 세계에서 적줄될 가능성이 두려웠다.

하지만,실제로 이미 죽었다는 이야기를 듣자 정신이 어지러웠다.

‘이제 남부 세 도시의 영주일 텐데.’

세계가 그녀의 불행에 굶주린 것처럼.

루비아는 죽고,죽고,죽고.

이번에도 죽었다.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천천히 해가 졌다.

혈흔처럼 노을이 배어 나온다.

루비아의 죽음을 이야기하던 주민 들은 곧 성안으로 되돌아갔다.

일몰 후에도 한참을 멍하니 있던 나는,

- 저벅.

홀린 것처럼 에라스트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유령이나 황실 세력이 있더라도 그 녀석들이 나를 감지할 수는 없고.

레이 루비아는 이미 죽었으므로. 두려울 것도 걱정할 것도 없다.

내가 무슨 목적으로 움직이고 있었 는지 까맣게 잊힌다.

나는 다시 한번 그녀가 죽은 거리를 걷는다.

한층 거대해진 에라스트는 익숙한 곳도,낯선 곳도 있다.

성장기의 인간을 수년 만에 보는 것 같은 기분.

물론 영주가 있는 내성은 쉽게 알아볼 수 있었다.

골목을 달려 내성으로 향했다.

‘반년이 라……

조용히 복도를 걸으며 생각했다.

에라스트에 대해서는 아무 소식도 듣지 못했다.

아니,일부러라도 듣지 않으려고 했다.

넥스몬드에게는 연합군과 제국군의 이동 및 교전 상황만 받았기에.

제국 내부에서 벌어지는 숙청이나.

영주들의 교체 같은 건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 달그락.

고개를 돌려 영주의 집무실을 훑는다.

낯설다.

처음 보는 박제.

사슴과 곰의 잘린 머리가 벽에 걸려 있다.

루비아라면 절대 걸어 놓지 않았겠지.

방 한쪽에 놓인 커다란 침대에서도 낯선 흔적이 있다.

‘사용자는… 인간 남자.’

키는 190cm 정도.

상당한 몸집인 것 같다.

체계적으로 무술을 습득했지만, 검기에는 이르지 못한 게 느껴진다.

초상화도 한쪽 벽에 걸려 있다.

아래에는 새비 맥마니만이라는 이름이 적혀 있다.

‘처음 듣는 이름이군.’

어딘가의 주전파 귀족이려나.

비역에서 봤던 녀석은 아니다.

적당히 고분고분한 녀석을 앉혀 놨겠지.

- 투둑.

책상을 열고 안에 있는 서류들을 차분히 꺼내 뒤졌다.

모두 만들어진 지 얼마 안 되는 것들.

새로 부임한 녀석의 기록들뿐이다.

루비아의 흔적은 작정하고 지워 버린 것처럼 없었다.

‘여긴 어떨까.’

단단해 보이는 금고를 바라봤다.

다행히 마법적인 잠금장치는 탐지 되지 않는다.

열쇠만 필요한 거라면 어렵지 않다.

[골격변용骨格變容을 사용합니다!]

- 우둑! 우두둑!

검지 끝이 열쇠 구멍에 맞춰 조금씩 변해 간다.

그냥 힘으로 우그러뜨려도 상관 없지만,더 깔끔한 방법이 있는데 굳이 쓰지 않을 이유는 없다.

- 탈칵.

곧 쉽게 금고가 열린다.

이 정도로 열리는 금고인 탓인지 특별히 귀중한 물건 같은 건 없다.

그냥 과거의 행정 기록들.

루비아가 예전에 수도에 보낸 서신 들도 모두 한 부씩 추가로 작성되어 저장되어 있었다.

‘이건… 무슨 항의서 같은데……

〈현재 주민들은 밀이 다 자라서 수확에 매진하기 위해 종일 온몸이 녹초가 되도록 일하고 있습니다. 영주로서,현 시기의 노역 동원은 단호히 거부합니다.〉

시기별로 나뉜 편지들을 하나씩 읽어 내려갔다.

〈에라스트의 자원은 황실이 호주머니 에서 마음대로 꺼내 쓸 수 있는 쌈짓돈이 아닙니다. 제가 임의로 처분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예산은 오직 법령과 정당한 절차에 의해서만…….>

〈책정된 임금은 말이 되지 않습니다. 농한기라고 한들 마찬가지입니다. 저와 주민들이 모두 납득할 수 있는

임금을 먼저 지급받은 뒤,저의 공동 감독하에서만 노역은 이뤄질 것입니다.〉

〈자위권 행사가 아닌 침략은 제국민 모두에 대한 범죄입니다. 그라스미어도 유블람도,에라스트도 결코 협조하지 않을 겁니다.>

차분히 수십 장에 달하는 편지를 찬찬히 읽었다.

수많은 서신의 어조는 놀랄 정도로 강경했다.

자신의 신변 같은 건 아예 돌아보지

않고 내던지는 느낌.

무리한 징집이나 징발 같은 걸 비난하는 차원이 아니다.

아예 전쟁 자체를 반대하는 모습. 피와 땀을 홀리는 건 평민들이고. 그중에서도 접경지 대 인 동남부라면서 연합 침공을 강력하게 비난하는 편지들이 었다.

살해당한 게 자연스럽게 납득될 정도의 기록들이었다.

위험하다.

루비아라고 모를 리가 없다.

오히려 누구보다 잘 알 거다.

‘레이 백작도 이러다 죽었으니까.’

하지만 주민을 위해 영주로서 목숨을 걸었다.

침략은 바르지 않다고 생각했기에 심장이 멎을 때까지 흔들리지 않았다.

그걸 루비아의 인간성이라고 보면 될 것이다.

물론 어떤 도덕은 피를 요구한다.

‘독살당한 뒤,시체는 화장이라…… 전형적이다.

그녀를 죽인 건 유령들일 확률이 높겠지.

이미 에라스트에 잠복하고 있는 유령 내사과.

보티스의 축복을 받은〈가면〉때문에

그들의 존재는 감지하지 못하지만, 숨어 있는 위치는 안다.

그곳을 다 엎어 버릴까?

새로 부임한 영주를 잡아서 신문해 볼까?

모든 게 어그러지겠지만.

눈앞에서 루비아의 죽음을 접하자 이미 세워 놨던 계획 같은 건 아무 렇지도 않게 느껴진다.

멍하니 시선이 부유했다.

집무실 창문에서 보이는,별빛을 받은 에라스트의 풍경.

항상 일에 빠져 있던 그녀의 책상.

‘항상 저기 찻잔을 놔뒀지.’

그 온기가 아직까지 느껴지는 것 같았다.

찻주전자가 있었던 곳에 손가락을 짚었다.

의자에 앉아 기록을 스르륵 넘겼다.

‘이런 식으로 페이지를 넘겼고.’

내 안에 있다.

반년이 아니라,수십 년이 지나도.

흔적은 사라졌지만.

영주가 몇 번이 바뀐다고 해도 여기 선 이상 생생하게 기억할 수 있다.

나는 그 모든 것을 잊지 않는다.

방 안에서,나는 천천히 루비아를 재생했다.

그녀가 눈앞에 있기라도 한 것처럼.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집무실의 창문으로 서서히 파란 햇볕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一 저벅.

새벽에 복도를 순찰하는 경비병의 소리.

기분 탓일까.

발걸음 소리에 어딘지 힘이 축

빠져 있다.

뒤졌던 기록들을 다시 정리하기 시작했을 때.

- 영주님! 영주님!

멀리서 다급한 목소리가 들린다.

- 급보입니다. 연합군의 습격입니다!

‘뭐라고?’

에라스트 습격 같은 건 알지 못했던 정보다.

게다가 탐지 범위를 최대화해도 병력의 움직임 같은 건 느껴지지 않는다.

목소리를 따라갔다.

온몸이 땀에 젖은 전령이 식당 앞에 서 있었다.

“영주님!”

“그래,들어오게.”

녀석을 따라 안으로 들어가자, 초상화에서 본 남자가 두 하녀에게 시중받으며 식사를 하고 있었다. 근육으로 비대한 몸은 몹시 탄탄 했지만 실제로 보자 어딘가 멍해 보이는 눈빛의 남자였다.

“성에서 10km 떨어진 북쪽 마을이 습격당하고 있습니다! 군사 시설도 없는 곳인데,평범한 마을을……! 연합 놈들이 선을 넘었습니다. 바로 소집 명령을 내려 주십시오! 그럼 제가 지금 당장 징을 울리도록……

묘한 일이었다.

보고받지 못한 은밀한 정보이기도 했고.

전쟁이 격화된 것도 아닌데,민간인을 대상으로 한 학살이라니.

이런 일이 원래 있었던가?

혹시 내가 움직인 결과인 걸까?

군대가 출동하겠지 싶었을 때.

“조용히 하게.”

낮은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예……?”

“아침 식사일세,전령. 아침 식사란 말이야.”

영주가 삶은 닭가슴살을 우물거리며 말했다.

“자네는 자고 일어난 뒤의 고기 섭취가 얼마나 중요한지 잘 모르나? 하긴,운동을 제대로 해 본 적이 없으니 모르겠군.”

“무슨 말씀을 하는지……. 영주님! 지금도 마을이 불타고 있습니다! 늦었지만 당장 출동한다면 몇 명이나마

살릴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부디 출동 명령을 내려 주십시오!”

“출동은 없네.”

그는 곧이어 계란프라이 하나를 꿀꺽 삼켰다.

“정찰은 수고했네만,병력은 계속 성을 지킬 거야.”

“영주님! 그곳에 살고 있는 주민들이 오백 명이 넘습니다! 수십 년 동안 에라스트에 세금을 내 온 우리 주민 들이란 말입니다.”

남자가 귀찮다는 듯 인상을 찌푸렸다.

“지난주에 황실에서 지침이 내려왔어. 유격대의 도발에 넘어가지 말라고

말이야. 폐하께서는 모두 다 내다보신 것이지. 아마 성을 비우게 하려는 함정일 거야. 우리가 가면 안 되네.”

“함정으로 보이는 건 없었습니다! 정 그러시다면 근처에 주둔하는 기병대에게라도 도움을 요청하는 서신을 작성해 주십시오! 제가 당장 가서 전달하겠습니다.”

“어허,이 사람. 함정이건 아니건, 황실의 지침이 내려왔다지 않는가! 그런 서신은 써줄 수 없어! 자중 하도록!”

짜증을 낸 영주가 입을 닦으며 말했다.

“나는 이만 운동을 가야 하네.

알아들었나?”

트림을 하는 영주를 바라봤다. 고작 저런 인간이 루비아의 자리에 앉아,그녀의 방을 쓰고,그녀의 식탁에서 밥을 먹으며,그녀의 욕실 에서 목욕을 한다.

‘죽여 버릴까?’

혹시라도 루비아 살해에 가담했을 지도 모른다. 거기까지 상상이 미치자 한층 살의가 치밀었다.

“뭐,뭐야? 안 나가? 왜 이렇게 으슬으슬해.”

영주가 몸을 떨었다.

“•••예.”

전령이 고개를 숙였다.

나와 비슷한 생각이라도 하는 걸까.

이를 악물고 나가는 전령을 무심코 따라갔다.

전령은 복도를 걷다가 힘이 빠진 듯 벽에 기댔다.

“어떻게 영주라는 자가 저럴 수가…. 전 영주님이 계셨더라면,결코 이렇지 않았을 텐데.”

그가 허공을 바라보며 작게 중얼 거렸다.

“루비아 님……

문득 정신이 든다.

뚝뚝.

허공에 울리는 그 이름이 차가운 물방울을 떨어트리는 것 같았다.

에라스트를 들쑤셔 봐야 이 세계선의 루비아는 살아 돌아오지 않는다.

이대로 폭주하는 건 올바른 선택이 아니다.

루비아가 살아 있었다면 뭘 바랐을까?

답은 간단하다.

그녀의 유지를 잇는 건 전쟁을 막는 일.

앞으로 벌어질 수많은 학살과 파괴를 저지하는 일이다.

내가 이번 생에 세웠던 목표와 같다.

여기서 길을 잃는 걸 원하지 않겠지.

학살당하는 주민들을 상상하는 건지, 손으로 벽을 짚고 애통해하는 녀석을 뒤로하고 성 바깥으로 나갔다.

‘북쪽 마을이라.’

어딘지는 대강 알고 있다.

- 파앗!

그대로 내달렸다.

저 멀리 불타오르는 마을의 모습이 보였다.

하지만 가까이 가 봐도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벌써 빠진 건가?’

곳곳에 기름을 뿌리고 불을 질렀는지, 불길은 잦아들 기미를 보이지 않았고, 곳곳에 널린 시체들마저 모조리 불타 버린 상태였다.

설사 정찰병의 말을 듣고 영주가 군대를 파견했더라도 늦었던 셈이다.

그곳에는 구원할 수 있는 인간도, 징죄할 수 있는 인간도 없었다.

까맣게 타오르는 마을을 천천히 걸었다.

‘서쪽으로 갔나.’

잘 훈련된 유격대다.

폐허와,곳곳의 발자국을 바라봤다.

순수한 인간의 몸이 아닌 병력도 꽤나 섞여 있는 듯 보인다.

‘전쟁을 막았더니,이런 식으로 나온다고?’

짜증이 치솟았다.

지표 아래를 감지했다.

‘마왕의 제단은… 없군.’

이 죽음과 절규가 마왕에 바쳐진 건 아니다.

하지만 이대로 넘길 수는 없다.

유격대의 후방 습격이 계속된다면, 마왕의 추종자들은 냄새를 맡고 금세 몰려들 거다.

아예 마을들을 중심으로 제단을

새기겠지.

내 계획이 어그러진다.

민간인의 피와 절규가 병사들의 그것보다 못할 리는 없을 터.

군대의 진로를 망가뜨려 살육을 막고, 〈흐름>을 막아 왔던 지금까지의 일이 모조리 헛수고가 되어 버린다.

놈들을 추적해 볼까 싶을 때.

‘뭐지?’

기척이 느껴졌다.

자욱하게 넘실대는 연기 너머로 무언가 다가오고 있다.

자그마한 철인이었다.

‘커다란 갑옷 같군.’

그렇게 생각될 만큼 다른 철인보다 크기가 작았다.

무엇보다 딱히 몰래 다가온 것도 아닌데,가면을 벗은 웬만한 유령들 보다도 기척이 없다.

맨몸도 아니고.

철인에 탑승한 상태인데도.

그 사실을 깨닫고 문득 자리에 멈춰 상대를 살핀 순간.

- Z、르

철인의 시선이 내 쪽을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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