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2화 신이 원하는 것 (30)
문지기 회의와 만나기 위해 호그위드 찻집으로 향했다. 들어가기 전 바깥 에서부터 느꼈지만, 이번에는 찻집에 참가한 사람의 숫자가 꽤 늘어난 상태다.
‘전쟁에 참가하지 않은 녀석은 전부 여기 모인 건가.’
안으로 들어가자 저번에 오지 않은 새로운 얼굴들이 나타난다. 그들도 원래 모였던 녀석들과 비슷하다. 어디서나 볼수 있을 인간들처럼 별거 없으면서도, 어디에서도 볼 수 없을 기괴한 느낌을 풍기고 있다.
이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각오하고 받아들인다거나 납득하는 차원이 아니다. 심지어 나조차 죽음을 활용하면서도 위기에 처하면 어느 정도는 긴장하는데, 그것과도 다른 느낌이다.
다시 한번 바라보고 그 정체를 느낀다.
움직임은 부드럽고, 전혀 각이 져 있는 건 아니지만.
‘마치 인형극 같다는 말이지.’
선인이라도.
악인이라도.
지금의 자신이〈진짜〉내가 아니 라고 생각하며 어중간하게 하루하루를 만지작대는 사람들이라도.
살아 있는 존재로서의 일말의 진지함은 분명히 느껴진다.
최소한 죽음이 찾아오는 순간만큼은 모두 성실해진다.
하지만.
이들에게는 그 성실함이 결여되어 있다.
내가 언제든지 목을 따 버릴 수 있는 지금에조차도.
“호오…. 증거를 가져오신 겁니까?” 도무지 그 〈이탈감〉이 숨겨지지 않는다.
스멀거리는 불쾌감을 억누르면서,
_ 탁.
“이걸 봐라.”
둘러 앉은 인간들의 앞에 커다란 서류봉투 하나씩을 털썩 내려놓았다.
각각의 이름이 적힌 봉투 안에는 유령들이 수년 동안 조사해 온 저들의 치부와 약점이 적힌 서류가 들어 있다. 모두가 봉투를 열어 내용을 훑어본다. 내용을 유심히 바라보는 그들의 눈에 이채가 흘렀다.
“이런 것까지 가지고 오셨다면……
“확실히 유령을 제압하셨나 보군요.”
“좋소. 믿을 수밖에 없겠군.”
태부가 확실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한다.
‘흠……
이걸로 된 걸까? 주위의 다른 녀석들도 고개를 끄덕거린다. 하지만 전혀 일이 잘되고 있다는 느낌은 들지 않는다.
이들에게 법이 제대로 미칠지는 모르겠지만, 제대로 처리하자면 감옥에 갇히거나 사형당할 만한 중죄도 제법 있는데.
당황하는 기색이라고는 조금도 없이 완전히 태연한 태도였다.
뭘 믿고 저렇게 태연한 걸까.
하지만 허세로도 느껴지지 않았고.
태연한 반응이 오히려 묘하게도 자연스러웠다.
“이제 나를 너희의 일원으로 받아 주는 건가?”
“물론이오. 이제 당신도 이곳에서 회의에 참석하면 된다오. 찻집에서 유익한 대담으로 격조 높은 시간을 나누도록 하세나. 제국 최고 회의에 온 것을 환영하네.”
“여기가 우리의 비역인가?”
“비역이라, 그렇소. 여기가 비역이지.”
‘이 새끼들이……!’
완전히 조롱당하는 느낌이었다.
참을 수 없는 분노가 치솟아 올랐다.
‘비역의 존재를 다 알고 있는데 감히 나를 기만하겠다는 것인가? 너희가 쓰는 타이탄이 모인 곳을 다 알고, 비역 3층까지 들어가서 플라스크까지 하나하나 목격했다! 죽어도 본체가 아니라고 버티고 있는 거냐! 가만두지 않겠다! 어디 끝까지 가 볼까!’
물론 그렇게 말해서는 안 된다.
가장 멍청한 짓일 뿐이다.
어차피 협박이 먹히지도 않는 상대들.
내가 뭘 알고 있다는 걸 털어놓는 데서 끝날 뿐이다.
나는 화를 내는 대신 가만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렇군……
일단 대화를 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다행이라고 생각하자. 생각해 보면 녀석들이 애초에 나를 완전히 무시할 가능성도 있었으니까.
‘일단 부탁을 들어 볼까.’
이들의 요구를 들어주는 과정에서 새로운 정보를 파악하게 되고, 호의를 살 수 있을지도 모른다.
“내가 유령들을 제압했으니, 이제 의뢰를 받아 주겠다.”
하지만 상황은 내 생각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글쎄, 우리 딸아이가 키우는 고양이를 잃어버렸는데 말이죠……
“저는 아끼던 우산을 잃어버렸습니다. 좋아하는 화가가 그림을 그려 준 정말 소중한 물건입니다만. 어떡해야 할까요!”
‘이 새끼들이?’
나는 그날의 만남을 끝내고 돌아와서 시아를 불렀다. 시시껄렁한 얘기만 듣다가 온 탓에 분노로 가득한 상태 였다.
“반응은 어땠어?”
“계속 자신들을 숨기고 있는 것 같군. 뭔가 더 치명적인 약점이 될 만한 건 없을까?”
“흐흐, 그건 이미 보여 준 봉투 안에 있는걸. 몇 년 동안 미행한 결과가 그거야. 충분하지 않았어?”
“적어도 녀석들을 반응하게 할 만한 건 없었던 것 같군.”
시아가 어깨를 으쓱였다.
“뭐, 너무 기대했던 것 아니야? 죽여도 다시 나타나는 상대라니까. 말랑말랑한 것들이었으면 애초에 내 수준에서 목줄이 잡혀 있었을 거야. 다시 한번 말해서 미안하지만, 너는 정말 그 녀석들에 대해서는 감을 못 잡고 있는 것 같네.”
나는 정곡을 찔린 기분이 들었다.
‘그렇긴 해.’
솔직히 비브리오와 저들 사이의 관계를 나는 전혀 모른다. 저들이 인류를 팔아넘겼다고 하지만 뭘 어떻게 팔았다는 건지도 전혀 알지 못하다. 비브리오가 문지기 회의 내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지도 깜깜 하다.
‘갑자기 나타난 자가 비브리오의 자리를 내놓으라고 하니… 생각해 보면 당연히 경계할 수밖에.’
상대를 너무 쉽게 여겼다고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보티스, 비브리오와 저놈들이 어떤 사이였지?〉
녀석이라면 답을 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의외로 신통찮은 대꾸가 돌아왔다.
〈대부분 황궁 내부에서 만남을 가지기에 내 눈과 귀는 그곳에서 뜨일 수 없었다. 다만…….>
〈다만?〉
〈모임의 인간들이 겉으로는 비브 리오를 몹시 우대했지만, 비브리오가 묘하게 겉도는 느낌이 있었다. 비브 리오도 그걸 알았기에 네크론 신사회 같은 너절한 무리를 만들 정도로 조급증을 느꼈던 것 같다. 나를 어떻게든 빨리 강림시키고자 했던 거지.〉
처음 듣는 이야기.
‘완전한 결탁이 아니었나?’
다른 문지기 회의 녀석들과 비브리오가 생각하고 있는 게 달랐다는 건가.
생각에 잠긴다.
‘비브리오의 명확한 목표는 마왕 강림.’
‘보티스의 대제사장인 걸 아는 문지기 회의가 그걸 모를 리는 당연히 없다.’
‘그렇다면, 문지기 회의의 목표는 단순히 마왕 강림이 아닌 건가.’
‘비브리오와는 마왕 강림까지만 함께한다는 이야기고.’
‘이용하고 버리는 사냥개였다는 건가?’ 다양한 생각들이 떠오르지만.
일단 지금 가진 정보들로써는 모조리 상상에 불과하다.
시아를 바라봤다.
“황궁 내부에서 저놈들을 조사해 본 적은 있나?”
애초에 녀석들을 처음으로 접한 곳도 비역의 타이탄을 탑승한 상태.
황궁 안에 문지기 회의와 관련된 장소가 있다고 생각하는 편이 자연 스럽다.
시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지. 황궁이야말로 이 수도 에서 가장 수상한 장소 아니겠어? 하지만 황궁 내외부는 전체가 결계가 쳐져 있기 때문에 은폐의 가호가 힘을 얻지 못해. 보티스의 은폐만이 아니라 대부분의 은신이 힘을 잃어 버리기 때문에 다른 곳처럼 막 다닐 수는 없어. 게다가 아예 들어가지 못하는 곳도 있다.”
“들어가지 못하는 곳?”
“이걸 봐.”
시아가 황궁의 지도를 보여 주며 자세한 위치를 설명했다. 그녀는 두 군데를 짚어 주었는데, 한 군데는 예전에 본 비역 입구가 있는 장소였고, 다른 한 곳은 내궁이라고 표시된 지역이었다.
로랑스 타르티에가 열어 준 길을 따라서 비역까지 깊이 내려가 본 이상.
황궁에서 내가 가보지 못한 곳은 이제 내궁뿐이다.
“내궁은 뭐 하는 곳이지?”
“황제 폐하의 사적인 공간이지. 폐하의 침소가 있고, 처첩과 시녀들이 기거하는 곳이다.”
“흐흠•…"
황제라.
복잡한 생각이 든다.
제위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인간의 황제.
즉위 직후 노골적으로 군비를 증강 하고, 실제로 지금처럼 전쟁을 일으킨 장본인이다. 그러고 보니 황제에 대해서 너무 무심했었다.
‘원래 녀석은 기스-제-라이에게 죽었을 테니까……
“지금 황제는 이름이 뭐지?”
“엘튼 클레멘스 2세시지.”
“뭐라고?”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가 살아 있다고……?”
“어머나, 폐하 암살에도 관여했었어?” 유령 내사과장.
시아 으스노르 역시 암살 사건을 알고 있다.
“그건 아니지만. 분명히 죽었을 텐데.” 내가 개입하지 않는 세계선에서 엘튼 클레멘스 2세의 사망은 확정이다.
기스-제-라이라는 피할 수 없는 죽음이 그를 찾아오니까.
엠버의 기술로 유전자 검식까지 완료한 상대.
기스-제-라이 본인의 손으로 직접 마무리했다.
죽음을 관장하는 네크로멘서에게 당연히 실수 따위가 있을 리 없다.
“후후후… 맞아. 처음 폐하의 시체를 확인한 건 다름 아닌 나였어. 몰살 당한 근위대와 함께 쓰러져 계시더군.”
여기까지는 내가 알던 진행과 똑같다.
그러나.
“하지만……
시아가 얼굴 가득히 썩은 표정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다시 살아나셨어. 문지기 회의 녀석들처럼 말이야.”
이게 대체 무슨 소리인가?
조용히 집중해서 그녀의 말을 들었다.
“처음 있는 일은 아니거든. 지금 어딘가에서도 죽은 뒤, 다시 살아나고 계실지도 몰라. 우리의 허수아비 가짜 황제가 말이야.”
나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물었다.
“가짜 황제라면, 진짜는 따로 있다는 말인가?”
“어디인지는 나도 몰라. 어디 있는 누군지도 모르고. 하지만 죽고 나면 어딘가에서 새로 나타나는 폐하를 진짜라고 말할 수는 없지. 내가 황실에 대한 충성심이 그래도 엿 바꿔 먹을 정도는 있거든.”
정무에 등장하는 일은 거의 없고, 대부분 허수아비로 활동한다는 황제에 대한 설명이 이어졌다.
대체 황제의 정체는 뭘까?
그 허수아비를 만들어 내는 자의 정체는 뭘까?
‘애벌레도 아니었는데.’
기스-제-라이가 죽인 황제의 시체는 엄연히 평범한 인간.
황제와 문지기 회의 구성원들의 상태가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건 명백하고.
‘한쪽의 비밀을 알아낼 수 있다면”.’
자연스럽게 다른 쪽도 엮여서 알아낼 수 있으리라는 확신이 들었다.
점점 더 궁금증이 더해 갔다.
나는 황제가 기거한다는 내궁을 가리키며 물었다.
“여기는 아무도 못 들어간다고?”
“응. 외곽과 외궁 입구까지는 근위대가, 내궁 입구는 유령이 담당하고 있지만, 경비를 총괄하는 유령 3위와 4위 조차도 내궁 안으로 들어갈 수는 없어.”
“그럼 내궁 안은 누가 지킨다는 이야기지?”
“아무도. 경비가 지키는 게 아니야. 바깥에서 구조를 오래 연구해 봤지만, 아무래도 살아 있는 결계가 자체적으로 내부를 수호하고 있는 것 같다.”
“한번 꼭 가보고 싶은데……
시아도 내 말을 예상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내궁 입구까지는 안내해 줄 수 있다.” 그때 였다.
〈주의해라.〉
보티스의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비브리오와 함께 입구까지는 들어가 봤지만… 일리엔의 본전本殿급 결계다. 정상적으로 파훼해도 결계 내의 모든 마魔를 용해해 신력으로 전환하는 공방이다.〉
〈그 결계는 지역 전체를 감싸서 일리엔의 ‘시선’에 가둬 버린다는 개념. 신의 눈 위에서 움직이는 것과 마찬가지다. 비브리오가 오로지 생문生門만을 밟았음에도 그 위에 있는 것만으로도 스트레스를 받았다.〉
〈나도 위험한가?〉
〈핵심부는 비르폰과 예메라의 결계가 겹쳐 쌓여서 형성되어 있는 것 같아. 세계 위에 결계를 쌓는 게 평범한 방식이라면, 이건 결계 위에 결계를, 다시 그 위에 결계를 쌓아 놓은 상태지. 그 부분은 절대로 접근하지 않는 게 좋다. 아무리
너라도 무리니까.〉
‘ 으음.’
직접 안에 들어가 본 보티스의 진지한 경고가 망설여진다. 하지만 지금이 기회가 아닐까?
‘언제 또 공작이 없을지 알 수 없어.’
게다가 황궁 안쪽의 길을 아는 시아의 협조도 얻을 수 있는 상태고.
수도에 기거하는 탑주급 마법사들도 전쟁으로 차출된 상태.
‘가야 해.’
나는 마음을 정하고 시아를 바라봤다.
“안내를 부탁하지.”
- 파앗!
황궁이 있는 방향으로 향했다.
골목길 저 멀리서부터 강력한 결계가 느껴진다.
동서남북으로 수천 미터의 면적.
넉넉히 수백 채의 건물이 들어갈 수 있을 법한 넓이가, 고정된 짙은 안개에 가려 전혀 보이지 않는다.
수많은 진법을 돌파해서 외궁 입구에 도착했을 때였다.
〈조심해라! 그래도 뭐 괜찮은 걸 발견하면 반드시 나에게 산제물로 바쳐야 한다! 마취 같은 건 시키지 마라. 오랜만에 싱싱하게 먹고 싶단 말이야.〉
……
부탁을 끝으로 보티스의 기운이 팔찌에서도 사라져 버렸다.
이곳을 견딜 수 없어서 완전히 떠나 버린 듯하다.
“들어가자.”
시아는 나를 곧장 황궁 안으로 안내했다.
어느 곳에서는 주문을 외웠고, 어느 곳에서는 규칙에 따라서 담을 빙빙 돌며 기관장치를 움직이기도 했다.
‘외궁이 이 정도라니.’
— 위이잉.
기계음이 울렸다. 시아의 움직임에 따라서 지금까지 지나온 곳에서는 붉은 빛이 생겨나고, 앞쪽에서 고정 되어 있던 안개가 걷히며 길이 열렸다. 직접 결계 안에 들어와 보니 단순히 시야를 가리는 안개가 아니었다.
‘빛, 열, 소리……
안개는 내부에서 무수한 기척 자체를 조작하면서 덮어 버리고 있었다. 은폐가 아니라 무수한 정보량으로. 만들어진 기척들은 흐릿해졌다가 또렷해지기가 자유자재였다. 실로 여러 개의 결계가 맞물려 돌아가는 것 같았다.
‘내 수준으로는 무리겠어.’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는 길로만 들어갔는데도 사방이 막막하게 느껴 진다. 티를 다 내고 억지로 전부 부수면서 돌파할 수 있을지는 모르 겠지만, 혼자서 정상적인 길을 찾는 건 불가능해 보인다.
그 순간이었다.
“어이쿠!”
앞에 갑자기 안개가 끼면서, 천천히 걸어가던 시아가 다가오던 누군가와 부딪혔다.
시아는 한 걸음도 움직이지 않았지만, 그녀와 부딪힌 자그마한 체구의 남자는 뒤로 엉덩방아를 찧었다.
“죄, 죄송합니다.”
남자는 뭐에 부딪힌지도 모르고 사과를 내뱉었다. 시아와 나는 몸을 숨긴 채 상대를 바라봤다.
이제 보니 머리가 반쯤 하얗게 센 노인이었다.
키는 160 정도로 작았고, 입고 있는 옷은 제법 격식이 있었지만 작은 키 탓에 몸과 맞지 않아서 조금 우습게 느껴졌다. 혼자 여러 벌의 옷을 운반하고 있었는데, 시아와 부딪혀 튕겨 나간 탓에 떨어트린 옷을 혼자 낑낑대면서 줍고 있었다. 노인이 낑낑거리며 옷을 수습하고 지나간 뒤 나는 시아를 바라봤다.
“어떻게 된 건가.”
은폐의 가호가 작동하지 않는 것과 상관없이, 지금까지는 누구와도 마주치지 않고 자연스럽게 지나왔다. 본신의 은신술만으로도 그 정도는 충분했다. 외궁 바깥부터 근위대가 깔려 있었지만 모두 눈 뜬 장님으로 만들어 왔다.
하지만 누군가의 눈에 띈 것도 아니고 아예 인지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부딪힌 것이다.
“진법 파훼를… 실수해서 엉뚱한 장소에 나와 버린 것 같다.”
시아가 주위를 둘러보고 말했다.
“방금 부딪힌 노인은 누구지?”
“내궁에 사는 사람들의 옷을 담당 하는 관리야. 무슨 자작이던가. 이름 까지는 기억하고 있지 않아. 내궁 쪽은 바깥과 출입이 거의 없을 텐데 하필 지금 마주치는군.”
“출입이 거의 없어?”
“폐하와, 음식이나 의복을 담당하는 정해진 인원 외에는 내궁 바깥으로 잘 나오지도 않지. 재미있는 건 의약품의 출입까지도 없다는 거야.”
“약품이 없다고?”
“그래. 황실 주치의가 들락날락 하면서 조달해야 할 텐데 말이야. 아픈 인간이 하나도 없을 리는 없는데 이상하지?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는 나도 모른다고.”
……
문득 노인이 사라진 곳을 흘끗 바라봤다.
왠지 허무하게 놓쳐 버린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는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표정과 몸짓으로 넘어졌고, 낑낑거리면서 옷을 챙겼다.
시아조차도 의심하지 않고 자기 실수라고 생각할 정도로 자연스럽게.
그리고 우리에게 시선도 주지 않고 허공을 허우적거리다 일어나서 제 갈 길을 갔다.
하지만 이미 황궁의 결계 안으로 까마득히 사라져 버린 뒤였다.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내 시선을 흘끗 쫓은 시아도 뭔가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가, 말을 이었다.
“안내하겠다.”
노인과 부딪힌 뒤 더 조심스럽게 안으로 들어갔다.
불상사는 한 번으로 끝났고, 내궁에서 가장 가까운 곳까지 금방 도착할 수 있었다. 안개는 무게감이 느껴질 정도로 짙고 빽빽했지만, 전각들을 완전히 가리지 않고 묘하게 감싸고 있어 몇몇 전각은 형태가 보였다.
“저기가 황제가 있는 곳인가?”
“그래. 이제부터는 나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른다. 네가 판단해야 돼.” ……
지금까지가 막막해 보였다면.
앞쪽의 내궁은 우리를 완강하게 밀어내는 것처럼 느껴졌다.
아마 실제로 밀어내고 있는 건 아닐 것이다.
하지만 그곳에서 느껴지는 불길한 기운이 나를 뒷걸음 치고 싶게 만들 었다.
‘들어가면 안 된다.’
누구의 조언을 듣거나 스킬을 사용 하지 않아도 금방 알 수 있었다.
하나씩 정보를 쌓아 나가고 있는 지금 상황에서는 절대 여기로 들어 가면 안 된다. 심지어 모든 게 망해 버린 자포자기한 상황이라고 해도 왠지 이건 틀린 선택지 같았다.
베트라스도 연락이 되지 않고.
보티스도 들어가지 말라고 경고하고 사라졌다.
눈앞의 내궁 입구를 보자 레나와 루-륨 탈취 작전을 수행하다가 갇혔던 잿빛기사의 결계가 떠올랐다.
지금은 그때 구출해 줬던 아이작도 없다.
“돌아가자.”
퍼뜩 정신이 들었다.
이미 벌써 황궁의 안개 속을 헤매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지금?”
시아는 약간 아쉬운 듯도 했지만, 나는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오늘은 여기서 만족한다. 돌아가자.”
질척거리는 듯한 내궁의 기운을 느끼며, 긴장하면서 천천히 몸을 돌렸다. 어딘가에서 살랑거리는 나뭇잎 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다.
지금까지 밟아 왔던 길을 그대로 뒤짚어 돌아나갔다.
외궁 바깥으로 나가서, 황궁에서 수 킬로미터 이상을 떨어지고 나서야 목까지 차 있었던 황실의 안개가
떨어져 나가는 것 같았다.
……
나는 잠시 고민한 끝에 결론을 내렸다.
‘지금 안전하게 할 수 있는 걸 하자.’
굳이 무리하지 않더라도 할 수 있는 게 많다.
안에 있는 게 세 여신과 관련된 결계라면.
세 여신의 세력들에 대해 조사하는 것도 우회적인 방법이다.
‘조사해 줄 유령은 많으니까.’
그리고 그 유령들의 효율을 단번에 폭발적으로 늘릴 수 있는 비책도 있다.
“보티스.”
〈왜 그러느냐.〉
“유일한 계약자로서 요청한다. 비늘 좀 뜯어 줘. 넉넉하게.”
거리의 제약 없이 통신이 가능한 압도적인 효능.
제 몸을 숨길 수 있는 정보집단인 유령들과 결합된다면, 얼마나 엄청난 효율을 발휘할지는 간단히 상상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