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인도의 심처 (1)
멀리에서 커다란 괴수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아무래도 몬스터들이 서식하는 섬이다 보니 괴수들의 울음소리가 종종 들리곤 하는 편이지만, 지금의 울음소리는 미세하게나마 땅이 울릴 정도의 크기였다.
지금도 이 소리를 들은 다른 플레이어들은 이 정체불명의 거대한 소리를 내는 괴수의 정체를 상상하며 불안에 떨고 있을 터였다.
물론 꽤 담력이 커진 수혁에게 있어서는 그냥 그렇구나 정도의 울음소리에 불과한 정도였다.
“오, 샘이다.”
수혁은 하나의 샘을 찾아내고서 기쁜 발걸음으로 그쪽으로 다가갔다.
당연한 듯이 샘물을 들고 온 빈 병에 채워 넣으려고 하다가, 수혁은 갑자기 동작을 멈췄다.
‘잠깐, 최근 너무 긴장이 풀어진 게 아닌지 몰라. 예전에 오거스 던전에 있을 때는 샘물에 독이 있는지도 하나하나 제대로 확인했었는데 말이지.’
물론 이런 곳의 샘에 독 같은 게 풀어져 있을 리는 없다고 생각했지만, 그래도 조심하지 않는 것보다는 나았다.
수혁은 우선 주변을 돌며 자신 대신 테스트를 할 만한 동물을 찾아다니기로 했다.
아쉽게도 주변에 딱히 그런 것은 보이지가 않았다. 그 대신, 여기저기 피어난 알록달록한 색깔의 꽃들이 수혁을 맞이하고 있을 뿐이었다.
“나 참, 어디 적당히 인체 실험의 대상이 되어줄 만한 녀석이 없으려나.”
수혁은 음흉한 웃음을 흘리며 주변을 탐색했다.
그때, 수혁의 눈에 뭔가 일정한 패턴을 그리고 있는 꽃의 색깔이 눈에 들어왔다.
‘어라, 뭔가 묘한데. 샘에서 가까운 부분은 꽃의 색깔이 붉은색인데, 샘에서 먼 부분은 푸른색이다. 어째서지?’
수혁은 수상하게 생각하며 가까이 다가갔다.
푸른색의 꽃을 꺾어 든 채 한참 동안 고민하다가, 슬쩍 샘이 있는 쪽으로 던져보았다.
꽃잎의 색깔이 변해 붉은색으로 물드는 것을 확인한다.
수혁의 머릿속에 하나의 생각이 스쳐 갔다.
‘설마 샘 근처에 있는 꽃은 샘의 물을 빨아들여 붉게 핀 거고 멀리 있는 꽃은 샘의 물을 빨아들이지 않아서 푸르다는 건가.’
샘의 물에 무언가 특별한 성분이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독이든지, 아니면 다른 것이든지.
그리고 그중에서도 수혁의 머릿속에 떠오른 것은, 과학 교과서에서 등장하는 산과 염기의 리트머스 시험지에 대한 실험이었다.
산이 묻으면 붉은색으로 변하고, 염기가 묻으면 푸른색으로 변하는···.
‘다른 샘을 찾는 게 좋겠군.’
수혁이 발걸음을 옮기려는 그 순간, 수혁의 머릿속에 하나의 생각이 떠올랐다.
수혁은 근처에 적당한 덩굴을 끈으로 하여 자신이 가져온 빈 병의 입구에 묶고, 그것을 그대로 샘에 담갔다.
뽀글거리는 물방울 소리와 함께, 병 안에 샘의 물이 채워져 간다.
수혁은 병을 끌어올려 그것을 코르크 마개로 다시 막았다.
분명 어딘가에 쓸 데가 있을지도 몰랐다.
한편, 수혁은 주변을 수색하여 진짜 샘을 찾을 수 있었다.
진짜 샘답게 주변에는 여러 마리의 동물들이 모여 물을 마시고 있었다.
수혁은 그중 사슴 한 마리에게 달려들어 그것을 붙잡은 뒤, 병에 담아온 물을 억지로 마시게 했다.
“뀌이이익! 께에엑!”
사슴의 입속이 급속도로 타들어 가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역시 방금 그 샘의 물은 강한 산성이나 염기성을 띄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잘하면 이것도 어딘가에 사용할 수 있지 않을까.’
수혁은 허리띠라도 만들어서 이것을 가지고 다니기로 했다.
한편, 보금자리와 식수원의 확보도 마쳤으니, 이제는 식량을 구할 차례였다.
이미 보급 상자에 말린 고기를 담아오기는 했지만, 3일 정도면 전부 없어질 터였다.
미리미리 구해놓고 그 이후에는 신경 쓰지 않는 편이 더 나았다.
‘멧돼지 고기가 좋겠지.’
조금 전에도 사슴 한 마리를 기습하여 잡아냈지만, 수혁이 생각하는 것은 조금 더 스케일이 거대한 녀석이었다.
멧돼지 중에서도, 자이언트 보어라 불리는 C등급의 몬스터.
한 마리만 잡아도 이번 미션을 보내기에는 충분한 양의 고기를 얻을 수 있을 터였다.
“꾸위이익! 꾸윅!”
수혁은 한쪽 팔로 늘어져 내린 덩굴을 붙잡은 채 자이언트 보어와 마주하고 있었다.
몸집은 거의 소형 자동차에 육박하는 크기.
입 주위에 난 두 개의 뿔 역시 날카롭기 그지없고, 이빨 역시 초식동물이 아닌 육식동물의 그것처럼 뾰족했다.
수혁은 그런 녀석의 앞에 가만히 서 있을 뿐이었다.
그것이 오히려 자이언트 보어를 자극한 모양이었다.
자이언트 보어가 육중한 몸집을 움직여 수혁에게 달려들기 시작한다.
“꾸위이이익!!”
보어가 수혁에게 달려드는 순간, 수혁은 가볍게 땅을 차 떠올랐다.
그리고 자이언트의 주둥이를 발로 차, 그 반동으로 뒤로 날아간다.
하지만 수혁은 덩굴을 붙잡고 있기에, 수혁의 몸은 나무를 한 바퀴 돌아 자이언트 보어의 뒤를 붙잡는다.
“뀌이이익?”
자이언트 보어는 자신이 공격한 대상이 순간 사라지자 당황하는 모습을 보인다.
수혁은 그런 자이언트 보어의 뒤로부터 나타나, 그대로 덩굴을 놓고 뛰어올라, 멧돼지에 목에 올라탄다.
그리고 자이언트 보어의 머리에, 양손으로 나이프를 잡아 그것을 그대로 찔러 넣었다.
한 번의 공격으로는 깊숙한 곳까지 닿지 않아, 몇 번이나 휘둘렀다.
쿵—!
자이언트 보어의 거대한 신체가 무너져 내린다.
그다지 큰 의미는 없을지도 모르지만, 머리를 제외한 가죽에 상처 하나 나지 않았을 정도로 깔끔한 솜씨였다.
이제, 수혁에게 남은 일은 이 자이언트 보어를 끌고 근거지를 향해 돌아가는 것뿐이었다.
그런데 그때, 수혁의 움직임이 우뚝 멈췄다.
“그런 데서 훔쳐보지 말고 빨리 나와라.”
수풀이 일순 흔들린 듯했다.
이윽고 수풀 안에서 부녀의 모습이 나타났다.
D급 파티에서 쫓겨나 방황하던 그들은, 쉴 곳과 먹을 것을 찾아 여기저기 헤매던 차에 누군가가 전투를 벌이는 모습에 이끌려 이곳까지 오게 된 것이었다.
“대, 대단한 실력이시군요.”
아버지 쪽이 먼저 약간 당황한 기색으로 말했다.
자신 쪽은 쳐다보지도 않은 수혁이 자신들을 발견한 것이 부녀에게는 놀라웠지만, 사실 그들의 등급이 낮은 편인지라 수혁의 육감 센서에 쉽게 걸린 것이었다.
“여기서 뭐 하는 거지?”
오정태는 약간 머뭇거리는 태도를 보이더니, 갑자기 수혁에게 엎드려 절을 한다.
오유진은 그런 아버지를 난처한 듯한 표정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제, 제발 저희를 받아주십시오! 안 그래도 갈 데가 없어 고생하고 있습니다. 받아만 주신다면 무엇이든 할 테니 제발···!”
“아, 아빠···.”
딸의 얼굴에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하지만 수혁의 눈빛은 차갑기 그지없었다.
“너희를? 내가 어째서?”
“부, 부탁입니다! 미션 스톤 같은 건 안 주셔도 상관없습니다. 저희가 이곳에서 얻는 모든 것을 바칠 테니 단지 이 미션이 끝날 때까지만 지켜주시면···.”
“뭐, 됐고.”
수혁은 이미 죽은 거대한 멧돼지의 다리를 붙잡고 질질 끌고 가기 시작했다.
그런 수혁의 다리에 매달리는 오정태였다.
“제, 제발! 제가 아니라 딸만이라도 좋으니 제발 받아주십시오! 제가 이렇게 빌 테니···.”
“아, 그러니까 필요 없다니···.”
그때, 수혁의 머릿속에 앞으로의 계획 중 일부가 떠올랐다.
수혁 혼자서도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이긴 하지만, 생각해보면 수혁이 직접 하기보다는 남에게 시키는 것이 훨씬 나을 것 같았다.
수혁은 천천히 턱을 쓰다듬었다.
갑자기 자신을 습격할 가능성이 없다고는 할 수 없겠지만, 그러한 경우라도 육감 스텟이 있으니 대처하는 것은 그리 문제가 없을 듯했다.
오늘 밤은 무리겠지만, 잠을 잘 때는 사역마 로코를 불러 자신을 지키게 하면 될 것이다.
“···좋다. 받아들이기로 하지.”
“저, 정말입니까!”
“그래. 대신 너희에게 시킬 일이 있다.”
“무엇이든 하겠습니다!”
“그 말 지키는 게 좋을 거야.”
수혁은 묘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
이튿날, 수혁은 부녀를 데리고 섬 안에 존재하는 발로니안의 서식지로 향했다.
발로니안은 굳이 비유하자면 현실에서의 공룡과도 같이 거대한 체구를 가진 초식의 파충류였는데, 이들은 특이하게도 제니스라고 불리는 식물의 단단한 열매를 먹고 그 열매를 소화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이들을 굳이 거둔 것은 그들로 하여금 발로니안이 제니스 열매를 소화하고 남은 씨앗들을 회수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저, 정말로 이것들을 뒤져야만 하는 겁니까?”
“밥 먹기 싫으면 뒤지지 말든지.”
“······.”
전날 저녁, 수혁은 자신이 잡은 멧돼지를 이용하여 성대한 바비큐 파티를 벌였다.
어차피 자신이 훈제로 만들어 먹을 만큼을 제외하면 상해서 곧 버려질 것이 분명했기에 망설임 없이 나누어준 것이었다.
눈물을 뚝뚝 흘리며 고기를 뜯고, 또 자신의 딸에게도 나누어주던 오정태의 모습이 지금에도 눈에 선했다. 어째선지 몰라도 딸 쪽이 그런 아버지를 어려워한다는 느낌을 받았지만, 그런 딸 역시도 먹는 것만큼은 사양하지 않고 마음껏 먹었다.
그리고 지금이 그 대가를 치러야 할 때였다.
오정태는 잠깐 갈등하는 듯했지만, 이윽고 결심을 굳힌 듯한 표정을 지었다.
“아, 알겠습니다. 그러면···.”
장갑이라도 있으면 조금 더 나았겠지만, 보물 상자에서 얻지 않는 한 이곳에서 장갑 같은 것을 얻을 수 있을 리 없었다.
결국 맨손으로 발로니안의 거대한 똥 덩어리를 퍼내고, 그것을 근처의 냇가에 씻어 작은 씨앗을 찾아내는 수밖에 없었다.
“윽, 냄새···. 도대체 몇 개나 찾아야 하는 겁니까?”
“최대한 많이.”
오정태가 코조차 쥐어 막지 못하고 열심히 씨앗을 찾아내는 동안, 오유진은 그런 아버지 쪽을 걱정스러운 듯이 쳐다보고 있었다.
수혁의 시선이 그런 유진 쪽으로 향했다.
“너는 일 안 하니?”
“네, 네?”
유진은 살짝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수혁의 분위기를 살피며 걱정스러운 낯빛으로 발로니안의 똥 쪽을 바라본다.
아직 어리다면 어린 그녀였지만, 그렇다고 해서 봐줄 생각은 없었다. 어리다고 해서 봐주는 법이 있는 곳이 아니었고, 수혁 역시 그럴 생각이었다.
유진은 찌푸린 표정을 숨기지 않은 채 천천히 발로니안의 똥으로 다가간다.
그런데 그때, 오정태가 그런 그녀를 막아섰다.
수혁이 눈썹을 살짝 찌푸렸지만, 그럼에도 오정태는 자신의 행동을 멈추려 하지 않는다.
“부, 부탁입니다. 제가 일을 더 열심히 할 테니 부디 딸만은 가만히 있도록 해주십시오!”
“아, 아빠, 난 괜찮으니까···.”
“아냐, 넌 가만히 있으렴. 힘든 건 전부 아빠가 할 테니까···!”
“······.”
눈물겨운 딸 사랑이었다.
수혁은 이런 것이 오히려 딸의 버릇을 나쁘게 만들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뭐 어차피 남의 일이었다. 함부로 참견하지 않기로 했다.
다만, 딸 쪽이 아빠 쪽을 보며 불만스러운 듯한 표정을 짓는 것은 아무리 수혁이라도 인상이 찌푸려질 수밖에 없었다. 자신 때문에 이렇게까지 하는데도 저런 태도라니.
“이, 이 정도면 그래도 꽤 많이 얻은 것 같은데···. 아직도 더 얻어야 하는 겁니까?”
“아니, 이 정도면 된 것 같군.”
수혁은 어느덧 한 무더기에 달하는 제니스 열매의 씨앗을 쳐다보며 대답했다.
단지 주먹 두 개를 합쳐놓은 정도의 양에 불과하지만, 이 정도라면 미끼로는 쓸만할 듯했다.
콰아아아아—
멀리에서부터 괴물의 울음소리가 들려온다.
그것은 시시각각으로 수혁이 있는 쪽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부녀는 불안한 표정으로 주위를 살핀다.
“너희는 먼저 돌아가라.”
수혁은 울음소리가 들려오는 방향으로 발걸음을 옮기며 그렇게 말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근처의 나무들을 완전히 뭉개며 거대한 벌레가 나타났다.
크기는 버스 정도 크기에, 길이는 훨씬 긴 징그러운 모습의 애벌레였다.
수혁은 그레이트 웜이라는 이름을 가진 그 벌레를 쳐다보며 천천히 나이프를 꺼냈다.
지금부터는 녀석을 길들여야 할 차례였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