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신의 사원 (4)
수혁은 갑옷 기사들을 올려다보았다.
마신은 여전히 뒤에서 음흉한 눈웃음을 짓고 있을 뿐이었다.
갑옷 기사 중 하나가 들고 있던 창으로 땅을 내려치자, 커다란 충격파가 사방으로 퍼져나간다.
충격파만으로도 수혁은 쓰러질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강하다. 분명 제대로 상대한다면 하나조차 이길 수 없을 테지.’
붙어보지 않아도 그 정도는 알았다.
무엇보다도 공격이 통하지 않을 가능성이 컸다. 지난 번의 철벽 골렘 역시도, 움직임을 봉쇄해 놓고 몇 번이고 한 부위를 집중공격해야만 했으니, 이 녀석 역시 그러리라는 것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일단은 공격을 해보는 게 좋을 것 같았다.
만약에 통하지 않는다면, 정공법으로 이 녀석들을 이긴다는 것은 포기해야 할 것이다.
“아이언 차지, 라인플레임!”
쿠아아아!
거대한 불꽃이 일직선으로 뻗어나가 갑옷 기사들에게 적중한다.
당연하게도 먹히지 않는다.
오히려, 갑옷으로부터 은은한 불길이 피어올라 수혁의 공격을 흡수해버리는 것 같은 효과마저 떠올랐다.
결론적으로 마법 공격은 먹히지 않음.
혹시 모르니 물리 공격이 먹힐지 시험해 보려고 했지만, 그 순간 갑옷 기사의 검은 강철 창이 수혁을 노리고 공중에서 떨어진다.
쾅!
거대한 폭발음과 함께 수혁이 있던 자리가 터져나간다.
수혁은 저런 괴물에게 가까이 다가갈 엄두조차 나지 않았다.
‘마지막 시련이라고 했지. 젠장, 보물들을 눈앞에 두고서 이런 말도 안 되는 시련이 펼쳐질 줄이야.’
바로 코앞이었다.
모든 시련을 거치고 조금만 있으면 보상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그것이, 바로 눈앞의 갑옷 전사들 때문에 막히게 생겼다.
박탈감이 엄청났다.
하지만 시련이란 것을 수혁 스스로 결정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아니, 잠깐. 결정할 수 있잖아.’
뒤늦게 리첸이 말한 조언이 생각났다.
무리하게 싸울 필요는 없다. 만약에 주어진 시련이 무리라고 생각되면, 미련하게 시련에 매달릴 필요는 없다.
4번째의 시련이 시작된 이후로는 필요없어진 조언이라고 생각했는데, 생각해보니 지금 이 순간에도 되돌아갈 문은 있었다.
즉, 리첸의 조언이 완전히 틀린 것이 아니라면, 지금 이런 상황이라 하더라도 도망가는 것은 가능했다.
수혁은 다시 갑옷 전사들을 올려다보았다.
‘이 녀석들을 쓰러뜨리면 또 어떤 보상을 얻게 될지 궁금하긴 한데. 하지만 그렇다고 미련하게 여기서 목숨을 잃을 수는 없지!’
아무리 강해지는 것이 좋다고 하더라도, 자신의 목숨보다 소중할 수는 없다.
리첸과 처음 만났을 때, 그는 이곳에서 시련을 뚫고 끝에 도달하더라도 파멸할지 모른다고 말했었다.
단순히 겁주려는 말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그렇지 않을지도 몰랐다.
수혁은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창끝을 흔들림없이 쳐다보며 그렇게 생각했다.
‘저 문까지만 가면 된다는 거지. 잠겨 있지만 말아야 할 텐데!’
수혁은 날아오는 창끝을 피했다. 두 번째의 창날이 날아오자, 뛰어올라 창에 올라타고 갑옷 기사를 향해 달려나간다.
당황한 갑옷 기사가 창을 놓고 수혁에게 손을 뻗는다. 양쪽 다였다.
그렇게 양쪽에서 수혁을 덮치는 그 상태 그대로, 수혁은 점멸 마법을 이용해 그 자리를 빠져나왔다.
콰당!
거대한 두 거체가 부딪치며 땅을 뒹구는 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수혁은 녀석들이 쓰러졌다고 해서 전세가 역전되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이전처럼 끈끈이로 녀석들을 잡아둔 것도 아니고, 녀석들이 마음만 먹는다면 얼마든지 자신을 낚아챌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그 예상대로, 갑옷 기사들은 너무나도 간단히 그 자리에서 일어서 수혁을 쫓아오기 시작한다.
하지만 수혁은 그 사이 이미 반대편의 문까지 도착한 상태였다.
수혁은 두근거리는 마음을 품은 채 문을 열어젖혔다.
쾅!
‘열렸다!’
수혁이 문을 열고 나가는 것과 동시에 창이 내려꽂혔다.
입구가 좁았기에, 덩치가 큰 갑옷 기사는 더 이상 수혁을 쫓지 못한다.
수혁은 긴장한 채 뒤돌아 상황을 살폈다.
다행히도, 더 이상의 추격은 없는 모양이었다.
수혁은 마지막의 시련을 피해 살아남았다.
“크흐흐. 적어도 보물에만 눈이 먼 멍청한 녀석은 아니로군.”
더 이상은 무의미하다는 것을 깨달은 마신이 손을 뻗자, 수혁을 쫓던 갑옷 기사들이 제자리로 향해 다시 동상으로 돌아왔다.
마신은 수혁에게 다가오라는 제스쳐를 취했다.
수혁은 또다시 동상들이 움직이는 것을 경계하며 마신에게 다가갔다.
다행히도 마신이 속임수를 사용하려는 듯한 기척은 없었다.
하긴, 이 시점에서 또다시 속임수를 사용하는 것은 마신 치고는 너무 치사한 것일지도 모른다.
“이것으로 확실해졌다. 그대에게는 나 듀나한의 힘을 이어받을 자격이 있다.”
“잠깐, 설마 내가 방금 전의 시련을 통과했다고 하는 건가? 녀석들을 이기지 못했는데도?”
듀나한은 커다란 웃음소리로 웃으며 말했다.
“만약 그대가 나의 수호 기사를 무찌를 정도의 강함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면, 애초에 그대는 이 나의 힘을 이어받을 필요조차 없을 정도로 강한 것이다.”
마신이 손을 뻗자, 수혁의 머리 위에 빛의 가루가 쏟아지며 축복이 이루어졌다.
“우선 그대에게, 그대 자신조차 깨닫지 못했던 새로운 가능성을 선사하리라.”
수혁은 온몸에 활력이 넘치는 것을 느꼈다. 동시에, 지금까지는 감지할 수 없었던 어떤 신비한 감각 같은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오감과는 달랐다. 영감과도 달랐다. 무언가 잡힐 듯하면서도 잡히지 않는 신비한 흐름이 수혁에게 느껴졌다.
마치 무지개의 색깔로 채워진 것만 같은 반짝이는 흐름.
제6의 감각. 육감이라고 하는 스텟이 수혁에게 생겨났다.
그러나 그 육감이라고 하는 것을 제대로 살펴 보기도 전에 마신의 목소리가 뒤를 이었다.
“어둠 속에 숨어서 간교한 계책을 세우리라. 그대를 어둠 속에 감추어줄 은밀의 베일을 그대에게 선사하리라.”
어둠 속에서 하나의 망토가 내려와 수혁의 손에 걸쳐졌다.
밤하늘의 색깔과도 같은 진한 보랏빛으로 물든 망토였다.
후드가 달려 있어, 원한다면 언제든 자신의 얼굴을 감출 수 있었다.
착용자의 기척을 다른 이들이 감지할 수 없게 만들어주고, 어둠 속에 있을 경우 그 모습을 다른 이들에게 들키지 않을 수 있게 만드는 마법의 망토였다.
그러나 수혁이 그러한 정보를 제대로 확인하기도 전에 또다시 마신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계책을 세우기 위해서는 항상 귀를 열고 있어야 하는 법. 언제 어디서든 그대에게 절묘한 정보를 가져다줄 암계의 능력을 그대에게 전해주리라.”
수혁의 시스템창이 열려, 새로운 어빌리티가 생겨났음을 수혁에게 보여주었다.
암계의 귀. 접촉 대상에 보이지 않는 귀를 매달아, 대상 근처에서 나는 소리들을 실시간으로 엿들을 수 있다.
상대방이 하는 이야기와 생각을 파악하여 암계를 세우는 데 적합한 능력.
어둠의 마신이 전해주기에 걸맞는 능력이라 할 수 있었다.
그리고 듀나한의 마지막 선물이 수혁에게 주어졌다.
“힘을…. 그대에게 힘을 내리리라. 그대의 앞길을 가로막는 모든 것들을 헤쳐 나가기 위한 궁극의 힘을….”
검은 가루가 내려와 수혁에게 스며들었다.
수혁에게 하나의 스킬이 생성되었다.
스킬의 이름은 ‘식스 오브 듀나한’. 처음의 공격으로부터 점차로 위력이 올라가, 여섯 번째 공격에서 모든 것을 쏟아붓는 필살기 개념의 공격이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받아들인 수혁은, 잘은 설명할 수 없지만 자신이 이전과는 달라진 것을 느꼈다.
사물이 더욱 뚜렷하게 보이고, 머릿속이 좀 더 명쾌하게 돌아가게 된 듯한 느낌.
전신의 감각이 확장되고, 가슴 속에서 근원을 알 수 없는 열정이 솟구치는 것만 같은 느낌.
마신의 축복을 받은 수혁은, 자신이 축복을 받기 이전에 비해 인간으로서 한 층 더 높은 계단에 올라서게 된 것 같다고 생각했다.
“으음. 지치는군. 이것으로 한동안, 나는 더욱 깊은 잠에 빠져들게 되겠지. 하지만 적어도 나는 후계자를 정하였으니. 후회 같은 건 없도다!”
마신의 붉은 눈이 휘어져 웃고 있음을 드러내고 있었다.
하지만 수혁은 의문이 떠오르는 것을 느꼈다.
아까 전, 마신은 자신을 봉인한 자들에 대해 분노하는 모습을 보였었다. 아마도, 신이라고 불리는 녀석들에 대하여.
그리고 수혁에게, 그런 그들을 무찌르겠다고 대답하기만 하면 힘을 준다는 뉘앙스의 말을 했었다.
그런데 지금, 마신은 수혁에게 그러한 확답을 받지도 않았는데 수혁에게 힘을 내려준 것이다.
의문스럽게 생각하는 것도 당연했다.
그러나 이에 대해 수혁이 의문을 떠올리자, 마신은 의미심장한 눈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흐흐흐, 그렇군. 확실히 나는 나를 봉인한 자들에게 증오를 품고 있고, 나를 이렇게 만든 녀석을 죽이고 싶다고까지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봉인된 나에게 가능한 것은, 안타깝게도 나의 시험을 거친 녀석을 골라 그 자가 나의 복수를 대신 이루어 주기를 바라는 것뿐.”
문제는, 그 복수의 대상이 신이라는 것이었다.
수혁은 기본적으로 신앙심이라고는 없다시피 하는 녀석이지만, 아마도 실제로 존재하리라 생각되는 이 판타지 세계의 신까지 두려워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봉인된 마신의 수하들마저 이렇게나 강하다. 봉인이 되어 있지 않은 진짜 신이나 마신은 얼마나 강할 것인지, 수혁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물론 인간인 그대가 신에게 도전하는 것은, 실제로는 불가능하다시피 한 일이나 마찬가지. 아무리 그대가 갖은 시련을 거쳐 이 듀나한에게 도달하였다고 하더라도, 그 정도를 가지고서는 결코 신에게 대항할 수 없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수혁은 맹렬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마신의 눈웃음도 그에 따라 더욱 짙어졌다.
“그래도 그대는 해야만 한다. 그대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그것은 상관이 없다. 그대는 다가오는 운명을 결코 피할 수 없을 것이니….”
***
수수께끼 같은 마신의 발언이었다.
수혁은 그 이상의 정보를 알아내고 싶었지만, 마신은 음흉한 눈웃음을 지은 채 더 이상은 수혁에게 정보를 넘겨주지 않았다.
답답한 노릇이었다. 마신만 아니었어도 멱살이라도 틀어잡고 무슨 뜻인지 알아내고 싶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 말을 하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마신은 천천히 사라지기 시작했다.
사라지면서, 마신은 또다시 수수께끼 같은 말을 남겼다.
“그대는 앞으로도 점점 더 강해지려 하겠지. 지금은 그것으로 충분하다. 지금은….”
그리고 마신은 사라졌다.
마신이 사라진 뒤, 수혁은 마신이 봉인된 구슬의 색깔이 조금 바뀐 것 같다고 생각했다.
처음에는 불길함이 가득 담긴 검붉은 색이었다면, 지금은 조금 분홍색이 섞인 듯한 느낌.
아무튼, 수혁이 마신과 대면하는 것은 거기까지였다.
갑옷 기사들이 움직이려는 듯한 기척도 느껴지지 않았고, 사방에 적막이 깔려 있었다.
마치 처음부터 그랬던 것처럼.
그 상태에서, 수혁은 주저앉은 채 우선 마신과의 대화를 곱씹어보았다.
‘마신과 신은 서로 반대 진형. 특히나 봉인되어 있는 마신은, 신의 의지에 의해 봉인되었고, 그만큼 신을 증오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다른 마신들도 이런 식으로 봉인되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대충 비슷한 상황이 아니려나.’
악을 상징하는 마신과, 선을 상징하는 천신. 이것이 이 세계에서도 적용되는지는 모르겠지만, 일반적으로는 그렇다.
보통의 판타지 세계관이라고 한다면 마신과 천신이 싸우다 천신이 패배하여 봉인되고, 그 천신의 힘을 용사나 모험가가 이어받는 것이 일반적인 스토리일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이 경우는 그 반대인 것으로 보인다. 봉인되어 있고, 그 힘을 나누어주는 것이 오히려 마신쪽이라고 할 수 있었다.
물론, 이런 경우에서 악의 힘을 넘겨주어 대상을 암흑에 물들게 한다는 전개도 있을 수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수혁은 마신이 준 힘으로부터 그러한 느낌을 받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한다면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
‘생각해 보면 이상하군. 나야 어느쪽이든 상관없지만, 정신이 똑바로 박힌 녀석이라면 세상을 파멸에 빠뜨릴지도 모르는 마신보다는 보통의 신을 선택하는 것이 아닐까? 아무리 자신에게 힘을 주었다고 해도 말이지.’
어쩌면 마신의 이 힘을 쏙 빼가서 오히려 신의 편에 가세할지도 모르는 것이다.
그럼에도 제대로 된 확답조차 받지 않은 채 시련을 돌파한 것만으로도 수혁에게 힘을 건네주었다.
마치 수혁이 신의 편에 붙을 리가 없다고 말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아니, 불을 수 있을 리가 없다고 말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신과의 싸움은 피할 수 없다…고 했던가.’
수혁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아무 생각 없이 노란 화살표를 따라왔을 뿐인데, 생각보다 이야기가 너무 커져 있었다.
그래도 수혁은 회복이 빠른 편이었다. 고개를 한번 흔들고는, 가슴 속에 퍼지는 불길한 상상을 떨쳐버린다.
‘아무튼 확실한 것은 아냐. 얼버무리는 것도 어쩐지 수상하고. 마신이 마지막에 말한 것처럼,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건 하나밖에 없어.’
강해지는 것.
다시 말해, 지금까지처럼 노란 화살표를 찾아다니며 히든 피스를 얻는 것이 수혁의 할 일이라고 할 수 있었다.
수혁의 눈에 다시금 빛이 감돈다.
“좋아. 일단은 얻은 것부터 제대로 확인해 봐야지. 우선은 스텟창부터!”
수혁은 왼손목을 흔들어 스테이터스 창을 불러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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