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7화 신이 원하는 것 (35)
"……."
물론 잘 알고 있다.
세상이 사라지는 풍경.
짧은 말이지만.
녀석이 언급하는 게 어떤 이야기인지 정확히 이해하고 있다.
“이 세상이… ‘처음’으로 돌려지는 걸 말하는 건가?”
수도 없이 경험해서 알고, 그것 때문에 지금 여기까지 와 있다.
그 순간이었다.
- 촤르륵.
말하는 중간부터 희고 긴 천자락이 펄럭이더니 팔찌에 칭칭 휘감겨 왔다. 보티스가 깃든 팔찌를 빈틈없이 감아 둔 녀석은 눈을 반짝거렸다.
“맞아. 역시 제대로 알고 있군. 지금부터는 우리끼리 이야기하지. 밖으로 새어 나가도 될 이야기가 아니다.”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보티스나 다른 마왕들이 회귀에 대해 언급하는 걸 들어 본 적은 없다. 그들이 알았을 때 어떤 파장이 발생할지, 어디로 새어 나갈지는 나도 모른다. 최소 인원의 정보 공유라는 하얀 후드의 조치는 현명한 셈이지만.
‘•••계속 놀라게 하는군.’
힘을 소진해서 사라진 베트라스는 그렇다고 쳐도, 방금까지 이야기하던 보티스를 속으로 불러 봤지만 대답 조차 없다. 마계에서도 나름대로 상위 서열이고, 지금까지 지상계에 가장 큰 영향을 끼쳐 왔던 마왕을 단번에 차단해 버렸다는 이야기다.
‘설마 이 녀석……
나처럼 회귀를 하는 걸까.
회귀에 대해서는 아이작조차 내가 알려 주기 전에는 모르고 있었다.
‘경험하지 않으면 아는 건 불가능할 것 같은데.’
이런 이야기를 슬쩍이라도 먼저 꺼낸 존재는 십수 번의 생을 경험하면서 완전히 처음이다.
도저히 원인을 알 수 없던 현상을 마침내 파악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혹시 너도……?”
거기까지 말했을 때였다.
빠르게 결계를 덮어씌워서 주변 소리까지 차단한 녀석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네. 세상이 다채롭게 움직이다가, 문득 어떤 경고도 없이 모든 게 사라지지. 알고 있던 지식, 감정, 인연이 째깍거리는 진자와 함께 다시 시작 하는 것. 몇 번이고, 몇 번이고……. 지금도 끝나는 순간밖에 되짚어내지 못하지만 말이야.”
- 달그락.
거기까지 듣고 흠칫 놀라 몸이 굳어 버렸다.
후드가 나를 바라봤다. 시선은 그대로였지만, 무언가 눈을 ‘뜬’ 것 같은 느낌이었다.
“확실히 자네도 알고 있군.”
물론 알고 있다.
하지만.
조금 다르다.
“너는, 네 의지와 상관없이 세계가 다시 시작한다는 이야기인가? 나는… 내 죽음이 기점이다.”
망설이지 않고 그대로 패를 까 버린다.
지금까지 다섯 명도 되지 않는 동료들에게만 했던 이야기를 할 정도로.
이 녀석이 반복되는 세상을 알고 있다는 사실이 참을 수 없이 반가웠다.
“죽고 나면 항상 정해진 시간으로 돌아가지.”
다소 충동적인 행동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내 패를 까야 녀석도 더 이야기를 해 줄 것이고, 이건 꼭 들어야만 하는 얘기다. 녀석이라면 어째서인지 믿을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진실... 이군.”
그 말을 뱉고 하얀 후드는 한동안 침묵에 빠진다.
“내게는… 물론 내 의지와는 전혀 상관없이 벌어지는 일이다. 대부분의 기억도 빨려들어가지만 희미하게 흔적을 남기는 법을 익혔지.” 확실히 나와 다르다.
문득 의문이 생긴다.
‘내 죽음 이후의 세계는 어떻게 흘러가지?’
당연하게도 죽음 이후의 세계는 한 번도 경험한 적이 없다.
항상 처음으로 되돌아갔으니까.
‘설마•…”
세상이 그 자리에 계속 남겨진 게 아니었다는 말인가.
수많은 세계선상에서 나만 탈락하고, 새로운 세계선에 진입했다고 여겼으 며.
항상 남겨진 세계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비브리오에게 개조된 루비아를 죽이지 못하고 생이 끝났을 때.
그녀가 남은 세계에서 받을 고통을 상상하고 무한한 죄책감을 느꼈다.
〈어떤 경고도 없이〉세상이 불규칙 하게 사라지는 거라면.
‘내가 죽을 때마다 세상이 다시 시작했다는 건가?’
내가 대체 뭐라고.
나 같은 게 뭐라고 죽음을 기점으로 모든 세계가 다시 시작한다는 말인가.
멍하니 서서 충격적인 가설에 빠져 있다가, 힘겹게 상대에게 질문을 던진다.
“혹시 짧으면 며칠… 아니면, 하루도 가지 못하고 세계가 다시 시작할 때가 있었나?”
말 그대로다. 몇 시간조차 버티지 못하고 죽은 적도 많았다. 내 죽음이 기점이라면 그래야 한다.
“내가 쫓을 수 있는 흔적들은 지극히 희미하다. 말했듯이 되짚을 수 있는 건 최후의 순간뿐이지. 하지만 이제 부터는 좀 나은 답변을 줄 수 있을 것 같구나. 지금 네게 귀속되어 있는 매듭은… 내가 이 수레바퀴에서 처음으로 보는 뚜렷한 흔적이니까.”
후드가 말을 이었다.
“〈옛 세계〉에서 나는 깨끗하게 사라졌으나, 너와 함께하는 그 매듭만은 사라지지 않고 나에게 흔적을 전해 주고 있구나.”
‘역시 그냥 준 게 아니었어.’
인벤토리에 묶은 매듭은 단순한 호의가 아니었다. 당시의 녀석도 나에게서 뭔가를 짐작하고, 나중을 위해서 특정한 기록을 해 둔 것이다.
몇 년 따위가 아니라 다음 생을 상상하고 매듭을 묶어 둔 녀석이 섬뜩하게 느껴진다. 당장이라도 이걸 떼어 버리고 싶었지만, 적대적으로 생각하기에 녀석의 능력과 혜안은 상상 이상으로 압도적이다.
‘반드시 잡아야 해.’
녀석에게 강한 필요를 느낀다. 지금껏 십수 번을 죽고 다시 살아나면서도 세계의 재시작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건 처음이었다.
‘신격이라고 했어.’
세 여신이 지배하는 지상에서 산몸으로 자유롭게 움직이는 것도 그렇고. 마계침식 지역에서마저 더없이 능숙한 행동을 보여 줬다. 게다가 여기까지 말했는데도 놀랄 정도로 담담하다. 연꽃처럼 초연하게 바라보는 나를 모습이 오히려 이쪽을 흔들리게 만든다.
‘신 중에서도… 그냥 평범한 신이 아니야.’
처음 만날 때부터 비범한 모습이었지만 지금 보니 그 정도가 아니었다. 위험을 무릅쓰고라도 곁에 두고 도움을 받아야 할 존재였다.
“네 정체는 대체 뭐지?”
후드가 작게 어깨를 으쓱했다.
“나는 그저 이 지옥의 수레바퀴를 여행하면서… 무연無緣의 만생萬生을 구하려는 자. 그것뿐이라네.”
“그 몸은 어떻게 유지하는 거냐? 인간과 계약한 건가? 화신인가? 어떻게 지상을 아무렇게나 다니고 있는 거지?”
“비밀일세.”
“•••이름은?”
“그것도 비밀이라네.”
후드가 손을 슬쩍 내저었다.
“지금은 더 가까워지고 싶지 않네. 서로 거리를 유지하도록 하지. 자네는… 수레바퀴를 벗어날 수 있는 존재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는군. 기대하겠네. 부탁인지도 모르지.”
“잠깐만!” 나는 슬쩍 뒤돌아서는 녀석을 붙잡았다. 이대로 놓칠 생각은 추호도 없다. 순간 가둬 버릴까, 싶은 생각까지 들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지.’
억지로 붙잡을 수 있을 리가 없다. 애초에 나를 마계 침식지대의 감옥에서 탈출시켜 준 존재다. 조금 전 신격들을 빨아들이는 흡수하는 모습이나, 보티스의 이목을 단번에 차단하는 모습을 보면 오히려 내가 일방적으로 밀릴 가능성이 높았다.
‘생각하자.’
뭘 원할지 떠올려야 한다.
‘뭐에 반응할지……
입에서 저절로 단어가 튀어나온다.
“캐빈 애슈턴.”
"……."
시험해 보기 충분한 미끼다. 언제나 여유롭던 녀석도, 예전에 애슈턴의 책을 보여 준다고 하자 흥분해서 넉넉히 대가를 지불하겠다고 외쳤다. 세상의 온갖 곳을 다 돌아다녔으면서도 애슈턴의 책은 정말 찾기 힘들었 다면서, 세 개의 머리로 탐욕스럽게 독서에 몰입했다.
이번에도, 그렇다.
‘눈빛이 흔들리고 있어.’
“백 권 정도는 있으니까. 전부 읽게 해 줄 수도 있다.”
반짝거리는 눈빛이 나를 노려보고, 이곳저곳을 탐색한다. 녀석이 천천히 말을 꺼낸다.
“자네, 내 취향을 잘 알고 있군.”
"……."
“저번에도 비슷한 거래를 했나 보지.” 정곡이 찔린다.
“매듭을 주기 전… 다른 시간선의 나도 애슈턴의 책을 읽고 이야기를 팔았겠지. 편리하겠어. 네가 수레바퀴를 넘는 자라면, 하나의 대가를 반복해 사용하며 내 모든 정보를 이용할 수 있겠지……. 그렇게 밑천이 탈탈 털리는 건 별로인데.”
할 말이 없어 침묵한다. 그렇다고 대여가 아니라 아예 책을 넘겨주기에는 아까운 마음도 든다.
‘그래도 이 녀석이라면.’
결심을 세우고 입을 열었다.
“아예 줄 수도 있……
방금 보여 준 모습은 충분히 그만한 가치가 있다.
하지만 오히려 녀석 쪽에서 손을 내젓는다.
“자네와 얽힐 경우의 위험부담이 얼마나 클지 상상조차 되지 않아. 특히 지금은 시기가 영 좋지 않거든.”
“시기가?”
“그렇다네. 잊혀신 신들이 이렇게 쏟아져 나오니 그들이 눈에 불을 켜고 특이점을 찾고 있으니까.”
“그들이라면… 바깥의?”
이것까지 알까 싶어 던진 질문에도 녀석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네. 세계를 순서에 맞춰 흐르게 하는 자들이지. 꼬리가 잡히면 무리를 해서라도 이번 세계는 〈폐기〉할 거라고 생각하네. 그리고 새로운 세계에 자네와 엮인 나는 없어져 있겠지.”
비역에서처럼.
빨려들던 나냐우와 아이작.
다시 시작하던 세계가 떠오른다.
‘이 정도로 난장판인 상황을 당연히 두고 보지는 않겠지……
생각해 보면 지금까지 자리를 비웠던 공작도.
잊혀진 신들을 처리하기 위해 움직 이고 있으리라.
‘나도 전쟁을 막는다고 무리하기도
했고.’
하얀 후드는 계속해서 담담하게 설명을 이어 간다. 인물은 물론이고, 마왕도, 신도, 대륙조차도 폐기되거나 조정될 수 있다는 주즉을 차분히 쏟아낸다.
‘ 대단하군.’
순수하게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기억을 가지고 회귀하는 것도 아닌데, 바뀌는 세계의 미세한 흔적을 쫓으 면서 여기까지 추론해 냈다. 그리고 거기에도 전혀 마음이 꺾이지 않고 자신의 길을 가고 있다.
“그러니 나는 자네와 거리를 둬야 하네. 하지만.”
녀석이 처음으로 씩 웃는다.
“내게 준 공양을 이미 받았으니 말이지. 원칙대로면 무작위의 제사는 의무를 가진 거래로 취급되는 게 아니지만, 받은 이상 호의를 베푸는 것도 자유롭지. 호의로 해석될 수 있는 한두 가지 정보는 주겠네.”
저 웃음은 거짓도 기만이 아니라는 느낌이 든다. 저건 말 그대로 호의다. 아마 대다수의 약자에게는 자비라고 생각될지도 모른다.
“좋아.”
계속 신경 쓰였던 걸 묻는다.
“저 신들은 대체 어디서 어떻게 나타난 거지?”
저번 생에는 한 번도 본 적 없는 무리들이고, 베트라스에게 물어봐도 단순히 내 공양 때문만은 아니라고 했다. 뭐가 바뀐 건지 확실히 알 필요가 있다. 후드가 슬쩍 고개를 오른쪽으로 돌렸다.
“동방이 라네.”
“동방?”
“그렇다네. 그곳에서 새로 태어난 신이 유폐의 장막을 잘라냈고, 잊혀졌던 신들이 소란스럽게 쏟아져 나왔지. 거기다 네 공양이 기폭제가 되어서 이들이 한꺼번에 자극을 받고 사방으로 흩어진 거야. 수도에만 있는 것은 아니야. 사방 어딜 가든 한동안 이들을 만날 수 있을 거라네.”
“새로 태어난 신이라는 건… 어떤 녀석인가? 지금 어떻게 됐지?”
언뜻 짚이는 게 있었다.
동방에서 뭔가 바뀐 거라면.
‘ 레안드로.’
이번 생에도 녀석을 만나기 위해 동방으로 향했었다.
녀석은 제국에서 사라졌고.
수천 마리의 요괴를 몸에 넣고 있던 나를 벨 정도였다.
그 당시 이미 신격이 되어 버렸다고 해도 이상하게 느껴지지는 않는다.
“유폐의 장막을 벤 뒤 동방에서 사라졌네. 도망에 성공하지 않았다면 세계에서 영원히 적출당하겠지. 내가 아는 건 거기까지야.” 잠시 침묵하다 물었다.
“내 공양이, 녀석에게도 갔겠지?” 후드가 어깨를 으쓱했다.
“나야 알 수 없지. 나한테 온 비율을 생각하면 다른 특별한 존재는 없었던 것 같기도 하고.”
"……."
레안드로마저도.
사라져 버렸다고 생각하고 싶지는 않았다.
하얀 후드가 말을 이었다.
“주의하게. ‘다음’。] 있다면, 그때는 잊혀진 신들에게 어떤 공양도 하지 않길 바라겠네. 그럼 나는 좀 더 안심하고 너와 깊은 거래를 할 수 있게 되겠지. 그때까지, 조심하도록.”
하얀후드는 멀어져 갔다.
“잠깐!”
“또 뭔가. 오래 머물렀다가는 추적이 붙을까 봐 불안하군……
“다음……. 다음에 너를 만나려면 어떻게 해야 하지?”
하얀후드가 피식 웃었다.
“이 정도로 연이 겹치는 데다… 만큼이나 자네도 이곳저곳 돌아다니는 모양이니 만나기 싫어도 만날 수밖에 없지 않겠나. 자네의 영역에 내 매듭까지 묶여 있고 말이야.”
“그럼 이만. 나는 서쪽으로 가겠네.”
“서쪽으로?”
“풀려난 신들이 사방에서 난립하고 있다고 말하지 않았나. 언제 이번 세계가 폐기되건… 고통받는 자들이 있는데, 계속 움직여야겠지. 자네도 조심하게나.”
총총걸음으로 사라지는 하얀후드를 멍하니 지켜봤다. 내가 회귀를 하기 전에도 얼마나 오랜 세월을 저런 방식으로 살아왔는지 짐작하기 어려 웠다.
저항할 수 없는 수레바퀴가 언제 다시 굴러가는지도 알지 못하고.
그저 눈앞의 순간을 살아내며 방금처럼 하나하나의 생명들을 구원해 왔던 걸까.
신앙 따위는 바랄 수도 없다.
멋대로 바뀌는 길 위에서 후드는 고통받는 것들을 허리 굽혀 줍고 있다. 누가 알아주기를 바랄 수도 없고, 이해받기를 꿈꿀 수도 없다. 수레바퀴가 돌아가면 모두 없었던 일이 된다.
“…여행자라.”
하지만 감상은 금방 사라지고.
〈대체 누구였어! 감각이 완전히 막 혀 있었잖아! 감히… 감히 건방지 게…….>
“그냥 예전에 알던 녀석이야……
보티스의 추궁에 대충 얼버무리며, 녀석이 던져 준 정보에 대해 곰곰이 생각에 잠겨 있을 때였다.
〈수도는 다 돌았어. 지금 일리엔의 애들이랑 같이 있지? 대부분 그쪽에서 흘러나온 잔여물들인 모양이야. 사소한 건 전부 처리 완료했어.〉 시아의 메시지와 함께.
예메라의 사제들을 쫓는 조에서도 메시지들이 계속 도착하고 있었다.
〈동쪽입니다.〉
〈예메라의 사제들은 동쪽, 끝없이 동쪽으로 향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