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8화 신이 원하는 것 (6)
‘괴현상은… 없군.’
이곳에 있는 건 그저 평범한 살육과 방화.
지진도.
강의 범람도.
산사태도 없다.
괴현상이 자주 일어나는 전선조차 아니다.
그렇다면 이곳에 머무를 이유도 없다.
칙명이 떠오른다.
‘다른 건 아무것도 신경쓰지 말고, 오직 전쟁을 막는 괴현상의 원인을 추적하라.’
벌써 세 달째.
그럼에도 아무런 수확도,단서조차 없다.
전쟁 계획은 모두 어그러지고.
폐하의 분노가 쏟아질 터.
서둘러야 한다.
하지만 데서리 바티엔느는 걸음을 옮길 수가 없었다.
그녀는 불길을 바라보며 가만히 서 있었다.
불길은 배가 뚫려 흙벽 앞에 쓰러진
시체를,목이 반쯤 베여 너덜거리는 시체를,아궁이 안에 웅크려 숨었다가 함부로 찔려 죽은 시체를, 지붕을, 기둥을,바닥을 태워 검은 연기를 만들었다.
- 타다닥!
허공에서 매캐한 기름 냄새가 났다.
남은 건 재까지,태울 만한 건 다 태워가며 불길은 최후의 번성을 구가하고 있었다.
그 가운데 서서 그녀는 칙명조차 잊고 불길을 바라봤다.
허공의 한 지점.
까끌거리는 위화감이 느껴졌다.
‘•••뭐지?’
몇 번이고 보아온 풍경.
누구의 기척도 없었다.
이런 곳에서 살아남았을 민간인도 없었고.
아직까지 저 가운데 버티고 있을 방화범이 있을 리도 없었다.
그런데도 계속 허공을 주시하는 그녀에게,
〈360도 열 감지. 100미터 이내까지
감지 완료. 생명체 발견되지 않음.>
“公으
타이탄 오베론이 정확히 생각을 읽은 것처럼 말을 걸었다. 생각을 읽은 것처럼,이라는 표현은 정확하지 않다. 오베론은 생각을 읽었다. 그녀의 의지는 실제로 오베론과 싱크로되어 있으니까.
누구보다 충성스러운 제국의 칼이 었지만,미처 검주에는 이르지 못했던 사모하는 친구를 위해 마공학자
할비 팔커스는 자신의 혼을 갈아 넣었다.
오직 데서리를 기준으로.
오직 그녀만이 탑승할 수 있는 타이탄을 제작한 팔커스 자작은 코어를 완성한 날 사망했다.
마치 그 안으로 영혼이 빨려 들어간 것처럼.
자식을 가질 생각이 없었기에 남자와 진지한 관계를 맺지 않았지만,함께 오베론을 개발하며 이 남자라면 괜찮지 않을까 싶었던 데서리는 꼬박 일 년을 슬퍼했다.
〈직감直感인가?>
오베론이 물었다.
그 목소리를 들을 때마다 어쩐지 할비 팔커스가 생각났다.
정말 혼이 빨려 들어갔는지도 모른다.
- 타다다다닥…….
잔해들이 남김없이 하얗게 되어 버리고,불길이 조금씩 잦아들며 소리가 작아졌다. 불어오는 차가운 바람에 연기도 흩어졌다. 그리고 아무것도 없었다.
“착각이었던 것 같아.”
단순히 기분 탓일지도 모른다.
지진,산사태,강의 범람.
전쟁을 막는 괴현상의 원인을 조사 하라는 칙명.
그것조차 잊을 정도로 분노한 탓이 리라.
불타 버린 이 마을에.
구할 수 있는 무언가라도 있었으면.
징벌할 수 있는 무언가라도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 만들어 낸 감각의 착란 이겠지.
‘무기도 쥐지 않은 백성들을 살육 하다니.’
처음 보는 습격은 아니다.
지금까지는 지나쳐 왔다.
데서리가 받은 칙명은 괴현상의 추적이었고.
연합 유격대의 후방 습격 정도는 그녀가 아니라도 막을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굳이 그녀까지 나설 필요는 없다.
각지의 영주들도.
근처에서 주둔하는 기병대도 있으 니까.
‘하지만,움직이지 않았어.’
첫 번째,두 번째,세 번째.
이미 벌써 네 번째 마을이다.
이번에도 아무도 출동하지 않았다.
가까운 도시는 에라스트.
늦어도 지금쯤이면 신호가 가서 누구라도 을 법했지만,이번에도 모두가 손을 놓고 방관하고 있는 것인가.
‘이럴 수가 있나……
자세한 사정조차 알 수 없었다.
정치에 관심 없이 오직 명에 충실한 군인으로서만 살아온 탓일까.
오히려 그렇기에 군부에서 입지가 고립되어 있다는 사실은 웃기 힘든 이야기였다.
근위대에 있을 때는 황궁에서만 있었고.
직속 부하들은 철인 파일럿뿐.
지금은 수도 방위에 투입된 상태다.
백작의 작위를 가지고 30년을 군에 바쳤지만.
뜻대로 움직일 수 있는 전력이라고 해 봐야 자기 한 몸.
‘내가 막아야 해.’
다른 건 아무것도 신경 쓰지 말라는 칙명이 떠올랐지만.
‘이것도 넓게 보면 임무의 일부겠지.’
더 이상 방관하는 건 무리다.
데서리 바티엔느는 유격대의 흔적을 쫓았다.
뛰어난 녀석들이었지만 못 찾을 건 결코 아니었다.
오베론에 탑승한 자신이 아니라 웬만한 레인저나,추적에 익숙한 기사라면 충분히 쫓아갈 수 있을 법한 흔적이 명백하게 남아 있었다.
애초에 흔적을 지우려는 노력조차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뭐 하는 거지?’
따라갈수록 의문이 들었다.
남부라고는 해도,이곳은 엄연히 국경으로부터 한참 떨어진 제국
한복판이 다.
점점 더 중심부로 움직이고 있는 유격대는 산이나 숲을 통해서 음직 이지 않고 있었다.
그들은 대놓고 대로를 이용하고 있었다.
마치 근방에 있는 제국군이 자신들을 공격하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라도 하는 것 같은 움직임.
불현듯 가슴 밑바닥에 이유 모를 서늘한 기분이 차올랐다.
첫 번째 갈림길.
〈흔적 분석 중••. 철인 4기로 파악됨)
오베론이 그녀와 같은 결론을 내린다. 기계화보병 위주이던 흔적에 철인의 그것이 섞이기 시작했다.
‘합류했다.’
네 기의 철인이 유격대와 함께 이동하고 있었다.
갈림길마다 때로는 몇 기의 철인이, 때로는 기계화보병들이 합류하고 있었다.
하지만 역시 전투의 흔적 따위는 없다.
무리는 점점 커졌다.
철인까지 섞인 이만한 군대를 근처의
초소에서 보지 못할 리가 없다.
하지만 공격당한 흔적도,쫓긴 흔적도 없었다.
제국군의 버려진 캠프 주위에서 데서리 바티엔느는 조금씩 걸음을 늦췄다.
‘여길 대체 어떻게 알았지?’
우연히 길을 잘못 들 수는 없는 곳.
제국군 내부에서도 소수만 알고 있는 장소다.
‘여길 아는 자들은 거의 없을 텐데.’
고위 간부들이 남부에서 회합을 가질 때 별장으로 사용하던 캠프였다.
길은 뚫려 있지만 강과 절벽에 묘하게 가려져 일반인의 접근이 쉽지 않고,숲과 계곡이 어우러진 풍광이 수려해서 예전에 자주 사용되었던 곳.
- 乂、르
데서리는 빼곡한 기척을 느끼며 몸을 낮췄다.
백작급은 되어야 알 법한 장소.
전쟁 준비로 바쁜 일정 때문에 고위 간부들 누구도 찾지 않게 된 군부의 별장은,지금 연합군 유격대의 본거지로 사용되고 있었다.
섬뜩한 감각이 피부 위로 바싹 기어왔다.
〈초음파 센서 가동 중.〉
〈270도 방향,트랩 감지. 20미터 거리.>
〈135도 방향,트랩 감지. 27미터 거리. 4미터 고도에서 부착됨.>
오히려 예전보다도 경비가 엄중해진 느낌이었다.
지금도 막 귀환했는지,열 명 정도 되는 기계화보병이 안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이래서는 마치 제국이 아니라 연합의 땅에서 임무를 수행하고 있다는 느낌까지 들 정도였다.
언제 그들에게 영토를 할양해 준 적이 있었던가?
‘영토……
관계 없는 생각이었지만.
문득 이 전쟁의 목적에 다시 한번 의문이 떠올랐다.
이 전쟁에는.
안정화 단계의 계획이 수립되어 있지 않다.
적의 영토를 온전한 상태로 얻어,
자원을 통제하고 피해를 복구하며, 새로운 백성들에게 홍보하는 계획이 전혀 수립되어 있지 않았다.
‘아무래도 이상해.’
이래서야.
마치 전쟁 그 자체가 목적인 것 같지 않은가.
- 스륵.
잠시 생각에 빠졌던 그녀는 걸음을 멈췄다.
몸집이 작은 편이고,은폐 모드를 최대화하기는 했지만, 오베른은
기본적으로 타이탄이었다.
더 이상의 진입은 위험했다.
데서리는 그 자리에 서서 시야를 확대했다.
천천히 날이 밝아오고 있었고, 복귀한 병력들의 몸 곳곳에 붉은 피가 얼룩처럼 묻어 있었다.
상처는 전혀 없었다.
그들 자신의 피가 아니었다.
가운데 있는 움막을 향해 걸어가면서, 두런두런 대화하는 두 병사의 목소 리가 들려왔다.
“솔직히 너무 급하게 마을을 태우는 건 별로야……. 충분히 즐길 수가
없잖아.”
“어쩔 수 없지. 몸이나 풀자. 예전에 잡아 온 녀석들이나 예뻐해 주자고.”
“그것도 질린단 말이야. 나는 잡아 온 녀석들을 예뻐하는 것보다 현장감이 좋다구. 마을은 불타고,옆에서는 잘린 머리가 굴러다니는데,그게 툭, 부딪치는 순간 몸이 굳어서 살려 달라는 말조차 하질 못하고,파르르 파르르 떨기만 하는… 그런 현장감이 좋단 말이야!”
“흠. 난 그런 건 별로.”
“하긴,네놈이 뭘 알겠어?”
전쟁에서 살육은 피할 수 없다.
하지만 병사들이 태연히 읊어대는 것은 어느 진영에서나 즉결처형할 범죄.
데서리의 눈가가 분노와 경멸로 썰룩거렸다.
- 털썩.
그들 중 한 명이 창고를 열었다.
움막 안에는 사람들이 몸을 웅크린 채 쇠사슬에 묶여 덜덜 떨고 있었다.
아는 얼굴은 없었지만,눈빛만 보고도 알 수 있었다.
납치당한 제국의 백성들이었다.
두 명이 거친 손길에 머리카락을 붙잡혀 끌려왔다.
- 우드득.
데서리의 팔에 힘이 들어갔다.
더 이상 망설일 수는 없었다.
안쪽에 있는 병력은 일백 정도였다. 철인도 열 기가 넘었다. 데서리는 퇴로부터 점검했다. 한 명도 놓아줄 생각은 없었다. 와 본 적 있는 장소 였기에 기억을 되살리는 건 어렵지 않았다.
포로들이 몇 명이나 희생될까?
모두를 지키며 싸울 수도 없다.
하지만.
지금 결정해야 했다.
창고 근처로 몇 명의 기계화보병이 비슷한 대화를 하며 다가가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구해야 할 백성들과 적이 더욱 섞여 버린다.
선택의 여지가 없다.
난폭하게 생긴 의수에 다뤄지는 포로의 다리에,목에,가슴에 실시간 으로 멍이 생겨난다.
〈최적 행동 시물레이팅 중…….>
데서리는 창고 근처의 병사에게 티타늄 스트라이커를 겨눴다. 두 명을 한 번에 날리는 궤도가 나오질 않아서, 한 번씩 빠르게 발사해야 했다. 몇 명까지 들키지 않고 죽일 수 있을까?
‘부디,희생자가 적게 나오기를.’
- 쌔애앵!
공기를 찢으며 스트라이커가 날아 갔다. 이제 돌이킬 수 없다. 발사와
동시에 다음 공격을 장전하는 그녀의 눈에,이상한 모습이 들어왔다.
‘뭐… 뭐야?’
- 털썩.
창고 근처에 있던 병사 두 명은 이미 몸이 절반으로 잘려 바닥으로 떨어진 상태였다.
“습격이다!”
초소에서 요란한 외침이 울려퍼졌다.
一 퍼억!
데서리는 장전한 다음 공격을 무심코 초소 위의 병사를 향해 날렸고, 병사는 배가 뚫려 죽었다. 하지만 이미 별장 안의 병력들은 새까맣게 바깥으로 기어나오고 있었다.
* * *
가만히 두고 보려고 했으나,유블 람의 경비병들이 떠올라 충동적으로 몸을 갈라 버렸다.
‘뭐,알아서 하겠지.’
도화선은 당겼지만 직접 나설 필요는
없어 보인다.
종횡무진 활약하는 타이탄을 바라 봤다.
거리를 두고 조심스럽게 따라와야 했던 녀석.
쳐다보면 시선까지 민감하게 느끼는 것 같아서,함부로 쳐다보지도 못하고 겨우 따라왔다.
터무니없는 감지 능력만큼.
녀석은 기대에 어긋나지 않았다.
‘과연,레안드로의 모친이라는 건가".’
탐지된 파일럿이 40대 후반의 인간 여자라는 사실.
얇은 회청색 머리칼과,구사하는
검술.
넥스몬드에게 들은 정보들을 조합해 보면 다른 후보는 없다.
- 콰광! 콰과광!
가벼운 발걸음이나 자세는 지금껏 보아왔던 어떤 철인들과도 다르다.
손끝,발끝의 움직임마저 기계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자연스럽고 부드러웠으며.
하나하나가 완벽하게 균형이 잡혀 있다.
걸을 때도 느꼈지만 전투에 돌입하자
더욱더 대단하게 느껴졌다.
‘끝내주네……
이곳에 있는 전력은 철인만 해도 스물이 넘었다.
그것도 모두 보통이 아니다.
한눈에 봐도 최고 사양의 정예들.
가문의 문장조차 달지 않은 수상한 녀석들을 상대로.
자그마한 타이탄은 감탄이 나을 기동을 발휘하고 있었다.
창고 안의 민간인들을 보호하는 것과, 퇴로를 차단하는 두 가지 일을 동시에 수행하는 터무니없는 곡예를 보여 주면서.
순식간에 철인 네 기,기계화보병 스무 명 정도가 타이탄의 손에 명을 달리했다.
一 퍼격!
염동력을 이용해 가속한 칼날이 다섯 번째 철인의 가슴에 찔러졌다.
두꺼운 철판이 가볍게 갈라지고, 그 사이로 파일럿의 피가 울컥 터져 나왔다.
기계화보병 한 명이 은밀히 창고 근처에 접근해서 인질을 잡으려고 했지만,숨어 있던 내가 슬쩍 인벤
토리로 녀석의 발뒤꿈치 힘줄을 끊었다.
살짝 늦게 움직인 타이탄이 가웃하며 주먹으로 녀석의 얼굴을 으깨 버렸다.
그때 였다.
“잠깐! 중지! 다들 멈춰라!” 가운데 있던 철인이 손을 들었다. 집중되던 공격이 잠시 멈췄다.
데서리 바티엔느를 가운데 두고 연합군 유격대가 커다란 원을 만들 었다.
一 저벅.
흑철로 만들어진 거무튀튀한 철인이 한 걸음 앞으로 걸어나왔다.
대장이라고 불리던 녀석이었다.
그는 진심으로 의아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귀하께선 이름 높은 오베론의 파일럿,데서리 바티엔느 공이 아니 시오? 대체 왜 우리를 공격하는 거요?”
“지금 어째서… 너희를 공격하냐고 했느냐?”
그 태연한 어조에 충격을 받은 걸까.
타이탄의 목소리가 떨리는 것처럼 느껴졌다.
거무튀튀한 철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이다. 괴현상의 원인을 추적하셔야 하지 않소? 칙명을 수행 하는 중이실 텐데? 갑자기 이게 다 무슨 난리인지 모르겠구려. 혹시 그냥……
철인이 흘끗 창고 쪽을 돌아본 뒤 말을 이었다.
“몸 좀 풀었거나 그러신 거요? 이놈들이 다 죄인이긴 한데,더 이상의 전력 손실은 조금 곤란하오. 대충 다섯 명 정도만 더 죽이시겠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