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점 정비 (3)
퍽! 퍽! 퍽!
수혁은 미친 듯한 속도로 벽을 파고 들어갔다.
곡괭이를 내리칠 때마다 온갖 암석들이 깨지고 부서져 잘게 흩어졌다.
부서진 돌들을 레밀리아가 삽으로 퍼 수레차에 담았다. 그리고 쓰레기 투입구에 가지고 가 돌들을 버린 뒤, 다시 수혁이 채광을 하고 있는 굴 안으로 돌아왔다.
사실, 가냘픈 몸을 가진 레밀리아에게 이런 힘든 일을 시키는 것이 마음에 걸리기는 했다.
여자라고 해서 보호받아야 한다는 생각 때문은 아니었다. 레밀리아의 아름다운 몸과 피부가 상할까 봐 걱정되어서였다.
수혁이 생각하기에 레밀리아의 몸은 하나의 예술이었다. 그리고 예술은 그 자체로 보존되어야 한다는 것이 수혁의 생각이었다. 특히나 그것이 자신의 것이라면 더욱이나.
그럼에도 수혁이 레밀리아에게 일을 시키는 것은, 이 거점에서 보내는 동안 시시각각으로 소모되는 미션 포인트가 아까웠기 때문이었다.
‘1분 1초라도 허투루 쓸 수는 없어. 최대한 빨리 거점을 정비하고 미션을 수행하러 가야 한다.’
다행히도 레밀리아는 자신에게 얼마든지 일을 시켜도 상관이 없으며, 거점의 메이드들은 피부가 상하거나 하지는 않는다는 대답을 꺼내 수혁의 마음을 안심시켰다.
덕분에 수혁은 마음 놓고 화살표가 가리키는 곳을 향해 곡괭이를 휘두르는 것이 가능했다.
‘잠깐, 그러고 보면 레밀리아의 스킬 중에 정령 소환이라는 게 있었지. 도대체 무슨 스킬인 거지.’
흥미가 생긴 수혁은 레밀리아에게 정령 소환에 대해 물었다. 그러자 레밀리아의 대답이 돌아왔다.
“정령 소환은 말 그대로 불, 물, 바람, 땅의 정령을 소환하여 가사를 돕거나 전투를 도울 수 있는 스킬입니다. 저의 경우에는 중급 정령 1마리 혹은 하급 정령 4마리까지 소환할 수 있지만, 소환하는 동안 지속적으로 마력을 소모하기에 본격적으로 운용할 수 있는 것은 하급 정령 2마리까지가 한계입니다.”
흐음. 그러고 보니 레밀리아가 자신에게 요리를 해줄 때에 뭔가 붉은 난쟁이 같은 것을 소환했던 것 같기도 하다.
“저의 경우는 어디까지나 가사와 거점의 관리가 특기이므로 정령의 경우에도 그쪽으로 이용되고 있습니다. 저를 인스턴스 던전에 데려가실 경우 전투용으로도 사용할 수 있겠습니다만, 저 자신의 스텟이 워낙 낮아 주인님에게 누를 끼치지는 않을까 걱정입니다.”
메이드나 집사는 기본적으로 거점에서만 활약할 수 있지만, 인스턴스 던전의 경우 거점 내로 간주되어 메이드나 집사를 전투용으로 데려갈 수 있다는 모양이었다.
메이드나 집사 대부분이 스텟이 그리 높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이들에게 마정석을 주어 성장하게 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모양이었다.
물론 수혁의 경우에는 레밀리아를 인던에 데려가기 위해 마정석을 쓸 필요는 전혀 없었다.
발현을 걸어주면 되었으니까.
수혁은 마가의 서를 꺼내 들었다.
-메이드 ‘레밀리아’에 대해 발현이 성공하였습니다.
“주인님, 이건….”
“내 어빌리티 ‘발현’이라는 거다. 스텟을 상승시켜주는 거지. 앞으로도 자주 걸어줄 테니 익숙해지도록.”
“감사합니다, 주인님.”
레밀리아가 깍듯이 고개를 숙였다. 수혁은 거점에 있는 동안은 이런 식으로 마가의 서를 이용해 발현을 사용해주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건 그렇고 그 정령이라는 거, 땅의 정령을 소환할 수 있다고 했지. 땅을 파는 데 도움이 되지는 않으려나.”
“제 생각에도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일단 소환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레밀리아는 수염 난 난쟁이 모양의 흙의 정령 2마리를 소환했다. 그리고 수혁이 파던 자리의 흙을 파낼 것을 지시했다.
흙의 정령이 손바닥을 대자 수혁이 파던 암석 지대의 암석이 약해졌다. 그리고 천천히 분해되어 무너져 내리기 시작한다.
‘내가 직접 파는 것보다는 꽤 느린걸. 하지만 노란 화살표가 한군데에 있는 것만은 아니니까.’
수혁은 레밀리아에게 흙의 정령을 데리고 다른 곳의 노란 화살표가 있는 쪽을 파내라고 지시했다. 레밀리아에게 노란 화살표는 보이지 않기에, 중간중간 수혁이 감독을 해야만 했다.
물론 그래도 수혁 혼자만 땅을 파내는 것보다는 나았다.
수혁은 여기저기 뻗어 있는 노란 화살표를 향해 착실히 나아갔다.
그 결과, 거점 주변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는 숨겨진 요소들을 찾아낼 수 있었다.
-철광석을 획득하였습니다.
-1000루페 거대 주화를 획득하였습니다.
-토룡의 뼈 조각을 획득하였습니다.
그 외에도 망가진 갑옷이나 깨진 그릇, 심지어는 탄피처럼 생긴 작은 금속 통 같은 것까지도 출토되었다.
어째서 이런 것들이 여기에?
의문은 깊어져만 갈 뿐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다. 수혁은 최대한 깊숙한 곳까지 곡괭이를 휘둘렀다.
그러다가 마침내 수혁의 곡괭이가 어딘가에 걸리고 말았다.
“음? 이건 또 무슨 벽이지?”
잘 살펴보니, 어딘가 불길하게 일렁이는 투명한 벽이 가로막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단순한 벽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도 인위적인 모습.
수혁이 가진 C등급의 곡괭이로도 흠집 하나 나지 않는다.
수혁은 아마도 이것이 자신의 거점을 둘러싼 경계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곡괭이로 땅을 파는 정도로는 다른 곳에 연결될 수 없다는 건가. 하긴, 너무 쉽다 생각했어.’
곡괭이로 땅을 파서 얻을 수 있는 건 정체불명의 유물 출토 정도가 전부일 듯했다.
물론 그 정도로도 상관 없었다. 수혁에게 필요한 건 일단 당장에 쓸 수 있는 자본이니까.
‘재료상 상점의 NPC는 잡템들을 싼 가격으로 구매한다. 게다가 가끔씩은 돈 자체가 나오는 경우도 있어. 무언가 있어 보이는 것들을 제외하고는 전부 팔아야겠군.’
수혁은 그렇게 계산을 끝마치고는 발굴 작업의 속도를 더욱 높였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수혁은 또다시 3만 루페라는 거금을 모을 수가 있었다.
생각보다 금화가 많이 나온 것이 다행이었다.
“휴우, 이 정도면 당분간 사용하는 데는 충분하겠지.”
흙먼지로 뒤덮인 수혁은 우선 3천 루페짜리 샤워실부터 설치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좋습니다. 이제 거점에 밭을 설치할 준비가 다 된 것 같습니다. 밭을 설치하기 위해서는 우선 인스턴스 던전 항목에서 원하는 등급의 밭을 골라야만 합니다.”
“응? 인스턴스 던전이라고? 어째서 인스턴스 던전에서 밭을 사야 한다는 거지?”
“밭을 이용하기 위해서는 일단 밭을 위협하는 몬스터를 퇴치하여야만 사용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약간 아리송한 기분이 들었지만, 수혁은 레밀리아가 말한 대로 인스턴스 던전 항목을 뒤졌다.
있었다. 밭뿐만이 아니라, 채광장이나 낚시터 같은 생산 스킬을 연마할 수 있는 장소 역시 고를 수가 있었다.
“해당 등급의 밭에서 나오는 몬스터들을 퇴치하면, 다음부터는 돈을 지불하여 원하는 면적의 밭을 언제든지 설치하는 것이 가능합니다.”
“일단은 인던을 깨 놓아야 한다는 거로군. 좋아. 우선은 F등급의 밭부터 가기로 하자.”
F등급의 밭을 해금하는 인던은 입장료가 1000루페였다. 수혁이 1000루페를 지불하자, 뒤쪽의 벽에 일그러지는 공간의 왜곡과 함께 인던으로 입장하는 게이트가 완성되었다.
“그럼 이제 들어가 볼까. 레밀리아 너도 인던에는 따라올 수 있다고 했지?”
“그렇습니다. 주인님의 도움이 될 수만 있다면 설령 그것이 물과 불이라고 해도 헤쳐나가겠습니다.”
“그럴 필요까지는 없고…. 아무튼 이번 던전은 F등급이니, E등급의 스텟을 가진 너라도 이 정도는 간단하겠지.”
“감사합니다, 주인님.”
현재 레밀리아의 스텟은 수혁의 발현에 의해 빠르게 D등급으로 나아가고 있는 중이었다. 수혁은 레밀리아와 파티를 맺은 뒤, 밭으로 향하는 인던의 게이트를 향해 손을 뻗었다.
미션에 돌입하는 것처럼 한 차례 세상이 일그러진 뒤, 다시금 배경이 바뀌었다.
넓게 펼쳐진 밭과, 밭에 심어진 당근.
그리고 밭을 향해 몰려오는….
수많은 떼의 붉은색 토끼들.
토끼?!
<거점 미션: 토끼 떼 퇴치>
등급 – F
설명 – 흉폭해진 레드 래빗들이 당근밭을 망치려 하고 있습니다. 어서 이를 막아내세요!
성공 조건 – 레드 래빗 떼 전멸(0/150)
실패 조건 – 당근밭 50% 이상 파괴(100/100%)
보수 – F등급 밭 설치 해금
“후우, 뭐 좋아.”
수혁은 검을 꺼내 들지는 않았다. 겨우 F등급 몬스터 따위에게 검을 꺼내기에는 수혁이 너무 강했다.
수혁은 몰려오는 토끼 떼를 향해 몸을 날렸다.
***
“휴! 아무리 그래도 150마리라니 너무 했네 진짜.”
수혁이 마지막 레드 래빗을 주먹으로 날려 버리고는 허리를 폈다.
F등급의 몬스터이다 보니 상대하는 것이 별로 어렵지는 않았지만, 수가 너무 많아서 여기저기 뛰어 다니느라 고생해야만 했다.
반대 편에서는 레밀리아가 불의 정령을 이용하여 그쪽의 레드 래빗들을 퇴치하는 중. 이쪽도 얼마 지나지 않아 레드 래빗들을 다 몰아낼 수 있을 듯했다.
-미션을 완료하였습니다. F등급 밭이 해금되었습니다.
-지금 당장 밭을 설치하시겠습니까?(비용 1000루페 소모)
수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시스템 창으로 거점의 대략적인 모습과 함께, 설치할 위치를 고르는 창이 나타났다.
수혁이 설치할 위치를 정하자, 차원문이 열리며 밭 한쪽에 수혁의 거점과 연결되는 문이 생성되었다.
“좋아. 이제 밭은 완성된 모양이고.”
수혁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일정 면적의 밭이 수혁의 발 밑에 있었으며, 주변은 한쪽이 숲이었고 한쪽은 물이 흐르는 가운데 그 너머는 온통 초원이었다.
물론 수혁이 밭에서 벗어나 다른 곳으로 갈 수는 없었다. 가까이 가야만 눈치챌 수 있는 거의 투명한 막이 수혁을 막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혹시 몰라 점멸도 써 봤지만, 점멸도 저 막은 통과할 수가 없었다. 아무래도 시스템적으로 통과가 불가능한 모양이었다.
포기하고, 수혁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푸른 하늘에 박힌 새하얀 태양의 빛이 투명한 막을 뚫고 밭에 내리쬔다. 솔솔 부는 바람이 막을 통과하고, 바로 옆의 강에서 공급되는 지하수가 흙을 통해 밭을 촉촉하게 적셔준다.
그야말로 자연의 축복을 듬뿍 담은 장소라고 할 수 있었다.
“훌륭하십니다. 그러면 이제부터 밭 관리에 대한 것을 설명 드리겠습니다.”
레밀리아가 시스템 창으로 밭에 대한 탭을 열어서 밭을 관리하는 방법을 보여주었다.
F등급 밭에 심을 수 있는 작물들과, 씨앗 구매 및 파종 관련 사항들에 대해 설명한다.
꽤나 복잡했다. 수혁은 간단하게만 생각했던 농사일도 생각보다는 쉽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물론 주인님은 이 부분에 대해 전혀 신경 쓰실 필요가 없습니다. 제가 전부 알아서 해 드릴테니까요.”
“믿음직스럽군. 너만 믿겠어, 레밀리아.”
“감사합니다, 주인님.”
레밀리아가 깍듯이 고개를 숙였다.
“그건 그렇고 F등급만으로는 조금 부족한 느낌이 드는걸. 분명 높은 등급의 밭을 구한다면 포션의 재료를 재배할 수 있다고 했지.”
“네, 맞습니다. 최소한 D등급은 되어야 합니다만….”
수혁은 손가락으로 턱을 쓸었다. 그리고는 씨익 웃었다.
아무래도 한 번 더 몸을 움직여야 할 필요성이 있을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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