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1화 신이 원하는 것 (29)
이적이 사라지자, 전쟁은 순탄하게 굴러갔다.
언제부턴가 제국과 연합의 군대들이 가는 진로는 땅이 갈라지지도, 홍수가 범람하지도, 산사태가 벌어지지도 않았다.
비틀렸던 전선에 기적이 사라지자.
수십만의 인간은 그동안 지루하게 연명해 온 삶에 복수라도 하듯이 서로를 향해 달려갔다.
남은 건 시체의 산이었다.
- 까악! 까악!
시커먼 새들은 다양하게 찢겨 나간 시체 위에 앉았다. 그리고 눈을 데굴데굴 굴려 식사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숨이 끊긴 순간부터 인간은 빠르게 익어간다. 죽은 지 반나절 정도라면 먹기 딱 좋은 시간이다.
- 투둑. 투두둑.
멀쩡히 갑옷을 입고 있는 시체도 있었지만, 영양 공급원들은 풍부했기에 하나에 굳이 매달릴 필요는 없었다. 까마귀는 곧장 다른 시체로 날아갔다. 그리고 검기에 잘려서 훤히 드러난 내장을 느긋하게 쪼아먹기 시작했다.
"아‘으•••. 아으으 …
복부에 관통상을 입고 쓰러진 병사는 식사 소리가 들릴 때마다 발작처럼 몸을 떨었다. 시선을 가만히 두지 못하고 주위를 바라봤다. 그의 눈에 얼굴 반쪽이 날아가 버린 시체가 들어왔다. 위턱과 광대뼈 라인까지 날아가 버린 시체는 목구멍에 혀만 남아서 밖으로 덜렁거렸다.
- 파닥!
먹기 좋게 노출된 그 부위를 놓치지 않고 영리한 까마귀 한 마리가 날아 들었다. 고도로 집중해서 식사를 끝낸 까마귀는 배에서 피를 흘리는 병사를 흘끗 바라봤다. 거기에는 약간의 경계심도 섞여 있지 않았다. 까마귀는 머리를 갸웃하며, 남자가 죽을 시간을 빠르게 계산하고는 근처의 다른 시체로 날아들었다.
“흐으흡……
옆의 기병이 쓰러질 때 말 아래 깔려 함께 쓰러졌다가, 살아남은 병사는 금이 간 갈비뼈를 잡고 비명을 삼켰다. 말 아래 깔린 순간부터 그는 눈을 감은 채로 꼼짝하지 않았다. 죽어도 눈을 감은 채로 아무것도 보지 않고 죽고 싶었다.
생면부지의 사람들에게 팔다리가 장난처럼 간단하게 떨어져 나갈 수 있다는 사실.
처음 보는 기괴한 쇳덩어리가 자신을 육포처럼 납작하게 짓뭉개 버릴 거라는 사실.
적과 엉킨 곳으로 달려온 자국의 기사단이 피아를 가리지 않고 모두를 짓밟으며 베어 버릴 거라는 사실. 그런 것들을 부정하고 모르는 채로 죽고 싶었다.
자신이 믿어 오던 세계가 거짓말이 었다는 사실을 깨닫는 데는 한 번의 경험으로 충분했다.
주변에서 벌어지는 상황을 약간이라도 생각하는 순간 정신이 갈려 나갈 것 같은 통증이 찾아왔다.
병사는 눈을 꽉 감고, 두 손으로 귀를 막고, 덜덜 떨며 웅크렸다.
하지만 그들 정도는 양호한 편이었다.
하나밖에 남지 않은 손에 단검을 쥐고 제 얼굴을 이리저리 그어 보고 있는 병사, 멍한 표정으로 머리카락을 꼬아 한 움큼씩 뽑고 있는 병사, 부러진 다리를 질질 끌고 움직이며 적군의 시체들을 연달아 찌르고 있는 병사마저 있었다.
부서진 몸과 정신이 가득한 전장으로으 잊혔던 목소리들이 떠돌아다녔다.
〈나와 계약하자…….>
성의도 없이 이리저리 찔러보는 식이었지만.
“내가- 그런 걸 할 수 있을까••…?” 살기 위해서.
인간은 어떤 세계에든지 기댈 수밖에 없다.
막 하나의 세계가 찢어졌을 때 나타나는 목소리는 매력적일 수밖에 없었다.
자신이 어떤 맥락도 없이 벌레처럼 짓이겨질 거라는 무력감에 사로잡힌 상태라면, 터무니없는 제안에도 사람은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자신을 헐값에 팔아 버리게 된다.
전장에서 버려진 병사들에게는 주워 줄 누군가가, 명령을 내려 줄 누군가가 간절히 필요했다.
〈네가 살아남은 것은 운명이다.
너는 선택받았다.〉
누구의 목소리인지 의심하지도 않고 의외로 많은 수의 병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것도 약속하지 않는 추상적인 말만으로 요구하는 계약을 병사들은 승낙했다.
그렇기에.
계약에 소모되는 인과율은 극미량에 불과했다.
〈떠오르는 칼들을 보여라.〉 특히 취약한 계약자를 찾는 것 외에도.
전장은 포교에도 이상적인 환경 이었다.
부서져 내린 마음들은 아주 작은 신성을, 작은 이적을 보여 주는 것만으로도 그것에 깊게 의지하고 자신을 포기하기 쉽기 때문이다.
“ 오오……
아직 능력에 적응하지 못한 계약자의 입과 코에서 피가 흘렀지만, 잊혔던 신들은 조금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애초에 파장이 일치하는 계약자를 성심껏 고르기 위해 여기 온 게 아니었다.
아무 대가도 주지 않고 쉽게 후려칠 상대를 찾아 전장에 왔다.
〈신도를 늘려라.〉
“철을 다스리시는… 레조츠를 섬겨라.” 물론 이런 포교의 장에 하나의 신만 떠도는 건 아니었다.
- 촤르르륵!
허공에서 떠도는 칼들을 솟아오른 덩굴들이 얽혀서 바닥으로 처박아 버렸다. 레조츠의 계약자는 어처구니 없는 표정을 지었다. 강신降神 상태 이기 때문에 심기가 곧바로 얼굴에 드러나고 있었다.
〈우습구나. 감히 마엘리아 따위가 내 앞을 가로막는가?〉
숲이라면 몰라도 이곳은 전장이었다.
대장간에서 담금질된 온갖 것이 모이는 장소.
레조츠의 상대가 될 신격이 있을 리 없었다. 기습적으로 솟아오른 덩굴들도 한번 칼질을 하니 어렵지 않게 부스스 흩어졌다. 하지만 상대는 거기에 기죽지 않았다.
〈전장이랑 전장은 다 돌면서 독식하는 꼴을 가만히 두고 볼 수는 없지.〉
〈볼 수 없으면 어쨌다는 말이지? 숲에 처박혀서 토끼들이나 개종시켜라!〉
떠오른 칼들이 마엘리아의 계약자를 향해 날아들 때였다.
- 쿠구궁. 일곱 개의 칼이 일시에 바닥으로 떨어졌다.
〈나 혼자 너를 타도하러 왔다고 생각하느냐?〉
〈이런 비열한…….>
주위의 무기들은 수십 배나 무거워져 있었다.
근처로 다가온 새로운 계약자는 무릎을 꿇고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지만, 그만큼의 힘은 발휘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래, 바트바다. 네가 움직이는 철들의 무게를 늘릴 수 있지.〉
〈저 음침한 녀석이 나보다 위험 하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던 거냐……!>
〈그게 걱정된다면 이런 꿀 같은 장소에서 작작 혼자 처먹었어야지.〉
〈오냐! 그렇다면 내가 그동안 만들어 낸 힘을 이 자리에서 목격해라!〉
* * *
“저게… 대체 무슨 일이지요?”
루비아는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망원경을 살짝 내렸다.
격렬한 전투가 장소.
달의 성녀와 함께 버려진 부상자들을 치료해 주러 왔지만.
시체의 평야 위에 보이는 건 기괴한 상황이었다.
허공에 수십 자루의 칼이 떠다니더니, 숲도 아닌 평야에서 굵은 덩굴이 뻗어 나와 칼들을 얽어매기도 하고, 어딘가에서는 불꽃과 번개가 사방 수십 미터를 불태우면서 서로 부딪치고 있었다.
〈거지새끼들이다.〉
“거지새끼들이래.”
소녀가 베트라스의 말을 그대로 옮겼다.
〈우리는 부자니까, 저런 거지새끼 들이랑 부딪혀서 좋을 거 없다.〉
“우리가 부자야? 나 돈 없는데?”
〈신앙 부자다. 벌써 신도가 수천을 헤아리지 않느냐. 괜히 저런 것들과 얽힌다면 가는 곳마다 꽁무니를 쫓아오며 질투할 것이다.〉
“베트라스가 이상한 소리 해. 아무튼 가지 말래.”
〈그래, 절대 가지 마라.〉
“신님의 말인가요? 하지만 엮여서 다치는 사람들이 있을 거 같은걸요. 도와줘야 하지 않을지……
“주군, 양측의 마법사들이 부딪치는 걸지도 모릅니다. 잔당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그런 건 흔히 있으니까요.”
“그렇습니다. 전투가 끝난 뒤 끼어 드는 게 원래 계획이었습니다.”
“언니, 나 배고파.” 루비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그럼 일단 소동이 마무리된 뒤에 가죠.”
마지막까지 망원경에서 눈을 떼지 않던 데서리 바티엔느가 저런 복장의 마법사도 있었나, 라면서 작게 중얼 거렸다.
* * *
〈크으으윽…….>
하나둘 늘어나는 적들에게 공격을 받은 레조츠는 분통을 터트리며 전장에서 멀리 벗어나 도망치고 있었다. 첫 번째 계약자는 무리한 사용으로 죽어 버렸고, 예비로 계약의 실을 이어 놓은 녀석마저도 한쪽 눈이 멀고 내장이 뒤집힌 탓에 얼마 있다가 숨이 끊어질 것 같았다.
〈다른 계약자를 찾아야…….>
아니라면 인과율에서 막심한 손해를 볼 게 분명했다. 이만큼의 힘을 사용하고도 아무런 이득도 얻지 못하다니.
〈빨리 좀 달리거라!〉
가까운 부대라면 얼마든지 새로운 계약자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시체의 평야에 버려진 부상병들만큼 거저먹는 건 아니겠지만, 공포에 시달리는 탈영 희망자들의 마음 따위에는 미약한 인과율로도 스며들 자신이 있었다.
〈처음 출전한 소년병이 좋겠군.〉
그는 완벽하게 파장이 맞는 계약자 따위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압도적인 힘을 가졌을 게 분명한 ‘공양자’를 찾을 때까지 이렇게 인간에게 바꿔 강림하면서 자신의 신앙을 늘릴 생각이었다.
“헉, 허억, 허억……
레조츠의 계약자가 구역질을 참고 달리는 순간이었다.
〈잠깐! 멈춰라!〉
어디선가 제사를 바치는 기운이 느껴졌다.
짐승이 먹잇감을 후각으로 찾듯 신들은 제사의 냄새를 곧바로 찾아낼 수 있었다.
기운은 미약했지만, 짐승이 맛있는 먹이일수록 냄새에 집중하게 되듯 그 제사의 기운은 절대 놓칠 수 없을 정도로 향기로웠다. 다행히도 근처에는 다른 어떤 신의 흔적도 느껴지지 않았다.
〈여기까지 온 게 인과율의 인도로구나. 하하하.......>
이런 향긋한 제사를 지낼 정도면 자신과 완벽하게 파장이 맞거나, 아니면 최고의 계약자가 될 자질이 넘쳐나는 자였다. 레조츠는 군부대 같은 건 머릿속에서 까맣게 지워 버렸다. 어떻게든 이 제사에 응해야 했다. 대체 누가 뭘 바치고 있길래 이런 좋은 냄새가 나는 것일까? 제사가 궁금해서라도 참을 수가 없었다.
- 서벅.
레조츠는 계약자를 움직여 수풀로 뛰어들었다. 마엘리아가 떠올라서 수풀이 왠지 꺼림칙했지만, 곧 수풀은 사라지고 깎아지른 듯한 절벽이 나왔다. 레조츠는 안심하며 길을 따라 천천히 움직였다. 그곳에는 옷을 벗어 놓고, 가만히 가부좌를 틀고 앉아 치성을 올리는 남자가 있었다. 그 앞을 보고 레조츠는 의아할 수밖에 없었다.
〈제물이 없잖아?〉
제물은커녕 심지어 제단이라고 할 만한 것조차 없었다. 하지만 남자에게서 풍기는 향기는 그대로였다. 마음의 수련을 높이 쌓은 인간이라도 되는 걸까? 그렇다고 제물도 없었는데 이런 향기를 느끼다니. 레조츠는 자기가 굶주리긴 했나 보다 생각했다.
“여기서 뭘 하고 있느냐?” 남자가 고개를 들었다.
“제사를 올리고 있습니다.”
“뭘 위해서?”
“오늘 전장에서 죽어간 사람들을 위로하는 제사입니다. 죽여서 죄를 짓는 사람들을 위한 제사입니다.”
“평소에도 그러고 있나?”
“착각과 집착으로 고통받는 모든 이를 위해 제사를 지내지요.”
“흐음, 굉장히 쓸데없는 짓을 하는구나.”
“그럴지도 모르겠습니다.”
남자가 긍정하자 레조츠는 당황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천 년이 넘는 시간 동안 망각된 뒤 다시 떠올라서, 산산조각으로 부서진 취약한 병사들의 마음들만 끼어들어 온 탓에 이런 상대와는 어떻게 계약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래도 인과율을 사용하면 억지 계약은 가능하겠지.
“어쨌거나, 중요한 이야기를 하자꾸나. 나는 철을 관장하는 신 레조츠다. 안타깝게 세계에 흔적도 남겨 놓지 못했고, 오랫동안 잊힌 탓에 나도 내가 뭘 더 할 수 있는지 잘 몰라. 하지만 지금 당장도 계약자만 있다면 수십 자루의 검을 움직일 수 있다.”
레조츠는 계약자의 품에서 다섯 자루의 단검을 꺼냈다. 다섯 자루의 칼이 허공에 맹렬히 떠돌았고, 계약자의 입에서 검은 핏물이 흘렀다.
“그 사람이 무척 힘들어 보입니다.”
“괜찮아. 신과 계약하는 건 원래 힘든 거란다.”
- 파바바밧!
네 자루의 단검이 남자의 사방에 꽂혔다. 바위를 뚫고 들어간 단검이 구속의 결계를 형성했다. 레조츠는 꼼짝없이 앉아 있는 남자에게 다섯 번째 단검을 들고 천천히 다가갔다.
설득할 생각도 시간도 없었다.
“어서 순순히 나와 계약을 맺는다고 해라. 심장에 이걸 꽂아서 강제로 계약한다면 너도 많이 힘들어질 거야.”
레조츠는 남자의 머리채를 휘어 잡았다. 인과율의 소모가 크겠지만 이런 향기로운 파장이라면 계약한 뒤 충분히 만회할 자신이 있었다.
“이런 식으로 해도 됩니까?”
“그래도 된다.”
인과율을 바른 칼을 남자의 심장에 박아 넣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서걱, 하는 파육음은 들려오지 않았다. 칼은 거의 다 죽어가는 계약자의 손에 들려 있지도 않았다. 그건 레조츠의 영체에 있었다.
〈응……?>
분명히 네 개의 단검으로 박은 결계 때문에 움직이지 못할 텐데.
남자가 바닥에 놓았던 새하얀 옷을 천천히 걸치며 말했다.
“나 수트반 브리하드바누 비리란드라는 명부와 경계와 길과 절벽에서 필멸자들에게 최저한의 이利와 한 가닥의 공정성이 지켜지도록 돕는 자로서, 이 강제계약에 징벌적 역전逆轉을 선언한다.”
- 구구구구구…….
새하얀 옷이 넓게 펼쳐지며, 마치 안에 잠들어 있던 것처럼 양쪽에서 수많은 팔이 솟아나왔다. 레조츠는 자기가 단검으로 만들어 낸 임시 구속과 비교조차 할 수 없는 압박감을 느끼며 전율했다.
“절벽에서 상대를 몰아붙였으므로 12배, 구속 상태에서 계약이 이뤄졌 으므로 다시 12배, 강제로 칼을 꽂아 계약을 강요했으므로 다시 12배, 그러므로 배상액은 최저 계약자 1,728명분의 인과율.”
〈마.. 말도 안 되는... 너는 도대체….〉
레조츠가 전장에서 쌓아온 신앙과 쌓아 놓은 힘, 첫 번째 제사로부터 공양받았던 인과율이 모조리 하얀 후드 속으로 빨려들어가기 시작했다. 그 자신이 만들어 놓은 결계가 말도 안 되는 힘으로 그를 제압하고 있었다.
뭐가 어떻게 된 건지 알 수 없는 상태에서 레조츠는 필사적으로 저항 했지만, 무의미한 행동이었다. 심지어 여러 신격과 싸우며 인과율을 소모 하지 않았어도 상대가 되지 않을 것처럼 느껴졌다.
〈그… 그아아악……!>
- 쉬이이익…….
허무하게 영체가 흩어지고, 잠시 펄럭거렸던 하얀 후드는 숨이 다해 쓰러진 레조츠의 옛 계약자를 보고 가만히 두 손을 모았다. 그리고 작게 한숨을 쉬며 중얼거렸다.
“이 정도로 인연을 흡수했으면 어느 정도 추적할 수 있겠군……. 대저 누구길래 내게 이렇게 많은 공양을 했단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