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2화 신이 원하는 것 (40)
한동안 이 정도로 작정하고 거대한 공격을 해 본 적은 없었다. 쓸 만한 상대도 없었고, 있다고 하더라도 애초에 이렇게까지 맞아 줄 리가 없기 때문이었다. 하나하나를 시전하면서 내가 발휘하는 힘에 스스로도 놀라울 정도였다. 산에 퍼부었으면 봉우리 십여 개는 흔적조차 없어질 만한 압도적인 위력의 공격이었다.
누가 신에게 이런 타격을 입힐 수 있을까?
몇 번이나 회귀를 거듭하면서 쌓아 올린 막강한 힘을 풀어내는 순간에는 도취감마저 들었다.
하지만.
- 꾸르르르륵…….
몇 초도 지나지 않았는데, 순식간에 내가 부순 부분이 채워져 버린다. 마치 애초에 공격했던 것이 신기루 이기라도 했던 것처럼, 사라졌던 게 신기루였던 것처럼 시간을 가로질러 새까맣게 허공에 얽혀 채워진다. 도대체 뭘 노렸으며. 무엇을 어쨌냐고
묻는 것처럼.
- 꾸륵. 꾸륵. 꾸르르륵.
순식간에 채워지는 모습이었다.
실체를 가진 고깃덩어리라면.
이 세계의 물질이라면 절대로 저런 속도로 불어날 수 없다고 생각될 정도였다.
하지만 그것은 굳건하게 허공에 자리잡아, 사방의 얼음을 부수고 구름을 흩트리고 바다새를 잡아먹으면서 솟아올랐다.
‘위로… 올라가고 있어.’ 기둥은 파먹힌 부위를 복구하는 순간조차도 위로 솟아오르며 거대해지고 있었다. 방금의 공격이 최선이었다.
설령 이게 최선이 아니고.
여기서 심지어 두 배로 더 강한 공격을 성공시킨다고 하더라도.
길고 굵고 자라나며, 하늘로 끝없이 솟아 올라가는 저 그림자의 기둥을 한 번에 날려 버릴 방법 따위는 나에게 존재하지 않는다.
달의 힘을 써볼까 싶기도 했지만.
수도에서 한바탕한 이후에 베트라스 부름에조차 응하지 않고 있었고, 보티스가 예메라의 순수한 존재감에 밀려 단번에 튕겨나가 버린 상황에서 솔직히 다른 신격의 힘이 먹힐 것 같지도 않았다.
- 콰광! 콰광!
아무런 방법이 없었기에 오히려 발작적으로 몇 번의 공격을 이어갔다. 물론어떤 공격도 처음의 것만큼 강렬하지는 못했고, 겉에 생채기를 얼마나 내건 시커먼 기둥은 굵고 높아지기만 했다.
그림자들이 반사된 수면을 일그러트린 것도 생각보다 타격이 훨씬 적었다. 한번 수면 아래에서 독자적인 생명을 얻은 그림자들은, 이미 존재하는 것 자체가 쐐기가 되어, 역시 돌이킬 수 없어지는 것처럼 터무니없는 수준으로 늘어나고 재생하고 있었다.
‘이런•…”
시야 전체를 거대한 기둥이 메워가고 있었다.
위에도, 아래에도, 옆으로도 마찬가지 였다. 절망스러웠다. 지금 이어가는 공격도, 혹시 뭘 어떻게 해볼 수 있을 거라는 처음과 같은 희망이 아니라, 그저 눈앞의 상황을 외면하듯이 휘둘러대는 것에 불과했다.
‘무리야.’
내심 모든 걸 쏟아부으면 어느 정도 상대해 볼 수 있다고도 생각했다. 상대하지 못할 건 이제 거의 없다고 자부심을 느끼기도 했다. 하지만 현실은 너무나도 달랐다. 저게 신이건 그 파편이건, 지금으로서는 격차를 운운하는 것조차 민망할 정도의 상대다.
이제 뭐가 저 하늘 끝에 있는지 제대로 보이지조차 않는다.
회심의 공격이 모조리 적중되었는데도 불구하고.
일방적으로 공격당하는 입장에서도 저 정도다.
공격력이 방어력의 반만 된다고 해도 한 번에 어느 정도 타격을 입힐 수 있을지 짐작조차 하기 어렵다.
‘저런 건… 싸우라고 있는 게 아니야.’ 여기서는 할 만큼 했다. 오히려 운이 좋았다. 저 기등이 지금 진행 중인 무언가를 시작하기 전에, 시작하는 과정이 되기 전에 나를 발견했으면 진작 당해서 끝났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이라도 도망가야 해.’
결심을 굳히고 몸을 뺀 순간이었다. 검뢰로 부숴 버린 곳이 메꿔지며 하나의 거대한 입으로 만들어졌다. 직경 수십 미터가 넘는 입이 꿈틀거리며 혼자 중얼거렸다.
“이제 알겠구나……
‘ 으음?’
예메라가 말을 이어갔다.
“일리엔…. 이 무능하고 어리석은 계집…. 내게 〈왼손〉으로 마귀의 무리를 제대로 소멸시켰다고 말하였 거늘……
“그게 무슨 소리지?”
“결국 곁다리만 짚은 게 아니었는가. 이미 광산에 통로도 파 둔 년이 한심하도다. 진짜 마귀는 여기 있었던 것을.”
내 물음 따윈 깨끗하게 무시했지만.
광산과 일리엔의 〈왼손〉이라면 떠오르는 상황은 하나밖에 없다.
그곳까지 동행했던 카린과, 뒤따라 왔던 넥스몬드.
그리고 그들 모두 지금 갑자기 연락이 끊긴 지금의 상태.
‘설마••••••
카린과 넥스몬드를 처리하기 위해 일리엔이 움직였다는 말인가.
그때처럼 근처에서 영향을 받은 게 아니라.
아예 그들을 목표로 잡고 움직였다면.
‘단순히... 연락이 끊긴 게 아니야.’
최악의 상황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멈칫한 순간이었다.
“너는 내가 직접 처리하지…. 기억 하겠다……
- 고오오오오오!
벌려져 중얼거리던 입은 한데 뭉쳤다. 그리고 거대한 하나의 회색 눈으로 변하곤 나를 뚫어져라 바라보기 시작했다. 마치 내 모습을 저 눈에 각인하려는 것 같은 모습이었다. 겉모습뿐만 아니라 모든 걸 하나하나 모조리 자기 안에 각인하려는 듯했다. 일단은 〈보는〉것밖에 없었지만, 섬뜩한 예감이 들어 곧바로 뒤로 도망쳤다. 뭔지 모르는 만큼 피하고 봐야 했다.
언제 저 강림이 끝날지 모른다.
이미 시간을 끌대로 끌었다.
‘당장 움직이자.’
- 파앗!
이미 부서진 배의 잔해를 밟고, 바다를 가르며 한참을 도망갔다. 몇 시간을 정신없이 계속 도망가자 다행히 거대한 기둥은 물론이고, 짐승으로 변한 수도사들도 나를 쫓아오지 않았다. 가볍게 파도가 치는 바다 한가운데서 생각에 잠겼다. 일단 도망치기는 했지만 몹시 머리가 복잡했다. 특히 예메라가 마지막에 했던 말이 계속 신경 쓰였다.
‘역시 직접 알아내 봐야겠어.’
시아에게 움직여 달라고 주문했지만, 정말 일리엔이 개입했다면 이제 인간들에게 의지할 수는 없다. 미스릴 광산에서 있었던 일이 또렷하게 기억난다.
빛이 강림하자 겐콘 크렉소르의 정신도, 노바의 정신도 즉시 소멸했다.
카린과 루이는 직접적인 영향을 받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미쳐서 즉시 목을 메고 제 다리를 잘랐다.
내가 움직여야 한다.
그런 존재가 개입한 이상 유능함은 두 번째 문제다. 일리엔의 광기에 대항해 미치지 않을 수 있는 건 어째서인지 나밖에 없다.
‘지금 연락을 취해 볼까?’
괜히 말려든다면 유용하게 쓸 수 있는 자원까지 잃어버리게 된다. 시아와 유령들은 역시 다른 곳에 파견해야겠다고 생각했을 때였다.
- 끼기기기긱
기괴한 파열음이 들렸다. 방금까지 내가 했던 생각 따위는 깨끗하게 날려 버리는 장대하고 기괴한 소리 였다. 결코 언어 따위가 되지 못할 소리였지만, 마치 미물들의 계획 따위는 티끌만큼도 의미가 없다고 짓이기는 하나의 선언 같았다. 그 소리는 너무나 커다래서, 까마득히 먼 하늘에서 들려오는데도 불구하고 사위를 가득 채우고 있는 것처럼 들렸다. 나는 곧바로 소리가 들리는 방향을 바라봤다.
북쪽이 었다.
하늘이 찢어지고 있었다.
찢어진 구멍으로 헤아릴 수조차 없는 숫자의 짐승들의 형상이 회오리치며 내려오고 있었다. 어마어마한 거리에 있는데도 불구하고 선명하게 보일 정도의 크기였다. 마치 깊고 어두운 심연이, 하늘에 구멍을 내어 자기 자신을 이 세상에 헤집어 넣는 듯한 모습이었다.
- 찌직! 찌지지직!
검은 그림자는 벌려진 하늘을 억지로 계속 찢고 뭉개고 밀어젖혔다. 하늘이 비명을 질렀다. 대기를 타고 진동이 바다에 가해졌고, 어류들은 일제히 몸이 터져서, 시야에 들어오는 바다는 모조리 새빨갛게 물들었다. 수면 위로 떠오른 것은 비늘과 아가미의 잔해 뿐이었다.
그 시뻘겋게 물든 바다 위로.
하늘에서부터 거대한 무언가가 〈머리〉를 집어넣고 있었다. 기둥에서 흘끗 엿봤던 회색 눈동자가 몇 배는 거대해져 천천히 바다를 훑었다.
[네가 내 추적을 떼지 못하리라…. 쫓고 쫓아 몇 번이고 산산히 흩어
버리리라…….]
눈동자는 붉은 바다와 바다 사이를 건너뛰면서 무언가를 찾았다.
‘저 정도였단 말인가?’
거대한 눈이 수평선과 수평선 사이, 섬과 섬 사이를 슥슥 건너뛰며 한 번에 수 킬로를 수색하는 것 같았다. 일방적으로 당하면서도 조급해하지 않던 모습이나, 수도사들이 기둥에 모여서 움직이지 않던 모습이 문득 이해되고 있었다.
저걸 상대로 내가 과연 도망칠 수 있을까?
도망칠 수 있다고 해도 대체 언제 까지?
시선이 이쪽을 향하지도 않았는데, 저런 게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사방이 굳어오는 지독한 압박감이 느껴진다.
- 스스스스…….
뭔가 감을 잡은 걸까.
회색 눈동자와 나 사이의 간격이 급속도로 줄어들기 시작했다.
‘여기서 끝인가……!’
그렇게 생각한 순간이었다.
- 째깍. 째깍째깍째깍. 째깍. 째깍. 째깍. 째깍째깍. 째깍째깍. 째깍째깍 째깍. 째깍. 째깍. 째깍.
‘ 이건•…"?’
진자가 흔들리고.
온 세상에서 초침 돌아가는 소리가 울리기 시작한다.
[이런…. 건방진…. 그러나 다음, 그다음, 그리고 그다음대에도…. 나는 너희를….] 그저 공포스럽고 압도적이었던 눈동자가 부르르 떨리고 있었다.
진동도, 비명도, 몸이 터지는 소리도, 파도 소리도 사라지고 분침과 초침 소리만, 검은 초침, 하얀 초침, 파란 초침, 빨간 초침들만 움직였다.
세상이 무수한 초침 속으로 천천히 빨려들어가고 있었다.
분노로 떨리던 회색 눈동자.
모든 걸 지켜볼 수 있을 것 같던 눈동자마저 조금씩 지워지고.
그 속에서도 하늘 위의 거대한 기둥은 무언가와 부딪치다가, 서서히 사라져 가고 있었다.
그리고는 초침들마저 완전히 사라 지면서一
나는〈무언가〉가 희미하게 돌아가는 것을 인식했다.
끝없이 먼 곳에서.
무언가가 살짝 인식에 잡히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 * *
[계승되었습니다.]
‘되돌아간… 건가?’ 칼도, 불꽃도, 직접적으로 가해지는 폭력도 없었지만.
[동화율이 내려갑니다.]
[39.14%…….]
‘39%……?’
눈에 띄는 하락.
다른 죽음과는 다르고.
비역에서의 회귀와는 완전히 똑같은 상황.
- 띠링! 띠링!
[특정 지역에 중대한 변경점이 적용됩니다.]
[지역 : 제국에서 〈수학〉의 교육 수준이 상향됩니다.]
[지역 : 제국에서〈화약〉의 채굴량이 늘어납니다.]
[지역 : 제국에서〈기계〉가 추가 연구됩니다.]
[지역 : 제국에서〈군사 공학〉이 추가 연구됩니다.]
연달아 메시지들이 떠오른다.
- 띠링! 띠링! 띠링!
[지역 : 제국에서 〈합리주의〉가 추가 연구됩니다.]
[지역 : 제국에서〈과학이론〉의 연구가 시작됩니다.]
[지역 : 제국에서〈증기선〉의……]
[지역 : 제국에서〈강선〉…….]
[지역 : 제국에서 〈신권 정치〉가 폐쇄됩니다.]
‘뭐라고……?’
[적용 완료까지 한동안 추가 변경이 제한됩니다.]
[대규모 변경으로 인한 불안정 인프라에 유의하십시오.]
정신을 차리기 힘들 정도의 정보량이 주르륵 이어졌다.
‘뭘…. 변경…. 한다고?’
도대체 누가 이런 일을 할 수 있다는 말인가.
답은 정해져 있다.
‘비역에서와 똑같은 일이 벌어졌 으니……
이번에는 모습조차 드러나지 않았지만, 예메라의 강림 이후 시간을 돌려 버린 건 물론〈바깥〉의 존재들이다.
내가 감히 감당할 수 없던 예메라와 조차 절대로 동격同格이 아닌 아예 차원 위의 군림자들.
세계선에서 영구히 누군가를 적출 하고.
‘이런 것까지… 가능하다고?’
너무나 터무니없는 권능이었다.
궁극의 힘이 어쩌고저쩌고하는 게 모두 장난처럼 느껴졌다.
대항 같은 건 희미하게도 상상할 수 없는 절대적인 절망.
저들이야말로 이 세계의 지배자.
잊혀졌던 신격들 따위와는 비교도 할 수 없고.
천 년 동안 군림했던 제국의 세 여신조차 그 굴레에 되돌려지는.
아무런 신앙도 증거도 필요하지 않은 절대자들인 것이다.
‘이런 자들이……
아이작을, 나냐우를, 레나를 소멸 시켰다.
"……."
암흑 속에 떠올랐던 메시지들이 서서히 사라지고一
“어떻게 그런 소리를!”
새까맣게 물들었던 세상이 다시 돌아온다.
눈앞에.
익숙한 여자가 격앙되어 바들바들 떨면서 나를 보고 있다.
조금 전까지 당했던 예메라의 추적이나.
세계가 되돌아가는 절망과 비교하면 따스하게 느껴질 정도의 분노.
그녀의 얼굴을 확인하고 나는 천천히 주위를 둘러봤다.
‘경매… 장......
익숙한 환경이다.
— 띠링!
[A-급 시나리오, ‘카린 크렉소르’가 열립니다.]
풍경 위로.
다시 한번 메시지가 겹쳐진다.
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