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해골병사는 던전을 지키지 못했다-441화 (441/458)

525화 신이 원하는 것 (23)

베트라스가 옆에서 속삭였다.

〈내 최고의 벗이자 불세출의 사제여…. 저 이류는 지상의 고리들이 모두 파괴되자 징징거리는 것뿐이다…. 특히 저 녀석처럼 지상에 많은 인과율을 할애한 경우는 한 번에 고리가 끊길 경우 타격이 크겠지…. 나처럼 처음부터 네 가치를 알아본 자와는 다르다…. 어서…. 내게 그 제물을 바쳐라….〉

〈시끄럽구나.〉

검은 불꽃이 발악처럼 진동했다.

〈나의 반려가 될 챔피언아, 먼지 속에 처박혀서 푸석푸석 삭아 버렸던 놈의 말 따위를 들을 텐가?〉

〈듣고 있는 거 다 안다. 대답해 보거라. 아니지?〉

“•••듣고 있다.”

〈그래, 효율을 생각하거라. 그 핵은 원래부터 내 거잖느냐? 내가 쓰는 게 정말 비교도 안 되게 효율이 뛰어나 느니라. 대가 자체가 훨씬 크게 취급되는데, 대체 무엇 때문에 고민 하고 있느냐?〉

“공양의 대가가… 훨씬 크게 취급 된다고? 진짜냐?”

내 물음에 달빛이 충격을 받은 것처럼 흔들렸다.

〈설마 고민하는 거냐…. 실망이다…. 길게 봐라…. 지금의 공양? 잠깐의 이득? 그런 것보다…. 앞으로 우리 둘이서 신뢰를 갖고 함께 걸어갈 앞날을 생각하란 말이다….〉

실망이라니.

내가 달의 신앙을 퍼트려 준 게 얼만데.

“뭔가 더 해줄 수 있는 건 없고?”

이대로라면 베트라스는 매력적인 선택지가 아니다.

〈음.... 어쩌다 내 사제가 이렇게 되었는지…. 가슴이 아프구나….〉

〈장막 뒤에 추방되었던 저런 퇴물 이랑은 더 이상 상대하지 마라. 내가 잘해 주겠다. 3여신도 아니고, 기반도 없이 잊힌 것들이 해줄 수 있는 건 받은 제물을 조금이라도 넘어서기가 어렵지. 애초에 이 제물의 특성상 내가 훨씬 크게 활용할 수 있는 데다, 베풀 수 있는 재량권도 내 쪽이 더 크다.〉

“으음.” 비브리오의 핵은, ‘끈이 닿아 있다’라는 면에서도, 보티스에게 공양하는 편이 유리하다는 이야기일까.

〈고민할 것 있느냐? 생각해 보아라. 이 핵을 공양하기만 하면, 지금까지 내가 이 핵을 통해서 받은 제사가, 구축한 인과율이 모조리 너와의 계약에 이어지는 것이다.〉

보티스가 작정한 듯 끝없이 몰아 붙인다.

〈더 원하는 게 있으면 말해 보아라. 패배자 비브리오와 했던 것보다도 훨씬 더 좋은 조건으로 너와 계약을 맺어 주마.〉

아예 쐐기를 박으려나 보다.

‘비브리오한테도 힘을 거의 몰아주지 않았었나.’

최소한 대제사장 취급은 해준다는 거 겠지.

내가 원하는 상대에게 마왕의 힘을 원하는 만큼 나눠 줄 수도 있고.

철저하게 나를 위해서 착취당하게만 할 수도 있다는 이야기.

‘솔직히, 별로 보티스의 힘을 나눠 주고 싶지는 않지만……

그 순간이었다.

- 위이이잉.

석상 위에 보티스를 상징하는 다양한 패턴의 각인들이 떠오르고, 가운데 석상 위에 계약서가 떠올랐다.

향후 보티스의 제단 위에 바쳐지는 산 제물들로 벌어들인 인과율, 강해지는 마왕의 영향력은 마계로 귀속하지 않고, 모두 지상에서 다시 사용한다는 내용이었다. 자세히 읽어 보면 일종의 재투자 개념이었다.

〈사기는 치지 않는다!〉

보티스가 설명을 이어 갔다.

자기는 누구와 비교해도 최고의 선택지라는 점.

열심히 각인을 그리고 제단을 만들어서 지상에서 하나둘 제물을 바쳐 봐야, 마왕이 최소한의 대가만 치르고 마계에서만 머무르려 한다면 의외로 제사장이 받는 힘은 적을 수도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지상에서 벌고, 그 이상으로 지상에 투자한다라.’

비브리오가 그토록 적극적으로 제물을 바쳤던 데는 보티스의 이런 성향도 분명히 영향을 끼친 것이다.

〈흠…….>

베트라스도 괜히 계약서를 훑는다.

〈자동연장이 한 번에 3년인 건 너무 길다…. 1년도 아니고….〉

〈계약기간이랑 같이 연장기간도 3년인 건 당연한 거다만, 퇴물.〉

“6개월로 하지. 다른 건?”

〈딱히 없군…….>

조금 분한 듯한 목소리가 달빛을 따라 흘러들어 온다.

‘뭔가 더 속일 줄 알았는데.’

두 녀석을 나란히 두고 서로 견제 시키는 게 괜찮은 방법인 것 같다.

‘역시 입찰자는 많을수록 좋군.’ 그럴수록 수혜를 받는 건 나다.

더 많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보티스에게 물었다.

“네 가호로 은신한 유령들도 모두 다 파악할 수 있는 거냐?”

〈물론이다. 어차피 그것들은 계약자도 신도도 아니며, 그저 가면이 축복을 받았을 뿐이니. 나와 직접 계약하는 즉시 훤하게 볼 수 있게 될 것이다. 제1계약자의 당연한 권리니라.〉

‘비브리오도 그랬겠지.’

공작까지 볼 수 있는 걸까 싶었지만, 아쉽게도 녀석의 은폐는 가면에 의한 게 아니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 스르르륵......

계약서에 문구가 작성됐다.

나는 곧바로 말을 이었다.

“다음은… 나를 제사장으로 만들어서 황실에 침투하는 데도 협조한다고 써라.”

황실의 비역.

고위 유령들이 에라스트에 순환 근무하라는 지침을 내리고, 터무니없는 양의 루-륨이 흐르고 있었던 데다, 아이작이 알고 있던 역사적인 인물들이 플라스크에 보관되었으며, 진흙 괴물과 잿빛 기사까지 있던 곳.

‘비브리오의 위치를 내가 차지한다면.’

그 안에서 일어나는 일에 다시 한번 접근할 수 있지 않을까.

압도적인 위험성 때문에 당장 파헤 칠지는 모르겠지만, 이런 건 당연히 계약서에 넣어야 한다.

〈간단한 일이다.〉

계약서에 문구가 다시 추가된다.

‘어째야 하나.’ 보티스가 역겨운 건 사실이다.

내 분노는 비브리오에게 멈췄지만.

그건 마왕을 없애 버린다는 발상 자체를 하지 못했던 것 때문이다.

결국 원흉은 이 녀석이라고 봐도 틀리지 않겠지.

수하들이 발휘하는 잔인성이 보티스 자신과 연관이 없을 리는 없고.

‘아예 다 파괴해 버려?’

물론, 그럴 경우.

마계가 열리면 나를 가만두지 않을 거다.

온갖 수를 다 써서 나를 갈아먹으려고 들 게 확실하다.

지금이야 나를 붙잡으려고 티 내지 않고 있지만, 내가 지금까지 한 짓만 해도 복수심이 없을 리 없다.

‘계속 베트라스 좋은 일만 하기도 뭣하고.’

지금까지 달의 사제로 활동했지만, 솔직히 조건만 본다면 보티스의 계약이 훨씬 좋다.

굳이 베트라스만 바라보고 있을 이유는 없다.

나는 잠시 고민하다 말했다.

“ 베트라스.”

〈말해라…….> “너는 왜 다른 인간에게 치유의 힘을 줬던 거지? 그냥 나한테 주면 됐잖아?”

소녀가 가진 치유의 힘.

‘나한테 줬으면 카린 같은 녀석들을 바로 치료할 수 있었을 텐데.’

굳이 따지자면.

소녀와 관련되어 루비아가 위험에 처하기도 했다.

〈그건…. 치유의 힘과 파장이…. 훨씬 잘 맞는 그 소녀에게 주는 게 훨씬 더 효율적이었기 때문이다…. 이해해 주길 바란다….〉

“좋아, 그런 식이라면 이 공양도 훨씬 효과적인 보티스에게 주는 게 낫겠지?”

〈정말이냐……•>

“자연스럽잖아? 뭐가 생기면 너한테 다 줘야 하는 것도 아니고.”

— 저벅.

마음을 결정하고, 보티스의 석상에 한 발자국 다가간 순간이었다.

〈잠시 멈춰라…. 나한테 주는 게 정 싫은 거라면… 다른 방법도 있다.〉

“다른 방법이라고?”

〈네가 좋아하는 효율도 최대화하는 방법이면서…. 저 수상하고 히스테릭한 이류에게 전부 몰아주지 않는 방법 이지…. 차라리 *@&!*$!에 바쳐라.〉

‘뭐라고?’ 기묘한 음절을 듣고 의아해하는 순간이었다.

〈안 돼! 허락하지 않겠다!〉

보티스가 처절하게 비명을 질렀다. 석상이 덜덜 떨렸다.

〈네가 못 먹는다고 대체 뭘 가르 치려는 거냐!〉

“방금 뭐라고 한 거지?” 베트라스는 어쩐지 훼방을 놓으며 즐거워하는 것 같았다.

〈너희들의 언어로 한다면 비사 데발라야…. 제물을 특정한 신격이 아니라 제신諸神에 대한 찬가를 부르며 소비해 버리는 거다. 이 세계의 초월적인 주明와 법法, 신앙 그 자체에 공양하는 것이지.〉

“제 신찬가諸神讚歌라고?” 〈그렇다…. 공양자가 원하는 특정한 신이 아니라…. 누군지도 알 수 없는 신의 제단에 바친다는 우연성…. 기복祈福도 기원祈願도 없는 순수한 공희임을 고려하여…. 제물의 절대값 자체는 훨씬 증폭된다…. 적어도 두 단계는 더 높은 제물로 취급되지….〉

〈말도 안 되는 일! 나의 챔피언이여, 분명히 후회할 것이다. 누군지도 모르는 거지들에게 최고의 식단을 다 털어 뿌리는 짓이다! 절대로 안 된다!〉

보티스의 처절한 절규를 들으며

‘그게 꼭 나쁜 건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하긴, 비브리오가 부랑자들을 잡아 모아서 공양의 산 제물로 사용했던 일을 생각하면 보티스의 가치관은 대충 알 법하다.

나는 절규를 무시하며 물었다.

“자세히 설명해 봐라.”

베트라스는 반쯤은 체념했고, 반쯤은 킬킬거리며 설명했다.

〈쉽다…. 말은 거창하지만…. 그냥 공양의식을 치르면 된다…. 바치는 부분에 누구를 특정하지 않으면 된다…. 그렇다면 모든 신에게 조금씩 나눠 주는 셈이 되는 것이지…….>

〈미친 짓이다! 세 여신도 아니고, 잊히고 추방되어 아무 힘도 쓸 수 없는 신들에게까지 모조리 공양을 해서 대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이냐? 게다가 지독히 잘게 나눠지느니라! 어떤 신과도 유의미한 관계를 맺지 못하며, 누구로부터도 제대로 된 보답은 얻지 못하리라!〉

〈그러나…. 무수히 나뉘는 파편 이라도.... 수백, 수천 년 동안 공양에 굶주린 자들은 그것만으로 크게 감격할 테지…….>

베트라스가 석상을 향해 비웃는 듯한 말투로 중얼거렸다.

“구체적인 결과는 어떻게 될 것 같은데‘?”

〈모른다…….>

솔직한 답변이었다. 달빛과 석상은 서로 견제하며 떨리고 있었다. 어느 한쪽만 있었다면 어떤 방식으로든 나를 속여먹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잠시 고민에 빠졌다.

‘이럴 때 아이작이라면 어떻게 했을까?’

가만히 생각해 보았다.

이미 사라진 지 오래되었지만, 중요한 결정을 내릴 때마다 녀석은 언제나 답안지 바깥의 정답을 고르곤 했다.

전부 따라 할 수 없겠지만.

상대가 던져 주는 것만 보지 말고, 항상 최상의 이득을 얻어내려는 태도만은 나도 취할 수 있을 것이다.

〈내 제물… 내 제물을…. 안 된다…. 그렇게 버릴 수는 없다…. 이렇게 탁월한 조건의 계약을 하지 않는 건 어리석음 그 자체니라!〉

“아니, 계약은 할 생각이다.”

〈그렇지! 역시 현명하구나.〉

“한 글자만 더해서.”

〈응? 완벽한 계약서인데…. 이미 고쳤지 않느냐. 또 어디를?〉 나는 석상에 쓰여 있는 ‘비브리오의 핵을 보티스에게 바친다’라는 글자를 ‘보티스에게도 바친다’로 수정했다.

〈무슨 말인가? 나 말고 누구? 반반씩 나눠서 저 뻔뻔한 퇴물이랑 나에게 주겠다는 소리인가?〉

아직 이해를 못 하고 있다.

“모든 신에게 뿌려 준다는 얘기지.”

〈지금 진심… 이냐? 내 제물은 온갖 거지들에게 뿌리고 나랑 계약만 하겠다고……?”

“넌 어차피 갈데없는 신세잖아.” 지상에 고리라도 남겨 두는 편이 나을 텐데.

〈이런…. 이런 날강도 같은 새끼! 설마 내가! 내가 가만히 당할 거라고만 생각하느냐! 나는 마계의 육십 군단을 지휘하는 마왕! 모든 혼을 잡아 삼키는 뱀이다! 감히 나를 대체 얼마나 우습게 보면 그따위 소리를 지껄이느냐! 후환이 두렵지 않느냐!〉

가면이 벗겨지는 건가. 후환이 라.

최악의 경우라도 죽으면 그만.

내가 녀석에게 크게 아쉬울 건 없다.

“싫으면 관두든가.”

어차피 보티스에게 ‘산 제물’을 바친다는 건 꺼림칙한 구석이 있다.

〈흐흐흐…. 뭔가 쌓인 감정이라도 있었던 건가…. 재밌구나…….>

〈내가 너를 기억하리라. 후회할 것이다. 마계가 강림할 때 내가 친히 네 뼈를 마디마디 씹어 부수고 목에 걸어 장식하리라! 부활하지도 흩어 지지도 못하게 저주를 걸고 영원히 목걸이로 사용하리라.〉

“아, 계약 안 해주면, 이거 말파스에게 주려고.”

내 패는 하나 더 있다.

〈무슨……?!>

“지금처럼 이럴까 봐. 네 복수가 무서우니까 말파스에게 이걸 공양하고 너를 공격해 달라고 하려고.”

— 철컥. 나는 타이탄에서 내려서 앞으로 걸어갔다.

“각인은 이쪽에 있어. 확인해 보든지.”

<…….>

전혀 생각도 못 한 말인지 침묵했다가, 보티스의 연기가 천천히 나를 훑는다.

〈이게 무슨”. 어떻게…. 활동도 전혀 없는 까마귀의 각인이…. 말도

안 돼…. 듣도 보도 못한 정보인데….〉

뱀의 천적은 까마귀.

조용히 지내면서도 제4위의 마왕이자 특히 자신에게 강한 말파스의 각인이 나타나자 보티스는 급격히 말수가 줄어든다.

〈믿을 수가 없구나…. 까마귀는 사제 하나만을 택하는 자인데…. 그게…. 그게 너라고…? 어째서…?〉

서서히 연기가 희미해지기 시작한다.

‘실제로 공양하면, 말파스가 무슨 반응일지 알 수는 없지만.’

아이작만 아니면 말파스는 지상 진출에 상당히 소극적인 마왕.

공양 자체에 성공하더라도 떨떠름 하거나 당황스러운 반응을 보일지도 모른다.

보티스와는 반대되는 성향인 것이다.

하지만 알 건 없다.

여기서 협박만 먹히면 그만인 것이다.

“지상에 이렇게나 힘을 쏟아부었던 네가 마계에서 말파스를 이길수 있을까? 얌전히 내 손을 잡으면 바깥 구경은 계속 시켜 주도록 하지.”

〈바깥…. 구경….〉

“나는 앞으로도 수없이 살육을 해 나갈 거다. 협조 여부에 따라서 너에게도 어느 정도 먹여 줄 수 있어.”

끝까지 몰아붙이는 것도 별로다. 어차피 이 녀석이 내리는 은폐의 축복과, 가면을 쓴 유령들을 찾아낼 수 있는 권능은 확실히 나에게도 매력적이니까.

〈알았다…. 석상을 잡아….〉

〈나 베트라스가 이 계약을 공증한다.〉 어쩐지 힘찬 목소리가 된 달이 갑자기 끼어들어 석상을 감쌌다. 공증 비용 정도는 챙겨 달라는 건가.

- 덥석.

뱀의 머리를 잡은 순간.

따리를 튼 거대한 뱀의 석상이, 마치 허물을 벗듯이 갈라지기 시작 했다.

- 뻐거걱! 뻐거거걱! 소리가 점차 요란해지면서 석상의 중앙이 십자 형태로 갈라졌다.

지금까지 웅얼거리던 칠흑의 마기가 쩍쩍 갈라진 지점으로 빨려들어 가더니, 내부를 깊게 한 바퀴 휩쓸었다.

그리고 석상을 잡고 있던 내 왼쪽 손목을 채찍처럼 휘감았다.

- 스르르륵......

어느새 마기가 걷히자.

왼쪽 손목에 세 바퀴 반을 돈 뱀 모양의 팔찌가 채워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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