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해골병사는 던전을 지키지 못했다-443화 (443/458)

527화 신이 원하는 것 (25)

〈어서 내려가거라! 다른 제물이라도 물색해서 내게 바치도록 해라! 조그마한 것도 관대하게 받아들여 주겠노라!〉

계속 종알거리는 보티스를 무시하며, 산 위의 바위에 걸터앉아 생각에 잠겼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

네크론 신사회를 뿌리까지 뽑아낸 참이다. 역시 이제 황실 내부의 음모를 파헤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로 당장 황궁 이곳저곳을 뒤진다는 건 지나치게 위험부담이 크다.

‘아무래도 무리야.’

황실 수뇌부의 의도는 물론이고, 전력이며, 위치까지 내가 알고 있는 게 없는 상태다.

‘여신들의 움직임도 신경 쓰이지.’

와들루스 옆에 있던 신전이 떠올랐다.

예메라의 추기경에 이어 주교들도 심상치 않은 움직임을 보였다.

빛의 일리엔과 불의 비르폰도, 달의 신앙을 토벌하기 위해 무언가 할 거라고 보는 게 자연스럽다.

그렇다면 세 여신의 중앙 신전이 있는 수도에서 잠자코 지켜보는 편이 좋다.

더 이상 소란을 일으키지 않으며, 내부에서 동태를 파악해야 한다.

일단은 내가 알고 있는 것부터 시작하자.

‘유령.’

이 녀석들이라면 익숙하다.

특히 서열 2위의 ‘내사과장’이라면 질릴 정도로 잘 알고 있다.

녀석에게 죽어 본 적도 있고.

같은 편이 되어 싸워 본 적도 있다. 심지어 지금은 보티스의 가호를 통해 그들의 위치까지 전부 파악할 수 있는 상태.

‘지휘자인 공작이 부재중이라는 것도 알잖아?’

이용하기에 이만큼 완벽한 상대는 없다.

“보티스.”

〈말하거라. 제물을 바칠 생각이냐?〉

— 저벅.

나는 산 아래로 내려가며 말했다.

“숨바꼭질 시작이다.”

수도에서 걸어간다면 열흘은 걸리고, 십중팔구는 길을 잘못 들어 도중에 사막에서 비틀거리며 죽을 극서부의 도시, 윌드스톤.

그곳의 여관에 한 청년이 갇혀 있었다.

하지만 청년에게는 쇠사슬도 족쇄도 없었다.

높다란 창문 바깥에 철창이 달려 있는 것도 아니었다.

청년을 가둔 것은 그 자신이었다.

“끄르르르륵……

창문 바깥으로 들어온 햇볕이 들어 오자 그는 몸을 더욱 움츠렸다.

문 안쪽에 달린 거울이 자신을 비추지 않게 공처럼 몸을 말았다.

손을 들어 얼굴을 감쌌다.

하지만 몸 전체가 가려질 수는 없었다.

두 눈을 가려서 보지 않게 됐다고 한들 그의 손도, 팔도, 몸 전체가 우둘투둘한 균류로 뒤덮여 있었다.

가면으로 가릴 수 있는 수준이 아니다. 몸 전체를 가리는 후드를 입는다고 해도 부풀어 오른 몸은 바깥으로 빠져나온다.

〈포자의 탑주〉가 데리고 다니는 균주 배양기이자, 한때 수도의 신문에까지 초상화가 실리며〈이번 달의 미남〉을 두 번이나 장식했던 그레고르 아지에는 문득 급격히 배가 고파왔다.

그의 몸에 배양되는 포자의 종류와 크기는 다양하지만, 공통적으로 모두 성장을 위해 영양분이 필요했다. 흡수하고 분해하는 능력은 있지만 스스로 영양을 만들어 낼 수 없기에, 그레고르 아지에는 제 몸에 배양되는 포자만큼의 식욕을 강요당했다.

- 똑똑.

“식사다.”

탑주의 제자가 문을 열었다.

그녀의 손에는 커다란 접시가 들려 있었다.

투박하지만 질 좋은 식단.

입맛을 돋우는 샐러드, 막 구워낸 소고기 덩어리, 싱싱한 해산물, 아삭한 제철과일, 심지어 향긋한 치즈 덩어리와 반숙한 달걀까지.

배양중인 포자의 성장을 위한.

호화로울 정도의 한 끼 식사였다.

- 드드득!

그레고르 아지에는 문이 열리는 즉시, 마법사의 제자가 자신을 보지 않도록 반대쪽 구석에 바싹 붙었다.

_ 탁.

문이 닫힌 뒤에도, 그는 가시에 온몸이 찔리기라도 하는 듯 계속해서 몸을 공처럼 움츠리고 있었다. 한참이 지난 뒤에야 그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포자의 배양으로 어디가 어딘지 잘 구별되지 않는 얼굴에서 눈물을 흘리며, 바닥에 바싹 붙어 음식이 있는 곳으로 기어갔다.

이렇게 되기 전에는 거울로 얼굴만 봐도 행복해서 다른 건 생각나지도 않았지만, 이제 남은 건 식욕과 갈증뿐이었다.

- 드드득.

바싹 붙었다고는 해도 몸 곳곳에 배양되는 포자 덩어리와, 그걸 지탱하기 위해 부푼 몸은 남보다 세 배는 두꺼웠기에, 기어간다기보다 힘겹게 굴러간다고 표현해야 했다.

그레고르 아지에는 부풀어 오른 손을 뻗어 과일을 씹어먹었다.

아지에의 몸에 배양되는 포자들이 꿈틀거리며 영양분을 흡수했다.

- 꾸르륵…. 꾸르륵….

개조된 소화기관이 맹렬하게 떨려 온다.

이제 한 시간 뒤에 그는 같은

식욕을 느끼게 될 것이다.

아지에는 온몸에서 그 진동을 느끼며, 과거의 아름다웠던 자신을 떠올리며 지독한 수치심에 눈물을 흘리고 다시 얼굴을 감쌌다.

석벽에 조각되었던 과거의 자신은 산산이 무너져 버렸다.

그는 누구에게도 지금의 자신을 보일 수 없었다.

그것이 포자의 탑주가 특출한 미청년이었던 그를 균주 배양기로 선택한 이유이고.

제자 한 명의 감시 외에는 구속장치 조차 없이 방에 놓아두고 외유를 나갈 수 있는 이유다. 세상의 모든 시선이 아지에의 창살 이라는 것.

‘굶어 죽을 수는 없을까.’

벌써 백 번이 넘게 실패한 시도였지만, 아지에는 다시 한번 식욕을 거부해 보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반숙한 달걀 하나를 먹지 않고 가만히 품었다.

우둘투둘한 손끝과 피부로 그 달걀의 형태를 느꼈다.

‘아름다움……

아지에의 상상이 달걀을 문질렀다. 그는 손끝에서 느껴지는 것 이상으로 완벽한 형태의 달걀을 창조해 냈다. 그리고 그 위에 자신의 옛 얼굴을 그렸다.

눈, 코, 입, 귀, 찰랑거리는 머리칼….

그 아름다운 형상이 눈꺼풀로 기운 어둠 위에 도도하게 떠 있었다.

달걀 아래로 완벽한 몸이 만들어진다.

어두운 세계에 바람 소리가 들리며 빛과 물과 흙이 쌓이고, 그것들이 점차 산으로, 마을로, 도시로, 나라로 변한다.

그곳에서 모두가 그레고르 아지에를 보고 있다.

완벽한 얼굴, 완벽한 몸의 청년을 보고 있다.

인간뿐만이 아니다.

날아가는 새들도, 사나운 맹수도, 도도한 고양이도, 청년의 외모에 감탄하며 가까이 다가와 살을 부빈다.

모두가 그를 사랑한다. 모두가…….

그레고르 아지에는 빙긋 웃었다.

그러자 입의 우둘투둘한 부위가, 혀에 자라난 포자가 선명하게 느껴 진다. 청년이 만들어 왔던 세계가 사라진다.

나라도 도시도 새도 짐승도 사람들도.

빛도 흙도 바람도 몸도 사라지고 원래의 달걀만 남는다.

그건 아무것도 태어날 수 없는 삶은 달걀이고.

방치해 두면 이틀도 버티지 못하고 썩어 버린다.

곰팡이가 잔뜩 피어서.

“끄흐흐흐흐흐......”

아지에는 울었다. 그 울음은 너무 격렬해서 오히려 우는 척처럼 보이기도 했다. 달걀을 품은 몸이 구렁이처럼 꿈틀거렸다.

‘ 아.’

잘못 힘을 줘 버린 아지에는 품었던 달걀가저도 부서져 버린 것이 슬펐다. 육중한 몸으로 달걀을 짓눌러 버린 것이다. 울고 울어서 시뻘건 눈으로 달걀의 파편을 바라봤다. 하지만, 어디에도 파편은 없었다.

달걀에는 애초에 작은 흠집 하나도 나지 않았다.

“응……?”

아지에는 두꺼운 손으로 눈물을 닦았다. 그리고 의아해하며 달걀을 바라봤다. 정말로 달걀에는 흠집 하나 나지 않았다. 이건 상상의 존재가 아니라, 분명히 접시 한쪽에 놓여 있던 달걀인데.

그는 조심스럽게 달걀을 쥐었다. 이번에는 매끈한 표면을 긁었다. 약간 힘을 줬다. 하지만 달걀은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힘에 저항하는 것 같지도 않았고, 그냥 달걀을 누른 힘이 사라져 버리는 것 같았다.

아지에는 기묘한 오기와 궁금증이 생겼다.

자신은 혹시 아직 상상 속의 세계에 있는 게 아닐까?

그곳에 놓인 달걀은 분명히 처음의 달걀이 아니라, 그가 상상했던 완벽한 형태의 달걀로 남아 있었다.

그는 두 손바닥 사이에 달걀을 놓고 강하게 힘을 주어 보려고 했다.

그 순간이었다.

〈반갑구나, 필멸자여.〉 달걀에서 목소리가 울렸다.

아주 작고 낮은 목소리에서 증폭되면서 머릿속에 직접 입력되는 것 같은 목소리였다. 아지에는 나쁜 짓을 하다 들킨 것처럼 흠칫 어깨를 떨었다.

“누, 누구……?”

〈나는 모든 장미의 아버지, 현혹과 조형을 관장하는 신 소조틀이라고 한다.〉

“시… 신이라고……?”

〈훌륭하도다, 훌륭하도다. 네 절망과 비탄의 목소리가 방금 깨어난 나를 이곳까지 불렀노라. 네 애절함이 나에게 기쁨과 활기를 부여했느니라. 나와 계약하겠느냐? 네 동공에 각인된 옛 아름다움을 되찾을 수 있노라. 소명을 거듭하면 진홍빛 꽃잎으로 더욱더 아름답게 피어날 수 있노라.〉

“아름... 다움…. 할게요 할게요 제가 다 할게요 뭐든지 다 할게요 해요 꼭 할게요”

아지에의 입에서 절규 같은 긍정의 말들이 쏟아졌다. 거기에는 찰나의 주저함도 없었다. 상대가 지옥에서 입을 벌리고 나온 악마일 수도, 가짜 계약일 수도 있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다. 여기서 더 떨어질 수는 없었다.

〈좋다. 이로써 계약은 성립되었다. 우리는 꽃이 되어 세계에 마침표를 찍을 것이다.〉

- 스르륵!

달걀은 그동안 받은 충격을 그제야 감당하는 것처럼 푸스슥 깨져 버렸고, 진흥빛 연기가 아지에의 몸으로

스며들었다.

〈거울을 봐라.〉

“거.,거울….”

목소리는 문 안쪽에 달려 있어서 청년이 그 근처로 가는 걸 엄두조차 내지 못했던 거울을 보라고 말했다.

“안 돼요……

〈된다. 너는 이미 터져오른 꽃봉오리다.〉

계약해 버린 탓일까. 목소리는 망설이는 아지에의 몸을 붙잡고 물리력을 행사해, 억지로 거울을 향해서 몸을 돌리게 만들었다.

아직도 눈꺼풀을 꾹 감고 있는 아지에를 향해 소조틀이 속삭였다.

〈믿음을 가져라, 나의 제사장이여.〉

아지에는 눈을 뜨는 즉시 멀기라도 하는 것처럼, 아주 천천히, 붉게 닫혀 있던 눈꺼풀을 조심스럽게 들어 올렸다.

“아••••••

그곳에는 다시 볼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던 아름다운 청년이 서 있었다. 아니, 그건 과거의 아름다움을 훌쩍 초월해 있었다. 옛 자신과 몹시 닮았지만, 좀처럼 자신이라고, 믿기 힘들 만큼 우아함과 매혹이 넘치는 청년이 거울에 비추고 있었다.

〈이제... 문 밖으로 걸어나가 모두를 유혹하거라. 꽃의 삶을 살거라. 더 많은 상대를 유혹할수록 더 많은 아름다움이 네게 임하리라.〉

아지에는 그 계시를 받아들여 문으로 걸어 나갔다. 그가 일어선 자리에는 바닥에 달걀 하나만이 깨져 있을 뿐, 몸을 뒤덮고 있던 곰팡이 덩어리는 어디로 갈무리된 건지 어떤 껍질도 잔해도 없었다.

- 덜컥.

가볍게 문이 열렸다. 바깥을 느슨하게 순찰하던 탑주의 제자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누구십니까?”

여관이라고 한들, 엄연히 마법사의 공방. 그곳에 낯선 이가 침입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즉시 살수를 뻗어 마땅했지만, 탑주의 제자는 그런 기본적인 규칙마저 잊고 어리석게도 질문을 던지고 있었다.

아지에는 탑주의 제자를 가만히 바라봤다.

짧은 머리에 안경을 쓰고 있는 마법사였다.

균주가 배양되던 초기에는 청년을 동정의 눈길로 보기도 했으나, 요즘은 그런 것도 없이 무감정한 눈빛으로 식사만 내려놓던 여자였다.

“우리 구면이던가요?”

아지에는 눈을 찡긋했다.

마법사는 터무니없다고 생각했다.

구면? 저런 남자를 본 적이 있다면 잊을 리가 없지 않은가?

그녀는 얼굴이 붉어진 채, 가슴을 움켜잡고 혀를 더듬거리며 말했다.

“이런 곳에 계시면 안 됩니다. 정체와 목적을 밝히십시오. 아니라면…. 아니라면…. 조금 화낼 겁니다.”

터무니없는 말을 지껄이면서도, 마법사는 본능적으로 현혹에서 물러나기 위해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그리고 청년의 미모를 제대로 보지 않기 위해서 눈을 가늘게 떴다. 마법사의 시야가 흐려졌고, 현혹의 영향력도 약해졌다.

〈지금 수준에서는 유혹이 먹히지 않을 상대겠구나. 곧바로 잡아먹어라.〉

“먹는... 겁니까?”

〈그래. 유혹이 성공한 뒤 먹는 게 이상적이지만, 이대로 먹어도 충분히 도움은 된단다, 계약자야.〉

아지에는 앞으로 조심스럽게 손을 뻗었다.

‘배고파.’

뭐든 먹어치우고 싶었다.

아까 식사를 하다 만 탓일까?

모습은 변했어도.

아지에의〈식욕〉은 포자에 뒤덮여 있던 시절과 동일했다.

“어, 어……

그제야 마법사는 지팡이를 똑바로 세웠다. 수정구가 박힌 지팡이에서 서늘한 광채가 주위로 뻗어 나왔지만, 아지에의 몸에서 뻗어 나온 포자는 순식간에 마법사의 몸을 구속해 버렸다. 두 손을 묶어 수인을 맺지 못하게 하고, 입을 틀어막아 주문을 영창하지 못하게 했다.

마법사의 상반신은 한 소절도 외우지 못하고 포자에 칭칭 감겨 파묻혀 버렸다.

- 와그작.

아지에는 마법사의 발목을 물어 뜯었다. 그리고 종아리를, 무릎 뒤를, 허벅지를 물어뜯으며 천천히 우물거리기 시작했다. 마취 속성의 포자가 코와 입, 귀를 통해 마법사의 뇌에 들어간 탓인지 버둥거림은 없었다.

- 츄읍.

두툼한 허벅지에서 꽤 많은 양을 먹게 된 탓인지, 아지에가 마법사의 고기를 씹는 속도는 그즈음에서 서서히 느려졌다. 포자에 감긴 허리의 윗부분이 뒤로 꺾이며 작게 발작을 일으켰다.

윌드스톤 외곽 사막.

모래 폭풍으로 도시의 윤곽조차 제대로 보이지 않는, 수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서.

“이런….〈포식〉주제에 미리별이 할 만한 대사를 빼앗고 있군. 알려 주면 화내겠지?”

후드를 쓴 남자가 두 손으로 이마를 짚으며 중얼거렸다.

“그나저나, 벌써 계약자를 찾은 신격이 일곱이라니…. 정말 개판이 따로 없군.”

하얀 후드 속에서 다른 손 두 개는 곤란하다는 듯이 허공에 내저어졌고, 다른 두 개는 팔짱을 끼고 있었으며, 다른 두 개는 주머니에 꽂혀 있었다.

“설마 이런 것까지 애슈턴의 계획 이라고 봐야 할까, 정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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