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해골병사는 던전을 지키지 못했다-434화 (434/458)

518화 신이 원하는 것 (16)

달의 성녀가 대체 왜 여기 있다는 거지?

이게 과연 우연일까.

‘그럴 리가 없지.’

분명한 이유가 있으리라.

내가 지금까지 회귀를 거듭해 오며 깨달은 사실 가운데 하나는,우연 이라는 건 없다는 사실이다.

설사 있다고 하더라도 없다고 생각 하는 편이 안전하다.

이 일은 어떤 식으로든 나와 관련 되어 있을 가능성이 높다.

바짝 긴장한 채로 흔적을 계속 쫓았다.

‘으음,여기로 오는 건 처음인데.’

흔적을 따라가다 보니 놀랍게도 나도 몰랐던 길이 있었다.

‘이런 길을 알 정도라면……

최소한 이 근처에 몇년은 살았던 자가 아닐까?

길은 내가 1년 동안 얼어붙어 있던 차가운 얼음 계곡으로 향했다.

첫 번째 삶에서 낭떠러지로 떨어져서 계곡에 처박혔다가,간신히 빠져

나왔던 기억이 떠올랐다.

저 멀리 얼어붙은 계곡이 보인다.

꽤 넓긴 해도 무척 황량한 장소다.

차갑게 깔린 얼음 위.

폭포라도 흐를 법한 절벽 아래에는 야생동물들이 몸을 피할 만한 작은 동굴이 있지만,먹을 것도 없는 탓에 실제로 저기서 지내는 건 아무도 없다.

계곡과 거리가 점점 가까워진다.

저 계곡에는 얼음밖에 없다고 생각 했지만,베트라스를 알게 되어서 그런지 계곡 안에 다른 무언가가 충만하게 느껴졌다.

달빛.

허공에 뜬 보름달로부터.

가득 부어져 있다고까지 느껴지는 달빛이 계곡을 가득 메웠다. 일 년 내내 물이 얼어붙은 대신, 얼음에 반사된 달빛의 물결이 그 안에서 찰랑거리고 있었다. 절묘한 각도로 끝없이 난반사되는 달빛은 소리도 내지 않고 계곡을 가득 흘렀다. 그 안에서 헤엄이라도 칠 수 있을 것처럼 농밀한 달빛이었다.

‘사기꾼이면… 장소는 참 잘 골랐네.’

딱히 달이 밝은 날도 아니었는데, 이 정도다.

내가 힘을 써 준 날이면 얼마나 더 밝을지 상상하기 어려웠다.

달빛만으로도 신비할 터.

이런 자연환경이면 확실히 누구라도 홀릴 수밖에 없겠지.

그리고,절벽 아래.

거대한 기운을 품은 회색 로브의 인간이 보였다.

‘저 녀석이 그레이시엄이겠군.’

이름 높은 잿빛 추기경일 게 분명하다.

실제로 본 적은 처음이지만.

추적해 온 것도 그렇고,녀석이 품고 있는 거대한 기운을 알아차리기는 어렵지 않았다.

미스릴 광산에서 일리엔의 왼손과 마주쳤을 때만큼 직접적인 건 아니 라도,분명 비슷하게 위험한 느낌을 풍기고 있다.

남자가 걸어가는 방향은 폭포 뒤쪽 이다.

‘저기 몰려 있어.’

곰 대여섯 마리가 둥지를 틀어도 될 만큼 넓은 폭포 뒤쪽의 동굴.

하나하나 정확히 파악되기에는 멀지만. 꽤 많은 숫자의 기척이 느껴졌다.

‘달의 성녀라는 녀석도 저기 있겠지.’

이제 싸우려는 걸까.

나는 남자의 뒤에 떨어져서 조용히

바라봤다.

굳이 내가 나서야 할 상황은 아니다.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일단 이쯤에서 구경하는 게 좋다.

예메라의 이단심문관이 사기꾼과 싸운다고 해서 나한테 손해가 되는 것은 전혀 없다.

이걸 기회로 사기꾼의 정체도 알게 되고.

그레이시엄의 능력에 대해서도 알아볼 수 있는 기회다.

로브를 쓴 남자는 앞으로 천천히 걸음을 내디디며 선고했다.

“예메라의 이름으로 명한다. 비천한

자들을 미혹하여 이교도로 만든 마녀는 스스로를 묶어 나오라. 충분한 고통이 있다면 참회의 기회가 주어질 수도 있으리라.”

메아리가 얼음벽 곳곳에 부딪혀 울려퍼졌다.

남자의 정체는 예상했던 대로였다.

‘그냥 죽이지도 않겠다는 거군.’

거울 조각으로 만들어 버린 무수한 인간들이 떠올랐다.

차라리 그들이 나을 만한 대우를 해주겠다는 이야기겠지.

뭐라도 나올 때까지 신전으로 끌고 가서 고문할 만큼 고문하겠다는 것

같았다.

〈베트라스?〉

〈어이,보고 있는 거냐?>

〈달의 성녀가 맞으면 어떻게든 도와줘야 할 것 같은데.>

하지만.

이런 이야기까지 나오는데도 달의 신은 고요하기만 하다.

‘뭘 준비하고 있다고 했는데……. 이럴 때 나와야 하는 것 아니야?’

성녀를 구하라거나.

추기경을 죽이라거나 하는 반응이 없다.

‘역시 사기꾼인가.’

진짜 권능을 내려 준 상대라면 위기 상황에 이렇게까지 방치할 리가 없겠지.

이쯤 되자 사기꾼의 모습이 한번 보고 싶었다.

그때.

동굴 안에서 인간들의 아우성이 들려왔다.

“성녀님! 절대 안 됩니다!”

“어서 몸을 피하십시오!”

“여기는 저희가 맡겠습니다! 저자는

지금까지 벌써……!”

“끌려간다면 어떻게 될지 모릅니다!”

자그마한 동굴에서 사람들의 아우성이 울려퍼지지만.

결국 누군가가 걸어 나온다.

“괜찮아요.”

목소리를 듣고.

“추기경 그레이시엄. 제가 당신이 찾던 달의 성녀입니다. 수도에서 정식으로 재판을 받는다면 어때요? 그쪽 입장에서도 나를 그렇게 데려 가는 게 더 낫겠죠? 그러니 다른 사람들은 건드리지 말아 주세요.”

걸어 나오는 여자를 보는 순간

나는 모든 생각이 멈춰 버렸다.

‘루비아……?’

그녀가 걸어 나오고, 말을 하고 있었다.

머릿속이 새까매진다.

분명히 반년 전 죽었다고 들었는데.

끊임없이 죽고,죽고,죽는 루비아의 상황에 절망했었다.

세계가 그녀의 불행에 굶주렸다고 생각했다.

자신이 무슨 목적으로 움직이고 있었는지조차 잊었다.

그런데.

‘살아… 있었어……?’

머릿속에 의문이 폭주했다.

어떻게 살아 있었지?

살아남았다면 영주는 어떻게 된 거지? 죽은 척을? 무슨 이유로?

당장은.

그게 중요한 건 아니었다.

‘구한다.’

모든 것에 우선되는 당연한 명제다. 그러나.

막 튀어나가려던 몸이 멈춰 버린다.

‘예메라……:

그 힘을 받았다면.

어쩌면〈보고〉있지 않을까.

내 개입이 루비아를 더 위험하게 만들지는 않을까.

내가 힘을 쓴 흔적이 드러나면, 나와 엮인다면 세계에서 적출당할지도 모른다.

이미 몇 번이나 벌어졌던 일.

종교재판 따위에 회부되는 걸 볼 수는 없지만,이 세계에서 영원히 사라져 버린다고 생각하면…….

어떻게 해야 할까.

대체 그녀가 왜 여기서 이러고 있지?

베트라스는 왜 대답이 없는 거야.

베트라스,베트라스!

너무 많은 의문과 감정이 한꺼번에

떠을라 오히려 모든 게 담담하게 느껴졌다.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있을 때.

“흐음?”

루비아를 바라보며 잿빛추기경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정말 네가 마녀가 맞는가? 확실히 달과 이어진 느낌은 있지만… 권능이 거의 느껴지지 않는군.”

〈이봐! 베트라스!〉

조언을 구하려고 말을 걸어도 아무 대답이 없다.

그 와중에도 대화는 계속 이어졌다.

“내가 달의 성녀가 아니면 누구란 말인가요?”

그때까지도 주위의 인간들은 동굴 밖으로 따라 나와 그녀를 둘러싸고 있었다.

“여러분,그렇지요? 저 말고 다른 사람이 있나요?”

“성녀님…. 흑흑,". 흑흑흑,". 안 돼요…. 싫어요…. 가지 마세요….”

“괜찮아요. 울지 마요.”

“흑흑”.. 미…. 미안해요…. 미안해요…. 제…. 제가 지켜 드리지 못했어요….”

그녀를 둘러싸고 사람들의 울음이

터져 나왔다. 하얀색 곱슬머리를 가진 한 소녀는 억제할 수 없이 어깨를 들썩이며 루비아에게 안겼다.

“성녀님이 저를 다…. 밥도 주시고…. 다 해주셨는데…. 다…. 전부…. 다 해주셨는데…. 흐아아아아앙….”

“괜찮아. 괜찮아.”

루비아가 아이를 품에 안고 토닥 거렸다.

‘저런 건 연기로 되는 게 아닌데.’

말도 없는 베트라스야 어떻게 생각 할지 몰라도.

저곳에 있는 인간들은 루비아를 진심으로 달의 성녀로 받드는 게

틀림없었다.

그 기색을 홀끗 살핀 그레이시엄은 선심 쓰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재판 청구를 받아들인다. 그럼 여성 이교도 전원을 마녀 후보자 로서,수도로 압송하겠다.”

“남자들은 풀어 주겠다는 건가요?”

“배교도를 살려 두어서는 안 된다. 검증이 필요 없는 자들에게는 사형 선고를 내리겠다.”

“그럼 수도로 데려가서도 결국 모두 죽이겠다는 거네요?”

“평범한 배교도는 사형,마녀로 검증된 자는 광장에 묶어 온 군중이

조금씩 돌로 쳐죽일 것이다.”

물론.

절대 그렇게 둘 수는 없었다.

설령 저게,루비아의 본을 뜬 밀랍 인형이라고 해도 결코 그런 꼴을 당하게 놓아둘 수는 없었다.

나는 앞으로 한 걸음 나아갔다.

그렇지만.

끼어드는 것이 정말 옳은 선택일까.

내 흔적을 그녀에게 남기는 게.

여기서 뛰쳐나가고.

몸을 드러내서 추기경을 짓이겨 버리면 루비아가 이 세계선에서 없었던 것처럼,그녀의 모든 것이

물거품처럼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희미한 가능성이 발목을 붙잡았다.

스스스스륵

추기경의 로브가 조금 올라갔다.

‘위험해.’

안쪽에 응축되어 있던 스산한 기운이 앞으로 날카롭게 터져나갔다.

루비아를 노리는 건 아니었지만, 혹시라도 휘말릴지도 몰랐다.

‘인벤……

참을 수 없었다.

즉시 영역을 발동시키고.

루비아를 구하려고 뛰쳐나가려는 순간.

- 째재재쟁!

웅성대던 사람들 사이에서 갑자기 한 여자가 검을 휘둘렀다. 검을 휘두르는 순간 급격하게 늘어나는 여자의 존재감은 마치 쭈그려 주저 앉았던 사람이 흑 일어나는 것 같았다. 여자의 칼은 달빛을 모으듯 훑고 지나서,로브에서 튀어나오는 스산한 기운을 쳐냈다.

나는 무심코 다시 뒤로 물러갔다.

튕겨난 기운은 원래 흐르는 물이었다는 사실을 떠올리지 못할 정도로 꽝꽝 얼어붙은 얼음과 부딪쳤고,얼음을 거울처럼 만들어 산산조각 냈다. 얼음 안에 가득 담겨 있던 달빛은 깨져 나간 얼음의 개수만큼이나 비산하며 빛났다. 한밤중인데도 달빛의 산란에 밝아서 눈이 시릴 정도였다. 그 빛 속에서 칼을 휘두른 여자가 앞으로 한 걸음 걸어 나왔다.

“제국 백작,전 근위기사단장, 현 철인여단장 데서리 바티엔느.”

칼은 든 여자가 스스로를 읊었다.

스스로를 읊은 그녀는.

작위를.

부여받은 특권을.

그리고 함께 받은 의무를 생각한다.

“칼을 쥔 목적은,악을 베어 나라의 혼란을 바로잡고, 부정을 축출하는 것.”

‘데서리 바티엔느? 저 여자가 어떻게 여기 있는 거지?’

얼마 전 오베론에 탑승하고 연합 유격대를 척살했던 바로 그 인간이다.

나는 뛰쳐나가려던 몸을 멈추고 상황을 살폈다.

그녀에게 목숨이 구해진 자들.

루비아와 함께 있던 사람들까지도 웅성거 리며 당황스러 워했지만.

어쩐지 루비아는 알고 있던 것 같은 눈빛이다.

추기경의 표정이 사정없이 일그러 진다.

“바티엔느 공,제정신인가? 사사로이 이단의 편에 서겠다는 것인가?”

여자는 대답하지 않고.

다시 한 걸음 앞으로 나간다.

“처음 했던 맹세는,백성들이 평온한 세상에서 살아갈 수 있도록 지켜 주는 것.”

“지금 예메라의 계시를 받은 이 몸을

상대로 칼을 겨누는가?”

“그레이시엄이 신의 이름으로 살해한 백성의 숫자는 347인. 어떤 살해에도 정당한 재판은 없었으며,그러므로 그것들은 모두 불의不義,사술邪術.”

“감히……

펄럭거리는 추기경의 로브에서 펼쳐지는 압력에 얼음이 점차 깨어져 갔다. 다른 인간들은 무형의 압력에 밀려나서 뒤쪽으로 넘어졌다.

그럼에도 데서리는 한 걸음도 밀리지 않았으며

一 철컥.

언제부터 그곳에 있었을까.

부유하는 갑옷이 스르르 나타난다.

- 철컥. 철컥. 철컥…….

독립된 의사를 가지고,자유로운 형태로 근처를 배회하고 있다가, 달빛 속에서 스스로 나타난 꿈틀거리는 미스릴의 덩어리. 오직 그녀만을 위해 만들어진 제국 최강의 타이탄이, 최적화된 갑옷의 형태로 여자의 몸에 입혀지고.

기계와 겹쳐진 목소리가 달빛 위로

동시에 울려퍼진다.

“예메라의 추기경, 그레이시엄은 이 나라의 적.”

미스릴로 뒤덮인 손이 눈앞의 로브를 가리킨다.

“13일간 기록된 죄상에 의거하여, 이제부터 데서리 바티엔느/오베론은 역적 토벌을 실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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