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멸의 도시, 아바레카 (3)
수혁이 그녀를 따라간 것은, 꽤 예쁘장한 외모인 그녀가 데이트를 신청한 것에 대해 혹했기 때문은 결코 아니었다.
애초에 방금과 같은 상황에서 자신에게 말을 건 자를 의심하지 않는다는 건, 믿을 사람 하나 없는 이 서바이벌 월드에서는 바보 같은 짓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혁이 그녀를 따라간 것은, 우선 수혁이 가지고 있는 육감이 그다지 큰 경계를 보내지 않았으며, 수혁 역시도 그녀가 어째서 자신을 불러 세웠는지에 대해 호기심이 생겼기 때문이었다.
‘데이트라니. 뜬금없는 것도 정도가 있지.’
솔직히 말해, 자신이 변질자를 해치운 것이 죄는 아니었다.
죄가 아니니까, 자신은 당당하다.
애초에 뱉어내라고 해도, 이미 먹어버렸으니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만약에 그녀가 자신에게 변질자를 해치운 것에 대해 추궁하거나 자신의 신상을 알아내려 한다면, 수혁은 곧바로 자리에서 빠져 나와 포탈을 향해 달려갈 생각이었다.
“그럼 단도직입적으로 물을게요. 저 어떻게 생각하세요?”
너무 단도직입적이잖아.
수혁은 여우 같은 웃음을 지은 채 자신에게 대쉬하는 그녀를, 약간 부담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며 그렇게 생각했다.
현재, 이곳은 포탈에서 그리 멀지 않은 분위기 좋은 카페의 2층 창가.
수혁은 만약에 낌새가 보인다면 언제든 도망칠 수 있도록 경계를 늦추지 않은 채 나연과 마주하고 있었다.
일단은 데이트라는 명목으로 이렇게 마주하고는 있지만, 실제는 다르다. 그녀는 자신이 꽤 강한 변질자를 간단히 처치해버린 것에 대해 의심을 품고 있기에 이렇게 자신에게 접근한 것이다.
그쪽에서 먼저 말을 꺼내주었으면 했지만, 여기까지 왔어도 그녀는 본론을 꺼낼 생각이 없어 보인다.
수혁은 속으로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다면 자신 쪽에서 먼저 얘기를 꺼내는 수밖에.
“나부터 단도직입적으로 물을게. 아까부터 계속 날 따라온 이유가 뭐야?”
그녀는 수혁 쪽에서 먼저 이런 말을 꺼낼 줄 몰랐던 듯,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수혁을 주시했다.
수혁은 자신을 얕잡아보는 듯한 그 눈빛에 짜증이 나는 것을 느꼈지만, 한편으로는 이곳에서의 자신의 입장이 그 정도라는 것을 인지했다.
아무도 자신에 대해 알지 못하며, 자신 역시 아는 이가 없다.
완전한 이방인. 이곳에서의 수혁의 입장은, 단순히 그 정도에 불과할 뿐이었다.
나연은 한참이나 수혁의 눈을 들여다보다가 입을 열었다.
“뭐,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니 어쩔 수가 없네요. 근데 한 가지 궁금한 게 있는데, 왜 갑자기 반말이에요?”
“너 몇 살인데.”
“스물둘.”
“난 스물세 살인데?”
“보기보다 늙으셨네.”
“그쪽이야말로.”
허공에서 불꽃이 튀었다.
실상, 둘의 나이는 각각 18과 21이었지만, 단지 존댓말을 하지 않으려고 나이를 부풀리고 있었다.
둘 다 유치하기 짝이 없었다.
“…후우, 그만두자. 솔직히 이런 데서 나이 따져 봐야 뭐 하겠어. 어차피 그쪽이나 이쪽이나 피차 남남일 뿐이고, 그쪽도 예의 격식 이런 거 별로 안 따지는 것 같으니 그냥 서로 반말하는 걸로 하지.”
“서로 반말하자는 거엔 동의. 근데 정말 몇 살이야? 꽤 어려 보이는데.”
“몇 살일 것 같아?”
나연이 깍지 낀 손 위에 턱을 올린 채 여우 같은 눈빛으로 수혁을 올려다보았다.
수혁은 제대로 된 이야기를 시작하기도 전부터 눈앞의 여자가 쉽지 않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하긴, 나연의 말마따나 이런 곳에서 나이를 따진다 한들 큰 의미가 없기는 했다.
현재, 이 서바이벌 월드에 대해 알려진 것에 따르면, 인류는 현실의 어느 한 시점을 기준으로 모두가 정신을 잃었다. 그리고 순차적으로 이 서바이벌 월드에 소환되기 시작했다.
소환이 시작된 것은, 이 서바이벌 월드를 기준으로 약 8년 전. 소환이 시작된 현실에서의 시점은 같으므로, 현실에서의 나이 차와 이 서바이벌 월드에서의 나이 차가 달라지는 현상이 발생하게 되었다.
예를 들어 현실에서 수혁과 동갑이었던 친구가 있었다고 치자. 이 친구가 만약 서바이벌 월드를 기준으로 3년 전에 소환되었다고 한다면, 정신을 잃은 시점은 같지만, 친구 쪽은 소환된 지 3년이 지났으므로 수혁보다 3살이 많은 셈이었다.
이런 일들이 서바이벌 월드의 곳곳에서 벌어지곤 했다.
그래서 어쩌면 이곳에서는 나이라는 것이 그렇게까지 중요하지는 않을 수도 있었다.
아무튼, 존댓말이니 나이 같은 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나연의 눈빛이 조금 전의 나긋나긋하던 것과는 달리 날카롭게 변한다.
“좋아. 솔직히 물어볼게. 너, 아바레카는 처음이지? 아니, 처음까지는 아니더라도 그다지 익숙하지는 않은 건 분명해.”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지?”
“나한테서 달려서 도망치려고 했잖아. 포탈 이동 주문서를 사용하지 않았지.”
수혁은 순간적으로 포탈 이동 주문서? 라고 되물으려다가, 그편이 오히려 나연의 추측을 강화한다고 생각해 가까스로 멈췄다.
그러나 이미 너무 늦어 있었다. 나연의 입가에 그럴 줄 알았다는 듯한 미소가 떠올랐다.
“방금 그런 게 있었던가 하는 생각을 했지? 후후, 그것만 봐도 아바레카의 진정한 시민이 아직 아니라는 건 충분히 알 수 있지. 이 아바레카에서만 사용할 수 있으니까, 보통 지하계 플레이어들은 포탈 이동 주문서의 존재 같은 건 잘 모르거든. 반면에 아바레카에서 꽤 지낸 플레이어들은 웬만하면 포탈 이동 주문서 하나쯤은 챙겨두곤 하지. 언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니까.”
수혁의 표정이 저절로 굳어졌다.
눈앞에 있는 여자는 생각보다 여간내기가 아니었다.
신상이 알려지는 게 두려워 최대한 말을 조심하려 했는데, 말 한마디 제대로 꺼내지도 못했는데도 벌써 중요한 정보가 드러나고 말았다.
이 여자와 계속 대화를 나누는 것은 위험하다. 그렇게 판단한 수혁은, 눈앞의 여자와 헤어지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 잠깐! 미안해. 악의가 있었던 건 절대 아냐. 솔직히 그쪽도 알 거 아냐. 만약 내가 진짜로 그쪽을 이용해 먹으려고 한다면, 굳이 경계심을 가지게 할 만한 이야기를 왜 꺼냈겠어.”
수혁은 잠깐 멈춰 서서 고민했다.
나연이 지금 말하는 것 자체가 자신을 안심시키기 위한 연막일 가능성도 있기는 했다.
그러나 만약에 이 여자가 정말로 악의를 가지고 있었다면, 이런 식으로 자신의 경계심을 건드리지 않으면서도 정보를 빼낼 방법이 있었을 것이다.
여전히 경계해야 하는 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일단은 상대방의 목적이 무엇인지를 파악할 필요가 있었다.
수혁은 일단 자리에 다시 앉았다.
“나한테서 원하는 게 뭐야.”
수혁이 자리에 앉자, 나연은 안심한 것처럼 느긋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별건 아냐. 그저, 변질자를 간단히 처리한 그쪽이 꽤나 강해 보여서 인연을 맺어 두려고 하는 것뿐이니까.”
“인연이라고?”
수혁은 살짝 이마를 찌푸렸다.
NPC들과 맺는 그런 인연을 말하는 건 아닐 테고.
어째서 그럴 필요가 있는 거지?
나연은 그렇게 되물을 줄 알았다는 듯 싱긋 웃는다.
“나는 이래 봬도 작은 길드에서 나름 부 길드 장이라는 직책을 맡고 있어. 그리고 길드라는 건 언제나 인재가 부족하기 마련이지.”
“나보고 길드에 들어오라는 건가?”
“아니 아니, 물론 그래 준다면야 이쪽으로서도 더할 나위 없겠지만 아무리 그래도 초면인 그 쪽에게 그렇게까지 부담을 줄 생각까지는 없어.”
그렇다면야 다행이었다. 하지만 그녀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궁금증은 더욱 깊어져만 간다.
이윽고 그녀가 입을 열었다.
“내가 원하는 건 단지, 아주 약간의 신뢰. 그리고 그쪽과 거래 관계를 트는 것 정도가 다야. 솔직히 그쪽 입장에서도 이쪽을 믿을 수 없는 건 마찬가지일 거 아냐. 이쪽 역시 아직 그쪽을 믿기 힘든 것은 사실이고. 그러니 가벼운 부분부터 시작하자는 거지.”
“거래라…. 예를 들면 어떤?”
“뭐, 대단한 건 아냐. 기본적으로 정보를 서로 교환한다든지, 필요한 게 있으면 서로 구해준다든지, 아니면…. 필요한 일이 있을 때 용병으로 뛰어준다든지.”
수혁은 어이가 없었다.
거의 길드에 들어가라는 것과 다름없는 말 아닌가?
일순 그녀의 미소가 뻔뻔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수혁이 걱정했던 대로 이미 해치워버린 변질자를 무르라는 것이 아니라 다행이기도 했다.
어쨌든 눈앞의 여자는 자신이 몰래 변질자를 해치운 것에 대해 탓하려고 하는 느낌은 아니었다.
‘뭐, 제안한 내용 자체만으로 보면 나쁘지는 않긴 한데.’
사실, 길드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거래라고 한다면 수혁으로서도 나쁜 이야기는 아니었다.
길드에 들어간다면 얻는 것은 더 많을지 모르지만, 그만큼 얽매이는 부분이 있을 수밖에 없다.
만약 서로가 서로에게 필요한 것만을 주고받을 수 있다면, 그편이 최상이라고 생각되었다.
다만…. 수혁에게는 그것이 결코 쉽지 않은 이유가 있었다.
“미안하지만 그건 힘들 것 같군.”
“응? 어째서?”
나연은 설마 수혁이 자신의 제안을 거절할 줄 몰랐다는 듯 눈을 크게 떴다.
하지만 조금의 위험 요소라도 차단하고 싶은 것이 수혁의 마음이었다.
보통의 사람이라면 몰라도, 수혁에게는 히든 피스가 보이는 노란 화살표가 있었으니까.
단순히 안 보이는 척을 하면 될 문제지만, 그렇다고 해도 그것을 들키게 될 만한 위험은 최대한 피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뭐, 각자의 사정이라는 게 있는 거니까. 그럼 나는 이만….”
수혁이 자리에서 일어선다.
그러자 수혁의 태도에서 진지함을 느낀 나연 쪽이 오히려 다급해지고 말았다.
‘이러면 안 되지. 아바레카 초행임에도 A등급 하급의 변질자를 간단히 잡아냈어. 아마도 B등급 중급인 나보다도 강하겠지. 분명 아바레카에 오기 전 엄청난 속도로 강해진 구간이 있을 거야.’
실상 스텟만으로 따지자면 수혁은 B등급 하급으로 나연보다도 약간 약할 정도였지만, 결과적으로 강한 변질자를 해치웠으므로 나연의 추측이 그리 틀린 것은 아닐지도 몰랐다.
그리고 나연은 그것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히든 피스밖에 방법이 없다고 생각했다.
물론 히든 피스가 아니라 단순히 아바레카에 늦게 진입한 것일 가능성도 있겠지만, 그러한 경우라도 이 정도로 강하다면 이름이 알려지지 않았을 리 없었다.
분명 대단한 히든 피스였겠지. 최소 A-에, 어쩌면 놀랍게도 S등급의 가치를 가지고 있었을 수도 있다.
그것만으로도 수혁을 붙잡아둘 이유는 충분했지만, 거기에다가 어쩌면, 나연 스스로도 거의 그럴 리는 없다고 생각했지만, 마신과 관련된 히든 피스를 얻었을 가능성도 있었다.
그렇다고 한다면 나연으로서도 조금 위험했다. 마신의 힘은, 천신의 힘과 함께 대길드에서도 눈에 불을 켜고 찾는 히든 피스 중의 하나였다.
나연은 일반 플레이어 중에서 이러한 힘에 관련되었다가 좋은 꼴을 본 경우를 본 적이 없었다.
만약 수혁이 그런 힘 일부라도 가졌다고 한다면, 나연은 수혁에게서 관심을 끄고 아무것도 모르는 것처럼 행동해야만 하리라.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러한 일말의 가능성이 나연의 가슴을 두근거리게 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었다.
위험. 나연은 자신을 위험 속에 빠뜨리는 남자가 좋았다.
“잠깐, 그렇다고 한다면 이쪽과 그쪽 사이에 작은 신뢰 관계를 위해 이쪽에서 그쪽이 원하는 것을 제공한다는 것은 어때? 예를 들면, 그쪽이 이곳 서바이벌 월드에 대해 궁금한 점이라든지.”
수혁이 뒤를 돌아보았다.
웬만해서는 아무와도 얽히고 싶지 않은 수혁이었지만, 나연이 지금 말하는 것은 거래가 아닌 자신 쪽의 일방적인 제공이었다.
수혁은 자신 쪽이 유리한 불공정거래 역시 좋아했지만, 자신이 일방적으로 무언가를 제공받는 것은 더 좋아했다.
어차피 여차하면 입 씻고 한동안 거점에 잠적하면 될 테니, 이참에 수혁이 알고 싶었던 정보들에 대해 알아보는 것도 좋을 것 같았다.
수혁은 다시 자리로 돌아가 앉은 뒤에 말했다.
“그러면 몇 가지만 묻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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