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목의 던전 (5)
수혁이 유목의 왕으로부터 드랍 아이템을 회수하자, 유목의 왕의 투명하게나마 남아 있던 영체가 희미해지며 완전히 사라졌다.
이제 유목의 왕이 있던 부분에는 가느다란 꼬챙이 같은 뼈대만이 남아 절벽의 위와 아래를 연결하고 있었다.
“흐음, 어디 보자. 무엇이 드랍되었으려나.”
수혁은 콧노래를 부르며 획득한 아이템을 확인했다.
유목의 왕에게서는 5000루페와 B급의 스페셜 마정석. 그리고 유목의 정수라는 아이템이 드랍되어 있었다.
B급!
힘겹지만 크리스탈들을 몰고 와 부숴 버린 녀석의 등급이 B급이나 된다는 것도 대단한 일이었고, 함께 드랍된 정수 역시 수혁의 흥미를 돋궜다.
수혁은 곧바로 아이템 정보를 확인했다.
<유목의 정수>
등급 – C
희귀도 – 희귀
영감 – 150
설명 – 유목의 왕이 품고 있던 적갈색의 정수. 소지자의 영감이 150만큼 증가한다. 영감이 증가할수록 더 깊은 층위에 있는 유령들을 인지하는 것이 가능하다. 유령을 보고 싶지 않을 경우 영감을 차단하는 것도 가능.
영감이라 함은, 말하자면 영체를 감지하고 인지하는 데 필요한 능력이라고 할 수 있었다.
원래 유령이라 부르는 존재들은, 저마다 각자의 층위가 존재하여 층위에 따라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거나 드러내지 않거나 하는 경향이 있었다.
낮은 층위에 있을 경우 영감이 없는 일반적인 사람들도 인지하는 것이 가능한 경우도 있으며, 이전 나벨카 유적지에서의 벨리온과 이곳의 유목 같은 경우가 바로 그러한 경우였다.
다시 말해 이러한 영감이 높아질 경우, 평소에는 보지 못하는 유령들을 보는 것이 가능하다는 이야기였다.
물론 수혁이 가진 현재 150의 위력으로는, 종종 으스스한 기분을 느낀다거나, 원래 보이는 유령들의 디테일한 부분이 보이는 정도가 전부였다.
‘어디, 무채색의 반지에 한번 끼워볼까.’
무채색의 반지에 장착된 황금 풍뎅이의 정수를 빼내고, 그 자리에 유목의 정수를 집어넣었다.
그러자 무채색의 반지의 설명이 다음과 같이 변했다.
<무채색의 반지: 유목의 정수>
등급 – A+
희귀도 – 유일
소켓 – 유목의 정수
영감 – 300
옵션 – 유목의 손길: 영체에 닿을 수 있게 된다.
설명 – 원래는 무채색인, 적갈색을 띠고 있는 반지. 유목의 정수가 깃들어 있다.
착용하자, 영감이 300이 되어 수혁의 눈에도 희미하게 숨어 있던 유령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한다.
물론 대단한 것은 아니고, 장난기 넘치는 미소를 지었다가 사라지거나, 대놓고 기침을 하며 수혁의 기분을 거스르는 정도의 가벼운 유령들이 몇 명 수혁의 눈에 띌 뿐이었다.
‘바로 곁에 이렇게나 많은 유령들이 있었다니….’
수혁은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자신이 느끼지 못하였을뿐, 평소에도 이렇게 자신의 주위에 유령들이 돌아다니고 있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누구라도 그런 기분을 느낄 것이다.
다만 그러한 사실을 알게 된 지금은 그다지 유령이 두렵지 않았다.
수혁의 옆에서 일부러라는 듯 크게 기침을 터뜨리는 녀석 하나를 붙잡아 얼굴에 주먹을 날렸다.
“시끄러워.”
“쿨럭!”
얼굴을 맞은 유령은 처량한 표정으로 수혁을 피해 도망쳤다.
한편, 다른 유령들 역시 수혁이 자신들에게 영향력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자, 수혁을 두려워하며 어디론가 사라진다.
무채색의 반지 효과에 따라, 영체에 물리적인 영향력을 가할 수 있게 됨에 따라 이런 일도 가능한 것이었다.
유령이 아무리 무섭다고는 해도, 결국에는 만질 수 없기 때문에 두려운 것. 이렇게 만질 수 있게 된 유령에게서 공포 같은 걸 느낄 리 없었다.
‘유목들이 영체라고 했지? 그 녀석들을 상대할 때 좋을 것 같군. 하지만 지금은 우선 저쪽에 있는 노란 화살표를 따라가는 게 먼저야.’
수혁은 유목의 왕이 있던 거대한 공간 뒤에 위치한 디딤대를 바라보며 눈을 좁혔다.
점멸을 쓰고 싶었지만, 아무래도 간격이 점멸의 사정거리보다는 멀어서 난처했다.
물론 이럴 때 사용할 수 있는 방법이 하나 있었다.
‘멀리뛰기로 최대한 거리를 좁힌 뒤에 점멸을 사용하면 되지.’
팟!
간단하게 발디딤대에 착지.
이윽고 나온 보물상자로부터, 사원의 열쇠를 획득할 수가 있었다.
<비밀 사원의 열쇠: 3>
등급 – S
희귀도 – 유일
설명 – 비밀 사원의 문을 열 때 사용되는 열쇠. 기괴한 악마 문양이 그려져 있다.
수혁은 등급이 S인 것을 확인하자마자 두려운 기분마저 들었다.
단순한 열쇠조차 이 정도인 것을 생각하면 분명 엄청난 것이 잠들어 있는 것이겠지.
하지만 그 두려움은 곧이어 미약한 흥분으로 변했다.
도전심이 불타오르는 것이었다.
‘히든 피스는 피하지 않는다. 등급 같은 건 상관 없어. 노란 화살표가 앞에 있다면, 나는 단지 그걸 따라갈 뿐!’
이제, 이 던전에서 얻을 수 있는 것도 중요한 건 거의 다 획득한 것 같았다.
하지만 아직 전부는 아니었다. 아직 가지 못한 곳도 많았고, 회수하지 못한 몬스터의 시체나 보물상자 같은 것도 많았다.
수혁은 씨익 웃었다.
보스 몬스터도 잡았으니 무서울 게 있을 리 없는 것이었다.
***
엘프 레인저 엘 살바는 이미 처참하게 변해버린 자신들의 마을을 쳐다보며 피눈물을 흘렸다.
나무 위에 지어진 아름다운 집들과, 새들이 노래하고 가는 아름드리 나무들.
그것들이 지금, 침입자들의 손에 의해 파괴되고 불타올라, 원래의 모습이라곤 떠올릴 수 없을 정도로 엉망진창으로 파괴되었다.
엘 살바는 이 모든 일의 원흉인 이세광을 노려보았다.
“내 반드시 네 녀석들의 미간에 분노의 화살촉을 꽂으리라. 감히 우리 브루엘 부족의 엘프에게 이런 짓을 하다니. 네 녀석들은 천벌이 두렵지도 않은 것인가!”
이세광은 그 말을 무시하며 이 서바이벌 월드의 희소 기호품 중 하나인 곽담배를 물어 길고 긴 담배연기를 뿜어내었다.
숲 속에서 저렇게 함부로 불씨를 다루다니, 이 또한 엘프에게 있어서는 용서할 수 없는 행위.
하지만 엘 살바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다른 동료 엘프들과 마찬가지로, 사각의 마법 철창 안에 갇혀 아무런 힘도 쓰지 못하는 이런 상황에서는.
“천벌이라. 그런 게 있다면 한번 받아보고 싶군. 적어도 이 빌어먹을 세계를 만든 녀석의 면상 정도는 볼 수 있을 테니.”
이세광은 절반 정도 피운 담배 꽁초를 아무렇게나 풀숲으로 던졌다.
엘 살바가 분노로 부들거리는 것이 보였지만, 상관없는 일이었다.
어차피 이들은 이 미션이 끝나고 나면 새롭게 부활하게 될 테니까.
자신들이 이 마을을 습격했다는 사실조차 없어지게 된다.
대체로 미션들이란 그랬다. 일부의 숨겨진 미션을 해결하는 경우를 제외하면, 새롭게 미션을 시작했을 때 이전에 일어났던 사건이 영향을 미치는 경우는 없었다.
미션을 플레이하며 100번을 죽인 NPC 캐릭터라고 하더라도, 다음 미션에서는 웃으며 마주칠 수 있는 것이 바로 이 세계였다.
그러니 이세광은 이 미션 세계의 주민들에 대해 딱히 동정심이나 연민 같은 감정은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것보다도 빨리 대답하는 게 좋을 거야. 사원의 열쇠를 어디에서 보관하고 있는지. 그리고 그 사원의 안에는 무엇이 잠들어 있는 것인지.”
“큭, 그런 걸 너희들에게 가르쳐 줄 리가 없….”
옆에서 둘의 대화를 지켜보고 있던 김수현이 웃으며 엘프 꼬마의 손가락 하나를 단검으로 잘라냈다.
엘 살바는 광란의 비명을 질렀다.
“죽인다! 반드시 죽일 테다! 이 더러운 인간 놈들…!”
이세광은 여전히 차가운 표정을 띠고 있었다. 하지만 속으로는 슬슬 짜증이 올라오려 하고 있는 상태였다.
이들이 사원의 열쇠에 대해 무언가를 쥐고 있는 것은 분명했다. 하지만 이들은 결코 그 입을 여는 법이 없었다.
죽이는 것은 불가능. 인간은 아니지만, 이들 역시 인간과 한편으로 여겨지기 때문에, 직접 죽일 경우 살기 스텟이 오른다.
애초에 이들로부터 정보를 얻어야만 하니, 죽이는 것보다 살려놓는 편이 좋다는 것도 이들을 죽일 수 없는 하나의 이유였다.
포획 작전을 벌인 끝에, 마을 안에 있던 엘프들 중 절반 정도는 비싼 포획용 케이지 주문서로 포획하는 데 성공했지만, 생각보다 이 녀석들은 끈질겼다.
“어쩔 수 없지. 하나 더 자르도록.”
“네, 대장님. 후후. 이 누나가 아프지 않게 잘라줄게.”
악마였다.
아무리 그래도 이렇게나 어린 아이에게 저런 짓을 저지르다니!
“데 롬바님이 너희를 벌할 것이다. 그분께서 너희들이 한 짓을 보게 된 순간, 너희들은 곧바로 불구덩지옥으로…!”
“아, 돌아왔구나. 광수. 녀석들을 쫓아갔더니 무언가 발견한 건 있나?”
“있었죠. 아무래도 사원의 열쇠를 관리하는 녀석들이 따로 있는 모양이더군요. 따라갔는데, 우연히 다리온 녀석을 발견했어요.”
“음? 그래서 어떻게 됐지?”
“어떻게 됐긴요. 다리온 녀석이 엘프 녀석들 다 쓸어버리고 사원 열쇠를 획득하더군요. 하여간 더럽게 강하더라니까요. 아, 그러고 보니 거기 수호자 이름이… 데 롬바였던가. 아무튼 기억해 놓는 게 좋을 것 같아서요.”
엘 살바의 표정이 멍해졌다.
데 롬바. 사원의 열쇠의 수호자 중의 한 명인 그가, 다른 인간에게 당했다고…?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다.
“그건 그렇고 이쪽에도 사원의 열쇠를 하나 보관하고 있는 모양이던데, 그걸 보면 아무래도 이쪽에도 다시 올 것 같던데요? 세광이 형, 어떻게 하죠?”
“음… 그렇군. 역시 이쪽에도 하나가 있었나. 어차피 녀석이 가진 열쇠를 빼앗지 않으면 저 사원의 문은 열 수가 없지. 어차피 이대로 미션을 끝내고 돌아가는 것도 뭐하니, 이 참에 열쇠가 있는 곳에 매복하고 있다가 녀석을 습격해서 열쇠를 빼앗는 것도….”
거기까지 중얼거린 이세광은 다시 엘프 쪽을 돌아보았다.
매복 작전을 성공시키기 위해서는, 일단 사원의 열쇠가 있는 장소를 알아내는 것이 필요했다.
이세광은 눈빛을 잔인하게 번득였다.
“자, 그럼 딱 한 가지만 물어보도록 하지.”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