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해골병사는 던전을 지키지 못했다-425화 (425/458)

509화 신이 원하는 것 (7)

‘역시 맞았군.’

나는 숨어서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 봤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타이탄이 잠깐 멈칫했다.

“계속 말해 보거라.”

“우리들의 명령 체계야 어차피 같은 뿌리 아닙니까,공.”

“공같이 높은 분께서 모르실 턱도

없을 텐데……. 전투를 원하신다면 차라리 저희 연합 내부에 오셔서 학살을 벌이시지요. 슬슬 시작되지 않았겠습니까? 여기서 먼저 피를 흘리면,자연스럽게… 으음?”

수다스럽던 대장의 말이 갑자기 멈췄다.

“설마 진짜 모르시는 겁니까?”

‘저 이야기는……

머리가 분주하게 돌아갔다.

연합과 제국의 수뇌부가 손을 잡았 다는 소리.

‘역시 연합에서도.’

카린의 보고서가 떠올랐다.

그녀가 추측하던 두 집단의 사전 내통이 눈앞에서 확인되는 순간이었다.

‘어떻게든 땅에 피만 더 뿌리면 된다는 건가?’

아니면 각 진영 병사들의 원한을 쌓는 걸지도 모른다.

자신의 마을이 약탈당하고,불타고, 살해당했다는 소식을 들으면 병사들의 마음은 더 끓어오를 수밖에 없다.

‘내 행동이 이런 식으로 영향을 끼치다니.’

끝끝내 군대의 대규모 충돌을 막는 다고 해도.

소규모 학살이 지속된다면 가랑비에

옷 젖듯 마왕의 강림이 이뤄질지도 모른다.

아직까지는 아니지만,마을 곳곳에 마왕의 제단이 발견되는 것도 시간 문제겠지.

전부 다 내가 통제할 수는 없다.

‘어떻게 해야 하지?’

고민에 빠져 있을 때.

- 저벅.

어느새 백여 명의 기계화보병과 열다섯 기의 철인이 타이탄을 몇 겹으로 둘러싸고 있었다.

촘촘하게 포위망이 완성된 것이다.

타이탄은 아직도 말이 없었다.

“뭐,혹시 제국군 내부에서 왕따라도 당하시는 겁니까? 이런 젠장,그렇 다면 조심하라고 우리에게 미리 말이라도 해 줄 것이지……

손짓에 따라 수십의 투척무기가 일제히 그녀에게 겨누어졌다.

‘다 피할 수 있을까?’

이대로 격돌한다면 그녀의 피해도 크겠지.

둘러싼 상태로 밀어붙인다면 과연 이길 수 있을까 싶었다.

그 순간이었다.

타이탄은 적에게 대답하지 않고 뒤로 돌았다.

오들거리며 떨고 있는 인간들이 있는 방향으로.

그들은 서로를 끌어안거나,입을 틀어막거나,등을 돌리고 울고 있었다.

타이탄이 입을 열었다.

“저,기사 데서리 바티엔느는 당신 들을 보호하기 위해 왔습니다.”

“보호……

낯선 단어를 듣는다는 표정으로 인간들이 중얼거렸다.

“이 싸움에서 당신들을 지키기 위해 목숨과 명예를 다하겠으나,역량이

미치지 못할 경우의 사망과 부상, 그대들이 겪을 고통에 대해 미리 용서를 구합니다.”

“뭐 하는 짓거리인지 모르겠군. 사격해!”

〈오베론,염력조작을 개시한다.〉

무기질의 목소리가 울려퍼지는 순간, 자그마한 타이탄의 몸에 강력한 파동이 느껴졌다.

‘염동력?’

묵직한 탄환이,화살이,온갖 투척 무기들이 한곳을 노렸다.

하지만 시간 차를 두고 날아온 수십 발의 공격은 일제히 무언가에 휘말려 좌우로 떨어져 있었다.

그와 동시에 타이탄은 적들 사이로 ‘던져’졌다.

그렇게밖에 표현할 수 없었다.

작은 발디딤도,어떤 준비동작도 없는 이동.

백이십 대 일.

철인 한 기가 오베론을 향해 옆으로 강하게 칼을 그었다.

오베론은 그걸 막지도,물러서지도, 흘리지도 않았다.

날갯짓도 없이 위로 가볍게 뜨더니

아래로 뚝 떨어졌다.

섬광과 함께 철인의 몸이 반으로 갈라졌다.

단순히 뛰어올랐다 내려친다고는 결코 말할 수 없는 운동에너지였다.

애초에 무언가를 내려치는〈궤적〉이 없다.

들고 있던 칼은 사라지고,어느새 발에,손에,쪼개기 위한 특수한 날이 튀어나와 있었다.

한 기를 쪼개 놓은 오베론의 두 팔이 양옆으로 휘둘러지며 기계화보병 둘의 목을 날렸다.

빼곡히 밀집해 있는 곳에 뛰어들었기

때문에,적들은 서로가 서로의 궤적에 얽혀서 효과적인 반격조차 하지 못했다. 그 가운데서 오직 오베론만이 자유롭게 움직였다.

오베론은 빈 공간으로 파고들어 다시 네 명을 죽였다.

위치가 바뀐 순간 다시 세 명이 죽었고,두 명이 다리를 잃었다.

‘염동력을 이용한 기동과 공격이라.’

‘이거라면 어느 각도로도,어느 순간이든 즉시 전환이 가능하겠어.’

물론 이론상의 이야기일 뿐이다.

염동력을 제 몸에 싣는다.

방향이 자유롭고,속도도,위력도

빨라지는 만큼 위험성이 높아진다. 인간으로서 익숙할 리도 없다. 한눈에 보기에도 통제하기 무척 어려운 힘처럼 보였지만.

얼마나 수련한 건지 몰라도 오베론은 몹시 정밀했다.

원하는 속도로 원하는 간격만큼만 움직였고.

적의 공격을 막거나 흘리지도 않았다. 애초에 방패조차 없었으며.

장갑은 보통 철인보다도 훨씬 얇았다. “아까 다섯 명이라고 했나? 심문할 다섯 명 정도는 남겨 주지.”

발과 주먹의 운동은 적의 움직임에

따라 그 즉시 바뀌었으며,실시간으로 헛점을 만들어 내서 방어가 빈 곳에 직선으로 강하게 박혔다.

一 퍼격!

피와 윤활액,뇌수와 기계 부품이 사방으로 터져 나갔다.

오베론은 타격이 끝나는 순간 터져 나오는 액체보다도 빠르게 이동해, 미스릴로 만든 새하얀 장갑 위에는 얼룩 한 방울 묻지 않았다.

흩뿌려져 나간 인간과 기계의 한가운 데서 순백의 모습을 유지하는 오베론.

그 모습이 더욱 공포스러웠는지 달려들던 무리가 서서히 뒷걸음질 치기 시작했다.

‘어디서 많이 본 것 같네.’

레안드로가 떠올랐다.

하긴 그가 누구를 보고 자랐겠는가.

데서리 바티엔느가 이번 세계선 에서는 자식을 낳지 않았다고 했으니, 저 여자에게는 레안드로가 하나 들어 있는 셈이다.

물론 구경만 하고 있을 때는 아니 었다.

‘좋은 참고가 되겠어.’

인벤토리.

그걸 저 녀석의 염동력처럼 사용하면 비슷한 기동을 할 수 있지 않을까?

나는 거리를 둔 채 은밀히 움직이며 오베론의 움직임을 따라 했다.

‘이게 더 낫지.’

기동에 사용한다고 쳐도.

염동력보다 역시 인벤토리를 사용 하는 편이 훨씬 편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압도적인 숙련도의 차이인 듯, 쉽게만은 되지 않았다.

- 과지직!

부딪친 나무들이 분쇄되어 갔다.

‘으음.’

난전 중이 아니었다면 당장 의심을 받았을 거다.

저 능력을 데서리 바티엔느에게 흡수해 볼까 싶기도 했지만.

아무래도 특별한 타이탄과 조합해서 나오는 힘인 만큼 죽여 봤자 흡수는 어려울 터였다.

‘연습해 보자……:

- 우두둑!

오베론의 움직임을 따라 하면서, 도망가려는 녀석이나 포로들에게 접근하려는 녀석들의 다리를 하나둘씩 분질러 놓았다.

“끄허허헉!”

슬슬 절반 정도가 정리됐을 때.

이상한 움직임이 감지됐다.

‘저 자식… 방금 내가 놓칠 뻔한 건가?’

거무튀튀한 철인.

대장이란 녀석이 몸을 빼어 멀리 사라지고 있었다.

커다란 철인에 탑승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난전 중의 데서리나 부하들은 물론.

바깥에 있던 나조차 순간 깜빡할 정도로 기척을 죽이고 숲속으로 도망가고 있었다.

전투력과 완전히 따로 노는 비정상 적인 은폐의 힘.

섬뜩한 기시감이 스쳐 지나갔다.

‘보티스……?’

추악공 보티스의 힘을 빌린 인간들.

에라스트의 유령들이 떠올랐다.

‘연합 유격대가 어떻게 이런 기운을 가지고 있는 거지.’

뒤쪽에서 분전하고 있는 데서리보다도 녀석이 한층 더 신경 쓰였다.

나는 전장을 이탈해 녀석의 뒤로 붙었다.

* * *

데서리 바티엔느는 수도로 달렸다.

이 주에 가까운 시간 동안 제국 중남부에 활동하던 연합 유격대를 말소한 뒤였다.

그런 자들이 제국의 심장부에서 활동한다는 사실이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하고,식사도 걸러 가며 홀로 전투에 임했던 그녀는

최소한의 세신을 마친 뒤에 곧바로 귀족 회의에 참석했다.

“기계화보병 6기명. 철인 48기. 지금까지 제가 국경 안에서 조우하고, 살해한 적의 숫자입니다. 도대체 어떻게 된 겁니까? 일부러 열어 주지 않으면 불가능한 규모입니다. 침투 했다고 하면 흔적이 있었을 겁니다. 왜 아직까지 아무것도 보고되지 않았지요 r

데서리 바티엔느는 먼저 국경 수비 대장에게 항의했다.

실로 오랜만의 참석이었고.

그보다 훨씬 오랜만의 발언.

그녀는 귀족회의가 싫었다.

항상 파벌이 갈리고,작은 꼬투리를 잡아 서로 침소봉대하고,파벌이 부모에서 자식으로 세습되기까지 했다.

오직 사안에 따라 중립적인 입장에서 행동하는 자들은 양쪽에서 어느 편 이냐며 지탄받아 활동하기가 어려웠다.

정치라면 골치가 아팠고.

어차피 파벌이 나뉘어 싸워대므로.

서로 상식선에서 알아서 하겠지 싶은 마음도 있었다.

하지만,언제부터인가 한쪽이 사라 졌을 때.

데서리 바티엔느는 무언가 잘못 되었다고 느꼈으나.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제국의 군인으로서.

오로지 검으로써만 충실하면 된다고 생각했었는데.

데서리 바티엔느가 지켜야 할 그 ‘나라’는.

‘황제’도 어딘가 기괴해져 버린 뒤였다.

“데서리 경,우리 모두 알다시피 지금은 전쟁 중입니다. 전선은 땅과 바다 양쪽에서 모두 넓지요. 적군의 후방 습격이야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 아니겠습니까?”

귀족들이 고개를 끄덕인다.

데서리는 모두의 짠 듯한 태도에 어처구니가 없었다.

하지만 할 말은 해야 했다.

그녀는 붉은 점들이 찍힌 지도를 펼쳤다.

“이 지점들을 보십시오. 예전에 군부와 황실에서 사용하던 군사 시설들입니다. 한 곳도 빠짐없이 은폐되어 있는 초소와 별장들이지요. 이곳을 대체 어떻게 적의 유격대가 알고 사용한 겁니까? 대사마! 당장 대대적인 감찰이 필요합니다.”

“허허,전쟁 전에 철저한 조사가 있었나 봅니다. 스파이야 언제나 있는 것이지요. 어차피 말씀하신 요충지는

지금 다 버려진 장소가 아닙니까?”

데서리의 외침은 공허했다.

“종사중랑,기병대는 왜 가만히 있었습니까? 어째서 종사중랑의 지침으로 대기한 거죠? 해명해 주십 시오.”

“해당 기병대들은 각자 임무가 있었습니다.”

“적의 유격대에 대처하기 위한 게 아니면,후방에 주둔하는 아군 기병대의 존재 이유가 뭡니까?”

“주어진 명을 우선시한 것이죠. 군인의 기본자세입니다. 그런데 이름 높은 군인인 데서리 경께서는, 폐하의 칙명은 수행하고 오셨는지

궁금하군요. 괴현상의 원인을 찾는 것 말입니다.”

가만히 있던 태부가 혀를 찼다.

“쯧,심각한 문제입니다. 설마 아무 단서도 찾은 게 없으십니까.”

“아직 찾지 못했습니다.”

곳곳에서 탄핵이 이어졌다.

“데서리 경,이거 대단히 실망이군요.”

“제국 최고의 군인인 경이라면 뭔가 다를 줄 알았는데……. 군인이라면 임무에 충실하셔야죠. 경께서 언제나 강조해 오셨던 게 아닙니까?”

“엉뚱한 거나 들쑤시고 말씀이야.

뭐가 중요한 건지 생각하셔야지.”

이 귀족 회의에 자신의 편은 없었다.

모두가 대놓고 그녀를 업신여기고 비웃었다.

그녀의 분개를 비웃고,무지를 손가락질하고, 지금까지의 방관을 조롱했다.

황제에게 보고할 수는 있을까?

그런다고 뭐가 달라질까?

철인 여단을 자신과 분리시키고.

‘아무것도 신경 쓰지 말고’ 혼자 임무를 수행하라고 했던 황제에게 보고한다고 해서?

자신을 향해 응성거리는 귀족 회의장

에서,데서리 바티엔느는 당장이라도 부서질 것 같은 고독을 느꼈다.

지금껏 해 온 정치에의 방관이 연명延命의 다른 이름임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적극적으로 저항했다면 어땠을까.

‘아마……:

살해당했으리라는 것을 직감했다. 그녀는 흐린 시선으로 허공을 훑었다.

엠버를 멸망시킨 로랑스 공작의 공석,제국 태부 리브레트릴,대사마 알테리온,대사농 테레스,마견 마탑 주들,명예 공작 비브리오,세 여신의

고위 사제들이 보였다.

어디에도 도움이 될 만한 인간은 없었다.

“그것보다……

시선이 멈춘 곳.

사제들이 모인 곳에서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이단입니다.”

비르폰의 주교였다.

불꽃을 오랫동안 들여다본 탓에 두 눈을 모두 새하얗게 실명한 남자가 연거푸 중얼거렸다.

“이단이 퍼지고 있습니다.”

태부 리브레트릴이 머리를 짚었다.

“새로운 달의 신앙 말씀이시군요.”

“그런 걸 신앙이라고 말씀하시다니! 가시나무로 태워 살라 정화해야 할 부정입니다!”

“뭐,그렇지요. 달이 밝아지는 날에 이변이 일어난다……. 신성한 땅에 상처를 남기는 것을 숭상하는 악의 무리임에 틀림없습니다. 데서리 경, 이런 건 역시 경께서 추적하셔야 했을 일이 아닙니까?”

다시 한번 쏟아지는 타박에 데서리는 살짝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내부의 분위기를 살폈다.

약간의 격론이 오갔다.

이제 보니 세 여신의 사제들과 다른 귀족들은 앉아 있는 위치가 나뉘어 있었다.

원래라면 관심도 두지 않았지만.

미묘하게 둘 사이에 흐르는 기류가 읽힌다.

‘귀족파……. 한쪽 끝에는 비브리오 공작……

그리고.

사제들이 모인 다른 한쪽 끝에는 로브를 쓴 남자가 있었다.

‘잿빛 추기경?’

로브 아래에 드러나는 실루엣으로

보아 틀림없이 그 남자였다.

예메라의 사제장.

생각해 보면 지금 그가 가만히 침묵하고 있는 게 이상했다.

원래라면 이단 심문에 누구보다 적극적인 자가 아닌가?

똑같은 생각을 하는 듯,대사농 테레스가 입을 열었다.

“그레이시엄 전하께서는 이곳에 계신 유일한 추기경이십니다. 이 일을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 入르

잿빛 추기경이 머리에 쓰고 있던 로브를 벗으며 일어났다.

“어젯밤 계시가 내려왔습니다.”

회의장의 시선이 그에게 집중됐다.

“이 미천한 예메라의 종 그레이시엄 에게,이교도를 섬멸하라는 계시가….”

그를 바라본 데서리는 흠칫 놀라 주먹을 쥐었다.

추기경의 두 눈썹 위.

양쪽 이마에 각각 회색 눈이 깜빡 거리며 회의장을 돌아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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