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6화 신이 원하는 것 (24)
팔찌의 머리 부분.
뱀의 두 눈에 붉은빛이 들어오는 순간.
허공에 상태창이 떠올랐다.
[유일한 제사의 권리를 획득합니다.]
[〈대제사장〉에 부속된 권능들을 획득합니다.]
[제사 Lv.l을 획득합니다.]
- 제사 특성 : 보티스의 챔피언
- 당신은 보티스의 모든 추종자를 물리치고 홀로 남았습니다. 마음껏 제사의 권리를 누리십시오. 보티스에게 당신 외의 다른 선택지는 없었습니다.
- 번제를 바칠 때마다 보티스와 관련된 권능들이 강해집니다.
- 보티스는 순결한 제물에 매력을 느끼지 않습니다. 제물의 피냄새가 진할수록 더 큰 힘을 얻게 됩니다.
-〈울며 쪼아 먹는 까마귀〉말파스의 추종자들을 조심하십시오. 물론, 그들이 아직도 이 세계에 남아 있다면 말입니다.
[결계작성 Lv.l을 획득합니다.]
- 두 기점을 연결하는 결계를 구축합니다. 신물을 사용하면 경계를 넘어 연락을 주고받을 수 있습니다.
- 레벨이 올라갈수록 연결 지점이 늘어납니다.
- 신물은 제사의 대가로 조금씩 얻어낼 수 있습니다.
‘비브리오가 썼던 게 이건가.’
뱀의 비늘을 사용해서 원격으로 각지의 사육장을 통치했었다.
‘같은 결계작성이라도… 말파스와는 조금 다르군.’ 아이작이 가졌던 결계는 스킬의 위력을 증폭시키면서, 시전자에게 절대적으로 유리한 전투 환경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마왕마다 각자 고유한 특성을 가진다고 봐야 할 것 같았다.
계속 메시지를 훑었다.
[보티스의 교리 Lv.15를 획득합니다.]
- 이 세상에 보티스의 계약자는 당신밖에 없으며, 당신은 언제나 직접 보티스와 대화할 수 있으므로 교리의 레벨은 어떤 의미도 없습니다. 자연스럽게 교리 레벨이 최상으로 설정됩니다.
- 궁금한 게 있으면 마왕에게 직접 물어보세요! 마음에 들지 않는 교리가 있으면 따져서 바꿀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 으음?’
이건 예상하지 못한 상황이다.
교리 선언 때마다 마왕의 힘을 쓴다는 베스커리빌의 별.
유치린의 힘을 얻은 뒤 줄곧 생각은 하고 있어도, 도달하려면 한참 멀었 다고 생각한 그 특전이.
단번에 1/4을 달성해 버린 것이다.
‘그래도, 쉽지만은 않겠지.’
지금 같은 관계를 맺기가 간단할 리가 없다.
이것저것이 다 맞아떨어진 덕분에 가능했던 계약.
교리 레벨 총합 60을 달성하려면.
최소한 세 마왕과의 접촉이 필요하다.
‘그것도 비슷한 조건이라는 가정하에 말이지.’
메시지는 계속 떠오르면서, 보티스에게 제사를 지낼수록 위력이 올라가는 가호들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묘하게 보티스 자신과 닮아 있는
말투였다.
[계약 특성 : 공예]
너무 난폭하게 군 탓에, 아끼는 사람의 팔다리가 사라졌는가? 딱히 걱정할 건 없다. 그런 건 다시 만들고, 이어서 달아 주도록 해라. 예비용으로 몇 개 더 만들어 줘도 좋다. 팔다리 뿐만이 아니다. 심장도, 폐도, 다른 장기도 마찬가지다. 상대가 불감증 이라도 걱정할 건 없다. 느끼게 하고 싶은 부분에 신경을 빼곡하게 심어 주면 그만이다.
공예의 활용은 무궁무진하다.
의지를 제거해 모두 뜻대로 움직이게 하면서도, 상식과 인식을 관찰하는 부분은 그대로 남겨 둘 수 있다. 정신으로는 결코 있을 수 없는 일, 개념조차 들어 있지 않던 일이라도, 명령하는 즉시 몸이 전력으로 수행 하게 만들 수 있다. 물론 윤리관을 완전히 바꿔 버리는 일도 가능하다.
[계약 특성 : 결합] 신경 한 줄 한 줄을 다루는 섬세함이 귀찮게 느껴지는가? 간단한 결합도 좋은 선택이다. 이미 만들어진 것을 활용하라. 배달부의 걸음이 너무 느리다면, 근육을 증강 배선하는 대신 몸을 다 떼고 말의 몸통을 달아 주면 된다. 종업원의 태도가 너무 딱딱하여 조금 더 유연한 것을 원한다면, 머리에 새롭게 연체류의 몸통을 달아 주면 된다. 거칠지라도 효과는 즉각적이다.
존재하는 것의 조합만으로 얼마나 많은 변화가 가능한지를 알면 놀랄 것이다.
혹은 선정 작업을 거칠 것도 없이, 여럿을 녹여 뭉쳐 버리면 된다. 이빨과 등껍질과 집게와 아가미와 발톱을 거대한 하나에 모아 버리는 건 어떠한가? 정신도 함께 융해되겠지만 단순한 전투 정도는 얼마든지 가능 하다. 심장도 폐도 몇 개씩 달린 노예는 좀처럼 죽지도 쓰러지지도 않고, 언제나 굶주린 채 새로운 희생양을 찾아 움직일 것이다.
`으음'
메시지를 보며 생각한다.
네크론 신사회에 그런 식으로 무언가와 결합된 인간들은 꽤나 적었다.
제사의 대가로 받은 능력을 어지간히도 제 몸에만 집중적으로 사용했던 것 같다.
예외가 있다면…….
‘루비아 정도인가.’
그 기억이 떠오르는 순간 강렬한 거부감이 치밀어올랐다.
뿌리치듯 메시지를 넘겼다.
[계약 특성 : 은폐] 보티스의 ‘공예’는 세계가 당신을 판독하기 어렵게 ‘빚어낼’수도 있다. 당신은 그곳에 존재하고, 실제로 육신이 변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으나 인식되지 않는다. 이 특성이 높은 경지에 도달한다면, 당신은 직접적인 폭력을 휘두르는 순간조차 계속 은폐의 장막에 숨어 있을 수 있다.
제1 계약자로서, 당신은 이 축복을 타자에게 전이시킬 수도 있다. 동시에 세계로부터 누군가를 강제로 고립시키는 것도 가능하다. 그가 아무리 발버둥 치고, 어떻게 자기 자신을 소리높여 외치더라도, 세계는 그의 존재를 깨끗하게 잊어버리는 것이다.
‘이게 제일 쓸 만하겠군.’
보호하고 싶은 자들까지 감출 수 있다는 이야기.
이거라면 일행들과 함께 움직일 때의 부담이 확실히 줄어든다.
아래쪽의 설명을 읽어 내려갔다.
‘물건을 감추고, 길을 감추고, 의미를 감춘다라……
권능이 강화될수록 재미있는 효과가 많은 것 같았다.
상태창을 끝까지 읽어 본 뒤 보티스 에게 물었다.
“그런데, 복제의 권능 같은 건 없는 건가?”
방금 파괴한 사육장의 애벌레들은 인간을 잡아먹고 복제한다.
모습은 물론이고.
완전하지는 않더라도 능력까지 빼앗아 버린다.
어느 정도는 비브리오의 응용이라고 가정하더라도.
그 능력의 근원이 될 만한 보티스의 가호는 전혀 상태창에 나타나지 않았다.
〈그건… 내가 내린 가호는 아니다….〉 보티스가 띄엄띄엄 대답했다.
“네가 내린 게 아니라고?”
〈그렇다. 패배자 비브리오는 다른 인간들과 애벌레들을 개발했지. 마탑도, 황실도 참여했다. 하지만 모든 과정을 내가 알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연구는 나의 눈이 닿지 않는 장소에서 이뤄졌다. 단지 대량 생산을 이 산에서 했을 뿐이지.〉
“너의 눈이 닿지 않는 곳이라면?”
〈수도의 황궁이다. 세 여신의 결계까지 쳐진 탓에 나조차 들여다볼 수 없었지.〉
그곳에 애벌레 실험실까지 따로 있었다는 건가.
‘저번에는 못 봤는데.’
혹시 레안드로를 따라 내려갔던 비역이 아니라 다른 곳에 있었을 가능성도 있다.
황궁은 어마어마하게 넓었고.
전체가 철저하게 주술로 보호되고 있었으니까.
‘아니면…… 레안드로와 꽤 시차를 두고 따라갔기 때문에.
비역의 어떤 층에서는 완전한 폐허와 하얀 잿더미밖에 보지 못했다.
‘소녀 공작을 흡수했던 층이었지.’
어쩌면 그곳이 애벌레를 집중적으로 양성하는 장소였을지도 모른다.
생각에 잠겨 있을 때.
〈밤이 지나가고 있다…. 그 녀석과만 무슨 잡담을 그리 오래 하느냐…. 내가 가고 난 다음 해라…. 모처럼 밤인데 나랑…. 상대를 해야 되지 않겠느냐….〉 문득 베트라스가 불만스러운 어조로 나를 불렀다.
‘저 녀석, 낮에는 나오기 힘들었던가.’
"알았다. 제사부터 시작하지."
〈으음”. 나랑 할 얘기는 그것뿐인가". 혹시…. 이제라도 나에게 제물을 바칠 생각은 없느냐….〉
“단념하라고.”
베트라스와 일대일로 비교했을 때는 오히려 보티스 쪽으로 기울었던 이상, 전혀 그럴 생각은 없다. 내 직감은 모든 신에게의 공양을 외치고 있다.
일종의 씨를 뿌려 두는 작업일지도 모른다.
유치 린에게도.
베스커리 빌에게도.
다른 잊혀진 상징들에게도 조금씩 손을 뻗는 일.
“모든 신에게 바치는 절차를 설명 해라.”
〈알았다….)
〈으으….〉 팔찌에 깃든 보티스가 아까워하며 끙끙 앓는 소리를 배경으로 흘리며 준비를 계속했다.
모든 신격에게 하는 공양이라서일까.
준비물은 오히려 어디에나 구할 수 있는 것들로만 이뤄졌다.
흙 위에 돌과 나뭇가지로 단순한 패턴의 제단을 그리고, 일정한 간격 으로 중앙에 물방울을 똑똑 흘리면 끝나는 일이었다.
“이렇게 간단한 건가?”
〈간단하다고 말하니 묘하군…. 하늘이, 태양이, 땅이, 바람이 이미 제신諸神의 각인…. 결계이며…. 눈이고 입인 것뿐…. 그들 모두에 제물을 보내며…. 먹이는 것이니…. 일견 쉬워 보이는 걸지도….〉
“과연.”
제사에서는, 오히려 누군가를 특정 하는 편이 복잡한 수고가 든다는 이야기다.
〈그러나…. 이 제사에서 가장 ‘특정되는 것’은 바로 제사를 지내는 너 자체…. 너와 이어져 있는 존재가 조금이라도 많은 공양을 받게 될
것이다….〉
“보티스와 너를 말하는 건가? 말파스라든지?”
〈후후후.... 그런 간단한 특정이라면 제물의 격이 두 단계나 증폭될 리가 없지…. 우리 둘은…. 이곳에 있는 만큼.... 이미 제단의 인과율에서 끄트머리로 밀려났다…. 말파스 역시 네게 언급됨으로써 까마득해졌지…. 너에게 의식되는 것만으로도 즉시 우연의 축복을 잃어…. 인과율에서 배격되게 된다.〉
‘그럼 어차피 의미 없다는 얘기군.’
〈그러니까…. 행사 보조비와…. 공증비는 차후에 반드시 따로 챙겨 줘야 한다….〉
“ 알았다고.”
베트라스의 말을 흘려들으며 제단을 계속 만들었다.
단순한 패턴이지만 만드는 제단 자체가 몹시 넓기에 전부 그리는 데는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모두를 초대하지만.
적어도 어디에서 어디까지가 식탁 이라고 정해 놓는 일이라고 했다.
‘많이 몰려드는 만큼, 식탁도 넓어야 한다는 거였지.’
비브리오의 핵을 제단의 중심에 올려놓고.
천천히 주위를 걸으며 의식을 끝마치는 순간이었다.
- 번쩍.
허공에서 날카로운 푸른 빛이 터져 나왔다.
빛의 띠에 묶인 새벽바람이 땅 위를 한차례 휩쓸고, 마치 자신을 위해 그려진 제단이라는 듯 짙게 땅 위에 흔적을 남겼다.
〈으음? 왜 특정한 신격이……?>
베트라스가 갸웃하는 순간.
바람이 밤의 장막을 길게 사선으로 찢으며 사라졌다.
_ @$*[email protected]@$&$*$(…….
바람이 사라진 곳으로 수많은 아우성이 옮겨붙었다.
화르륵 타오르는 소리, 번개가 치는 소리, 거대한 무언가가 큰 보폭으로 걷는 소리, 꾸륵거리는 소리, 빠지직 거리는 소리, 끓는 소리, 웅웅거리는 소리, 사그락사그락 부서지는 소리, 커졌다 잦아들기를 반복하는 피리 소리, 짤랑거리는 소리, 모서리가 접혔다 펴지는 소리, 무언가 투툭 돋아나는 소리들이 거대한 회오리가 되어 주위를 맴돌았다.
땅이 한 바퀴를 도는 것 같았고, 태양이 떠오르고 정점에 섰다 일몰을 겪는 것 같기도 했다. 돌멩이 하나 하나가, 흐르는 물이, 초목이 눈을 뜨고 살아 움직였다. 태어나고, 자라고, 번식하고, 쇠약해지고, 쪼그라들며 죽어 버리는 무수한 짐승들의 삶이 일렁이는 만화경 속에 스쳐 지나갔다. 찢어진 장막 사이로 무수한 이름들이 초대되어 두드러졌다가 서로를 비견 하며 다시 사그라들었다.
- 파사사삭.......
의식하지도 못하는 사이 비브리오의 핵은 수천 수만 가닥으로 분해되어 연기처럼 흩어져 버렸다. 수많은 소리와 빛은 그 연기를 두어 번 되새김질하다가, 모조리 하품처럼 사그라들었다.
어떤 힘도 생기지 않았고.
어떤 상태창의 변화도 없었다.
연기가 흩어진 자리로 침묵이 툭툭 구겨졌다.
나는 모든 게 사라진 장소에 한참 가만히 서 있었다.
텅 빈 허공의 어딘가는 얇아지고, 어딘가는 홈이 파이고, 어딘가는 구멍이 뚫려 버린 것 같았지만 먼지 같은 느낌에 불과했다.
뭐가 어떻게 된 건지 전혀 알 수 없었다.
“베트라스? 이게, 끝……?”
대답은 없었다.
고개를 돌려 하늘을 바라봤다. 어느새 달은 신기루처럼 희미해지고, 푸른 여명이 서서히 밝아오고 있었다.
‘벌써 이렇게 됐나.’
제사를 지내는 데 상당한 시간이 걸린 듯했다. 제자리에 서서 주위를 둘러봤다. 드넓게 그려낸 제단 역시 달빛과 함께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었다.
‘푸른 바람……
마치 한차례 짧은 꿈을 꾼 것 같은 기분이었다. 하지만 쨍쨍거리는 목소리가 곧 꿈도 환상도 아니라는 사실을 알려 줬다.
〈내… 내가 뭐랬느냐! 역시 그냥 버려 버린 거잖느냐. 나한테 바쳤으면 말이지, 권능의 단계를 훨씬 껑충 뛸 수도 있었다! 단번에 살아 움직이는 고기의 제단을 만들 정도로도 될 수 있었는데…….>
〈아까운 것…. 참으로 아까운 것…!〉
원망이 계속 팔찌를 타고 올라왔다. 나는 팔찌를 툭툭 치며 물었다.
“보티스, 뭔가 보이는 게 없었나?”
〈네가 제물을 바쳤어야 말이지! 지금 같은 상태로는 통찰력도 인지력도 완전히 바닥이니라! 뭘 물으려면 제물을 바쳐라!〉
‘도움이 안 되겠군.’
아우성을 무시하고 그 자리에 대기 했다.
한참 기다렸다 확인해도 상태창은 그대로.
하지만 어째서인지, 조금도 후회는 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