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 화살표 (2)
사람들 사이에 긴장감이 흘렀다.
누구든 한 명을 죽이라니. 도저히 제정신으로 할 수 있는 지시가 아니었다.
그러나 조금 전, 저 텔레비전에서 기관총이 나와 한 명을 죽인 것이 사람들의 눈에 깊숙이 각인되어 있었다.
거슬러서는 안 되었다. 거스르는 것은 곧 자신이 죽는다는 것.
하지만 이들은 전부 평화로운 현대 사회에서 온 사람들이었다. 사람을 죽이는 게 그렇게 간단할 리가 없었다.
모두는 서로가 서로의 눈치를 살피며 대치하기만 했다.
그때, 텔레비전에 하나의 숫자가 떠올랐다.
-00:10:00
사람들이 이 숫자가 무엇인지 모를 리 없었다.
그리고 숫자가 빠르게 줄어들기 시작했다.
“제, 젠장! 모, 몰라. 난 죽일 거야. 누구든 상관 없으니 죽일 거라고! 내가 이런 곳에서 주저앉을 것 같아!”
“이쪽도 마찬가지라고! 누, 누구든지 다가오기만 하면…!”
사람들은 전부 날이 선 채 서로를 노려보고 있었다. 일촉즉발의 상황이 지속되었다. 지금 당장 누가 누군가에게 달려들더라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
이때, 수혁의 머릿속에서는 조금 전 무기를 선택할 때 들렸던 목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저쪽으로 가라.]
반투명한 노란색 화살표가 생겨나 수혁이 가야 할 곳을 가리키고 있었다.
수혁도 지금 당장 손에 피를 묻히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에, 목소리가 말하는 대로 발걸음을 옮겼다. 다행히도 이런 긴박한 상황에서 수혁에게 신경 쓰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화살표는 공터 바깥 쪽의 숲에 위치한, 거대한 아름드리 나무를 가리키고 있었다. 공터와는 조금 거리가 있는 곳이었다.
[끼워 넣어라.]
끼워 넣으라니, 도대체 뭘?
수혁은 잠시 혼란에 빠졌다. 그러나 이내 화살표가 가리키는 곳에 육각 형태로 되어 있는 깊은 홈을 발견했다.
잠깐. 육각 형태라고?
수혁은 자신의 손에 들려 있는 육모 방망이를 쳐다보았다.
어쩐지 육각 모양의 홈에 딱 들어맞을 것 같이 생겼다.
[끼워 넣어라.]
목소리가 또다시 들려왔다. 수혁은 이번에는 망설이지 않고 육모 방망이를 끼워 넣었다.
예상대로였다. 딱 들어맞았다.
[돌려라.]
수혁은 목소리가 말하는 대로 육모 방망이의 손잡이를 잡아 돌렸다.
그러자 끼익끼익거리는 소리와 함께 무언가 열리는 것이 느껴졌다.
눈앞의 아름드리 나무 한쪽이 금이 가, 마치 문처럼 열 수 있게 된 것이었다.
이제는 목소리가 굳이 지시해주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수혁은 그대로 나무의 한쪽을 열어 젖혔다.
그러자 나무 밑동을 큼지막하게 차지하고 있는, 금빛을 띈 거대한 벌레의 유충이 튀어 나왔다.
“끼에에에—!”
“헉!”
수혁은 저도 모르게 숨을 들이켰다. 그러나 유충의 밑부분이 나무 뿌리에 박혀 윗부분만 꼼지락거리는 것을 깨닫고는 가볍게 숨을 진정시킬 수 있었다.
한편, 화살표는 벌레의 유충을 가리키고 있었다.
‘주, 죽이라는 건가.’
평범한 대학생이었던 그가, 이렇게 커다란 생물체를 죽여본 경험이 있을 리 없었다. 그러나 수혁은 조금 전 텔레비전이 ‘하나의 생명을 빼앗으’라고 했던 것을 기억해냈다.
그리고 눈앞의 이 유충 역시 ‘하나의 생명’이었다.
사람을 죽이기보다는 이 벌레 유충을 죽이는 편이 훨씬 더 마음이 편했다.
‘어쩔 수 없나.’
수혁은 마음을 단단히 먹었다. 수혁은 남을 괴롭히는 것을 즐기지는 않았지만, 마음을 굳게 먹을 때는 굳게 먹을 수 있었다.
수혁은 육모 방망이를 이용해 황금색 벌레 유충을 패기 시작했다.
“끼에엣—”
“허억… 허억….”
반격은 없었다. 단지 때려 죽이는 것뿐인데도 생각보다 체력 소모가 컸다.
벌레 유충이 움직임을 완전히 멈출 때까지는 시간이 걸렸다.
-미션을 완료하였습니다.
-1등으로 미션을 수행한 사람에게 보너스로 500루페가 지급됩니다.
이번에는 텔레비전이 아니라 자신의 왼쪽 손목에서 들려온 목소리였다.
수혁의 왼쪽 손목 위에 하늘색의 작은 홀로그램 창이 생겨나, 그곳에서 목소리가 흘러나오고 있는 것이었다.
아무래도 텔레비전과는 약간 거리가 있었기에 이렇게 되는 듯했다.
수혁이 지켜보는 동안 공중에서 환한 빛이 생겨나더니, 금색의 동전이 다섯 개, 왼쪽 손목에 떠오른 홀로그램 창으로 흘러 들어갔다.
수혁은 신기하게 생각하며 죽은 유충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죽은 유충의 시체 위에 하나의 홀로그램 창이 떠올라 있었다.
홀로그램 창에는 32루페와 E급 마정석, 그리고 황금 풍뎅이의 정수라고 하는 아이템이 목록 형식으로 나열되어 있었다.
수혁이 아이템 목록에 손을 갖다 대자, 아이템의 정보가 홀로그램으로 떠올랐다.
등급 – E
희귀도 – 흔함
가치 – 8.6
설명 – E급의 마정석. 흡수하여 스텟을 올리거나 상점에 팔 수 있다.
<황금 풍뎅이의 정수>
등급 – F
희귀도 – 희귀
물리저항 – 1
마법저항 – 1
설명 – 황금빛의 풍뎅이가 품고 있는 정수. 그러나 미숙한 유충이 품고 있던 탓에 그 성능은 조금 떨어지는 듯하다.
소지하고 있으면 물리저항과 마법저항을 각각 1만큼 올려준다. (중복 불가)
잘은 모르겠지만, 어쨌든 아이템을 획득한 것은 좋은 일이었다.
E급 마정석은 지금까지의 F급을 넘어선 E급이라는 점에서 그러했고, 황금 풍뎅이의 정수의 경우도 희귀도가 ‘흔함’이 아닌 ‘희귀’라는 점에서 뭔가 있어 보였다.
사실, 실제로도 이 아이템들은 지금의 수혁 입장에서는 상당한 도움이 되는 아이템들이었다. E급 마정석은 앞으로 몇 개인가의 미션을 거친 뒤에서야 비로소 출현하는 아이템이었고, 황금 풍뎅이가 올려주는 물리저항과 마법저항은 다른 스텟들에 비해 올리기가 상당히 까다로운 까닭이었다.
아무튼 수혁은 홀로그램 창 한쪽에 위치한 ‘모두 획득’ 버튼을 눌렀다. 그러자 유충의 시체에서 반짝이는 빛이 솟아올라 수혁의 왼쪽 손목 부근으로 사라졌다.
화살표는 더 이상 눈앞에 나타나지 않았다. 수혁은 다시 발걸음을 돌려 모두가 있는 곳으로 돌아갔다.
공터에서는 여전히 대치가 계속되고 있었다. 그러나 사람들 사이의 험악함만큼은 아까보다도 더 늘어나 있는 것처럼 보였다.
“죽여서는 안 된다고? 큭큭큭. 우스운 소리를 하시는군 그래. 지금 이 상황에서 저 텔레비전이 하는 소리에 거역하시겠다 그 말인가?”
“거역이라니! 저 텔레비전이 뭐라도 된다고 거역이라는 건가!”
두 명의 남자가 서로 마주본 채 언성을 높이고 있었다.
한 명의 이름은 조강태. 형무소의 복역수였던 그는, 서로 죽이라는 미션이 떨어졌는데도 미적거리는 이 상황이 그리 마음에 들지 않았다.
미션이었다. 까라면 까야지. 설령 서로 죽이라는 지시가 내려졌어도, 기관총을 소유한 저 텔레비전의 지시라면 듣는 것이 당연하다. 만약 말을 안 들으면 어쩔 건데? 상황만 볼 때 당장에 기관총에 사살당한다 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한편, 다른 한 명의 이름은 이주성. 평범한 샐러리맨이었던 그는, 그래도 지킬 건 지켜야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아무리 조금 전 한 명이 죽었다고 해도, 이 많은 사람들을 한번에 죽일 리가 없다. 분명 무엇인가 다른 방법이 존재할 거다. 이주성은 그렇게 생각했다.
이렇듯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진 두 명이, 모두의 의견을 대신하여 서로를 마주보고 있었던 것이다.
“뭐라도 되지! 그쪽도 조금 전 봤을 텐데? 저 텔레비전을 향해 돌 한번 던졌다고 피떡이 되어버린 시체를 말이야! 그쪽도 피떡이 되고 싶은 건 아니겠지?”
“그, 그렇다고 해도 여기에는 아이도 있고 여자들도 있다. 희생자가 되든 가해자가 되든 이들에게 이런 미션을 수행하라는 건 너무 가혹하다고 생각하지 않나!”
“하!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군. 저 텔레비전이 여자나 아이라고 해서 봐줄 거라고 생각하나?”
이주성의 말문이 막혔다. 조강태는 신이 나서 떠들기 시작했다.
“그것 봐라! 우리가 어떻게 생각하든 저 텔레비전은 정해진 규칙대로 한다! 그러니 당연히 우리 역시 규칙을 따라야 하는 게 아니냐!”
그랬다. 스스로가 말한 대로였다. 어차피 누군가는 죽여야 하고, 누군가는 죽임 당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다면 지금 이 시간을 그냥 보내는 것은 너무 아깝지 않나?
일 초라도 빠를수록 좋았다. 다행히도 10분이라는 시간은 살인을 결심하기에는 충분히 긴 시간이었다.
조강태의 눈이 희번덕거렸다. 그의 눈에 적당한 사냥감이 포착되었다.
잘 빠진 몸매에 예쁘장한 얼굴을 가진 여대생이었다. 자신의 말을 듣고 벌벌 떠는 중이었다.
조강태는 결정했다. 저 여자야말로 이 피의 축제를 열기에 딱 적당한 제물일 것이다.
조강태가 나는 듯이 뛰어 여성에게로 향했다. 그리고 여성이 얼어 있는 사이, 단숨에 그녀의 팔을 붙잡았다.
“꺄, 꺄아아! 사, 살려줘요!”
“크흐흐, 죽엇!”
조강태가 손에 든 마체테를 들어 올렸다.
그때, 수혁의 눈에 다시금 노란 화살표가 나타났다.
[막아라.]
수혁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평범한 대학생인 수혁은 격투 같은 걸 제대로 해본 적이 없었다. 마체테를 휘두르는 남성을 막다가 싸움이라도 나면 수혁은 이길 자신이 없었다.
하지만 수혁은 조금 전 노란 화살표의 지시를 따른 결과 E급 마정석과 황금 풍뎅이의 정수라는 아이템을 얻을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사람의 피를 묻히지 않고도 누구보다 먼저 미션을 클리어할 수 있었다.
잘은 몰라도, 노란 화살표가 자신을 도우려 한다는 것은 분명해 보였다.
갈등의 순간은 매우 짧았다. 수혁은 노란 화살표를 믿기로 했다.
수혁은 몸을 날려 여성의 앞으로 나섰다.
휘이익—
퍽!
조강태가 휘두른 마체테가 수혁의 육모 방망이에 막혔다. 수혁의 간담이 서늘했다.
“응? 넌 또 뭐야!”
조강태는 부리부리한 눈빛을 수혁에게 향했다. 수혁은 지지 않고 조강태에 맞섰다.
둘의 힘은 팽팽했다.
둘이 부딪치는 사이, 이주성이 달려와 조강태의 뒤를 붙잡았다.
“이익! 이 미친 것들이! 지금 당장이라도 죽여야 된다고! 이대로 가만히 있어 봐야 전부 다 몰살이란 말이다! 몰살! 살아남기 위해서는 누군가를 죽여야 하는 법이라고!”
조강태가 절규하듯 외쳤다.
그러나 그때, 텔레비전에 표시된 시간이 00:05:00을 가리켰다.
텔레비전에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현재 남은 시간 5분. 처음 인원과 현 시점의 인원수가 같으므로, 대체 생물 ‘고블린’을 소환합니다.
곳곳에서 환한 빛이 뿜어져 나왔다. 빛이 잦아들자, 그곳에는 작고 볼품없는 인간 모양의 생물체, 고블린이 생겨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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