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르 스톤 (3)
폭풍이 휩쓸고 지나갔다.
수혁이 지나갈 때마다, 스텟이 낮은 C등급의 플레이어들은 제대로 된 저항도 하지 못하고 우수수 쓸려나가야만 했다.
물론 B등급과 C등급의 차이가 수혁이 무쌍을 펼칠 정도의 차이냐고 묻는다면, 꼭 그렇다고 할 수만은 없었다.
어디까지나 한 등급 차이에 불과한데 그 정도의 실력 차가 난다고 한다면, 굳이 등급을 나누는 의미가 없을 것이기 때문.
그러나 등급을 떠나서 수혁의 스텟과 다른 이들의 스텟을 비교한다면 과연 어떨까.
우선은, 공격력과 방어력에 대해서.
“됐다! 찔렀…. 뭐, 뭣! 맨피부에 찔렀는데 어째서 이 정도밖에…. 으, 으아악!”
물리저항이든 마법저항이든, 변변한 갑옷 하나 착용하지 않은 지금의 상태에서도 웬만한 플레이어가 갑옷을 착용한 것과 비슷한 저항력을 가졌다.
그렇기 때문에 적의 공격이 반감되는 효과가 있는 것은 물론이고,
“크, 크악! 방패로 막았는데 어째서….”
발현으로 강화된 B등급의 나이프는, 기껏해야 D~C등급의 장비밖에 구할 수 없는 이곳에서는 S급이나 다름없는 위력을 보여주었다.
게다가 거침없이 사람의 목숨을 빼앗는 수혁의 모습 역시, 다른 이들에게는 충분히 두려움을 불러일으킬 수밖에는 없었다.
‘대체 뭐지? 살기 스텟은 신경도 쓰지 않는 것 같은 저 대담함이라니…!’
전장의 지배자. 살기 스텟을 미션 포인트로 대체하며, 처치한 대상에 따라 스페셜 마정석을 얻고, 처치한 자의 수에 따라 전투 도중 추가 스텟을 얻는다.
이 S급의 어빌리티가 제대로 빛을 발하는 시점이었다.
반면에 상대는, 아무리 30의 미션 포인트가 예약되어 있다고 해도 기본적으로 사람을 죽이는 것에 거부감을 가질 수밖에 없는 상황.
“뭐, 뭐 하는 거냐! 어서 녀석을 공격해! 제아무리 강한 녀석이라도 이런 식으로 사람을 죽이다가는 금세 살기 스텟이 오버돼서….”
“이, 이미 13은 진작에 넘었습니다!”
“뭐, 뭐라고?!”
드미트리는 그리 추운 날씨인 것도 아닌데 이빨이 딱딱 맞물리는 것을 경험했다.
사람을 13명도 넘게 죽였는데도 괴물로 변하지 않는 남자!
눈으로 보지 않았더라면 그 누가 믿었을까.
‘어빌리티? 스킬? 아니야. 지금까지 이 서바이벌 월드에 그런 건 없었어. 그런데 어떻게 이런 짓을 벌일 수 있었을까. 설마…. 이 서바이벌 월드에서 최초로…?’
드미트리가 놀라는 사이에도 수혁은 단지 하나의 나이프만으로 플레이어들 사이를 이리저리 누비고 있었다.
이미 반이 넘는 인원들이 살해당한 상황.
수적 우위와 살기 스텟이라는 시스템을 악용하여 수혁을 상대하려 했던 플레이어들은, 수혁이 13이라는 한계를 진작에 넘어버린 이 상황에서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한 채 전의를 잃고 있었다.
“마, 말도 안 돼. 13명은 진작에 넘겼는데, 아직도 이렇게 멀쩡하게….”
“게다가 너무 강해!”
“마, 맞아. 길드장님! A등급인 길드장님이라면 분명히 저 녀석도 간단히….”
남은 자들의 시선이, 서로 합의라도 한 듯 르본에게 쏠렸다.
이중에서 유일하게 A등급인 실력자.
다른 이들이 허무하게 당하고 있는 이 시점에서, 저 괴물 같은 놈을 막을 이는 르본밖에 없었다.
“르본님! 이제는 정말로 길드장님밖에 안 남았습니다!”
“저 녀석을 막을 사람은 길드장님뿐입니다!”
길드원들이 저마다 입을 열어 길드장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그러나 그 모습을 본 르본은 어째서인지 파랗게 질린 채 입을 다물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부하들의 머리에 물음표가 떠오른다.
“기, 길드장님! 어서 저 녀석을 막지 않으면….”
길드장 르본이 천천히 돌아섰다.
그리고 부하들의 의문을 뒤로 한 채, 수혁과는 반대 방향으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기, 길드장님…?”
드미트리가 멍하니 르본의 등 뒤로 손을 뻗었다.
그리고 그 뒤로, 서서히 다가서는 선명한 그림자가 있었다.
드미트리는 침을 삼키며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
르본은 계속해서 달렸다.
부하들을 버리고 도망치는 그의 등에는 벌써부터 땀이 한가득이었다.
‘젠장, 부하들 따위야 아무래도 상관없지만 이대로 죽는 건 곤란해! 도대체 어디서 저런 괴물이 나온 거지?’
A급은 안 돼도 B급 정도는 되는 르본이었지만, 그런 그로서도 저런 것과 상대하고 싶지는 않았다.
단순히 강한 것만이 문제가 아니었다. 르본이 생각하기에 자신이 다른 부하들과 함께 그 녀석을 공략했다면, 확실하지는 않지만 아마도 그 녀석을 잡았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수혁이 아무렇지도 않게 플레이어를 살해하는 모습을 보자, 르본은 굳이 자신이 나설 필요까지도 없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저런 식으로 어차피 버리는 말인 파티원들을 죽이다 보면 녀석은 결국에는 변질자로 변할 것이고, 그렇게 되면 다른 이들에게 녀석을 넘길 필요도 없이 자신이 녀석을 처치하면 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녀석이 파티원들을 죽이고, 결국에는 13명의 제한마저 넘기게 되면서, 르본은 뭔가가 잘못되었음을 깨닫고 말았다.
‘저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사람을 죽이는 것에서부터 알아봤어야 했어. 녀석을 이길 수 있건 없건, 사람을 죽여도 되는 사람과 싸우는 건 멍청한 짓이지.’
다행히도 자신이 데리고 온 길드원들 가운데 그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없었다.
대외적으로는 A등급을 자처하는 그가, 사실은 B등급에서도 중급 정도의 위치에 불과하다는 것은 길드 내에서도 극히 일부밖에는 모르는 사항이었다.
이번 미션에서는 자신의 진짜 실력을 알고 있고, 또한 자신이 길드에서 다른 이들을 속이는 것을 협력하는 인원은 따라오지 않았다. 길드원들이라고 해도, 그다지 소중한 사람은 없었다.
‘그나저나 녀석들이 시간을 잘 벌고 있어야 할 텐데. 이렇게 된 이상 미션 스톤을 전부 챙겨서 내가 알고 있는 방법으로 이 무인도에서 탈출만 하면….’
대박!
200에 달하는 엄청난 미션 포인트가 전부 르본의 것이었다.
당분간 거점을 꾸며놓고 자유로운 시간을 보내도 될 것이고, 아바레카의 상점으로부터 루페로는 구할 수 없는 고급 스킬북이나 어빌리티를 구입할 수도 있었다.
‘크크크, 뭐 어쩌겠어. 내가 죽으라고 해서 죽은 것도 아닌데!’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근거지로 달려나가는 르본이었다.
현재 이곳은, 황폐한 구역을 지나 이제 막 숲에 다다르는 지점.
이 부분부터는 나무 때문에 시야가 가려서 자신을 추적하고자 해도 잘 추적할 수 없을 테니, 르본 역시도 수혁으로부터 거의 도망친 것이나 마찬가지인 상황이라고 할 수 있을 터였다.
‘좋아. 나침반은 제대로 챙겼고, 이제 근거지로 제대로 되돌아가기만 한다면….’
그렇게 생각해서 르본의 마음도 조금쯤은 해이해졌을 때였다.
르본의 등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렇게 도망쳐서 어디까지 갈 셈이지?”
르본의 등에 소름이 돋았다.
천천히 뒤돌아보니, 어느새 르본의 뒤를 쫓아온 수혁의 모습이 보였다.
숨이 조금 흐트러지기는 했지만, 르본이 기대했던 커다란 상처나 부상 같은 것은 보이지 않는 모습이었다.
‘녀석들이 내 어빌리티에 대해 어느 정도는 눈치를 챘겠지. 한 놈도 살려 보낼 수는 없다.’
사람을 살해할 때마다 전체적인 스텟이 상승하기에, 마지막에는 꽤나 수월하게 마무리를 짓는 것이 가능했다.
도망치는 자들도 물론 있었지만, 르본이 자신들을 버리고 도망쳤다는 사실 때문인지 얼어 있는 자들이 많아서 다행이었다.
그리고 이제, 르본만이 남아 있었다.
“하, 하하. 이거 왜 이러시나. 자네가 나한테 덤벼서 이길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는 건가? 이 A급의 르본님과 맞붙어서?”
“A급이라, 뭐 상대할 만은 하겠군.”
수혁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말했다.
그 여유로운 모습에 르본은 더 난처해지는 것을 느꼈다.
‘젠장, 안 먹히잖아. 뭔가 녀석의 마음을 돌릴 만한 걸 찾아야 하는데….’
그러다가 르본은 수혁이 그 부녀를 데리고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해냈다.
그래, 바로 그거야! 르본은 속으로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그, 그런데 자네는 역시나 그거로군. 그렇지 않나?”
“그거?”
“로리타 콤플렉스. 어린 여자아이를 성적으로 소유하고 지배하고 싶어지는 거지. 역시나 자네도 나처럼…. 그, 그래. 나처럼 그런 욕망을 가지고 있는 거야. 그렇지 않은가?”
수혁은 헛웃음이 나오는 것을 느꼈다.
이 자는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지?
“나, 나라면 자네의 욕망을 채워줄 방법을 알고 있지. 사실은 말야, 아바레카에 그런 종류의 아이들을 소개해주는 곳이 있다네. 나는 그쪽과 접선하는 법을 알고 있지. 만약에 자네와 내가 사이좋게 이곳에서 잘만 빠져나간다면, 자네에게도 그곳을 소개해주지.”
더는 그의 말을 들을 가치도 없어 보였다.
귀에서 그의 말을 들은 것을 파내 버리고 싶을 정도였다.
그러나 르본은 그런 수혁의 반응을 보고 자신의 말이 잘 먹혀 들어가고 있다고 생각한 것인지, 열정을 담아 말을 뱉어내기 시작했다.
“그, 그렇게 수줍어할 건 없어! 인간은 원래 그런 거야! 누구나가 내면에 은밀한 욕망을 가지고 있지. 그런 걸 부끄러워할 필요는 전혀 없는 거다!”
어쩌면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수혁의 눈에 비치는 르본의 얼굴은, 인간이라기보다는 한 마리의 짐승에 가까워 보이는 표정이었다.
수혁은 굳은 표정을 지으며 르본에게 한 발 더 가까이 다가섰다.
르본은 절박한 표정을 지은 채 그런 수혁에게 대항하여 허리춤에 찬 검에 손을 가져가 대었다.
“너도 어차피 욕망에 가득 찬 인간일 뿐이야!”
“아—쿰!”
콰직!
르본의 머리통이 깨져나갔다.
수혁은 갑작스레 일어난 이 사태에 정신이 멍해지는 것을 느끼며 눈앞을 쳐다보았다.
어느새 나타난 아쿰이 뚝뚝 흐르는 몽둥이를 든 채 르본의 뒤에 서 있었다.
뒤늦게서야 수혁의 육감이 작동하고 있었다.
이 녀석은 위험한 녀석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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