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4화 신이 원하는 것 (22)
그 짧은 말로 비브리오는 상황을 파악한 것 같았다. 노을 속에서 긴 주둥이가 옆으로 찢어졌다. 축축한 어둠이 입에서 독기처럼 새어 나왔다. 어둠에 바닥에 닿으며 아직 땅 아래 남아 있는 결계가 서서히 진동하면서 사방에서 새하얀 불꽃이 타올랐다.
- 타다닥…….
점점 길어지면서 서로 굽이굽이 엮어지는 불꽃이었다. 보티스의 대사제인 비브리오는 경솔하지 않았다. 내 힘을 파악하지 못한 시점에서 아직 이쪽으로 다가오지 않고 있었다. 실처럼 사방을 촘촘히 둘러가는 새하얀 불꽃에서는 무게의 저주와 쇠약의 저주, 속박의 저주가 쏟아졌다.
‘견딜 만하군.’
또렷하게 그 불꽃들을 바라보며 저주를 하나하나 튕겨냈다. 타오르는 저주들은 어떤 것도 내가 만들어 낸 영역 안으로 들어오지 못했다. 매듭으로 엮인 불꽃들이 모두 나에게 와서 폭발해도, 자리에서 밀려나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한번 맞으면 끝이었을 예전과는 전혀 달랐다. 진녹색 송곳니를 드러내는 녀석을 보고 비웃었다.
“기어와서 한번 물어 보지 그러나?” 샛노란 시선이 툭, 흔들렸다.
- 촤아아악!
- 촤악!
- 촤르르르르륵!
노을 아래서 수십 가닥 촉수가 무리처럼 솟아났다. 몸의 절반 정도를 땅 아래로 집어넣어서 나를 옭아매려는 공격이었다. 태반이 부서지긴 했지만 여전히 이곳은 녀석의 공방이었고, 결계를 훑으며 저장된 저주들을 싣고 촉수들이 덮쳐 왔다.
[〈새벽을 잡아먹는 뱀〉의 권역이 당신을 집중적으로 노립니다!]
[맹독 피해를 극대화하는 일곱개의 저주가 당신을 노립니다!]
[아홉 종류의 속박이 당신의 발밑에서…….]
[〈포식특권〉이 당신을…….]
[공포의 손아귀가…….]
[전능 하락의 저주가…….]
[스킬 봉인이 연속으로 시도됩니다!]
이 안에서 내가 이길 가능성은…….
‘바친다.’
높다.
- 타다다다다닥…….
쥐고 있던 보티스의 비늘들을 모조리 꺼내 흩뿌렸다.
이미 공양의 밑작업은 완성한 상태. 뿌려지는 순간.
비늘들은 허공에서 거대하게 부풀더니 멋대로 찌그러지며 제 표면에 무수한 구덩이를 만들어 냈다.
울퉁불퉁해진 비늘들은 마치 달이 그러하듯 내 주위를 한 바퀴 빙 돌더니, 터지고 찢기며 사방으로 방울방울 흩어졌다. 흩어진 조각들은 땅 아래로, 비브리오의 촉수로, 본체로, 그가 뿌린 독안개로, 주위의 비어 있는 모든 공간으로 스며들었다.
“ 으음?”
촉수들이 움찔거리며 뒤로 물러나는 순간이었다.
저 먼 하늘 위에서만 존재하던.
인력引方이 강림했다.
— 촤악!
[〈새벽을[email protected][email protected]* 니다!]
[맹…@$*@$$#%* 다!]
모든 저주가 일제히 흩어지고.
_ 꽈드드드드드득
내가 선 땅 아래 박혀 있던 비브리오의 몸이 여러 갈래로 가늘게 찢겼다. 파충류도 인간도 악마도 아닌, 무언가의 구토물 같은 존재가 검은 피를 흘리며 그가 지금까지 지워 온 삶의 페이지 들처럼 찢겼다.
노인의 얼굴이, 팔다리가, 쌓아온 먹이사슬과 오랫동안 고여온 기름 찌꺼기 같은 연명이 너덜대며 찢겼다.
뽀얀 피먼지가 노을 속으로 침몰한다.
비브리오의 몸은 물론 결계까지 송두리째 찢겨 나간 자리에 선명해진 달빛이 박히기 시작했다. 그건 사냥감을 해체하듯 꽂힌 무수한 칼날 같았다.
〈내가 이 정도다…….> 베트라스가 중얼거렸다. 어쩐지 바로 옆에서 속삭이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 건 확실하네.〉
“끄흐흐으윽…. 이런 말도 안 되는 농담이…. 이단의 신이 네놈이었단 말인가……
몸의 절반이 날아간 비브리오가 꿀럭꿀럭거리는 소리를 내며 뒤로 물러갔다. 제대로 한 방을 먹이긴 했지만, 그 순간에도 녀석의 몸은 빠른 속도로 회복되고 있었다. 나는 베트라스에게 물었다.
〈더 공격할 수는 없나?〉
바닥에 박혀 있던 달빛이
〈그러면 제물을 더 바쳐라…….
이 정도로는 이걸로 끝이다…….>
〈효율이 너무 안 좋은 거 같은데?〉
〈내외부의 결계와… 미스릴보다 단단한 비늘까지 모조리 찢어 주었는데…. 너도 참 뻔뻔하구나…. 어쨌거나 이 이상은 해 주고 싶어도 못 해 준다….〉
‘ 흐음.’
확실히 과한 요구일지도 몰랐다.
- 파앗!
나는 도망치는 비브리오의 몸을 일직선으로 뚫고 나갔다. 남은 몸 한쪽이 다시 무너진 비브리오가 균형을 잃고 휘청거렸다. 어디선가 새로 만들어진 촉수가 뻗어와서 독기를 품은 발톱을 휘둘렀지만, 나는 발톱을 살짝 피하고 촉수의 중간을 잘라 버렸다.
“ 흐흐흐* • • • _흐흐흐 • • •"
비브리오는 더 이상의 반격을 포기하고 몸을 움츠렸다. 녀석의 몸 앞부분에서 투둑거리는 소리가 나더니 내장과 피로 범벅이 된 축축한 날개가 돋아나기 시작했다. 비브리오는 거대한 날개를 천천히 접었다 펴더니, 어색하게 펄럭거리며 도망가려 했다.
“더 버둥거려 봐라.”
나는 그대로 허공을 밟아 올라가 비브리오의 목에 칼을 박아 넣었다. 칼을 박아 넣은 곳 바로 옆에서 아가리가 생겨났다. 아가리가 독연을 뿜어냈지만, 박은 칼날을 중심으로 터트리는 영역에 휘말려서 금방 터져 버렸다. 인벤토리로 만들어진 거대한 칼날은 붉은 하늘을 날아 오르려는 비브리오의 머리를, 목을, 몸통을 터트려서 다시 땅에 처박아 버렸다.
꼬리 부분에서 새로 만들어진 입과 손들이 허우적거리며 저주와 공격을 뱉어내려 했지만 이미 힘은 빠질 대로 빠진 뒤였다. 날아올랐다가, 떨어진 곳은 공교롭게도 다시 산의 중심 이었다.
‘ 파동.’
- 콰과과과광• • •• • •
다시 한번 유치린의 파동이 사방을 잠식하며 터트려 나갔다. 비브리오의 거대한 몸이 거기에 휘말렸다. 비브 리오의 단말마는 육신만큼이나 길었다. 제 몸을 튕기며 고기 조각들을 뿌리고 뱉어냈다. 마치 지금껏 잡아먹고 이식해 온 수많은 생명 그 자체를 뱉어내는 것 같았다.
파동이 지나간 자리에 몸 이곳저곳이 파먹힌 노인 한 명이 서 있었다. 노인은 비틀거리면서 거칠게 숨을 내쉬며 손을 뻗었다.
“이만 끝내자.”
인벤토리를 덮어씌우고 터트린 공격에 노인의 몸이 터져 나갔다. 마지막으로 뻗어낸 저주도 그 자리에서 반으로 갈라져서 허공으로 흩어졌다. 완전히 터진 몸에서 검은 핵이 바닥에 툭 떨어졌다. 어떤 기척도 없었고, 아무것도 더 이상은 움직이지 않았다.
잠시 가만히 그 자리에 서서 여운을 즐겼다.
보티스의 대제사장 비브리오.
그가 죽었으므로.
‘드디어……
수많은 회귀 끝에, 처음으로.
네크론 신사회를 완벽하게 제거한 것이다.
* * *
‘정말 길었다.’
그동안의 무수한 악연이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네크론 신사회의 사육장들, 살아 있는 인간으로 만든 하수도의 풍경, 루비아의 활짝 열린 몸에서 솟아나던 뼈 칼날들.
그 뿌리를 마침내 내 손으로 끝냈다.
나는 비브리오의 시체에 소멸되지 않고 남은 핵을 바라봤다.
‘과연.’
시체는 사라졌지만.
단단히 뭉친 암녹색 덩어리에서 뿜어지는 빛의 밀도는 추기경 이상 이었다.
자연스러운 일이다.
베트라스의 선공.
결계를 찢어 버린 인력이 없었더라면 훨씬 어렵게 싸웠을 테고, 놓쳐 버렸을 가능성도 중분히 있는 상대였다.
간격을 좁혀 손을 뻗었다.
[새벽을 잡아먹는 뱀 Lv.3(new!)를 흡수했습니다.]
[스킬 레벨이 올랐습니다.]
[공포 Lv.l _ 공포 Lv.7(new!)]
[해당 스킬에 속성이 추가됩니다.]
- 포식 : 공포를 사용한 대상을 먹지 않으면 배가 고픕니다.
- 절망 : 상대의 정신을 간편하게 죽여 버립니다.
- 조종 : 상대가 당신의 의도를 읽어 그대로 행동하게 만듭니다.
- 마비 : 몸이나 판단력을 마음대로 마비시킵니다.
‘한 번에 이렇게나 올라가는 건가….’ 예전에 녀석이 지나쳐 가는 것만으로도 모든 능력치가 크게 떨어졌던 기억이 떠올랐다. 베트라스가 선공으로 결계를 찢어 버리고, 내 영역이 저주들을 하나하나 튕겨내지 않았다면 역시 어려운 상대였으리라. 공포 스킬이 올라가자 녀석에게서 나오는 빛이 대부분 사그라들었다.
[보티스의 교리 Lv.3(new!)를 흡수 했습니다.]
‘이것도 차곡차곡 쌓여 가는군.’ 특전으로 파동을 각성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일까.
죽음의 기사의 다른 특전.
〈베스커리빌의 별〉이 신경 쓰였다.
마왕의 교리를 선언할 때마다 해당하는 마왕의 힘을 강제로 끌어 쓸 수 있다는 특전.
‘교리 레벨 총합이 60에 도달한 시점에 개방된다고 했었지.’
베트라스, 유치린, 베스커리빌.
상태창은 그들의 공통점이 잊힌 상징이라고 했다.
‘베트라스 말고 다른 두 녀석도 신일까?’
그렇다면.
두 녀석은 지금 어디서 뭘 하고 있을까.
교리 흡수를 끝내자 뿜어지던 짙은 암녹색 빛은 사라져 있었다.
하지만 사라지지 않고 남은 것도 있었다.
‘ 음‘?’
핵 근처에서는 암녹색 빛에 가려졌던 반투명한 기운이 어른거리고 있었다. 어떤 색채도 없이 영롱한 아지랑이 같았지만, 그곳에서 느껴지는 독기는 지금까지 봤던 어떤 보티스의 비늘에서 느껴지는 것보다도 음험했다.
‘대제사장쯤 되면, 죽인 다음 이런 게 나오는 건가.’
몸에 박아 넣은 검은 비늘이, 직접 제물을 흡수한 탓에 잘잘 윤기가 흐르고 비대해진 것 같은 모양새다.
비늘로 만들어진 심장이랄까.
정수를 흡수한 뒤 살피자 한층 객관적으로 비브리오의 핵을 볼 수 있었다.
가까이 있는 것만으로도 나조차 흠칫해 버릴 정도의 존재감.
비브리오의 위치와 네크론 신사회의 거대한 조직.
그들이 지금까지 벌인 악행을 생각 한다면, 이 핵이야말로 지금 지상에 있는 마魔와 악惡의 정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달빛이 웅웅거리며 속삭였다.
〈좋아, 이제 그걸 나에게 공양해라…. 〉
“또 너한테 주라고?”
〈다른 뱀의 비늘들처럼, 그 핵 역시 어차피 네게는 쓸모도 없다…. 이미 한번 효과를 톡톡히 보지 않았느냐. 자, 다시 한번 아까처럼…. 어서….〉 방금이야 비브리오를 죽이기 위해서 달의 힘이 필요했고.
분명히 효과를 보긴 했지만.
당연하게 내놓으라고 하는 태도가 어쩐지 마음에 들지 않는다.
이렇게 부탁을 들어주다 보면, 어느새 녀석에게 줄 제물을 찾으러 다니는 게 내 일과가 되어 버리지 않을까?
뭐라고 대답할지 고민하고 있을 때였다.
〈절대 안 돼!〉 쇠가 잘근잘근 씹히는 것처럼 불쾌하게 쉭쉭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뭐지?”
- 투둑. 투두두둑.
착각이 아니었다. 산 정상에 있던 보티스의 석상이 꿈틀거렸다.
다시 보니 묘한 기분이 들었다.
비브리오를 때려 죽이면서 석상을 칭칭 감은 쇠사슬과 주변의 결계는 모조리 날려 버렸지만, 그럼에도 석상 자체는 파괴되지 않았던 것이다.
〈그건 내 거다! 어서 나에게 바쳐라, 나의 사제여.〉
몹시 신경질적이고 강박적으로 느껴지는 목소리였다.
- 달그락.
비브리오의 핵이 석상 쪽으로 조금 움직였다. 끌어당기는 힘이 있는 걸까?
“ 흐음.”
나는 핵을 석상에서 훌쩍 멀리 가져다 놓았다.
“너의 사제?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지‘?”
- 콰과광.
석상에서 검은 불꽃이 타올랐다. 하지만 어쩐지 힘이 완전히 빠져 있어서 뜨겁지조차 않았다. 비브리오가 만들어 낸 것보다도 훨씬 약해 보였다. 인제 보니 석상의 목소리도, 원래 목소리 자체가 그렇다기보다 힘이 가빠서 끽끽거릴 수밖에 없는 것처럼 들렸다.
〈내 이름은 보티스.〉
‘짐작은 했지만……!’
추악공 보티스.
16마왕의 일인이자 추악공으로서, 비브리오의 계약자다.
명실상부하게 가장 잔혹한 마왕 가운데 한 명으로.
지금까지 비브리오가 벌인 행동은 결과적으로 이 녀석과 관련된 것이다.
‘직접 지상에서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인과율을 쌓았단 말인가?’
그만큼 막대한 제물을 처먹었다는 이야기.
생각하자 분노가 치밀었다.
석상은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계속 이어서 지껄여 댔다.
〈내 불경하고 무능한 종들을 모두 죽인 너에게 최고의 계약을 선사해 주마. 네가 나의 새로운 대리자이자 제사장이 다.〉
아까부터 했던 헛소리다.
뱀의 형상을 만들어 내려다가.
어쩐지 뭔가 잘되지 않는 것 같은 불꽃을 보며 생각했다.
‘왜 저래?’
하지만 짚이는 게 있다.
녀석이 방금 한 말.
‘설마 다 죽여서......
제단도.
비브리오도.
각지의 사육장도.
수도에 있던 본부까지.
모두 내가 다 소멸시켜 버렸다.
푸르손과 함께.
지상에 가장 성공적으로 자리잡은 양대 세력이었지만.
이제 땅 위에 저 뱀을 섬기는 무리는 한 명도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제로부터 시작하는 마왕이라는 건가….’ 그렇게 생각해서일까.
〈간택받은 아이야, 나의 유일한 신도이자 파트너야. 내가 내리는 모든 집착과 축복을 독점해라. 이건 누구도 받을 수 없었던 기회란다. 어서 그 핵을 내게 바치거라.〉
이 석상.
굉장히 절박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