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해골병사는 던전을 지키지 못했다-437화 (437/458)

521화 신이 원하는 것 (19)

구출한 뒤.

근처 산장에서 밤을 보낸 아침이었다.

“다시 돌아가야 해요.”

허공만 멍하니 쳐다볼 뿐, 말 한마디 없이 씻겨 주는 대로, 먹여 주는 대로 가만히 따라왔던 소녀가 입을 열었다.

“ 응?”

“마을로 돌아갈 거예요.”

소녀는 뭔가 정신이 든 것처럼 말했다.

“꼭 그래야겠니?”

루비아는 소녀를 보내는 게 내키지 않았다. 몸은 별다른 이상이 없었지만, 어른들에게 강제로 납치당했던 일곱 살 여자아이의 마음은 몹시 불안정한 상태였다. 지금도 다른 레인저들에게는 가까이 가지 않고 루비아에게만 붙어 있었다.

게다가 소녀가 가려는 곳은 그들을 치유해 준 소녀를 마적단에게 내주고 숨어 있던 마을이다.

아무리 저항할 수 없었다고 하더라도 썩 달가운 기분이 들지 않는 것도 사실이다.

“그래야 해요. 가서 치유해야 해요.” 소녀는 절박하게 말했다. 목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비명처럼 들렸다. 눈물은 흐르지 않았지만 살갗 아래로 고통이 선명하게 비쳐 보였다.

대체 왜 저렇게 치유에 집착하는 걸까.

달의 신이라는 존재가 소녀를 제멋 대로 휘두르고 있는 건 아닐까.

이적을 눈으로 본 지금은 믿지 않으래야 믿을 수 없지만 좋은 마음은 들지 않았다.

루비아는 어쩔 수 없이 마을로 향했다.

“주군, 마을이 아무래도…… 앞장서서 정찰을 다녀온 레인저는 말을 끝맺지 못했다. 소녀와 루비아 사이를 그의 시선이 빠르게 오갔다. 루비아는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곧 파악할 수 있었다. 멀리서 연기가 피어올랐다.

연기가 느리게, 무성하게, 웅크렸다 일어나듯 뭉게뭉게 피어올랐다. 뭘 태웠는지 짐작이 갈 수밖에 없는 연기였다. 연기는 푸른 하늘에 구멍을 내고, 루비아의 마음에도 구멍을 냈다. 흐린 연기가 자꾸 밀려들어 구멍은 닦이지 않았다.

‘이런••••••

눈을 가릴 틈도 없었다. 소녀는 루비아의 손을 놓고 마을 쪽으로 달리고 있었다. 일행은 빠르게 소녀를 쫓았다.

소녀의 속도에 맞춰 마을에 도착했다. 연기는 슬슬 꺼져 갔고, 사람의 기척은 전혀 느껴지지 않고 고요했다. 하지만 시각적으로 몹시 요란한 고요였다. 오솔길, 나무 위, 계곡에 나뒹구는

수많은 시체가 눈에 들어왔다. 시체들이 쓰러져 있는 둥근 언덕은 어쩐지 삐뚤삐뚤하게 보였다.

집들이 모여 있는 곳에서는 시체들은 온전한 형상도 갖추지 못했고, 그냥 검은 덩어리가 되어 있었다. 한나절 전까지만 해도 걷고, 말하고, 소녀에게 치유를 받은 인간들이었지만, 지금은 모두 그냥 까맣게 타버린 습기 없는 덩어리였다. 솟아오르던 연기는 그들이 온몸에서 흘리던 회색 눈물 이었다. 소녀가 끌려갈 때도 홀리지 않고 있던 눈물, 참아 온 눈물이 모조리 연기가 되어 해를 가렸다.

“수색하겠습니다.”

경험이 많은 레인저의 캡틴들조차 인상을 찡그리며 흩어져 사방을 경계했다. 누구도 생존자를 기대하고 하는 수색은 아니었다.

남은 연기를 피하며 루비아는 곁에 있는 소녀의 안색을 살폈다. 흐렸다가, 조금씩 또렷해지며 빛을 되찾던 눈동자는 이제 완전히 텅 비어 버렸다.

바라보자 숨이 막혔다. 어떤 세상 이라도 일곱 살 소녀는 이런 눈을 가지고 있으면 안 된다. 타 버린 시체들에 대한 소녀의 시선은 애도가 아닌 몰입처럼 보였다. 죽음은 소녀의 눈으로 옮겨와 있었다.

‘자기가 살려낸 사람들일 텐데……

달의 권능으로 직접 치료한 목숨들도 꽤 섞여 있으리라. 루비아는 손으로 소녀의 시선을 가렸다. 사방을 오가며 흔적을 조사한 레인저들이 루비아에게 말했다.

“이곳은 덮친 자들은, 저희가 죽인 놈들을 확인하고 마을로 되돌아온 것 같습니다.”

루비아는 숨을 멈췄다. 목을 날카로운 채찍이 조르는 것 같았다. 까맣게 타 버린 시체들이 몸을 일으켜서, 너 때문이라고 고래고래 소리치며 저주를 퍼붓는 환상이 보였다.

‘복수, 라는 건가……

부주의했다.

하지만 선택적인 부주의였다.

원래대로라면 루비아는 훨씬 더 세심하게 일처리를 했을 거다.

이곳이 자신의 영지였다면.

마을 사람들이 소녀를 돌보기 위해 나섰었다면.

끝까지 마음을 써서 챙겼을 터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패거리를 알아내고.

마을에 보복이 오지 않게 신경 썼으리라.

하지만 루비아는 은연중에 이들에게 조금 부정적인 감정을 품었고, 마적들의 본거지와 다른 무리를 알아내는 수고를 하지 않았다.

그 결과가 이런 몰살이었다. 죄의식이 머리칼을 잡아 뽑는 것 같았다. 수치심이 가슴 밑바닥에서 마구 휘저어졌다.

“…아무리하러 가죠.”

화풀이를 하러 왔던 마적단을 완벽 하게 토벌하고, 그곳에 갇혀 있던 노예들을 풀어 줬다. 몸값을 위한 포로는 없었다. 대부분 노역이나 성욕을 위한 노예들이었다.

법령대로라면 우두머리급을 제외한 마적들은 잡아 십 년 단위의 노역형에 처하게 만들겠지만, 루비아는 더 이상 그런 데 얽매이는 영주의 신분이 아니었다. 수고를 끼쳐 가면서까지 생포한 마적은 한 명도 없었다.

풀려난 사람들이 끙끙거리며 갈 길을 가려던 참이었다.

“사람들… 치유… 해야 돼...... 소녀는 다친 포로들에게 다가갔다. 반사적으로 손을 내밀었다. 손가락 끝에 새하얀 빛이 흔들렸다. 순식간에 수많은 시선이 쏠렸다.

“어어?”

옅은 빛의 줄기들이 다치고 아픈 사람들을 감쌌다. 소녀는 치유해야 돼, 라는 말을 반복적으로 중얼거렸다. 가녀린 두 손은, 그곳에 덧입혀진 빛은 사람들을 향해 뻗어 있었지만 소녀는 마음속의 어둠에 깊이 숨어 들어 있는 것 같았다.

- 샤아아아…….

부러진 뼈가 붙고, 상처가 아물었다.

“달을 믿어야…. 제대로 나아요…. 베트라스…. 믿으세요….”

소녀는 지쳐 휘청거릴 정도로 치유를 계속했다. 하지만 신의 언급과 전도는 의외로 적었다. 중간중간 생각나면 한 번씩 하는 식이었다. 전도가 목적인지, 사람들을 돕는 게 목적인지 알 수 없었다.

달의 성녀를 사이비 교주라고 생각 하던 과거가 어처구니없이 느껴졌다.

루비아는 소녀의 곁에 바싹 붙었다.

“이제 그만해. 힘들잖아…? 사람들을 정말 걱정한다면, 네 몸을 돌보는 게 먼저야.”

“계속... 계속할 거야.”

죽은 눈으로 소녀가 계속 중얼거렸다. 소녀는 이미 쓰러진 채 마지막 환자 에게까지 손을 뻗고 있다가, 가냘픈 몸을 한번 움찔하더니 잠들어 버렸다. 하지만 잠들어 버린 후에도 완전히 안식을 취하지 못했다.

“더 많이…. 치유해야 돼…. 죽은 만큼… 더 치료해야 돼….”

잠꼬대가 흘러나왔다. 잠꼬대 속에서 살해당한 사람들의 모습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루비아는 가슴이 아팠다. 자신이 소녀를 이렇게 만든 데 무거운 책임이 있는 것이다. 성녀라고 숭배 하는 사람들이 흩어진 뒤 소녀를 들고 다시 산장으로 돌아갔다.

잠에서 깨어난 소녀가 고개를 들었다. 여전히 비어 있는 눈이었다.

“치료하러 가야 해요.”

소녀는 초조한 듯, 낡은 의자에 앉은 몸을 앞뒤로 움직였다. 의자에서 들리는 삐걱삐걱 소리는 마음에서 들리는 비명 같았다. 이대로면 소녀는 자신을 끝없이 몰아붙이고, 그 능력을 본 사람들에 의해 계속해서 같은 위험에 빠질 것이다.

‘언젠가 죽을 수도 있겠지.’

루비아는 침을 꿀깍 삼켰다.

“그럼, 언니랑 계속 같이 다니자. 이름이 뭐니?”

“베트라스……

“응? 아니, 그거 말고, 네 이름 말이야.”

소녀의 멍한 눈동자에 잠시, 보일 락말락 한 희미한 불이 들어왔다. 아직 꺼지지 않은 부드러운 불이었다.

“클레 •••어••••••

강박적으로 치유해야 되나는 말만 반복하던 때와는 달리, 더듬거리면서도 조금 쑥쓰러운 것 같은 말투였다.

“클레어! 참 예쁜 이름이구나.” 루비아가 소녀의 두 손을 잡았다.

“아무도…. 내 이름…. 물어보지 않았는데……

소녀가 작게 중얼거리고 고개를 숙였다.

‘모두 성녀라고만 불렀던 건가.’

어느 마을에서나 오로지 능력에만 관심이 있었을 뿐, 소녀의 이름조차도 묻지 않았다. 부르고 눈을 바라봐 주는 사람은 소녀의 세상에 아무도 없었다. 루비아는 최소한의 버팀목은 되어 주고 싶었다.

“클레어, 사람들을 많이 치료하려면 너부터 건강하고 상태가 좋아야 해. 절대 힘들지 않을 정도만 하는 거야.”

“그래요?”

“물론이지. 아니면 금방 지쳐 버려서 추스르느라 시간을 더 소모하게 될걸? 그리고 널 노리는 사람도 많을 거야. 언니 말을 잘 들어야 돼.”

“어떻게… 하면… 되는데요?”

“일단, 사람들 앞에 나서는 건 언니가 할게. 언니가 치료할 수 있는 척하는 거 괜찮아?”

자신이 성녀가 된다면 어떨까.

물론 루비아가 그런 이름을 이용해서 뭔가 이득을 취하겠다는 생각은 전혀 없다.

다만 이목과 요구가 소녀에게 집중 되는 상황은 피하게 해주고 싶었다.

‘이제 어디로… 어디로 가십니까?’

‘더 해주세요……

‘착한 성녀님, 혹시… 저를 더 건강하게 만들어 주실 수는 없나요?’

치유를 받고도 기이하게 빛나는 인간들의 눈빛들이 기억났다.

이런 아이를 더 이상 사람들에게 노출시키는 건 곤란하다.

철저하게 통제된 환경 아래에서만 기적은 일어나야 한다.

“좋아요.”

소녀, 클레어는 고개를 끄덕였다.

간단한 승낙이었다.

“고마워.”

마적들의 본거지를 떠난 후.

루비아는 클레어의 모습은 몰래 숨긴 채 사람들을 치유하고 다녔다.

그때부터 달의 성녀에게서〈기적〉을 행사받기 위해서는 최소한의 검증이 필요했다.

실제로 아픈 사람.

무기가 없는 사람.

오는 건 한 번에 한 명씩.

필요한 경우라도 2명씩.

3명 이상은 불가.

안내자의 모든 요구에 따를 것.

루비아의 통제하에서 모습은 드러내지 않으면서도, 치유된 이후 감사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소녀의 마음은 조금씩 회복되기 시작했다.

“이제 딱 103명째네.”

입을 여는 일이라곤 없다시피 한 소녀가 숫자를 읊조렸다.

“103명? 치유한 사람의 숫자니?”

소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마을에서 타 죽었던 사람의 숫자야. 이제 딱 맞네.”

루비아는 어쩐지 목이 메였다.

“•••클레어, 꼭 누굴 치유해야만 하는 게 아니야. 너는 지금 사람들에게 돌봄과 도움을 받아야 할 나이야. 여유가 있을 때 다른 사람을 도우면 정말 대단한 거지만, 너를 힘들게 만들면 그건 다른 어른들이 너에게 굉장히 부끄러워해야 하는 거야.” “지금까지 도와주고 살린 사람들만 해도, 너는 누굴 기준으로 봐도 정말정말 특별하고 대단한 아이야. 네 나이, 아니, 네 나이의 두세 배가 되던 해의 언니랑 비교하면 정말 내가 한없이 초라해지는걸?”

티끌처럼 무력하고 무의미했던 자신을 끝까지 지켜 준 꿈속의 누군가를 생각하며, 루비아는 같은 말을 하고 또 했다.

“언니가 볼 때 클레어는 너무 귀여 우니까, 졸리면 자고, 배고프면 먹기만 해도 괜찮아. 앞으로 3년은 더 그래도 돼!”

루비아가 쏟아붓는 말이 간지럽다는 듯 소녀가 쿡쿡거렸다.

“•••뭐야 그거. 돼지예요?”

“어? 웃은 거야? 지금 웃은 거지?”

몇 개월 동안 처음 보는 미소였다.

“언니는... 착한 사람이네.”

‘그럴까.’

어쩌면 자신은 소녀를 구슬려서 함께 다니면서, 곳곳에서 죽어 가는 사람들을 살리고 싶은 마음에 사로 잡힌 건지도 모른다. 손에 넣고, 조금 더 오래 사용하고 싶어서.

“그런데, 돌아다니는 것도 힘들지 않니?”

“다리 아파.”

소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우리가 계속 이동하니까 사람들이 우리를 찾아오다가 헛걸음 하는 경우가 많더라.”

소녀가 살풋 웃은 다음 날.

루비아는 비밀통로와 여러 은신처를 구축해 놓은 야산으로 거처를 정했다. 하지만 최근 명성은 더 높아지고 찾아오는 사람들의 숫자도 늘어나서, 슬슬 다시 기거하는 장소를 바꿀 생각으로 레인저들에게 적당한 곳을 알아보게 하던 도중이었다.

“묻겠습니다.”

바람 한 점 불지 않았는데, 갑자기 루비아의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순간 루비아는 뻣뻣하게 굳어서 움직일 수 없었다. 긴장감에 곁눈질 조차 할 수 없었다. 핸드건을 쏘든, 뭘 하든 늦는다.

협박 한마디도 없지만, 자신을 포함한 주위가 모두 등 뒤의 목소리에 통제된다는 사실이 느껴졌다. 목소리는 루비아가 ‘딱 그 사실을 알 만큼’ 정확히 조절된 압박감으로 질문을 던지고 있었다.

“남부의 영주 레이 루비아는 죽었 습니다만, 성녀를 칭하고 있는 당신의 정체는 대체 뭡니까?”

당신은 누구냐니. 레인저의 캡틴들이 자리를 비우지 않았어도 이자를 감당할 수 있을까? 루비아는 마음속으로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감당은커녕, 감각을 전문적으로 수련하는 그들조차 싸움도 없이 그냥 통과시켜 버렸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루비아는 질문을 거꾸로 돌려보았다.

‘ 누굴까?’

그 정도 되는 능력의 중년 여자다. 그런 자가, 당연하게도 이 세상에 흔하지는 않다. 목소리. 짧게 기억을 더듬었고, 그녀는 곧바로 목소리의 주인을 짐작할 수 있었다.

“데서리… 백작님?”

짧은 흔들림에서 루비아는 확신을 가졌다. 그녀의 머릿속에 제법 크게 자리잡고 있던 상대였다. 수도에 있을 때 몇 번 자리를 함께한 적이 있었다. 스쳐 지나간 정도의 기억이 었지만, 데서리 바티엔느에 대해 루비아는 꽤 각별한 관심을 가졌다. 한눈에도 올곧아 보이는 성품과 깨끗하다 못해 아예 없는 사생활이 인상적이었다. 뒷조사 끝에, 이 사람 이라면 전쟁을 반대해 줄 거라고 생각하고 편지를 보냈지만, 황실에 대한 충성심 때문인지 상대는 아예 자신의 서신을 철저히 무시했다.

“맞으시군요. 왜 한 번도 답장을 하지 않으신 건가요? 무척 서운했다고요 보낸 편지가 두 자릿수는 됐을 텐데…. 너무해요.” 뒤에서 칼을 겨누고 있을 상대에게 건네기에는 지나치게 긴장이 풀린 말투였지만, 어쩐지 자연스럽게 이런 말투가 나왔다. 루비아 스스로도 뱉어 놓고 조금 당황할 정도였다. 하지만 그 말을 들은 상대는 한층 더 당황하며 머뭇거렸다.

“•••편지라고?”

의아한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뒤에서 탈색된 잿빛 머리칼의 여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백작, 본인은 그대로부터 편지 같은 건 전혀 받은 적이 없습니다만.”

“네?”

루비아가 침을 삼키며 말했다. 그녀는 곧바로 판단을 내렸다.

“우리 둘 모두 거짓말을 할 사람은 아니니까....... 누군가 줄곧 편지를

가로채고 있었던 것 같군요. 아마 황실일 거예요.”

평소라면 불경하다며 부정하겠지만, 지금까지 많은 걸 보아온 데서리에게 루비아의 말은 설득력이 있었다.

루비아의 머리가 빠르게 돌아갔다.

“저, 친구 없으시죠?”

난데없는 인신공격에 데서리는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그것도 황실에서 철저하게 기획한 결과일 거예요……

“황실이?”

“네••••••

루비아가 짧게 설명을 이었다. 확실히 그럴듯한 이야기였다.

데서리는 그렇게 까다로운 성격이 아니었고, 오히려 무던한 편에 가까웠다. 하지만 확실히 이상할 정도로 자신의 주위에는 묘한 장막이 쳐져 있었다. 정치에 관심 없이 군부에 평생 몸을 담아서 그렇다기엔 군부 자체에서조차 마찬가지였다. 누군가와 조금 친해질 것 같으면 상대는 반드시 먼 곳으로 인사발령이 나 버렸다.

생각해 보면 어쩐지 누군가와 정을 붙일 기회가 배제된 것 같은 느낌이었다. 데서리도 인사에 대해 불평 따윈 하는 성격이 아니었지만, 확실히 뭔가 이상하긴 했다.

그 추론을 시작으로 루비아는 자초 지종을 설명했다.

대신 성녀 역할을 하기로 했다는 이야기까지 듣고 데서리가 끄덕거리며 질문을 던졌다.

“그럼, 이것부터 물어봅시다.”

“말씀하세요.”

“지금 전쟁을 가로막고 있는 이적… 땅의 균열. 이건 성녀와 상관없는 겁니까?”

루비아는 고개를 저었다.

“네. 그건 모르겠어요. 달의 신앙과 관련이 있다고는 하는데, 진짜 성녀인 저의 일행도 전혀 모르겠다고 말했 거든요.”

“그렇군요.”

‘혹시 그분일지도 모르겠어.’

부하들에게 이적의 정체를 알아 보라고 주문한 적이 있다.

하지만 어떤 흔적도 밟지 못했다.

‘그때와 같지.’

꿈속의 존재를 추적하면서 겪은 결코 잡을 수 없던 느낌.

하지만 근거 없는 추측이고, 막연한 직감일 뿐이다.

굳이 다른 사람에게까지 말할 필요는 없다.

“일단은 납득했습니다.”

데서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튼, 그동안 연락을 계속 하려던 분을 이렇게 뵙게 되어 진심으로 기쁘네요! 사실 여쭤볼 게 많은데….”

수도에 있던 데서리에게 물어보고 싶은 게 많았지만, 그녀는 말을 잘랐다.

“송구합니다만, 더 이상 대화를

나눌 때는 아닙니다.”

기사는 비장한 표정을 지었다.

“네••••••?”

“예메라의 추기경, 그레이시엄이 이단심판관이 되어 여기로 걸어오고 있습니다. 제가 조금 앞지르긴 했지만, 곧 도착할 겁니다. 어쩌시겠습니까? 시간은 벌어 드릴 수 있습니다만, 저조차 싸워서 이긴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루비아는 그 말을 듣고 흠칫 굳었다. 눈앞의 기사가 지금 정면으로 교단에, 황실에 거역하고 있다는 사실이 새삼 느껴졌다. 루비아도, 소녀도 생포해 이단심판관에게 바치려고 하지 않고, 망설임 없이 죽을 길로 들어서고 있었다.

“백작님은 괜찮… 으시겠어요?”

기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까지 보아오며 이단심판관의 만행을 목격했습니다. 그는 제국의 역적입니다.”

“•••도망갈 생각은 없어요. 백작님이 진다면 어차피 저희도 금방 위험해 질 거예요.”

데서리를 쓰러트릴 정도라면.

지금 비참하게 도망가 봤자 금방 따라잡힐 확률이 높았다.

차라리 이곳에서 결과를 보는 편이 낫다.

잿빛 추기경은 곧 도착했다.

추기경은 듣도 보도 못한 거울의 권능을 사용해서 데서리를 몰아붙였다.

하지만.

그가 만들어 낸 환영들이 루비아에게 덮쳐오는 순간.

얼음 계곡에 봉우리가 솟아올랐고, 봉우리가 다시 내려앉았을 때 추기경은 목 없는 시체가 되어 있었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데서리가 자신을 멍한 눈으로 보고 있었다. 하지만 루비아는 그런 것에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 이건••••••

당연하게도 데서리나 루비아가 한 일이 아니다.

자신이 지금까지 찾아 헤매던 것.

그 힘의 느낌이었다.

거대한 굉음을 감지하고 달려온 레인저의 캡틴들에게, 루비아는 비명처럼 외쳤다.

“지금 바로 주위를 수색하세요! 어떻게든 이 계곡 안과 주위를 살펴 봐야 해요! 있어요! 누군가 있을 거예요! 절대로 있으니까……!”

‘아직도 나를 찾고 있다니……

루비아의 모습에 가슴이 적막했다. 왠지 이 넓은 세상에 그녀만 혼자 덩그러니 남기고 숨은 듯 씁쓸했다. 데서리 바티엔느와 다른 레인저들까지 나서서 계곡을 샅샅이 수색하고 있었다. 수색 중인 레인저들에게 상황을 설명하는 루비아와 데서리에 의해서, 지금까지 있었던 대략적인 일을 알아낼 수 있었다.

허공에 몸을 띄우고 완전하게 기척을 차폐한 채 그들을 바라봤다.

“아무것도 없습니다.”

“은신에 달라붙는 포에리아 가루까지 뿌렸습니다만, 발견되는 건 전혀 없군요.”

“으으…. 아니야…. 있는데……

루비아가 안타까운 듯 말했다.

“그렇습니까……

데서리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쨌거나, 이곳이 발각됐으니 거처를 옮기시는 게 좋겠습니다. 지금까지 쫓아온 바에 따르면, 동부 산맥에 달의 신자들이 많더군요.”

‘잘 알고 있군.’

동부 산맥이라면 내가 해방시켜 준 녀석들과 만나게 되는 걸까?

웨어울프들나 페어리들이 떠올랐다.

‘성녀라고 하면 해를 끼치지는 않겠지.’

오히려 도움이 되면 될 거다.

‘따라가고 싶군.’

이대로 그녀와 함께 따라가고 싶었다.

무뎌졌다고 생각했고.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다고 생각 했는데 그렇지 않았다.

루비아의 눈에 살짝 서려 있는 물기를 보니 차분히 숨어 있기가 괴로웠다.

아무렇지도 않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예상과 달리 저렇게 애타고 찾고 있는 모습을 보자 그냥 이대로 눈앞에서 정체를 밝히고 싶었다. 더 이상 숨지 않고 인사를 건네고 싶었다. 회귀한 게 맞다고 말하며, 아는 척을 하고 싶었다. 감정이 복잡해졌다.

‘안 돼.’

당연한 이야기다.

그녀에게 남은 감정은 미안함이 가장 크다.

참아야 한다.

누가 나를 어떻게 노릴지 모른다.

이번 생뿐만 아니라 세계선상에서

지워질지도 모른다.

지겨울 정도로 깨달아 온 사실.

‘더 이상 엮이면 안 돼.’

이대로 보내야 했다.

이런 상황에서 흔들리면 안 된다.

루비아가 떠나는 뒷모습을 끝까지 지켜봤다.

멀리서 지켜보면서 위험 요소를 제거해 주는 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겠지.

모두의 기척이 완전히 사라진 뒤, 나는 천천히 추기경의 시체로 걸음을 옮겼다.

예메라의 권능이 임해서 그런지, 추기경의 시체에서는 오랜만에 보는 꽤 밝은 초록색이 빛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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