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해골병사는 던전을 지키지 못했다-449화 (449/458)

533화 신이 원하는 것 (31)

<…….>

처음으로 보티스에게서 차가운 분노가 느껴진다. 허세나 위협 따위가 아니다. 한순간, 손익 같은 건 상관 없이 모조리 엎어 버리고 싶어 할 것 같은 감정이 팔찌로부터 느껴진다.

이건 좀 무서운데.

내가 유리한 상황이라고 너무 핍박 하는 것도 좋지 않다.

간접적인 원한이야 많이 쌓였지만, 어쨌거나 한동안은 계속 같이 가야 하는 녀석 아닌가?

“괜찮은 제물을 발견하면 너에게 주겠어.”

〈공허한 말이군.〉

짧은 대답에 불과했지만 예전과는 무언가 달라져 있다.

여기서 잘못 대답하면 정말 보티스가 비뚤어질지도 모른다.

“비브리오도 쓰러트린 나다. 다른 신이나 마왕의 제사장급을 사냥하는 것도 어려운 일이 아니지. 지금부터 생기는 한 번의 사냥감을 네가 원할 때 반드시 너에게 공양하겠다.”

나름 진지하게 말한 덕분인지 보티 스도 조금 누그러진 것 같았다.

〈•••그건 알았다. 하지만 지금은 뭔가 주고 싶어도 힘이 없어서 꺼내 줄 수 없어. 일단 뭔가를 내놔라.〉

생각해 보면 자연스러운 이야기다. 사실 지금까지 받은 비늘이나 은폐의 가면 같은 건 모두 비브리오가 바친 무수한 제물의 결과다. 피 냄새가 짙게 밴 물건들인 것이다.

“흐음……. 이건 어떠냐?”

- 스르륵.

나는 비역에서 주워 담은 금괴와 보석들을 내놓았다. 불순물이 섞이지 않은 1kg짜리 순금 덩어리가 싯누런 빛을 발했다. 보석들도 최고 수준의 기술로 정밀하게 세공한 화려하고 아름다운 것들이었다. 누가 봐도 극상품이라고 할 만했다.

〈농담하는 거냐? 하찮구나. 그따위 것은 말파스에게나 던져 줘라. 게다가 인과율에 전혀 영향을 끼칠 수 없는 무가치한 물건들이다.〉 진심인 것 같다.

〈공물이라면… 제대로 피와 절규가 깃들어 있는 녀석으로 바치도록 해라. 모든 걸 넘어서 그만한 가치가 있는 귀한 물건이라든지. 나를 대체 뭘로 생각하는 건지……•>

‘취향 참.’

하지만 보티스도 상당한 불쾌감을 느끼고 있는 듯하다. 역시 비브리오를 자기에게 바치지 않은 일에 대한 감정이 아직 풀리지 않은 느낌이다. 공물 제시도 조금 더 신중하게 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다.

‘뭐가 있더라?’

나는 인벤토리에 있는 물건들을 하나씩 떠올려 보기 시작했다.

먼저 애슈턴의 책을 여러 권 가지고 있다. 하지만 이걸 보티스에게 바치면, 회귀할 때마다 계속 사용할 수 있는 애슈턴의 책이 사라져 버리게 된다. 지금 내 수준에서 마력이 부족한 건 아니지만, 그래도 스탯을 꾸준히 올릴 수 있는 아이템을 굳이 포기할 필요는 없다.

‘애초에 이걸 원할지도 미지수고.’

딱 봐도 귀중한 물건이라면 역시 기스-제-라이의 단검이다. 용의 힘을 품고 있는 붉은 단검은 침식된 마계의 무리를 먼지처럼 쓸어버렸고, 흑과 백의 단검을 양손에 들고 폭주시키자 제3좌인 바싸고의 힘마저 튕겨내고 타격을 입혔다. 좋아하든 싫어하든 눈이 있다면 보티스가 이 단검의 가치를 몰라볼 가능성은 없다.

‘하지만 절대 못 주지.’

무엇보다 기스-제-라이의 유품 이기도 하고, 거기에 담긴 가치를 생각한다면 애초에 거래 대상으로는 생각할 수조차 없다.

캐빈 애슈턴이 남긴 〈유산〉과 밀접한 관련이 있고, 일곱 개를 모아가는 과정에 있는 황금 벌레 모형 같은 경우도 마찬가지로 논외.

‘혹시 이건 어떨까?’

나는 인벤토리에서 주황색 램프를 꺼냈다. 한 손에 쏙 잡히는 크기의 동그란 램프였다. 완만한 곡선이 둥글고 넓게 퍼지는 만듦새가 뛰어 나다.

‘보는 것도 오랜만이군.’

용사상점에서 구매한 램프였다. 이걸로 바알의 신전에서 휘하 사령관인 이굴쿠의 마기를 흡수했다. 제1좌 바알의 측근이 가진 마기를 흡수할 정도이므로, 마왕이라면 그 가치를 간단히 알아볼 수 있으리라.

‘그러고 보니… 용사상점 포인트는 얼마나 쌓인 거지?’

상점 확인, 이라고 작게 머릿속으로 읊조린 순간이었다.

[구매력 2.5%를 돌파하셨습니다.

소모품 구매가 해금됩니다.]

[구매력 5%를 돌파하셨습니다. 무기 구매가 해금됩니다.]

여기까지는 이미 본 내용이다. 하지만 그 아래로 아직 확인하지 않은 메시지들이 반짝거리며 무수히 쌓여 있었다.

[구매력 7.5%를 돌파하셨습니다. 갑옷 구매가 해금됩니다.]

[구매력 10%를 돌파하셨습니다. 스탯을 구매할 수 있게 됩니다.]

[구매 력 15%를 돌파하셨습니 다. 스킬을 구매할 수 있게 됩니다.]

[구매력 20%를 돌파하셨습니다. 검색 기능이 활성화됩니다.]

[유니크 등급 이상의 아이템은 검색으로만 찾을 수 있습니다.]

[서비스 검색 횟수가 5회 제공됩니다.]

[검색 횟수는 사용하신 포인트에 따라 추가 제공됩니다.]

[구매력 25%를 돌파하셨습니다. 탈것을 구매할 수 있게 됩니다.]

[구매력 30%를 돌파하셨습니다. 레시피 및 특수 재료 구매가 활성화 됩니다. 특수 재료는 재고에 따라 구매가 제한됩니다.]

[구매력: 379.45%]

[보유하고 계신 포인트에 비해 상점 이용이 몹시 저조합니다.]

[포인트 보유만으로는 고객 등급이 제한됩니다.]

[사용하신 누적 포인트에 따라 이후 추가 혜택이 주어집니다.]

[...이후 추가 구매가 해금됩니다.]

‘379%? 이게 도대체 무슨……

터무니없는 숫자에 놀라 멍하니 서 있었다. 전혀 생각하지도 못했던 상황이다. 저 정도의 포인트가 있으면 대체 뭘 할 수 있는 거지? 일단 가만히 메시지들을 보며 마음을 가다듬는다.

그동안 있었던 일을 잠시 돌이켜 보며 기억을 정리했다. 용사 상점의 구매력은 던전을 클리어하면 쌓인다. 그리고 세계부정을 습득한 이후 나에게 던전은 거의 세상 전체라고 봐도 좋았다.

‘네크론 신사회.’

상태창을 무시하는 동안, 그 녀석들을 정리하고 비브리오까지 처리하면서 포인트가 꽤나 쌓일 거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용사 포인트가' 그렇게 쉽게 얻을 수 있는 건 아니다. 그라스미어 같은 거대한 도시를 지배하면서도 6%대의 구매력 밖에 획득하지 못했다.

도시의 경우를 생각하면, 포인트가 꾸준히 조금씩 들어오는 지배보다는 살육이 더 많은 포인트를 준다. 그러면 왜 이런 폭발적인 포인트가 들어왔는지가 설명된다.

동방.

수천 마리의 요괴에게 휩쓸려 있을 때.

나는 그 어느 때보다도 많은 〈던전〉을 공략했다.

의식을 잃어버리고 오직 잔혹한 힘으로만 가득해서, 인간 수천 명이 모여 사는 도시를 통째로 사냥했다.

물에 빠트려 죽이고, 불에 태워 죽이고, 떨어트려 죽이고, 베어 죽이고, 찔러 죽이고, 졸라 죽이고, 중독시켜 죽였다.

수년 동안 대륙의 절반을 휩쓸었다.

그리고.

저지른 죄는 천벌 대신 379.45%의 구매력이 되어 허공에 떠올라 있다.

지금까지 접한 그 어떤 존재보다 상태창은 절대자에 가깝고.

상태창에게는 모든 게 포인트일 뿐이고.

더 쓰고, 더 모으라고 재촉하고 있다.

깊은 죄의식과 비뚤어진 기대감, 희미하게 스멀거리는 불안감이 마음을 자극한다.

〈그 램프는 그럭저럭 괜찮군.〉 보티스의 중얼거림이 나를 멍한 생각에서 잡아챈다.

〈희미하게 바알의 냄새가 난다. 그 녀석에게서 비롯된 마기를 흡수한 건가? 나에게 바친다면 기꺼이 먹어 주겠느니라. 하지만 살짝 부족한 것 같기도…….>

나는 고개를 저었다.

“이건 안 줄 거야.”

힘의 램프는 계속 가지고 있을 생각이다. 단순히 포인트만으로 구매할 수 있는 물건이 아니다.

세계부정 최초 구매자의 특전이기도 하고, 계속 힘을 빨아들여서 진화 시킨다면 혼의 램프가 된다는 설명이 붙어 있다. 아무 단서도 없이 아이템 이름만 보고 하는 추측에 불과하지만, 검은 구슬로 빨려들어간 동료들을 어쩌면 이 램프로 다시 빼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어차피 다른 어디에도 힌트가 없으니 지푸라기라도 잡아 봐야 한다.

〈뭐? 그럼 왜 꺼낸 거냐.〉

“다른 원하는 걸 말해 봐.”

〈호오……. 마치 말하면 줄 수 있을 것처럼 말하는구나?〉

“최대한 구체적으로 묘사해 봐. 너무 터무니없이 가치가 높은 건 말고, 적당히 네가 힘을 얻을 만한 공양물을.”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는군…….>

잠시 망설이던 보티스가 길게 말을 이었다.

〈그렇다면… 구불구불 돌아서 감싸안을 만한 구체… 농밀한 원한과 저주가 담긴 물건이라면 더욱 좋다…. 오랜 세월 동안 강력한 정령이 갇혀 있는 상자 같은 게 좋겠군… 후후… 그 절규가 상자를 빙빙 감싸고 있는 내 살갗에 닿는다면…. 생각만 해도 자극적이구나. 하지만 그런 걸 네가 구할 수 있겠느냐?〉

“기다려 봐.”

나는 용사상점을 띄웠다.

‘검색.’ 생각하는 즉시 상점창 위에 작은 창이 겹쳐진다. 오른쪽 아래를 보자 아이템을 검색하는 방법이 자세히 설명되어 있었다. 이런 것까지 되나 싶을 정도로 기능적인 체계를 갖추고 있었다.

‘봉인, 악령, 저주. 다 포함하고, 무기류는 빼서.’

[검색 결과 8개.]

떠오른 메시지들을 쭉 읽어내렸다.

[불타는 숲의 유령] - 설명 : 이 책은 무참히 살해당한 뒤 숲에 버려진 상인이 다시 일어난 뒤의 이야기를 적은 것이다. 성실과 신용으로 자신을 증거하던 상인은 이제 저주받은 악령이 되어 버렸다! 상인은 처절한 복수를 이뤄낼 것인가? 누군가 그를 달래 승화시킬 수 있을까? 혹은 강력한 사제에게 다짜고짜 봉인당해 다시 묻혀 버리는 것은 아닌가? 이제 페이지를 넘길 시간이다.

‘이게 뭐야……

아이템 이름뿐만 아니라 설명까지 포함하는 검색이었기에 전혀 엉뚱한 것들도 있었다.

네 권은 책이고, 하나는 악령을 봉인했다는 사제의 의복.

‘앞으로는 책도 빼야겠군. 그림도 있어?’

전설적인 실력을 지닌 화공이 산적 들에게 가족을 모두 잃고 그렸다는 그림도 떠올랐다. 세상을 지옥으로 만들고 싶다는 생각으로 그린 그림 에서, 온갖 기괴한 모습의 귀신들이 바깥으로 기어나왔다는 설명이 붙어 있다.

‘흥미롭긴 해.’

하지만 내가 찾는 물건은 아니다.

다음 선택지를 바라봤다.

[우세라그의 관]

- 설명 : 무엇이든 되고 싶었던 아크 리치 우세라그가 자신의 뼈와 지팡이, 수정구, 라이프베슬을 베즈 모알륨에 융해시켜 만들어 낸 액체. 하지만 모든 것이 될 수 있다는 것은 자신을 잃어버리는 것이다. 스스로가 무엇인지도 잊어버린 그는 액체에 봉인된 악령이 되어 버렸다. 이 액체는 모든 형태를 취할 수 있지만 오직 타의에 의해서만 기능한다. 우스라그는 액체에 갇힌 채 자신과 접촉하는 주인의 요구를 따라 움직이면서도, 명령을 내리는 주인을 질투하고 저주할 것이다.

‘나쁘지 않네.’

지금까지 본 것 중에는 제일 보티스가 말한 것과 가깝다. 어떤 형태든 취할 수 있다면 언제든 녀석이 말한 형태가 되어 빙빙 감고 다닐 수 있지 않겠 는가?

그러나.

- 가격 : 135,766포인트 말도 안 되게 비싸다.

동방의 반을 쓸어버리며 모은 포인트의 1/3 이상을 사용해야 하는 구매.

물론 아크리치라는 강대한 전력을 철저히 노예로 부릴 수 있다는 걸 생각하면 합리적인 가격인지도 모르 지만.

‘어차피 나보다 약할 거고…. 딱히 전력이 필요한 시기는 아닌 데다, 보티스에게 주기엔 더욱 아깝지.’

남은 선택지는 하나다.

[방황하는 진흙(일부)] - 설명 : 다수의 행복을 위해 인신공양된 육괴肉傀들이 바쳐지기를 거부하고 세상을 떠도는 덩어리. 어떠한 위로도 거부하고 유계와 지상 사이를 떠돈다. 뭉쳐진 원념들은 서로가 서로를 오염시켜서 완전히 돌이킬 수 없는 증오가 되어 버렸다. 자아를 가진 망령, 악령이 아닌 무수한 악의와 저주의 집합체이기에 진혼鎭魂은커녕 봉인조차도 어렵다. 가까이 둘 경우 금세 진흙을 뒤집써서 미쳐 버리게 되므로 극히 주의해야 한다.

‘진흙… 이라.’ 문득 비역 지하에서 봤던 진흙이 떠오른다.

허공을 긁어대던 진흙. 유체 같기도 기체 같기도 하며, 진득거리며 머릿속에 직접 말을 전달하던 그 섬뜩한 진흙의 정체는 대체 뭐였을까.

〈아주... 잘... 왔... 다…〉

〈함께… 해야… 한다…〉

〈우리는… 하나…〉

〈나는... 영원히… 위대해져야…〉

주위의 공격 따위는 모조리 무시하고 다가오던 진흙.

가까워지는 순간.

모든 게 망가질 것 같은 느낌이었는데.

- 달그락.

고개를 흔들었다.

‘이게 그건 아니니까.’

지금 상점창에 떠 있는 건 어떻게 봐도 보티스가 말한 바로 그런 물건 이다.

‘가격도 완벽하고.’

어떤 효용가치도 없이 무시무시한 부작용만 잔뜩 있는 물건인 탓인지, 고작 6,666포인트밖에 하지 않는다.

“구매한다.”

- 꾸르르르륵......

검붉게 덮인 덩어리가 허공에 휘감겨 온다. 모든 원망과 증오, 이제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는 악의가 이리저리 형체를 갖춰 간다.

〈어...? 어어…? 자, 잠깐만…!〉

‘휘말리기 전에 어서 떠넘겨야겠어.’

“시간이 없어. 공양한다. 받아라.”

〈대… 대체 어떻게 이런 걸……!>

- 꾸륵. 꾸르르륵.

움찔대는 진흙이 서서히 팔찌에 스며들면서 사라져 갔다. 팔찌 전체가 진동하며 탐욕스럽게 진흙을 집어 삼켰다. 말도 하지 않고 집중했지만 한 번에 삼키기 조금 버거운지 시간이 걸렸다.

〈잠깐만 기다려라…….> 십여 분이 지나고, 진흙을 모조리 흡수한 보티스는 투덜댔던 아까의 기색은 온데간데없이 사근사근한 목소리로 변해 있었다.

〈정말…. 만족스러워. 너…. 정체가 뭐냐? 궁금해서 참을 수가 없군…. 어쨌건 너도 지독한 녀석이라는 건 알겠구나…. 후후후….〉

“무슨 소리지?”

〈마지막 의지로 초월체에게 바쳐 지기를 거부한 인간의 악의들을 모아서 내게 공양하다니…….>

……

〈비슷한 게 더 없는 거냐? 비늘은 얼마든지 떼어 줄 수 있다. 거래를 원하면 말만 하거라.〉

“끝이야.”

다시 검색해 봐도 재고가 다 떨어 지기도 했고, 보티스의 말을 듣고 보니 왠지 찝찝했다. 진흙이 된 원혼들에게 못 할 짓을 한 건가 싶었다. 하지만 진흙을 먹은 보티스는 민감하게 내 심경을 알아챈 것 같았다.

〈어차피 결코 진혼되지 못할 존재 들이다. 내가 흡수하는 것도 아니니라. 그저 무한한 악의와 구원되지 못할 증오를 곁에 두고 즐길 뿐이지.〉

그 광오한 말에서 새삼 느껴졌다.

‘ 마왕••••••

상대는 마계의 16좌의 일원.

추악공 보티스다.

미치는 것 따위는 상상도 하지 않는다는 데서 내가 계약한 상대가 누구인지가 실감된다.

‘이 녀석, 이대로 계속 키워 줘도 될까.’

앞으로 보티스에게 뭔가를 먹이는 일은 역시 최대한 지양해야 할 것 같았다. 무거운 기분으로 생각에 잠겨 있을 때, 팔찌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럼, 합당한 대가를 치뤄 볼까. 비늘만으로는 부족하겠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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