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해골병사는 던전을 지키지 못했다-432화 (432/458)

516화 신이 원하는 것 (14)

‘잘했다고?’

떠오르는 글자들이 당황스러웠다.

그 순간에도 문자들은 연달아 계속 떠올랐다.

〈지시한 대로 습격을 계속하고 있구나.〉

〈제사는 후하게 받들어졌느니라.〉

〈느껴지고 있다.〉

〈계속 진행하거라.〉

‘이 녀석,대체 무슨 소리를 지껄 이는 거야?’

민간인은 한 명도 공격하지 않았다.

부순 건 네크론이 운영하는 사육장 뿐이고.

죽인 건 녀석들의 부하들뿐인데.

침묵하던 나는 문득 밖을 돌아본다. 베어 죽인 네크론 신사회의 시체들이 뿜어내는 기운.

그걸 느끼자 대충 감이 잡힌다.

‘이 거였나.’

보티스의 결계도 없던 원형 극장에서,

땅에 묻혀 죽은 녀석들이 짧게 뿜어 내던 것과 같은 기운이다.

정해진 제물이 죽을 때 자동적으로 발동하는 각인.

‘저들의 몸 하나하나가… 보티스의 제단이군.’

땅에 제단을 만드는 것보다 몸에 직접 각인을 새기는 편이 효율이 좋은 건 당연하고.

사악한 녀석들인 만큼 보티스가 만족할 만한 양질의 제물이었을 것이다.

마지막 단말마.

숨소리 하나까지 모두 삼켜져 제물로

바쳐졌다.

‘그런 식으로 착각하다니.’

우스운 기분이 들었다.

내가 사라져 가는 제 졸개들을 규합하며 대규모 습격을 벌이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계속 그렇게 여기도록 내버려 두는 게 낫다.

당분간 방해받을 일은 없겠지.

나는 비늘 위에 천천히 답을 새겼다.

‘동부산맥. 따라서. 진행.’

사육장들이 자리한 동부산맥을 따라서 움직일 계획을 이야기한다.

완전히 거짓으로 말할 수도 있겠지만,

비브리오가 뭘 얼마나 아는지 모르는 상태다.

필요한 것 외에는 진실을 섞어 줘야 기만의 가능성이 그만큼 높아진다.

혹시 제사가 어디쯤에서 바쳐지는지 대략적으로 감지할 수도 있으니까.

비늘 위에 즉각 답변이 쓰인다.

〈좋다. 그리하거라.〉

전혀 예상하지 못한 글자들도 뒤이어 쓰인다.

〈조각상의 검은 비늘은 가지고

가도록 해라.>

‘…비늘을 가지고 가라고?’

껍껍하긴 하지만.

기본적으로 마왕의 진신.

보통 귀중한 것일 리가 없다.

이런 걸 나한테 챙기라고 하니 의심스러운 기분까지 든다.

〈지금부터 조각상에 박힌 비늘들은 모두 회수한다. 이후 내가 연락할 때까지 그동안 모아 온 네크론의 고기들을 모두 모아서 수도로 오거라. 구체적인 장소는 그때 말해 주겠다.>

무슨 수작을 부리는 걸까.

그곳에서 각인이 박힌 졸개들을 모조리 공양이라도 할 생각일까.

내가 흉내 내는 2선 의원까지 포함해서.

‘이미 죄다 죽었지만.’

그만큼 제사를 지내고.

검은 비늘을 모아서 뭔가를 소환 하려고 할 확률이 높다.

본격적인 강림은 불가능해도, 보티스의 화신 따위라도 나온다거나, 최소한 비브리오의 몸이 크게 강화될 확률이 높겠지.

〈힘을 주어 분리하려고 한다면 반드시 파괴되어 버리니라. 또한 지독한 저주가 너를 잡아먹게 될 것이니. 먼저 조각상을…….>

비브리오는 비늘을 회수하는 방법을 차근차근 설명하기 시작했다.

나는 녀석을 따라서 마법진을 그린 뒤 약간의 마력을 주입했다.

一 툭.

〈훌륭하군.〉

떨어진 비늘 위에 비브리오의 메시지가 새겨진다.

‘이 새끼,비늘의 상태를 알고 있잖아?’

* * *

동부산맥을 쭉 따라 사육장들을 정리했다.

켄타우로스 사육장을,심지어 커다란 호수를 끼고 있는 아팡크 사육장을, 하반신을 땅에 박고 영양분을 흡수 해야 하기에 거의 움직이지 못하는 알라우네 재배장을 정리했다.

아직 이렇게 다양한 마물이 살아남아 있었다는 사실이 생경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각자의 종족 특성만큼 다채로운 방식으로 학대당하던 그들은 때로는 고요하게 해방을 맞이했고,때로는 제 입으로 인간들을 찢어 죽이기도 했고,때로는 이미 죽은 동족들을 기억하며 슬퍼하기도 했다.

가지고 다니는 뱀 비늘의 숫자는 어느덧 여덟 개로 늘어나 있었다.

〈생각보다 훨씬 뛰어난 녀석이로다.>

〈명령에 충실하구나.〉

계속 제사를 받아먹었다고 생각 하는지 비브리오의 만족도는 점점 높아지고 있었다. 내가 메시지를 보내는 속도도 조금씩 빨라졌다.

‘혹시 속는 척하는 건 아니겠지?’

조금은 불안했지만.

이대로의 진행이 나쁠 거야 없다.

녀석에게 적당히 기름칠을 하는 메시지를 보낸 뒤,좋은 정보가 있으면 알려 달라는 식으로 말했다.

그러자 의외로 순순히 답변이 돌아 왔다.

〈그레이시엄이 이단 재판을 위해 남동부로 이동했다. 그자의 눈에 띄지 않도록 주의해서 움직이도록.>

‘그레이 시엄……?’

예메라의 추기경이다.

‘눈에 띄지 말라니.’

부딪치기라도 한다는 걸까.

마왕의 제사장과 여신의 추기경이 적대적인 건 당연하게 들리지만.

결국 같은 패거리라고 생각했는데.

말투로 보아 의외로 썩 좋은 관계는 아닌 것 같다.

‘생각해 보면,그레이시엄은 황실 비역에도 없었지.’

하지만 거기에 대해 깊이 캐물을 수는 없었다.

비브리오는 당연하단 투로 말하고 있다.

‘2선 의원이란 녀석에게는 이게 상식이란 이야기. 이것도 한번 캐 봐야겠어. 넥스몬드에게 연락할까.’

마지막 사육장 정리도 끝났고.

이제 슬슬 그동안의 보고서를 받아 볼 때가 되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나는 베트라스…….>

‘굳이 저렇게 말 안 해도 아는데.’

달의 신이 오랜만에 말을 걸어왔다.

〈너는 내 선교자...>

이미 했던 말 아닌가.

뭔가 어휘력이 부족한 녀석인지도 모른다.

〈공경심은 많이 부족하고…. 신앙은 있는지조차 의심스럽지만…. 강하기는

한…. 골치 아픈 녀석이지만….〉

“뭐 어쩌라는 거요?”

나는 어깨를 으쏙했다.

〈…도움은 많이 되고 있다.>

산 중턱의 호수에 비치는 달은, 마치 하늘이 아니라 그곳에서 직접 떠오른 것 같았다.

언제부터 일까.

녀석이 비치는 모습이 무척 생생하고 가깝게 느껴졌다.

〈그래서…. 특별히….〉

무언가 색다른 보상이라도 해주려는 걸까.

기대감에 호수에 조금씩 더 다가갔다.

“특별히?”

〈실적을 더 빨리 쌓게 해 주마…. 그 추악한 뱀의 비늘 나에게 모두 바치거라…. 내가 말하는 방법대로…. 나에게 공양한다면…. 대단히 커다란 공을 세우는 것이다….〉

- 철퍽!

나는 호수에 비춰진 달을 후려쳤다.

〈언제나처럼…. 불경하군….〉

“뭐 맡겨 놓은 걸 찾는다고 생각하는 거요?”

〈달의 힘을 쓰게 해주지 않았느냐….〉

“달의 힘을 써서 이득 보는 거야 그쪽도 마찬가지 아닌지? 오히려

그쪽이 더 클 텐데? 게다가 나는 직접적인 전투에 딱히 그 힘을 사용 하지도 않고. 그쪽 좋으라고 신앙 전파용으로 과시할 때나 쓰고 있는데.”

물론 그 힘으로 전쟁을 막는 게 내 목표다. 그러나 어쩌다 한 번씩 나오는 베트라스에게 자세한 사정을 말해 줄 필요는 없었다. 베트라스가 당황한 듯 물속에서 일렁거렸다.

〈흐음…. 보통 신에게 공양한다고 하면 기쁜 마음으로 하는데….〉

녀석이 잠시 침묵했다.

〈그리고 그 뱀의 비늘은 딱히 네게 필요하지도 않은 물건. 네가 그런 걸 가지고 있어 봤자 쓸모도 없고, 어디 쓰는지도 모를 텐데. 가지고 있어 봤자 해만 끼칠 거야. 깔끔하게 나에게 공양하는 게 훨씬 낫다. 중요한 일에 필요하다.〉

갑자기 발음이 또렷하고 말투가 단호해진다.

처음으로 녀석에게서 분노가 느껴 졌다.

‘설마 나한테 화를 내는 건가? 그건 아니고… 딱히 보티스에게도 아닌 것 같은데.’

애초에 보티스에게 별다른 관심이 없는 모습.

이곳에 없는 무언가를 보고 분노하는 기색이었다.

“중요한 일?”

〈어휴….〉

베트라스가 말을 삼켰다.

〈됐다…. 내가 알아서 하마…. 도와주기 싫으면 관둬라…. 누가 나 좋으라고 그러는지….〉

설마 삐진 걸까?

‘웬만하면 들어주겠는데.’

하지만 양보는 곤란했다.

“지금 이게 사라지는 걸 의식시키면 곤란해. 속이고 있는 녀석이 있다고.”

이 비늘들은 비브리오와의 연락책 이며 보티스의 일부.

의식을 치뤄 공양한다면.

보티스의 대제사장인 비브리오가 눈치챌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렇다면 멀쩡히 있는 척 내가 속여 줄 수도 있다.>

“확실한 건가?”

〈후…. 아직 힘이 모자라서 확실하진 않지만….〉

“음?”

〈정 불안하면,공양은 네가 원하는 순간에 하도록 해라. 대신 그러기

위해 지금부터 밑작업을 해줬으면 하는군.〉

“그런 게 가능한가?”

관심이 생겼다.

녀석의 코앞에서 이걸 베트라스에게 공양해 버린다면 어떨까.

꽤 볼만한 표정이 되지 않을지.

〈물론이지. 뱀 비늘을 평평한 곳에 놓고,내가 떠오른 호수에 이바바 가지를 담궈라.〉

“이바바 가지?”

〈저기 청자색靑紫色 꽃을 피우고 있는 낭창하게 뻗은….〉

나는 녀석이 시키는 대로 나뭇가지 하나를 꺾어,달을 찍어 적셨다. 그리고 뱀 비늘을 가운데 놓고 바닥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림은 꽤 촘촘했고,그림이 완성되는 순간 달이 묻어 있던 물기가 모조리 증발 했다. 마치 중앙의 뱀 비늘을 향해 빨려들어간 듯한 모양이었다.

〈잘 그렸다. 그럼 나는 준비해야

할 게 있다. 한동안 나타나지 못할 것이다…. 잘 지내도록….〉

베트라스는 일단 만족한 듯했다. 작은 호수 위에서 달이 사라지고, 목소리도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문득 묘한 느낌이 들어 고개를 하늘로 돌렸다. 이제 보니 달은 울창한 수풀과 산맥에 가려서,깊은 골짜기에 있는 호수 위에 도저히 비칠 수 없는 각도에 있었다.

“O으”

1 — I그 •

녀석이 걱정하던 건 뭐였을까?

‘왠지… 힘이 부족한 걸 분해 하는

것 같았어.’

비슷한 감정이라면 수없이 느껴 본 적이 있어서 민감하게 알아차릴 수 있었다. 나와의 차이점이라면 녀석의 기준은 턱없이 높다는 거겠지.

분함을 넘어서서,힘이 없는 현재가 어처구니없다고 여길 정도로.

한동안 빈 호수를 바라보다가 산 아래를 향해 걸어갔다.

‘지금쯤이면 넥스몬드와 카린에게 편지도 와 있겠군.’

일단 가까운 상인연합의 포인트를 향해 걸어갔다.

인간들의 전쟁에도 신경을 좀 써

줘야 한다.

‘할 일이 많네.’

- 쿵! 쿠쿵!

타이탄을 타고 빠르게 뛰어가다 보니 멀리 목적지가 보였다.

포인트가 있는 마을,밤베르는 굳이 산골에 있는 곳이라고 한정해서 생각지 않아도 몹시 큰 마을이었다.

‘네크론 무리가 공격하고 싶어 했던 게 바로 이런 곳이겠지.’

산적이나 마물들의 침입을 막을 수 있는 이중 목책.

각각 철조망까지 얽힌 채 이중으로 세워져 있다.

그 뒤에 빼곡하게 세워진 스피어와 석궁들.

살펴보면 돌이 아니라 통나무로 만들어지기만 했지,거의 성 수준의 방호라고 생각해도 될 정도다.

이곳에 사는 가구만 해도 무려 1천에 육박한다.

집 하나하나를 봐도 허술한 나무집이 아니다.

2층이나 3층으로 제대로 지어진 목조 건물도 꽤 있기에 거주 인구가 최소한 5천 명은 넘는다고 생각해야

했다.

‘이 정도면 거의 도시라고 불러야지.’

위치적인 중요성과 자체적인 자경 단의 능력을 인정받아,청년들이 군대에 편입되지 않고 이곳에서 거점으로 활동하도록 인정될 정도로 특별한 마을.

하지만 밤베르에 가까이 다가갈수록 뭔가 잘못되었다는 느낌이 들었다.

‘인기척이 없어?’

순찰이나 경계를 도는 인간도 하나 없이 고요하기만 했다.

‘침략인가?’

하지만 주변 네크론 지부는 이미

내가 깨끗하게 정리했다.

중간중간 비브리오와 대화를 나누 면서도 근처에 놓친 지부가 없다는 걸 확인했다.

연합 유격대의 본거지가 털린 건 직접 목격했다.

무엇보다 전투의 흔적은 전혀 없었고, 목책도 깨끗했다. 하다못해 석궁 사정거리에 화살 하나 박힌 흔적도 없다. 수상한 상황이었다.

- 사뿐.

타이탄까지 인벤토리로 받치고,

굳게 닫힌 목책을 가볍게 뛰어넘어 안으로 들어갔다. 그제야 저 안쪽에서 인간들의 기척이 느껴졌다. 기척을 드러내지 않고 가까이 다가갔다.

‘이게 무슨……

전체의 3할 정도 되는 집들은 두꺼운 통나무가 수수깡처럼 뜯겨 나가 있었고,나머지 멀쩡한 집들은 문을 단단히 걸어 잠그고 있었다. 걸어 잠근 문 안에서 정신이 나간 채 덜덜 떠는 인간들이 느껴졌다. 바깥에서 경계를 서고 있어야 할 자경대들,징병마저 면제받은 이 도시의 자경대들까지도 공포에 질린 채 여기서 웅크려 떨고 있는 것 같았다.

‘반쯤 미쳐 버린 건가…. 물어 봤자 제대로 대답도 못 듣겠군.’

집을 걸어 잠근 채 살아 있는 자들의 집은 그냥 지나쳤다. 곳곳에 널린 부서진 집들로 걸어갔다. 가까이 접근하자 묘하게 서걱거리는 느낌이 들었다. 집 안으로 들어가는 순간 그 섬뜩한 느낌의 이유를 곧바로 알 수 있었다.

그곳에는 인간들이 파편으로 깨져서 여기저기 튀어 있었다.

인간들은 얼어붙은 것도 아니고, 찢어진 것도,잘린 것도 아니었다. 그들은 마치 뒤에 수은을 바른 유리, 거울 조각이 깨진 것처럼 사방에

‘반쯤 미쳐 버린 건가…. 물어 봤자 제대로 대답도 못 듣겠군.’

집을 걸어 잠근 채 살아 있는 자들의 집은 그냥 지나쳤다. 곳곳에 널린 부서진 집들로 걸어갔다. 가까이 접근하자 묘하게 서걱거리는 느낌이 들었다. 집 안으로 들어가는 순간 그 섬뜩한 느낌의 이유를 곧바로 알 수 있었다.

그곳에는 인간들이 파편으로 깨져서 여기저기 튀어 있었다.

인간들은 얼어붙은 것도 아니고, 찢어진 것도,잘린 것도 아니었다. 그들은 마치 뒤에 수은을 바른 유리, 거울 조각이 깨진 것처럼 사방에

날카로운 파편이 되어 널브러져 있었다. 피도 바깥으로 흘러나오지 않았고, 내장의 절단면도 흐물흐물하지 않고 날카로웠다.

몇 군데를 확인하고,곧바로 상인 연합의 포인트를 향해 움직였다.

“으... 으으으… ”

그곳에 있는 녀석들도 얼굴이 새파렇게 질려 있긴 했지만,정신은 유지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나는 녀석들에게 곧바로 종이를 내밀었다.

“이…. 이….”

“읽어 주지.”

암호를 해독하는 절차를 마치고 인증 코드까지 읊었다. 아직도 눈을 몇 번씩 깜빡이고,불안한 듯 턱을 떨고 있는 책임자가 나타났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

“그게… 잿빛추기경이 나타났습니다.”

책임자가 침을 꿀꺽 삼키며 증언을 이어 갔다. 그가 태연히 목책 안으로 들어오더니,특정한 집과 사람들을 바라봤고. 그들이 거울로 변해서 죽었다는 증언이 이어졌다.

“이, 이단의 무리를 심판한다면서….”

“이단이라고?”

“아실 겁니다. 최근에 달을 숭상하는

자들이 생겨났습니다. 전쟁을 막아 줬다면서요…. 추기경이 뭐라고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많이 하긴 했는데…. 죽은 가구들을 보면…. 아무래도 그들이 목적인 것 같았습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