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인자 잭 (2)
“윽!”
배를 관통당한 살인자 잭이 고통스런 신음을 흘렸다.
곧이어 숙인 고개의 입으로부터 엄청난 양의 피가 쏟아져 나온다.
수혁은 그것을 반쯤은 차가운 눈빛으로, 반쯤은 연민이 섞인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그러나 조금 뒤, 고개를 숙인 살인자 잭이 웃음을 터뜨리기 시작했다.
“크큭…. 하하핫….”
수혁은 살인자 잭에게 당황스러운 시선을 향했다.
그러나 잭은 더욱 커다랗게 웃으며 웃음을 멈출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크하하하핫!”
수혁은 질린 듯한 시선을 향했다.
미친 소리를 할 때부터 미친놈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설마 배 한가운데가 뻥 뚫린 상태에서까지 이렇게 미친놈처럼 웃어댈 줄은 몰랐다.
이윽고 웃음을 멈추고 고개를 들어올린 잭이, 수혁을 향해 흉흉한 붉은 눈을 번뜩였다.
“훌륭해! 역시 내가 선택한 자답군! 이렇게 즉각적으로 내가 준 어빌리티를 써먹을 줄이야…!”
수혁은 눈을 좁혔다.
미쳐도 보통 미친 녀석이 아니었다.
기분이 나빠진 수혁은 검을 비틀어 잭의 허리를 두동강냈다.
그러자 미친 것처럼 웃던 잭의 몸이 마치 끈 떨어진 것처럼 쓰러지고 말았다.
그러나 죽은 것은 아니었다.
쓰러진 잭으로부터 검은 기운이 솟아 나와, 하나의 사악한 형상으로 변해간다.
“흐흐흐, 설마 인간 따위에게 나의 본 모습을 드러낼 줄이야.”
이윽고 나타난 것은 어딘가 불길한 분위기를 풍기는 험악한 인상의 까마귀였다.
머리에 세모꼴의 뿔이 달려 있고, 영체가 그러하듯 반투명한 몸을 가지고 있었다.
몸집은 일반 까마귀보다는 약간 큰 정도.
공중에 뜬 채 검은 날개를 천천히 펄럭이며, 거만한 눈을 치켜뜬 채 수혁을 내려다보았다.
“이 악마 로코 님을 본래의 모습으로 되돌리다니. 재미있구나, 인간이여.”
악마!
본래 마계에서 머물며 인간의 소환에 응하곤 하는 그들이지만, 일부의 악마는 이렇듯 인간의 몸을 빼앗거나 인간으로 변신하여 판데라 대륙에 혼란을 일으키곤 했다.
살인자 잭 역시, 로코라고 하는 악마가 만든 신체에 로코 자신이 들어간 케이스로서, 지역 사회에 여러 살인을 통해 커다란 혼란을 일으켜 왔다.
그랬던 것이, 노란 화살표가 보이는 수혁에 의해 그 진정한 정체가 드러나고 만 것이었다.
물론 수혁은 그런 로코가 전혀 위협적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래서?”
“흐흐흐. 인간 주제에 겁이 없구나. 이 로코 님의 진정한 모습을 일깨운 것을 후회하도록 만들어주지!”
자신을 로코라 칭한 악마는 천천히 날갯짓을 하며 뿔 위에 강력한 바람 에너지를 충전하기 시작했다.
“크하하! 잘 보아라! 영체 상태인 나는 네 녀석에게 간단히 공격을 가할 수 있지만, 실체를 가지고 있는 네 녀석은 결코 나를 공격할 수 없….”
수혁은 한심하다는 듯 로코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말없이 무채색의 반지의 소켓에 유목의 정수를 끼워 넣었다.
유목의 정수. 영감 스텟을 부여하여 평소에는 볼 수 없는 영체를 볼 수 있게 해주는 한편, 원래라면 만질 수 없는 영체를 만질 수 있도록 해주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대로 로코의 목을 붙잡아, 한 대 한 대 정성스럽게 로코의 얼굴에 주먹을 날리기 시작했다.
“쿠왁! 가, 감히 무슨 짓을….”
건방진 소리가 나오는 부리를 중점적으로 노리고 때렸다.
“이, 이런 짓을 하고도 네 놈이….”
“조, 좋은 말로 할 때 그만….”
“뭐, 뭔가 타협점을….”
“제, 제발 살려….”
제발 그만해 달라고 빌 때까지 때리고 또 때렸다.
마침내 수혁이 주먹질을 그만두었을 때, 로코라고 하는 악마는 계약으로 묶인 수혁의 충실한 종이 되어 있었다.
***
두 번째 미션을 끝낸 수혁은 또다시 거점의 침대에서 눈을 떴다.
여전히 좁은 방. 그러나 이전과는 달리 밖으로 나가는 문이 달려 있다는 것이 위안이었다.
수혁은 머리를 털어 잠의 기운을 쫓아내고는, 미션을 수행하는 동안 있었던 일들을 돌이켰다.
여러 가지 일들이 있었다. 마신의 사원에서 시련을 받은 일이라거나, 다리온과 싸운 것. 그 이후 메인 미션에 합류하여 활약을 펼친 것.
생각보다 다른 플레이어들이 너무 약해서 김이 새는 느낌을 받았었다.
한편으로는 자신이 그만큼 강해진 것 같아 뿌듯하기도 했다.
‘그러고보니 리덴 길드의 녀석들이 보이지 않았었지.’
분명 메인 미션에 합류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모습이 보이지 않아서 의아하게 생각했었다.
만약 만나게 된다면 능청스럽게 들러붙어 정보를 캐내려고 했는데, 약간 아쉬웠다.
하긴, 만약 마주치게 된다면 열쇠를 훔쳐간 용의자로 의심받을 수 있었을 테니 안 마주친 것이 오히려 다행일지도 모른다.
물론 그렇게 된다면 수혁은 본 실력을 숨기지 않고 그들의 입을 막으려 했을 것이다.
‘아무튼 앞으로의 계획이라.’
메인 미션에 합류하여 어느 정도의 정보 교환을 할 수 있었다.
물론 수혁은 중요한 정보는 숨겼고, 그것은 아마도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하지만 이 서바이벌 월드에 대한 기본적인 정보는 수혁으로서도 어느 정도 획득할 수 있었다.
자신이 어느 정도의 위치인지, 다른 플레이어들은 어떻게 지내는지, 이 서바이벌 월드는 어떤 곳인지.
정작 제일 중요한 정보인 이 서바이벌 월드로부터 나가는 법에 대해서는 알아낼 수 없었지만, 사실 수혁도 그렇게 간단히 알아낼 수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아마도 스테이터스에 표시되어 있는 계층을 올라가다 보면 무언가 단서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추측들을 하고 있을 뿐이었다.
‘계층이라…. 계층을 올려 아바레카에 가면 여러 정보들을 얻을 수 있다고 했지.’
일반적으로 100번대의 미션을 무난하게 수행할 수 있는 D등급 후반에서 C등급 초반이 되면 아바레카에 가는 미션을 수행하게 된다.
수혁이 현재 B등급에 근접한 C등급이었으니 슬슬 아바레카라는 곳에 가보는 것도 좋을 듯했다.
현재 수혁은 어빌리티를 어떻게 관리해야 하는지를 고민 중이었는데, 아바레카에서는 자신이 가진 어빌리티의 합성 조합을 시뮬레이트해 그 결과를 보여주는 서비스를 제공한다고 하니 그 때문에라도 아바레카에는 가는 편이 좋을 듯했다.
다만 지상계로 승급하기 위해서는 미션 포인트가 필요하니 그 전에 가벼운 미션들을 수행하여 미션 포인트를 모을 필요는 있었다.
‘로코 녀석은 그 사이에 길들이는 것이 좋겠지.’
전 미션 수행 도중 자신의 사역마가 된 로코는 기본적으로 영체였기 때문에, 여러 모로 이용하기 좋을 듯했다.
아직은 수혁에 대해 반항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지만, 함께 여행을 하는 동안 상냥하게 어루만져준다면 로코의 생각도 많이 바뀔 것이다.
한편, 다리온의 일기장으로부터 생겨난 히든 미션은 메인 미션이 끝났음에도 아직 사라지지 않고 있었다.
당장에 수행하기가 버거워 나중에 다시 수행하려고 했건만, 예상하지 못한 현상이었다.
게다가 내용도 조금 바뀌어, 다리온이 죽은 사실이 사라지고, 단순히 일기장을 전달하라는 내용으로 바뀌어 있었다.
이 현상에 대해서도 여러 가지로 생각해 볼 것이 있었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여러 가지로 바쁜 수혁에게 있어 나쁘지 않은 현상이라는 것이었다.
설마 미션이 발을 가지고 도망칠 리는 없으니, 여유를 가지고 차차 풀어나가기로 했다.
‘그건 그렇고 레밀리아와 직접 얼굴을 맞대는 것도 오랜만이군.’
통신 기능을 이용해서 꽤 자주 얼굴을 보았지만, 미션을 수행한 것은 거의 2주일이나 되었기 때문에 마주친다면 감회가 새로울 듯했다.
거점 안 어디쯤에 있으려나 하는 생각을 하며 침대에서 몸을 일으킨 그때, 문을 열고 레밀리아가 들어왔다.
“어서오십시오, 주인님. 모험은 어떠셨는지요.”
“그야 나쁘지 않았지. 레밀리아도 잘 지냈지?”
“물론입니다. 염려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수혁은 레밀리아가 과연 거점을 어느 정도나 확장시켰을지가 궁금해졌다.
수혁이 미션을 수행하며 돈을 쓸 일은 거의 없었기 때문에 대부분의 돈은 레밀리아에게 송금했고, 레밀리아가 그것을 바탕으로 하여 스스로 거점을 확장하였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레밀리아는 언제나 그렇듯 깍듯이 수혁에게 고개를 숙인 뒤, 변함없는 무표정으로 수혁을 안내하였다.
“주인님께서 대규모의 지원을 해주신 덕분에 거점을 다양한 방향으로 확장할 수 있었습니다. 자세한 것은 돌아다니면서 설명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사실, 방을 나서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수혁은 그다지 기대하지 않았다.
수혁이 돈을 많이 벌었다고는 하나, 다 합쳐 봐야 고작 15만 루페 정도에 불과하였기 때문이었다.
생산 시설과 주요 시설에 돈을 투자하는 것만 해도 빠듯할 테니, 거점 자체는 그리 발전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방을 나서자마자 나오는 복도가 끝없이 이어지는 광경과 마주하자, 수혁으로서도 긴장된 침을 삼키지 않을 수 없었다.
“저, 저기. 이 복도는 대체 어디까지 이어지는 거지?”
복도에는 수많은 방이 나있었고, 각기 수많은 내용의 편의시설들이 가득 차 있었다.
한쪽에는 무기구 상점, 방어구 상점, 잡화류 상점 등의 다양한 상점들이 늘어서 있었고, 한쪽에는 면 요리점, 고기집, 밥집 등의 음식점이 늘어서 있었다.
더 나아가면 마사지실, 안마실, 미용실 등의 유흥 시설들이 늘어서 있었으며, 심지어는 보드 게임방이나 책방 같은 시설까지 있었다.
당장에 이 상점들을 유지할 유지비 걱정부터 들었지만, 레밀리아의 설명으로는 유지비는 들어가지 않는다고 한다. 점원은 NPC로서 무급이고, 제공되는 서비스 역시 사전에 만든 것을 아이템화 하여 제공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수혁이 신기한 표정으로 그것들을 쳐다보고 있자, 레밀리아가 말했다.
“주인님께서 주신 돈으로 생산 시설과 주요 시설들을 설치하고 남은 돈으로 설치한 것입니다. 원하신다면 언제라도 이용하셔도 됩니다. 마음껏 이용하신다고 해도 현재의 재정상으로는 별 문제가 없으니 돈 문제는 안 하셔도 될 것입니다.”
내가 준 돈이 남아서 설치한 거라고? 그것도 주요 시설까지 다 설치하고 나서?
수혁은 말도 안 된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무리 그래도 자신이 이 정도나 되는 돈을 레밀리아에게 건네준 기억은 없었다. 주요 시설 중 보물 창고만 해도 5만 루페나 드는데….
아무튼 수혁은 시험 삼아 바로 옆의 마사지실로 들어갔다. 깔끔한 차림의 여성 마사지사 NPC가 수혁을 맞이했다.
“어서오십시오, 손님.”
수혁이 눕자, 마사지가 시작되었다.
모험을 하는 동안 뭉친 근육들이 시원하게 풀어졌다.
아무리 거점이라고 해도 방심할 생각은 없었건만, 어느새 수혁의 굳은 입가 역시 흐물흐물해져 있었다.
그러다가 수혁은 정신을 차리고 레밀리아에게 물었다.
“도,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거야!”
레밀리아는 여전히 표정의 변화 없이 대답했다.
“장사를 한 결과입니다.”
“자, 장사?”
“네, 그렇습니다.”
레밀리아는 일의 전말을 설명하였다.
거점에서 설치할 수 있는 시설 중에, 마켓이라는 시설이 있다.
마켓을 설치한 거점 간에 물건을 거래하여 상행위가 이루어지는 시설이었다.
당연하게도 거점의 주인 되는 플레이어들만 이용할 수 있고, 메이드나 집사들은 이용 불가. 그야 메이드나 집사가 상행위가 가능하다면 플레이어가 미션을 수행하는 동안 모두가 메이드나 집사에게 상행위를 시킬 테니, 혼란이 벌어질 터이므로 당연한 조치였다.
그런데 레밀리아는 ‘거점 관리’라는 어빌리티 덕에 그것이 가능했다.
그것도 미션을 수행하느라 상당한 시간 동안 자리를 비워야 하는 플레이어와는 달리, 잠자는 시간을 제외하고 항상.
게다가 레밀리아의 장사 스킬은 A등급!
하루종일 마켓의 동향을 쳐다보며, 장사 스킬에 의한 정확한 눈썰미로 급처하는 물건을 싸게 사고, 급매하는 물건을 비싸게 팔았다.
순식간에 불어나는 돈들.
“주인님께서 초반 자본금을 충분히 보내주셨기에 돈을 불리는 것은 더욱 쉬웠습니다.”
“잠깐, 아무리 그래도 그걸로 돈이 벌린 거야? 여기가 게임 속 세상도 아니고 다들 돈 벌려고 혈안이 되었을 텐데….”
물론이었다. 루페라고 하는 것이 현실에서의 돈 그 이상의 가치를 가지고 있다보니, 한푼이라도 손해를 보지 않으려고 모두들 필사적이었다.
하지만 언제나 마켓에 접속할 수 있는 레밀리아와 달리, 플레이어들은 거점에 체류할 수 있는 시간이 제한적이다. 다음 미션에 급하게 필요한 아이템이 있을 수도 있으며, 급하게 돈을 만들어야 할 필요가 있을 수도 있다.
그리고 이러한 점에서 전혀 급할 것이 없는 레밀리아는, 다른 플레이어들에 비해 냉정한 머리로 상행위를 하는 것이 가능하였다.
이렇게 해서 불린 재산이, 고작 2주만에 약 5배 정도.
중간에 운이 좋은 거래가 있긴 했지만, 그걸 고려해도 어마어마한 수치였다.
그리고 모든 내막을 전해 들은 수혁은, 레밀리아 앞에 선 채 그녀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레밀리아, 내가 너를 안아봐도 되겠니?”
레밀리아는 언제나 그렇듯 공손한 자세로 허리를 숙였다.
“물론입니다. 얼마든지 안아주십시오.”
수혁은 양손을 높이 들어, 레밀리아를 와락 껴안았다.
대견해서 어찌할 바를 모르는 눈빛을 한 채 몇 번이고 등을 두드려주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