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해골병사는 던전을 지키지 못했다-444화 (444/458)

528화 신이 원하는 것 (26)

— 지잉.

보티스의 팔찌와 공명하면서, 은폐된 유령들을 찾는 파장이 넓게 퍼져 나갔다.

‘엄청나군.’

대제사장이 된 효과일까. 잿빛추기경 에게서 흡수한 힘으로, 예메라의 주교들을 찾을 때보다도 훨씬 더 넓게 감각이 퍼져 나간다. 애벌레 사육장 에서 무슨 일이 일어난 걸 눈치챘는지 이쪽으로 다가오는 몇몇 유령의 기척이 느껴졌다.

‘드디어!’

지금까지는 아예 감지하지도 못하고 있었던 녀석들의 기척이 한 번에 잡힌다.

끝없이 강해져 왔다.

사실 웬만한 유령 정도는 충분히 이길 수 있게 된 건 꽤 오래전의 일.

하지만.

강해지는 것과 상관없이, 보티스의 가호는 항상 절대적이었다.

그 때문에 내 코앞에 있건, 머리 위에서 내려다보고 있든.

뒤에서 졸졸 따라오건 당하고 있어 야만 했다.

처음으로 루비아를 영주에 등극시키고 갑자기 내사과장에 살해당한 일이나.

그라스미어에서 유령들에게 몰려서 결국 공작에게 죽은 일들이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난다.

절대 감지되지 않는 가면의 능력 덕분에 유령들은 모든 반대파를 무덤으로 밀어넣을 수 있었다.

단순히 보이지 않는 것뿐이 아니라 모든 감각과 마법을 피해낼 수 있었 으니까.

‘그런 날들은 끝이야.’ 이제 내가 바로 그 보티스의 대제사장.

유일한 계약자이므로 녀석들을 상대하는 건 손바닥 뒤집기처럼 쉬웠다.

‘특히, 자신이 은폐되었다고 철썩 같이 믿고 있는 이상 더 그렇겠지.’

탐지 스킬의 범위 바깥에서까지 유령들이 생생하게 느껴진다.

게다가 바로 앞에 있는 것처럼, 가면 안쪽의 표정과 감정까지도 읽힐 것 같았다.

그 가면에 얽힌 기운이 팔찌와 공명하는 것이 선명하게 느껴졌다.

〈비브리오가 뒈졌으니, 이제 저것들이 너에게 머리를 조아리게 하거라.〉

듣던 중 반가운 소리였다.

은폐 상태로 허공을 걷던 나는 순식간에 산 아래로 내려왔다.

“저놈들의 가면에서 가호만 빼앗았다가 다시 줄 수 있나?”

머릿속에 한 가지 계획이 떠올랐다.

그게 가능할지는 보티스에게 물어 봐야 했다.

녀석도 내 의도를 짐작하고 있는 것 같았다.

〈하하... 생각은 알겠다만, 저 가면들은 나름대로 내 영토에서 제작한 영물 들이다. 아예 가호를 빼버리는 건 까다롭다. 차라리 부수는 게 쉽지. 하지만 딱 좋은 방법이 있다. 저기 걸어오는 인간의 가면을 보거라.〉

먼저 가장 가까이 다가온 유령을 바라봤다.

2미터를 넘는 키에 비쩍 마른 남자였다. 그는 새하얀 가면을 쓰고 거리를 지나며 똑바로 걸어오고 있었다. 차림새가 몹시 괴이했는데, 얼굴에 걸친 가면과 기다란 부츠 외에는 옷을 거의 입지 않고 온몸으로 햇살을 즐기고 있는 상태였다.

‘어차피 보이지 않으니 상관없다는 건가.’

〈저 가면에 얽힌 내 각인을 살펴라. 거기서 솟아나는 은폐의 장막이 느껴지느냐?〉

가까이 다가가기 전부터도 이미 알 수 있었다. 가면 위에서는 작지만 분명히 새겨진 가면의 각인들이 있었고, 각인으로부터 안팎으로 나오는 기운들이 허공에 무형의 기운을 구축하고 있었다. 그건 착용자를 둘러싼 세계의 인식을 굴절시켜, 아예 유령들이 확실히 ‘그 자리에 없는’ 것이 되게끔 만들고 있었다.

“느껴진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가면 위에 떠오르는 결계가 붉은 뱀(E) 형태로 시각화가 될 때까지 집중해 봐라. 느껴지는 나의 가호를 좀 더 또렷하게 의식하면 된다.〉

- 우우웅…….

보티스의 말대로였다. 확실히 가면 근처에서 솟아나, 세계 사이에 끼어 있는 붉은 뱀 형태가 보였다. 그건 손으로 만질 수도 있고, 잡아당길 수도 있을 것 같은 것처럼 느껴졌다.

〈혹시 뱀 형태가 보이게 되면 꼬리 끝부분을 아래쪽으로 살짝 꺾으면 결계가 비활성화된다. 다시 돌리면 활성화되고. 자유롭게 조종할 수 있는 면이 편리하지. 내 영지의 장인들이 만들어 낸 귀한 가면이다.〉

“과연. 내 마음대로 끄고 켤 수 있 다는 것인가?”

〈그렇다! 이상적으로는 그렇지만, 아직 너는 제사장으로서의 경험이 부족하니 한참은 더 집중해야 할 것이다. 아직 보이지도 않지 않느냐? 결계의 시각화란 항상 어려운 것이지. 일단 좀

나에게 제물을 바쳐 보거라. 그러면 내가 좀 더 도와줄 수 있으리니…….>

‘보이는데?’

하지만 약간의 집중만으로도 뚜렷 하게 보이고, 느껴졌다.

— 끼릭.

보티스가 종알거리는 사이, 나는 유령의 앞에서 붉은 뱀의 꼬리를 그대로 잡아 돌려 버렸다. 그러자 허공에 떠올라 있던 뱀에게서 곧바로 붉은 기운이 사라지면서 뱀이 아래로 고개를 푹 숙였다.

〈아, 아니 어떻게 이렇게 쉽게……!>

“뭐야, 네가 하라고 한 거 아니었나.” 〈그렇다고 해도…. 어떻게 이렇게 쉽게…. 으음, 그래. 역시 넌 나의 제사장이다! 비브리오를 처리하는 순간부터 내가 알아봤지. 하하하…. 내가 계약자는 정말 제대로 봤어. 우리 둘은 내면의 파장까지도 깊이 잘 맞는다니까? 이 정도면 보통 연이 아닌 거다.〉

‘ 쉬운데?’

정해진 종류의 힘이다.

정해진 규칙과 정해진 결계가 어려울 리 없었다.

보티스의 가호를 인식하고 뒤트는 감각은 인벤토리를 다루던 감각보다 훨씬 뚜렷하고, 구체적으로 느껴졌다.

인벤토리를 수련할 때 절대 뚫리지 않는 장막을 상상하라느니, 신을 죽이는 창을 상상하라느니 하던 아이작의 요구에 비교하면 보티스의 가호를 인식하고 손대는 일은 몹시 간단했다.

그 순간이었다.

- 퍼억!

“끄헉••••••!”

코앞에서 비명이 울려퍼졌다. 마침 골목을 순찰하고 있던 경비대원들이, 옷을 거의 벗고 있는, 가면을 쓴 남자가 허공에서 나타나자 깜짝 놀라 창대로 배를 강하게 후려친 것이다.

‘뭔... 설마 지금 저놈이 얻어맞은 건가?’

황실의 유령으로 선정될 정도면 거리를 순찰하는 일반 경비병들과는 수준이 완전히 다르다. 가면이 없이 열 명, 스무 명을 데려다 놔도 상대가 되지 않을 것이다. 심지어 황제의 근위대보다도 뛰어난 실력자들이 저들인 것이다.

‘그런데 저렇게 처맞는다고?’

- 파억!

구타가 이어진다. 보이지 않는 게 당연한 삶을 살다 보니, 누군가 먼저 자신을 공격한다는 생각은 상상조차 하지 못해서 공황에 빠져 있는 것 같았다.

정말로.

이 녀석이 살면서 같은 유령 외에 다른 자에게, 그것도 한낱 경비병들 에게 몽둥이 찜질을 당한다는 예상을 해 본 적이나 있을까?

“끄윽••••••

입에서 튀어나온 비명도 정신적 충격이 큰 것 같았다.

다가오는 경비들에게서 살기를 느꼈을 텐데.

경비병들이 자신을 알아보고 공격 한다는 상황은 절대로 일어날 리가 없기 때문에, 머릿속에서 완전히 배제하고 그들 사이를 똑바로 지나 치려고 했던 것이다.

“웬 놈이냐!”

“거리에서 옷을 다 벗고 다니다니….”

“이놈, 적국의 스파이는 아닐까?”

“이실직고해라!”

하지만 전쟁 중인 제국 수도의 경비병들은 상당히 독이 올라 있는

상태였다.

- 빠각!

“이…. 이이….”

경비병들에게 둘러싸여 창대로 구타당하는 상황이 실로 어처구니가 없는듯 유령의 얼굴이 지독하게 일그러졌다. 녀석은 웅크려 몸을 보호하다가, 경비병들을 대충 걷어 차며 몸을 한 바퀴 굴렸다.

어이쿠!”

“첩자가 확실하다! 저놈 잡아라!”

그는 나자빠지는 주위의 경비병들을 무시하고 순식간에 몸을 빼내어, 으슥한 골목으로 뛰어들어 몸을 웅 크렸다. 나도 녀석을 따라갔다.

“뭐, 뭐야……

더 이상 유령이 될 수 없는 녀석이 황급히 제 가면부터 어루만졌다.

“멀쩡한데……

가면이 그대로 붙어 있는 걸 확인하고,움켜쥐고 웅크리고 있는 모습이 이대로 더 숨어다녀야 하는지, 벗고 태연하게 바깥으로 다시 나가야 하는지 아직 감이 잡히지 않는 것 같았다. 나는 골목의 담장 위에 서서 녀석을 한동안 더 가만히 관찰했다. 녀석은 황망한 표정으로 웅크리고 있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내’ 은신이……

〈건방진 것! 장난감 주제에 감히 누구의 가호를 받고 있는지도 의식 하지 않은 것이냐!〉

보티스가 종알거렸다.

어쨌거나 키 큰 유령은 몇 년간의 은폐가 풀려 버린 충격이 적지 않은 것 같았다. 한동안 웅크리고 있던 녀석은, 몸을 추스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한동안 가만히 서 있다가 자기를 아래로 내려다보곤, 거리의 쓰레기 더미에서 보라색 넝마를 줍더니 대충 둘렀다.

그리고는 확연히 힘 빠진 걸음걸이로, 거리를 지나는 사람들 앞에 슬며시 모습을 드러냈다.

시민들은 아까의 경비병처럼 공격 하거나 소리를 지르지는 않았지만, 한데 뭉쳐 경계와 의심으로 눈초리로 바라보며 수군거렸다.

“저 인간 뭐지?”

“엄마, 저 아저씨 바보야?”

“광대인가 봐. 어디 모자란 사람인가.” “피부도 더러운데 왜 옷을 벗었데?” 뚜렷하게 꽂히는 시선과 웅성거림에 남자는 당황하며 다시 몸을 숨겼다.

“이런 젠장…. 가면의 가호는 어떻게 된 거지? 비브리오를 조사해 봐야 되나?”

넝마의 냄새에 얼굴을 찌푸리던 녀석은, 가면을 벗어서 허리춤에 매달며 중얼거렸다.

“이렇게 된 이상 더 이상 일 못 해…. 공작님도 안 계신데…. 이게 무슨 봉변인지….”

- 저벅. 그리고는 조심스럽게 벽에 붙어 움직이더니, 산을 향하던 발걸음을 돌려 교외로 향했다. 대놓고 대로를 걸어다니던 움직임에 비해 갑자기 무척 조심스러워졌는데, 자기도 그런 움직임이 굉장히 어색한 것 같았다.

“젠장…. 어디 가서 늘어지게 술이나 마셔야겠군.”

‘음? 뭐 하는 짓이지?’

조금 더 근성을 발휘할 줄 알았다.

날렵하게 움직이던 모습을 보면.

충분히 적당히 몸을 숨기고 산 쪽을 수색할 수 있는 실력의 녀석이었다. 아니, 애초에 굳이 몸을 숨길 필요도 없지 않은가?

산 정상의 애벌레 사육장.

그곳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조사하는 데 꼭 신분을 은폐할 필요는 없었다.

“보티스, 언제부터 저들이 저 가면을 쓰게 된 거지?”

〈7년 전이다.〉

7년 동안 가림막 뒤에 숨어서 살아가다 보니, 하나의 대상으로서 시선을 받는 스스로가 너무나도 낯설어져 버린 걸지도 몰랐다.

그의 세계에서 시선은 오로지 한 방향.

남을 마음대로 내려다보며 품평하고 매도해도 그는 어디까지나 안전했으니까.

녀석이 가면 없이 살아가려면 힘겨운 적응 기간이 필요할 것이다.

‘그런데, 동료들에게 찾아가지도 않는 건가?’

가면에 생긴 문제를 전파할 수도 있을 텐데.

그것마저 하지 않으며 술이나 벌컥 벌컥 들이켜고 있다.

어쩌면 유령의 일부는 점조직으로서, 서로를 인지하지 못하고 활동하고 있을 가능성도 있다.

설령 그렇더라도 너무 방만한 태도.

‘마치 조직이 망가진 것 같잖아? 무슨 생각들인 거지?’

- 파앗!

빠르게 움직이며 산 정상으로 다가 오려던 다른 유령들을 찾아다녔다. 녀석들도 하나씩 눈앞에서 보티스의 가호를 빼앗았다.

유령들의 태도는 하나같이 비슷했다.

가면 뒤에서 일방적인 시선을 보내던 상황이 부서지고, 자신들에게 시선이 향하자 여유롭던 모습이 순식간에 무너 졌다.

그들은 심지어 어린아이의 시선 하나에도 어쩔 줄 몰라하며 겁먹고 허겁지겁 도망쳐 갔다.

가면이 없어도 그들 하나하나는 상당히 강력한 살수들인데, 무언가를 하려는 의지 자체를 잃어버린 것 같았다.

은폐뿐만이 아니라 자아와 감정마저 가면에 의탁해 버린 모습이었다.

“보티스, 딱히 가면에 의존하게 만들어 놓은 게 있나?”

〈너도 결계를 느끼지 않았느냐? 그런 건 없다. 가면은 그저 가면일 뿐이야. 저들이 멋대로 익숙해진 거지. 관찰을 독점하며 남들을 어떤 식으로 보았는지 스스로 알고 있으니까, 시선을 받을 때 저절로 위축되는 거겠지.〉

“그런가.”

산 주위에 있던 마지막 유령을 향했다.

‘이자가 마지막이군.’

양손에 쇠갈퀴를 낀 구부정한 노인 에게서 보티스의 가호를 빼앗자, 노인은 주변 시민들의 반응을 보더니 훌쩍 숨어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흐음…. 문지기 회의에서 더 난리를 치겠군. 하지만 나랑은 상관없지. 오른쪽 무릎도 요즘 자꾸 쑤시는데 말이야…. 무슨 애국하는 것도 아니고, 이 짓도 이제 못 해먹겠군……

남들보다도 한층 더 의욕 없는 태도였다.

노인 역시 가면을 품에 넣더니, 어디선가 지팡이를 꺼내어 절뚝거리면서 주택가로 걸어갔다.

애초에 대단한 의욕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이 뭔가 가라앉아 있던 유령들은.

가면의 힘이 사라지자 그대로 산에 올라오는 일을 깨끗히 단념해 버린 것이다.

은폐의 가호 없이는 위험한 일에 결코 끼어들지 않겠다는걸까.

‘게다가… 애초에 애벌레 사육장 쪽으로 다가오는 유령의 숫자가 너무 적었어.’

다 합쳐도 다섯 명.

그나마 사육장의 상황을 확인하려는 마음을 먹었던 다섯 명은 양반이었다.

〈개판이구나!〉

구석구석들 뒤져 본 수도의 상황은 실로 그러했다.

창가에 발을 걸고 거꾸로 매달린 채 멍하니 사람들을 바라보거나, 높은 건물 꼭대기까지 암벽타기를 연습하는 유령 정도면 얌전한 편.

수도에서 발견한 다른 몇몇 유령. 골목골목에서 탐지된 그들의 상황은 가관이었다.

가만히 서 있는 경비병들의 머리에 넓적한 나무통을 씌워 놓는 정도도 차라리 낫다.

어떤 녀석은 호주머니에서 물건을 훔친 뒤, 그걸 근처에 있는 사람의 주머니에 뻔히 보이게 넣어 서로 싸움을 붙이기도 했다.

“이 천한 것이! 감히 내 복숭아를 훔치다니!”

“뭐? 누가 그딴 걸 훔쳤다고 그래? 아까부터 계속 팔짱 끼고 있는 거 안 보여?”

“안 흠쳤단 말이지?”

“그래, 이거 놔, 이 새끼야!”

“거기 잠깐만요. 제 지갑이 왜 거기 있죠?”

“무슨 헛소리야? 어라? 이런 지갑이 왜 여기 있지?”

“어이쿠! 지가 도둑인데 남을 몰아 붙이던 거구만? 이거 악질이네?”

‘•••정말 별짓을 다 하는군.’

이래서는 마치, 정말 단체로 파업 이라도 하고 있는 것 같지 않은가?

전쟁 중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였다.

‘스파이 임무 같은 건 전혀 안 하는 건가?’

전쟁 중에 황실의 그림자들이 한가 하다는 건, 뭐라고 응수해야 할지도 모를 지독한 농담이다.

수도를 한차례 돌고, 유령들을 확인하며 세 가지를 확인했다.

첫 번째.

‘수도에는 공작이 없어.’ 내가 지금까지 취합한 정보와도 부합하며.

누구보다 공작의 소재에 민감할 유령들이 그렇게 확신하고 있었다.

두 번째.

이들은 가면의 가호에 완전히 매몰 되어 있다.

세 번째.

‘문지기 회의.’

처음 듣는 이름이다.

공작 대신 유령을 관리하는 게 이들인 것 같지만, 유령들에게 ‘문지기 회의’에 대한 충성심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유령 내사과장을 찾은 건, 도시 외곽의 숲에 이르러서였다.

‘어이쿠.’

〈잡스러운 거미줄이구나.〉

보티스가 매도했지만, 내사과장이 반경 50여 미터에 걸쳐 구축해 놓은 투명한 와이어는 거의 편집증적인 수준이었다.

‘이 녀석은 은폐의 가호만 믿고 살지 않는다는 건가.’

하긴, 이 녀석이 의식하는 가장 큰 적은 본인의 상사인 로랑스 공작이고、

상정하는 상대가 상대라서인지, 강철로 된 검 같은 건 가볍게 튕길 수 있는 슈텐 와이어를 사방에 이어 하늘에까지 빼곡하게 쳐 놓은 상태 였다.

천천히 걸어도 목이 잘리는 투명한 거미줄의 한가운데, 내사과장은 해먹을 쳐 놓고 누워서 따스한 햇살을 즐기고 있었다. 몸에 곡선에 맞춰진 해먹이 자연스럽게 흔들린다. 시아 으스노르는 약하게 콧노래를 홍얼 거리며 말했다.

“아, 살인하고 싶다……

‘되게 큰 소리로 말하네.’

어쨌거나 기분은 몹시 좋아 보인다.

나는 곧바로 녀석을 향해 달려갔다.

- 투투툭!

“이런 씨발?”

순식간에 끊어지는 와이어를 느끼고, 녀석이 흠칫하며 내 쪽을 노려봤다.

“로랑스 공작 전하십니까?”

여유로운 표정은 단번에 사라지고, 솟구치는 짜증과 경계심, 어쩔 수 없이 복종한다는 표정이 차례대로 빠르게 내사과장의 얼굴에 스쳐갔다.

- 사르륵!

순식간에 수많은 와이어가 내 쪽으로 휘감겼다. 하지만 인벤토리로 전부 밀어내 버리고, 녀석을 향해 다가갔다. 그 와중에도 끊임없이 와이어가 설치되어 내 쪽에 자르고 엉켜 왔지만 이런 거에 당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아니면, 비브리오 공작 전하십니까?” 워낙 숨겨 둔 덩치가 거대해서 어쩔지는 몰라도, 보티스의 대제사장인 비브리오 공작도 은폐의 권능이 있긴 할 테니까 올바른 추론이긴 하다.

“그놈은 내가 죽였다.”

- 스륵.

나는 녀석의 앞에서 은신을 풀었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상대가 나타나자, 내사과장의 붉은 눈동자가 흔들렸다.

“하하하…. 네가 누구길래…. 농담도 정도가 있다. 비브리오 공작이 어떤 존재인 줄 알고?”

‘그러고 보니 딱히 증거물도 없네.’

남겨진 시체를 제신들에게 공양한 덕분에 모조리 다 흩어져서 증거물 같은 것도 사라진 상태다.

보티스의 팔찌를 보여 줘 봤자 알아볼 리도 없고.

“못 믿겠으면 일단 맞고 시작하자. 그럼 내가 얼마나 강한 줄 알겠지….”

“뭔 말같잖은 소리를……

말을 하는 순간에도 주변 나무들에 숨겨 놓은 무기들이 나를 향해 쏟아 지고 있었다. 놀라운 반응 속도이긴 했지만,

— 빠각!

나는 내사과정의 정강이를 걷어찼다.

“믿을 때까지만 맞자.”

- 뻐걱! 뻐억! 촤악! 퍼벅! 파지지직!

“크흑!”

- 콰과광!

아예 질려서 비명조차 못 지르게 된 내사과장이 바닥을 나뒹굴었다. 하지만 녀석은 딱 물리적인 충격 만큼만 바닥을 뒹굴다가, 곧 다시 일어나 자세를 잡았다. 나름대로 고통 같은 건 깨끗하게 무시할 수 있는 경지인 것이다.

‘거의 다 때렸나.’

이 정도면 엠버에서 정신 못 차리고 꿈기계에 중독되어 있던 화풀이는 한 것 같다.

“더 할 말 있냐?”

“할 말은…. 쿨럭…. 네놈이 있는 것 같은데……

입에 피거품을 물면서 내사과장이 중얼거렸다.

‘그건 그렇네.’

패는 데 너무 열중했던 거 같다.

내사과장이 힘겹게 말을 이었다.

“네놈이…. 비브리오… 쿨럭… 공작을 죽였다고 치자… 그래서 나한테 무슨 용무냐……

“시아 으스노르.”

“본명 정도는 알 거라고 생각했다….”

“좋아하는 건 비밀이고, 제일 싫어 하는 건 로랑스 공작이지.”

“손쉬운 추측인 것 같군…. 그래서 뭐 어쩌라는 거냐……

“자유라는 이름으로 일부러 자기 몸을 망가뜨리거나, 약자를 흉내내는 인간들을 본다면 의외로 굉장히 엄청난 분노를 표출할 거 같군.”

엠버에서 봤던 내사과장이 떠올랐다.

“대체 뭔 구체적인 설명…. 언제 나랑 같이 여행이라도 했다는 듯한 그 말투는 뭐냐……

그녀가 투덜거렸지만, 표정은 조금씩 미묘해지고 있었다.

“로랑스 공작도 그래서 싫어하는 거 아닌가? 아니면 네가 자는 도중 가족들을 살해한 일의 배후에, 공작이 있다고 의심하고 있기 때문일 수도 있고.”

“그런데 최근에 공작에게 일어난 변화로 몹시 당황스럽겠지? 누구보다 로랑스 공작을 잘 아는 너야말로 가장 잘 느낄 수 있을 테지.”

“나는 많은 걸 알려 줄 수 있다. 정예 유령들이 왜 에라스트의 내성 특정 부분에 1년씩 번갈아 가며 배치되는지, 에라스트가 황실의 정통성과 어떻게 관련되었는지, 그 내부에 어떤 유적이 숨어 있으며 어떻게 해제할 수 있는지, 레드 플레이크과 어떻게 관련되었는지. 아쥬라의 탑 아래에 뭐가 묻혀 있는지 상상해 본 적 있나?”

물론 나도 모르는 것도 섞여 있다. 하지만 알 게 뭔가?

내사과장보다는 훨씬 많이 알 거 아닌가?

그리고 어차피 다 알려 줄 생각도 전혀 없다.

완전히 신뢰할 수 있는 동료도 아니다.

정보를 꽉 쥐고 있다가 조금씩 푸는 게 당연한 일.

“로랑스 공작이 너에게 중간에 정보를 차단했었던, 애벌레에 대한 비밀은 뭐가 있는지는 어떨까?”

“황실 분수대로 통하는 비역은 몇 층까지 가 봤지? 추파카브라가 출몰하는 10층? 용암과 화산지대의 9층? 검술을 쓰는 키메라들이 나타나는 8층? 최고급 시료들로 가득 채워진 연금 제단의 7층? 아쉽게도 나는 2층까지만 가 봤지. 그곳에 뭐가 있는지 알고 싶지 않……

“젠장•…"

시아 으스노르가 퉤, 하고 옆으로 피로 가득 찬 침을 뱉었다.

‘‘그 절반만 얘기해 줘라. 숨이 끊어질 때까지 협력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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