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진실 (2)
거대한 용이 깊은 잠으로부터 깨어나고, 무인도가 혼란 속에 빠져들고 있을 무렵···.
수혁은 깨져버린 유리벽 너머로부터 무언가를 보고 있었다.
‘차단막의··· 바깥.’
용이 잠에서 깨어나면서 엄청난 폭발이 있었다.
분화구를 둘러싼 유리벽이 터져 나갈 정도의 강한 충격.
수혁 역시 글라도스의 겉옷 덕분에 겨우 견뎌냈을 정도였다.
그 폭발 후, 용암으로 가득 차 있던 분화구는 뜨거운 열기만을 남겨둔 채 비어버린 상태였다.
‘원래라면 용이 사라졌어도 용암이 남아 있어야 정상이지만, 용암이 전부 어디론가 빨려 나가 사라져버렸다. 바로 저 검은 구멍으로···.’
바로 저 검은 구멍이야말로 수혁이 목표로 하던 것이었다.
세상의 바깥, 이 세계를 나가는 단서가 될지도 모르는 장소.
‘확실히, 그녀의 말대로였어. 여기까지는 그녀의 말대로다. 물론, 확실한 것은 직접 들어가서 확인해 봐야겠지만.’
나연이 설명해준 것이 바로 이것이었다.
무인도의 중앙에는 거대한 화산이 있고, 특정 조건을 만족하면 화산 안에 잠들어 있는 거대한 용을 깨울 수 있다.
이 용은, 추정 S랭크로서, 아직까지 잡은 사람은 없음. 잡을 수 있는 파티야 있겠지만, 존재 자체가 거의 알려져 있지 않으니 그럴 만도 했다.
아무튼, 이 용을 깨우고 난 뒤에 분화구의 밑바닥에 거대한 구멍이 생겨서, 그 구멍으로 용암이 빠져나간다는 모양.
이것이 뜻하는 것은 두 가지였다. 무인도 밑에 또 다른 거대한 공동이 있거나, 아니면 섬 밑에 깔려 있는 차단막이 모종의 이유로 인해 뚫려서 구멍을 드러낸 것이거나.
‘지난번에 온 녀석들은 여기까지만 확인하고 미션을 빠져나왔다고 했다. 한심한 녀석들이지. 한번 시작했으면 제대로 끝을 봐야지!’
수혁은 가지고 온 로프를 걸 만한 곳을 찾았다.
처음 유리벽이 깨져 유적 내부로 용암이 흘러들어올 때만 해도 사방이 타올랐지만,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난 지금은 그래도 로프를 걸 수 있을 정도로는 식어 있었다.
수혁은 로프를 적당한 곳에 묶고, 반대편은 자신의 허리에 묶은 뒤, 유리벽을 넘어 분화구 바닥에 보이는 검은 구멍으로 뛰어내렸다.
휘익—
점점 가까워진다.
15m, 10m, 5m···.
그리고 마침내 수혁이 검은 구멍을 통과하는 순간, 수혁의 눈앞에 별빛이 펼쳐졌다.
“무, 무슨···.”
가히 환상적인 광경이었다.
단순히 검은 구멍을 넘어왔을 뿐인데, 이곳은 마치 다른 세상처럼 곳곳에 반짝이는 빛이 수를 놓고 있었다.
붉은빛과 푸른빛, 그리고 녹색의 빛들.
정체는 알 수 없지만, 멀리서 천천히 흔들리며 신비로운 분위기를 자아낸다.
‘왠지 몸이 둥둥 떠 있는 것 같은데. 마치 무중력 상태인 것처럼···.’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이제는 거의 식어가는 대량의 용암이 둥둥 뜬 채 굳어가고 있었다.
수혁은 확신할 수밖에 없었다.
이곳은 무인도 밑의 공동 같은 것이 아니라, 차단막 바깥의, 지금까지 미션을 수행하면서는 결코 경험한 적 없는 종류의 공간이라는 것을.
‘그건 그렇지만 도대체 어디까지 이어져 있는 거지.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이 공간을 계속 나아가다 보면 결국 어딘가에 도착하게 되는 걸까.’
그럴지도 몰랐지만, 그건 너무나도 기약 없는 계획이었다. 애초에 무중력이긴 해도 자신이 마음먹은 대로 이동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때, 수혁의 눈앞에 하나의 화살표가 들어왔다.
노란 화살표나 붉은 화살표가 아닌, 이전에 딱 한 번 본 적이 있는 파란 화살표였다.
아무것도 없는 검은 공간을 가로지르는 단 하나의 화살표.
수혁의 눈이 저절로 그 화살표의 끝을 쫓았다.
펄럭—
수혁은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이 텅 빈 공간에 제일 존재해서는 안 될 존재가 수혁의 눈앞에서 날개를 펄럭이고 있었다.
‘은색의··· 나비?’
마치 밤하늘의 달과도 같은 빛을 발하며 수혁을 향해 위태로운 날갯짓을 하고 있다.
수혁이 멍하니 쳐다보고 있자, 날아온 은나비가 수혁의 손 위에 앉았다.
그리고 수혁은 머리에서부터 울리는 목소리를 들었다.
-반갑습니다. 그대, 히든 피스를 찾아다니는 자여. 저, 여신 헬레나가 인사 드립니다.
***
수혁은 당황스러움을 느꼈다.
은나비와 접촉한 순간 자신에게 말소리가 들리는 것도 이해하기 힘들었지만, 그 말소리가 자기 스스로를 여신이라 지칭하는 부분은 완전히 어이가 없을 정도였다.
“여신이라고?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그대의 눈에 보이는 파란 화살표는 어디를 가리키고 있나요?
“흥, 파란 화살표라니 그게 무슨···.”
수혁은 동요를 비치지 않기 위해 표정을 숨겼다.
하지만 내심으로는 앞으로 마주치게 될 충격적인 진실에 적잖이 가슴이 두근거리는 상태였다.
‘이 녀석···. 정말로? 그렇다면, 지금까지 노란 화살표나 붉은 화살표 같은 것이 보였던 것은 전부 다 이 녀석 때문이었단 말야?’
하지만 수혁이 노란 화살표를 얻을 때 들었던 목소리는 남자의 목소리였었다. 지금의 여성스러운 목소리와는 완전히 달랐다.
물론 목소리를 변조했을 가능성도 있으므로 확실한 것은 아니었지만.
은나비는 수혁의 손등에 앉은 채 은빛 가루가 나풀거리는 날개를 한 번 접었다가 펼쳤다.
-당신도 아마 속으로는 인정하고 있을 거예요. 저는 지금까지 당신을 다양한 색깔의 화살표로 이끌어온 존재. 그대에게 히든 피스를 찾아가도록 인도한 존재랍니다.
“······.”
할 말이 없어 입을 다문 수혁에게, 은나비는 또다시 말을 걸어왔다.
-그보다도 당신은 이 세계가 어떻게 해서 생겨났는지 그 이유를 알고 계십니까?
“이, 이 세계가 생긴 이유?”
-네. 그것은 단 한 명의 천재 게이머에 의해 이루어진 일이었지요.
자신을 헬레나라 칭한 은나비는 수혁에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이 세계가 생겨난 이유에 대해.
발단이 된 것은 수혁의 세계에 존재한 한 명의 천재 게이머.
그는 게임에 있어서는 굉장히 천재였지만, 한편으로는 아무도 자신을 알아주지 않는 세상에 절망하고 있었다.
사실, 과학이나 예술, 체육 등, 다양한 분야에서 천재가 출현하곤 한다. 그들 역시 살아가면서 다양한 벽에 부딪히기도 하겠지만, 결국에 천재로서 인정받는 자들은 천재로서 인정받기 마련이었다.
천재 게이머는 자신을 천재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다른 분야와는 달리, 게임 분야에서 천재라고 인정받는다고 해도 모두에게 천재라며 추켜올려지는 일은 없다.
예를 들어, 격투 게임 대회에서 신묘한 컨트롤을 보이며 1위 자리에 올라선다면 어떨까? 세계적으로 유명한 전략 게임에서 우승한다면? 무척이나 어려운 RPG 게임을 최단 기록으로 주파해낸다면 어떨까?
정말로 대단하겠지. 그것을 본 사람들에게서 감탄의 목소리도 나올 것이고, 그런 일을 벌인 장본인에게 열광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그는 이 모든 것을 한꺼번에 이루었다. 하지만 그런 그가 다른 분야의 천재들처럼 떠받들어지는 일은 없었다.
-그의 이름은 최태현. 인간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게임계에서 엄청난 업적을 이루었지만, 어두운 성격 때문인지 그의 팬은 그다지 많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게임에만 몰두하는 그를 비웃는 목소리가 점점 더 높아져만 갔지요. 그리고 어느 날, 그는 갑자기 세상에서 사라져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래, 최태현이라. 기억난다. 분명히 버그를 이용해서 게임을 플레이한다느니 인성이 쓰레기라느니 하는 소문이 돌아다녔던 것 같은데.’
수혁은 이제는 마치 오래전 일처럼 느껴지는 현실의 일을 떠올렸다.
엄청난 실력으로 유명한 다방면의 게이머가 있었지만, 각종 의혹으로 점철되어 사회적으로 매장당한 일이 있었다.
아마도 그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리라.
-세상에 복수심을 갖고 있던 그는, 그에게 관심을 가지고 있던 한 신과 만났습니다. 신은 그에게 하나의 내기를 제안했죠. 자신과의 게임에서 이긴다면 그를 위한 세계를 만들어줄 것이고, 그가 진다면 그는 게임의 재능을 잃은 채 세상으로 내보내질 것이라고. 그는 그 내기를 수락했습니다. 그리고···. 신과의 게임에서 승리하고 말았습니다.
“자, 잠깐만. 설마 그를 위한 세계라는 것이···.”
나비가 다시 한 번 날개를 펄럭였다.
-네. 바로 이 서바이벌 월드라고 하는 세계인 것입니다.
“······.”
얼떨떨한 기분이었다.
장난하는 것도 아니고 뭐냐 싶었다.
자신들이 이렇게 생고생하면서, 서로를 적대하고, 치고받고 하는 이 세계가 단순히 세상에 불만 많은 한 명의 인간 때문에 생겨난 장소란 말인가?
“그, 그렇다고 하면 너는 뭐지? 너는 여신이잖아. 그 천재 게이머나 신이라고 자칭하는 녀석과 한패인 거 아냐?”
-네···. 하지만 당신이 있던 원래 세계의 신은 아닙니다. 저는 이 세계에서 창조신으로서 군림하고 있는 최태현 님이 신으로 임명해주신 덕에 이 자리에 있는 것뿐···.
“즉, 배신자라는 건가?”
-어감이 좋지는 않지만···. 결과적으로 신을 적대하는 당신에게 화살표를 보여주어 도우려 한다는 점에서 그렇게 말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화살표···. 어째서 나인 거지?”
-이곳에 흘러들어오는 여러 사람 중 당신만이 저의 메시지를 받기에 가장 적합한 파장을 지니고 있었으니까요. 사실은 이전에도 이런 식으로 몇 명의 플레이어를 도우려 했었지만, 그들은 결국 리타이어하거나 이 세계를 구하려는 마음이 없었습니다. 저의 힘이 점점 약해져 가는 지금, 당신은 어쩌면 제가 노란 화살표를 보여주는 마지막 플레이어가 될지도 모릅니다.
“흐음···.”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한꺼번에 너무 많은 이야기를 받아들인 것 같았다.
“그러니까 즉, 이 서바이벌 월드라는 곳은 한 명의 게이머가 자신의 오락을 위해 만든 곳이고, 그 녀석은 이 세계에서 신으로서 군림하고 있고, 너는 그 신 중에 한 명이지만 최태현을 배신하고 나를 키우기 위해 노란 화살표를 보여주고 있고···. 뭐 그런 건가?”
-네, 그렇습니다. 비록 저를 만들어주신 분이지만···. 저로서는 그분이 정신적으로 불안정한 모습을 보이는 것이 걱정입니다. 이 세계를 만들고 홀로 군림하시고 난 뒤부터 그분의 그러한 경향은 더욱더 심해져만 갔습니다. 오히려 다른 누군가가 이 세계를 무너뜨리는 것이 그분에게 있어서는 더 도움이 될지도 모릅니다.
수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대충 어떻게 돌아가는 것인지 이해는 되고 있었다.
이 세계가 게임 시스템으로 이루어진 이유. 첫 번째 파란 화살표가 가리킨 메시지 ‘게임은 좋아합니까?’의 의미. 그리고 마신 듀나한이 자신에게 힘을 넘겨주며 흘린 미묘한 뉘앙스까지.
“그래서, 나보고 뭘 어떡하란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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