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신의 사원 (2) (수정됨)
수혁은 잠시 인상을 찌푸렸다.
믿음이 나 자신을 배신한다니, 도대체 저게 무슨 뜻이지?
하지만 수혁이 그렇게 중얼거리는 동안, 갑자기 모든 빛이 사라지고 말았다.
수혁은 덜컥 가슴이 내려앉았다.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는 건가, 라고 자문하는 것도 잠시.
지면이 흔들리는 소리와 함께 수혁이 발을 디디고 있는 이 공간이 서서히 회전하기 시작했다.
당황한 수혁이 마석등으로 앞을 비추어 자신이 들어온 문으로 향했지만, 리첸이 말한 것과 달리 굳게 닫힌 문은 열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수혁이 라인플레임을 들어 내려쳐도, 손잡이를 잡고 흔들어도, 문은 열리지 않는다.
당황하는 사이에도 방은 천천히 회전하며, 회전한 만큼 아래로 내려가는 중이었다.
그리고 빛이 다시 돌아왔다.
수혁이 뒤를 돌아보자, 징그러울 정도로 수많은 몬스터들이 수혁을 노려보는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츄르릅. 츄릅.”
“큭, 젠장. 이런 거였나.”
나타난 몬스터들은 리자드맨이었다.
징그러운 파충류의 비늘에, 뱀의 혀를 날름거리며 수혁을 세로로 찢어진 눈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모두들 붉은 빛으로 빛나는 좋은 재질의 갑옷과 날카로운 창을 들고 서 있었다.
게다가 그 수가 장난이 아니었다.
전부 합쳐 30은 넘어 보이는데다가, 이 순간에도 어둠 속에서 하나씩 생겨나고 있었다.
그들이 모두 수혁 하나만을 바라본 채 잔인한 눈빛을 빛내고 있었다.
“…젠장, 제대로 배신당했는데 그래.”
아무래도 수혁의 생각과는 달리, 도망칠 수 있다는 희망 같은 것은 허용되지 않는 모양이다.
아니면 그런 안일한 생각으로 도전할 수 있었던 것도 3번째의 시련까지만이었던 것인지도.
어쩌면 리첸이 그런 힌트를 준 것부터가 이 시련을 위한 포석이었는지도 모른다.
어느 쪽이든, 이제 수혁이 도망칠 수 없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수혁은 결심한 듯 대검의 손잡이를 힘껏 쥐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리자드맨들은 계속해서 생겨나고, 수혁을 공격할 생각에 가득 차 있다.
그렇다면 일 분 일 초라도 빨리 선제 행동에 나서는 것이 더 유리하리라는 것을 수혁은 깨달았던 것이다.
“도대체 여기에는 뭐가 잠들어 있길래 이리도 호들갑인 거냐고!”
수혁은 너무 안일하게 생각했던 자신을 반성하며, 리자드맨들의 한가운데로 뛰어들었다.
***
수혁의 검은 거침없이 리자드맨 사이를 날아다녔다.
리자드맨은 강했고, 방어력 역시 수혁의 검에 쉽게 뚫리지 않을 정도였다.
하지만 공격이 통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공격이 통한다는 것은, 희망이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헉… 헉… 도대체 이 녀석들은 어디서 이렇게 끊임없이 나오는 거야!”
수혁이 있는 방은 여전히 회전하며 아래로 내려가고 있었고, 리자드맨은 끊임없이 나와 수혁을 노렸다.
창과 검, 도끼와 방망이.
마법이나 화살 공격이 나오지 않은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만약에 원거리 공격까지 있었더라면, 수혁은 사방에서 날아오는 공격에 의해 완전히 너덜너덜해졌을 터였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지금의 수혁이 너덜너덜하지 않다는 것은 아니지만.
“젠장, 이거 너무 깊이 들어와버렸어. 좀 더 제대로 알아보고 왔으면 좋았을지도 모르는데.”
도망갈 길은 없는 상황.
주변에는 여전히 적들이 넘쳐나고, 해치워도 해치워도 이들은 끝이 없었다.
설마 이 정도까지 어려운 시련이 나올 줄 몰랐던 수혁에게는 낭패라는 말이 어울리는 상황이었다.
물론, 우연히 이런 기회가 주어진 것이기에 어쩔 수 없는 것이기도 했다.
수혁이 다리온과 리덴 길드 3인방으로부터 열쇠를 빼앗은 것은 정말로 우연한 일이었고, 이후에 또 언제 다시 이러한 기회가 찾아올지는 미지수였으니까.
리덴 길드를 제외하더라도, 다리온과 싸워 열쇠를 얻어낼 정도가 되려면 어느 정도가 걸릴지 상상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노란 화살표가 눈앞에 있는 한은 반드시 따라가겠다고 생각했었는데. 지금 이 상황까지 오게 되니 그게 과연 잘 한 결정이었을까 하는 생각마저 떠오르는군.’
게다가 설상가상으로 이 방에서는 노란 화살표마저 보이지 않았다.
지금까지 수많은 역경을 노란 화살표 덕분에 뛰어넘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 노란 화살표가 보이지 않는 지금, 자신에게는 무엇이 가능한 것인가.
수혁은 슬쩍 스테이터스 창을 열어 자신의 상태를 살펴보았다.
자신을 지탱하는 두 가지의 지표인 체력과 마력은, 지금 이 순간이라도 바닥에 닿을 듯이 찰랑거렸다.
마력이 떨어지면 더 이상 마력을 이용하는 마법이나 스킬을 사용할 수 없게 되고, 체력이 떨어지면 상황은 그보다 더 해서, 아예 움직이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게 되어버린다.
리자드맨의 패턴은 단순한 편이었기에 해치우는 것 자체는 큰 문제가 되지 않았지만, 상당한 공격력과 방어력을 가지고 있는 탓에, 해치우는 것만으로도 상당한 체력과 마력이 소모되었다.
지금까지는 어떻게든 원래 있던 포션과, 레밀리아로부터 전송받은 포션으로 버텼지만, 그것도 이제는 끝이었다.
하루에 전송 가능한 아이템의 수량은 정해져 있었고, 오늘의 수량은 이미 전부 사용한 상태. 이제는 체력이나 마력을 채워줄 그 어떠한 수단도 남아있지 않은 것이었다.
‘끝났군.’
수혁은 거칠어져만 가는 호흡과, 그와 반대로 또렷해져만 가는 정신을 느끼며 생각했다.
히든 피스를 모조리 자신의 것으로 만들겠다는 생각 자체는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자신은 너무 큰 욕심을 부리고 말았다.
이것이 그 대가였다.
‘그러고 보면 난 왜 이렇게까지 히든 피스에 목숨을 걸었던 걸까.’
돌이켜 보면, 자신은 너무 허겁지겁 음식을 들이키려 했는지도 몰랐다.
조금 천천히 먹는다고 해도 나쁠 것은 없었다. 오히려 너무 빨리 음식을 들이키려 했기에, 채해버린 것인지도 모른다.
‘강해지는 것이 좋았어. 그래서 조금 들떠버린 것인지도 몰라.’
또 하나의 리자드맨을 베며 생각한다.
사실, 현실과는 다르기에 이렇게까지 빠져든 것인지도 몰랐다.
수혁이 현실에 있었을 때, 수혁은 현실이 그다지 즐겁지 않다고 생각했었다. 노력해도, 얻어지는 것은 없었으니까.
모든 것이 그랬다. 공부도, 운동도, 친구들을 사귀는 것도.
머리가 터져라, 근육이 불타라 노력해도, 돌아오는 것은 언제나 미약한 보상뿐이었다. 하지만, 이 세계는 달랐다.
노력하면, 그만큼의 보상이 즉각적으로 돌아온다.
노란 화살표가 보이는 수혁에게는, 노력한 것 이상의 보상이 돌아왔다.
그래서 수혁은 이 세계가 좋았다.
많은 것들을 얻게 해주는 이 세계가.
“젠장, 이대로 얌전히 죽어줄 것 같으냐!”
기껏 엄청난 능력을 얻었는데 그것을 제대로 사용하지도 못하고 죽는 것은 억울했다.
적어도 이 세상이 무엇인지, 무엇 때문에 자신이 이 고생을 하는지는 알고 가야 하지 않겠냐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수혁은 힘을 냈다.
이대로 죽어줄 수는 없다고, 안간힘을 썼다.
‘중요한 건 체력이야. 스텟이 조금 언밸런스하게 되겠지만, 남은 스텟을 전부 체력에 투자하는 게 좋겠어.’
포션이 없으니 체력을 채우는 방법은, 마정석을 이용해 스텟 자체를 상승시키는 수밖에 없었다.
발현이라는 방법도 있겠지만, 마력이 간당간당한 이런 시점에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마정석이 투자됨에 따라, 바닥까지 내려가 있던 체력 스텟이 스텟 자체가 상승한 만큼 차올랐다.
스페셜 마정석이 많았기에, 무려 100이나 되는 체력이 채워졌다.
그리고 나서 수혁은 또다시 라인플레임을 휘둘렀다.
‘아이러니하군. 강해지고 싶어서 노란 화살표를 따라왔다. 하지만 노란 화살표 때문에 나는 위기에 빠지고 말았지. 그런데 정작 이 노란 화살표가 보인다는 사실 때문에, 나는 이 위기에서 벗어나려 안간힘을 쓰고 있어.’
수혁은 계속해서 리자드맨들과 싸워나갔다.
채워졌던 체력이 또다시 천천히 줄어들고 있었다.
이제는 마정석이나 다른 체력을 채울 수단마저 남아있지 않았다.
그래도 수혁은 검을 휘두르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이 녀석들에게는 마정석 드랍 같은 건 되지 않는 모양이니…. 이제는 정말 끝이로군.’
검을 휘두르는 수혁의 팔이 점점 느려진다.
현실에서도 체력을 소모하면 소모할수록 더 움직이는 것이 괴로워지는 것처럼, 이곳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체력이 0을 향해 다가갈수록, 체력을 소모하는 것은 더 힘들어진다.
체력이 0이 될 경우 정말로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게 되는 것이 사실이지만, 사실은 2나 3 정도에서 움직임을 그만두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만큼, 움직이는 것이 너무 힘들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 체력이 1이 되었어도, 수혁은 멈추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는 멈출 수가 없는 것이었다.
그만큼 수혁에게는 지금이 소중한 것이리라. 엄청난 고통조차 이겨낼 만큼.
“젠장…. 이대로 죽을 수는….”
그리고 마침내, 수혁의 체력이 0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근육이 죽을 듯이 통증을 호소하고, 심장은 미친 듯이 박동한다.
몸 전체를 가로지르는 엄청난 고통.
그러나 수혁은 이대로 모든 것을 잃어버린다는 사실이 분했다.
앞길이 막막했던 현실과는 달리, 노란 화살표가 보이는 자신에게 있어서 이곳은 어쩌면 희망의 땅이었을지도 모른다.
수혁이 충혈된 눈으로 자신에게 날아오는 도끼날을 마주했다.
그러나 바로 그 순간, 방이 회전하던 것이 멈췄다.
리자드맨들의 공격 역시, 그대로 멈춰버렸다.
리자드맨들은 순식간에 돌로 변해, 그대로 바람에 실려 먼지가 되어 버리고 말았다.
영문을 몰라 눈을 크게 뜬 수혁의 앞에, 먼지로 만들어진 하나의 글귀가 떠올랐다.
그대는 의심과 회의를 딛고 근성을 보였다. 그러므로 시련을 통과하였다. 하지만 다음의 시련에서도, 그대는 그대 자신을 증명할 수 있을 것인가.
수혁의 체력과 마력은 여전히 바닥에 수렴했다.
손가락 하나 까딱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실제로 체험하는 중이었다.
물론 조금 있으면 체력이 채워지겠지만, 일단 체력이 한번 0으로 된 이후에는, 10분 정도의 딜레이가 지나야 체력이 차기 시작한다.
후유증이라고나 할까.
만약 누군가 지금 수혁의 앞에 나타나 바늘로 찌른다고 하더라도 움직일 수는 없다.
그만큼 외부의 공격에 취약한 상태.
‘이런 상태에서 또다시 몬스터라도 나타난다면 난리나겠는데.’
그리고 수혁이 그러한 생각을 한 순간, 수혁이 들어온 문이 열렸다.
단검을 든 고블린 한 마리가, 신나는 얼굴을 한 채 수혁에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젠장. 미치겠군, 진짜.’
수혁은 짜증나는 것을 억누르며 자신에게 다가오는 고블린을 올려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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