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4화 신이 원하는 것 (12)
나는 곧장 동북쪽으로 향했다.
네크론 회원들이 간신히 따라을 정도의 속도로 움직였지만,나에겐 느리게 느껴지기만 했다. 데리고 다니는 일이 생각보다 번거로웠다.
“대장님,저희 조상 중에 연합에서 건너오신 분이 있습니다. 엄청난 쾌남아셨다고 들었는데 대장님을 보니 그분이 생각나는군요. 마약의 신으로 군림하셨지요.”
조상을 팔아먹는 부류.
“전쟁이 끝나면 노예산업이 부흥할 겁니다. 공급이 폭증하는 거죠! 하지만 제가 그동안 싸악 다져 놓은 인맥이 있기 때문에,저랑 같이 사업하시면 입 무거운 단골 고객 확보에는 전혀 문제가 없습니다! 함께 하시 겠습니 까?”
장밋빛 사업 구상을 제시하는 부류.
“웨어울프 사육장에 있는 놈들이 건방지게 반항할 텐데,아주 혼쭐을 내주십시오. 팔다리 힘줄을 끊어 놓으셔도 뭐라 할 놈 아무도 없을 겁니다. 실적도 내지 못하는 주제에 칼 좀 쓴다고 패악질만 부리는 무리 입니다.”
대신 복수를 해달라는 부류까지.
무시하거나 대충 대꾸하며 넘겨도 끝없이 질척거리며 말을 걸어온다.
연합에서 넘어와 제국 사정을 잘 모르니 이용하기 좋겠다고 생각 하는지도 모른다.
“제가 에라스트를 좀 아는데……
“저는 그라스미어를……
점점 피로가 쌓여갔다.
산맥에 가까워질 무렵.
수백 미터 떨어진 곳에서도 육안으로 보일 만큼 거대한 시설이 보였다.
“저곳입니다!”
지붕 없는 극장이었다.
절반 가까이 파괴되어.
더 이상 원형이라고도 불리기 어려운 극장.
그곳의 남은 좌석들은 동부 산맥의 풍광을 마주보고 있었다.
산맥에서 떠오르는 일출을 보기에는 최고지만,워낙 구석진 곳에 있고 도적들의 본거지로 쓰이기도 해 웬만한 여행자들은 얼씬거리지 않을 장소라고 했다.
- 쿵. 쿵.
〈검은 도살자>에 탑승한 채로 걸음을 재촉했다.
완전히 무너진 쪽으로 접근했다.
정면에서 수많은 관객석을 마주하고 들어가자 연기자라도 된 듯한 느낌 이었다.
하지만 관객석은 모두 텅 비어 있었고,그곳에 있는 건 배우들뿐이다.
■- 크르르르르…. 크르….
순은사슬에 치렁치렁 묶인 웨어울프 들이 힘겹게 그르렁거렸다.
수천 명은 들어찰 만한 광장 곳곳에
여섯 마리의 웨어울프가 고립되어 있었다.
순은으로 만든 화살과 창검에 살이 숭숭 뚫려 회복하지 못하고 무기력 하게 쓰러져 있는 웨어울프도.
강도 실험이라도 당한 듯 강철에 무수히 긁히거나.
불에 그을린 자국이 가죽에 남아 있는 웨어울프도 있었다.
무엇보다 웨어울프들은 숨 쉬는 것을 고통스러워했다.
자세히 보니 은사슬 주변에 무언가를 부은 흔적이 보였고.
웨어울프들은 묶인 채 어떻게든
그 흔적으로부터 도망치려고 자해를 거듭하고 있었다.
‘약품? 냄새… 인가.’
개의 수십 배에 달하는 예민한 후각을 가진 웨어울프.
수십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서도 사냥감을 찾을 수 있는 그들의 코는 온통 지독한 염증으로 뒤덮여 있었고, 검붉게 부어올라 지독히도 고통스러워 보였다.
코에서 시작한 염증이 얼굴을 절반쯤 뒤덮은 상태.
‘끔찍하군.’
그들의 위로 브로디 발도프의 모습이
겹쳐 떠올랐다.
그런 위풍당당한 전사들을 부수고 고문해서 저렇게 만들어 놓다니.
묶여 있는 웨어울프들 모두 차라리 온몸이 찢겨 죽는 편을 택하지 않을까.
여섯 마리 대부분이 고통과 혐오로 반쯤 실성한 것 같았다.
“저 고블린이나 키우는 새끼들, 거절했는데 왜 또 얼씬거려?”
“숫자 믿고 해보겠다는거야?”
“이 시커먼 철인은 또 뭐냐?”
생각에 잠겨 있는 사이.
그 웨어울프들을 둘러싸고 있던 인간들이 일제히 나를 바라봤다.
‘이것들은 별거 없고.’
저런 수준이야 한눈에 파악이 끝난다.
가장 강한 우두머리라고 해 봐야 검기의 초입 정도.
그들을 무시하고 주위를 좀 더 살폈다.
웨어울프들을 잡아온 지 얼마 되지 않은 건지.
아니면 제물의 수가 적어서 무의미 하다고 생각했는지 이곳에는 보티스의 결계조차 깔려 있지 않았다.
‘저자인가.’
다른 인간들은 순은 무기가 있어도 웨어울프들이 풀려나면 곧바로 찢겨
죽을 만한 녀석들뿐이지만,한쪽에 있는 마법사는 만만치 않아 보였다.
꽤 키가 크고,복잡한 문양이 새겨진 목걸이와 팔찌가 눈에 띄는 인간 이었다.
여자가 입은 헐렁한 옷이 저녁 바람에 펄럭거렸다.
애초에 웨어울프들을 구속하려면 단순한 순은만으로는 어렵고.
축성되거나 마력이 부여되어야 한다.
땅에 박힌 족쇄들에게서 느껴지는 마력과 여자에게서 느껴지는 마력의 느낌은 완전히 동일했다.
이 장소의 시작과 끝은 저 녀석.
이곳에 판을 벌여 놓고 킬킬거리며 인간들을 구경하고 있는 느낌이었다.
침묵하고 있지만.
‘우두머리는 당연히 저 마법사군.’ 그 즈음이었다.
서쪽에 감돌던 노을도 사라지고, 희미하게 달이 떠오른다.
“이 시커먼 건 뭐냐니까?”
“우리 대장님이다,털박이 새끼들아.”
“늑대랑 떡 치는 데 정신이 팔려서 마을 약탈을 안 하겠다고 징징거려? 또라이 새끼들 아니야?”
‘시끄럽군.’
일단 모을 필요성이 있다.
나는 대충 극장의 무너진 방향을 가리켰다.
“너희,합류해라. 저쪽으로 가서 서.”
한 번에 모아 놓는 게 좋다.
늑대들을 학대하던 자들이 얼굴을 험악하게 찡그렸다.
그들이 나와 나를 쫓던 무리를 번갈아 쳐다본다.
“어디서 굴러들어온 건방진 새끼인지…. 우리로 따지자면….”
“그렇군.”
나는 굳이 끝까지 듣지 않고 말을 잘랐다.
해야 할 일이 이것만 있는 것도 아니다.
시간을 아끼는 건 중요하다.
- 부응!
흑철의 거인이 어둠을 가른다.
남자의 전방에 착지해,거인은 손에 쥔 칼을 휘두른다. 검신보다 훨씬 작은 키의 남자는 몸이 얇은 종이처럼 쩍 갈라지며 쓰러졌다. 경맥이 반으로 잘려 버린 남자는 다시 자랑스러운 검기를 쓸 수 없다. 물론 다시 숨을
쉴 수도 없다.
나는 쓰러진 남자의 시체를 밟는다. 가볍게 밟는 것만으로도 기괴한 소리가 나며 사방으로 질척하게 핏물이 튄다. 남자는 시체마저 완전히 망가진다. 설령 뼈의 군주가 통한다고 하더라도 이런 쓸모없는 녀석을 일으킬 생각은 전혀 없다.
“으아악!”
남은 자들이 비명을 지르며 뒤로 물러섰다. 목소리 가장 큰 놈이 단번에 육편이 되는 광경은 나머지를 공포에 질리게 만들기 충분했다.
“재밌는 힘……
그때까지 조용히 있던 키 큰 여자가 스태프를 들었다.
애초에 내가 신경 쓰고 있던 건 저 마법사뿐이다.
- 꾸르르르...
타이탄이 딛고 있는 지점에서 반경 20미터가 순식간에 질척한 늪으로 변해 버렸다.
‘제법이잖아?’
이 정도면 보통 마법사는 아니다.
탑주급은 아니라도.
황제의 행차를 호위하던 마법사들 보다도 강하다고 봐야 했다.
늪의 깊이도 무려 5미터가 넘는다.
‘적절한 공격이군.’
이미 철인 여럿을 요리해 본 솜씨.
버둥거리든, 체념하든 관계없이 강철의 무게라면 속절없이 아래로 처박혀 버린다.
얼마나 능숙한 파일럿이건.
여기서 빠져나갈 방법은 없었다.
없는 게 상식이다.
“어,어떻게……
- 파앗!
물론 그런 레벨의 싸움은 하지 않게 된 지 오래다.
나는 애초에 늪에 발을 담그지도 않고,인벤토리를 딛고 마법사를 향해 날아갔다.
뭔가 잘못됐다는 걸 깨닫고,몸을 돌리려는 마법사의 얼굴을 쥐었다.
“자,잠깐! 나! 나느은……
유언은 짧았다.
- 과지직.
마법사의 얼굴이 핏물이 되어 바스라 졌다.
‘좀 아깝긴 한가.’
유능한 녀석이다.
왜 이만한 마법사가 네크론의 사육장에 있었을까?
이것저것 말해 줄 게 많은 상대 였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종족을 불문하고 보는 눈이 많았고.
혹시 무슨 수작을 부려서 어딘가에 연락을 취했을지 모르니까.
안전이 최고다.
‘다 이동했군.’
시끄러운 놈과 마법사 둘을 죽이자, 나머지 늑대 학대자들이 쭈뻣거리며 내가 데려온 인간들 근처에 섰다.
슬슬 달과 산이 만들어 내는 그림자가 극장을 덮는다.
마치 시작하라고 말하는 것 같은 느낌이다.
그림자를 향해 몸을 돌렸다.
새로 합류한 무리가 나를 향해 말했다.
“대장! 어디든 가겠습니다!”
더듬지도 않고 곧바로 적응하는 게 대단하다.
그들을 묵묵히 바라보며 물었다.
“혹시 페어리 말고 다른 사육지의 위치를 아는 녀석?”
모두 고개를 젓는다.
‘안타깝군.’
나를 따라왔던 네크론 회원들도 말을 걸어온다.
“이제 페어리 사육장과 합류합니까? 정말 다 쓸어 버릴 만한 군세가 되겠군요!”
“가시죠,대장님!”
“사육장은 나 혼자 갈 거다.”
“알겠습니다. 저희들은 이 주위에서 활약하고 있을까요? 동부 산맥에
자그맣게 숨어 있는 마을들도 있을 텐데……. 후후후. 몸 풀기 좋을 것 같습니다. 기왕 온 김에 하나라도 놓칠 수 없으니까요.”
“아니.”
녀석들은 의아한 기색이었다.
“그러면 어디로 갑니까, 대장? 대장이 없이 커다란 성을 바로 덮치 기는 무리일 텐데……
- 툭툭.
나는 땅을 가리켰다.
“네?”
“지옥에나 가라.”
- 쿠구구구구구구!
땅이 벌어진다.
그들이 서 있는 원형 극장의 폐허가 인간들을 집어삼킨다.
물론 인간이 죽으면 지옥에 가는지, 지옥 이후에는 뭐가 있는지 따위는 모른다.
어쨌거나 이들이 살아 있으면 이 세계가 점점 더 지옥에 가깝게 되리라는 건 분명하다.
기괴하게 땅이 갈라졌다가 합쳐지고. 인간들이 그 안에서 짓이겨진다.
워낙 깊이 처박혔기에 섬뜩한 비명 소리는 밖으로 제대로 나오지도 못하고 끝나 버린다.
‘점점 더 정밀해지는군.’
역시 종종 이렇게 써 줘야 감각을 유지하는 데도 좋다.
- 스스스숙!
'음? 뭐였지?’
땅 아래에서 순간 보티스의 기운이
산발적으로 느껴졌다.
‘죽은 놈들의 단말마 같은 건가.’
하지만 곧 사라졌기에.
일단 극장의 남은 배우들을 훑어봤다.
웨어울프들은 촉촉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지만,눈빛과는 별개로 몸 상태는 끔찍했다.
몸 곳곳을 뚫은 순은 무기들을 뽑아 줬다.
웨어울프들을 얽매고 있는 사슬을, 족쇄와 수갑을 잘라내 멀리 던져 버렸다.
“너희들은 자유다.”
무너진 극장에 달빛이 비췄다.
- 아우우우우!
조금 전까지만 해도 고통으로 숨도 제대로 못 쉬고 으르렁대던 웨어울프 들은,압도적인 해방감 탓인지 완전한 늑대의 형상으로 변해서 울부짖었다. 바닥에 떨어진 약품 자국으로부터 멀리 도망가서,관객석에 타고 올라가 소리 높여 울부짖는다.
- 아우우! 아우우우!
호응이라도 하는 걸까.
맞은편에 보이는 저 멀리 산에서까지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녀석들이 울부짖을수록 달빛은 눈에 띄게 점점 더 강해지고 있었다.
‘이 녀석들,달을 보고… 울부짖고 있잖아?’
달의 신을 믿으라느니 하는 이야기는 한마디도 안 했는데.
‘직감적으로 이해한 건가?’
생각해 보면 당연한 이야기.
웨어울프는 말할 것도 없이 달의 종족이다.
달의 축복을 받고.
달의 변화에 따라 힘이 달라진다.
그들이 달의 밝기를.
내가 보여 준 힘이 달의 힘이라는 걸 몰라보는 편이 오히려 이상하다.
- 아우우우우우우!
울음소리가 공명을 이루는 순간.
어떤 위화감에 뒤를 돌아봤고.
‘이게 뭐야?’
진기한 광경이 시야에 들어왔다.
거대한 콜로세움에 새겨진 부조들이 달빛을 흠뻑 머금고 부풀어오르고 있었다.
뼈대가 생기고,살이 생기고.
근육과 핏줄이 생기는 것처럼 조금씩 움직이고 있었다.
생명을 얻은 부조들.
벽에 박힌 채,한정된 공간에서 생명을 얻은 그들이 관객석의 웨어 울프들을.
그리고 홀로 무대에 선 나를 바라 봤다.
〈아주 잘했다. 이 녀석들의 순도 높은 믿음이 무척 마음에 드는군. 훌륭하다.〉
머릿속에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두 번째 겪는 일이었다.
“베르카스?”
〈은총을 내리도록 하겠다. 계산해 보자…. 방금 얻은 신앙이라면…. 이 정도 해줘도 절대 손해는 아니 겠지….〉
생명을 얻어 꿈틀대던 원형 극장의 부조들.
그곳에서.
부조를 닮은 반투명한 달빛들이 앞으로 천천히 걸어나오기 시작했다.
다양한 신의 형상을 한 달빛들이 늑대들을 어루만졌다.
그들의 상처와 염증으로 녹아 들어 갔다.
살과 가죽을 축복해서 은에 대한 저항을 올리고.
발톱을 축복해서 모든 걸 찢어죽일 수 있도록 만들었다.
갈기에 윤기가 흐르고.
눈빛에 총명이 돌아왔으며.
송곳니는 한층 더 길어졌다.
그 모든 변화를 내가 직관적으로 머릿속에 공유하고 있었다.
- 스르르르륵.
신성神聖이 희박한 이 땅 위에서 오래는 버티지 못하는 듯.
달빛 부조들은 물에 푼 염료처럼 늑대들에게로 흐드러져 가고.
- 아우우우우…….
관객석의 웨어울프들이 하나같이 내 쪽을 보고 울부짖으며 꼬리를 흔들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