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히든독식자-73화 (73/78)

세계의 진실 (3)

-…최태현 님을 쓰러뜨려 주십시오.

“신을 쓰러뜨리라고? 나보고? 어떻게?”

-당신이라면 가능합니다. 물론 지금 당장은 힘들겠지만, 이렇게 당신이 차단막을 뚫고 나와 저와 직접 소통하게 된 지금이라면 그 방법을 전해드릴 수 있습니다. 지금 이 순간, 이 세계에서 최태현 님을 막을 수 있는 것은 당신뿐입니다.

수혁의 입가에 쓴웃음이 지어졌다.

신을 쓰러뜨리라고? 미친 짓이다. 자신이 어째서 그런 짓을 해야 하지?

“만약 내가 그 녀석을 처치하고 싶지 않다면 어쩔 생각이지?”

수혁의 입가에 작은 비웃음이 떠올랐다.

솔직히 말해, 자신이 그 최태현이라는 녀석을 해치워야 할 필요는 없었다.

녀석을 해치운다고 해도, 결국에는 일상으로 되돌아갈 뿐이다. 평범하기 그지없는 일상으로….

-…지금으로부터 1년 뒤, 아바레카는 멸망하는 것으로 예정되어 있습니다.

“…그게 무슨 소리지?”

-필멸의 도시, 아바레카. 그 멸망의 때는 점점 가까워져만 가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그것을 눈치채고 막을 방법을 세워야만 하겠지만, 아직까지는 그 누구도 이와 관련된 메시지를 발견해내지 못했습니다. 미션 구석구석을 찾는다면 발견할 수 있었겠지만, 서로 싸우기 바쁜 플레이어들은 그 메시지를 무시하고 말았지요.

“뭐야, 결국 그 녀석과 싸우지 않으면 전부 다 죽게 되고 말 거라는…?”

-네, 그렇습니다.

기가 막히는 이야기였다.

당장 가서 아바레카의 모두에게 알려야 하겠지만, 수혁이 말한다고 해도 누가 믿어줄까 싶었다. 필사적으로 알린다면 모르겠지만, 수혁은 다른 사람들을 설득하는 것은 좋아하지 않았다.

“칫, 결국에는 싸우지 않으면 안 된다는 이야기로군.”

-기억하십시오. 그대는 어쩌면 저의 가이드를 받게 될 마지막 플레이어일지도 모릅니다. 그대가 실패한다면, 가이드조차 없는 다른 이들은 아마도…

“알았어, 알았다고. 그래서 그 특별한 방법이라는 건 뭐지?”

-그건…. 하나의 숨겨진 미션을 돌파하는 것입니다. 그 누구도 발견할 수 없도록 숨겨진 하나의 미션…. 그러나 저라면 당신을 그 미션으로 보낼 수 있죠.

“흐음, 미션이라….”

-물론 그전에 어느 정도는 시간을 드려야겠죠. 부디 이 은나비를 데려가 주셨으면 합니다. 그리고 돌아가서, 충분한 준비를 끝마치고 나면, 이 은나비를 강하게 문지르십시오. 그러면 제가 당신을 새로운 미션으로 보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수혁이 고개를 끄덕이자, 은나비가 스스로 수혁의 인벤토리를 열고 그 안으로 들어갔다.

로프를 타고 원래의 유적으로 올라가는 동안, 수혁은 깊은 생각 속에 빠져들었다.

이 세계의 비밀과 자신이 물리쳐야 할 적.

갑자기 생겨난 무거운 짐에 수혁의 가슴은 답답해져만 갔다.

***

그렇게 해서 무인도 미션은 싱겁게 끝나고 말았다.

여기저기에서 미션 스톤을 모으고, 블리스 길드의 본거지로 보였던 장소에서 대량의 미션 스톤을 얻기도 했지만, 수혁의 마음은 어딘가 공허했다.

‘아바레카의 멸망…. 이 세계의 멸망이라는 뜻이겠지. 거기까지 남은 시간이 겨우 1년….’

말이 1년이지 체감상 거의 곧이나 다름없었다.

이제 조금 강해져서 그것을 실감하는가 싶었는데, 다짜고짜 세계의 멸망이라는 거창한 이야기를 들으니 가슴이 답답할 지경이었다.

무인도에서 무더기로 얻은 미션 포인트라든지 보물들이 전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주인님, 최근 뭔가 걱정스러운 듯한 표정이십니다만….”

거점의 서재.

기분이 좋지 않아 책상에 앉아 책을 읽고 있는 수혁에게, 레밀리아가 다가와 수혁의 안부를 묻는다.

수혁이 읽고 있는 책의 이름은, 아바레카의 역사.

평소 책을 좋아하지 않는 수혁이 책을 붙잡고 있을 정도로, 세계의 멸망이라는 것은 수혁에게 있어 무겁게 다가왔다.

레밀리아는 그런 수혁의 책상 위에 조용히 커피잔을 내려놓았다.

“아니, 아무것도 아냐. 레밀리아는 그냥 평소처럼 있어 주면 돼.”

“하지만 주인님의 근심과 걱정을 파악하여 그것을 최대한 제거하려 노력하는 것도 밑의 사람 된 자의 도리라고 생각합니다.”

“…….”

수혁은 천천히 레밀리아를 돌아보았다.

언제나 그렇듯 단정하게 묶어 내린 레밀리아의 긴 머리카락과, 호수처럼 빛나는 검은 두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레밀리아가 이렇게 적극적으로 자기주장을 이야기한 적은 없었는데….’

언제나 충실하고, 또 수혁에게 많은 부분을 헌신하였지만, 정작 수혁은 그녀가 자신에게 무언가를 요구하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그 정도로 자신의 표정이 심각했던 것일까.

“믿어주십시오. 저는 언제나 주인님의 충직한 메이드입니다. 주인님의 고민을, 고통을, 조금이라도 공유하여 덜어내고 싶습니다.”

“하지만….”

레밀리아가 갑자기 수혁에게 다가왔다.

그리고 메이드복에 감싸여 있는 그 커다란 가슴으로, 수혁을 가볍게 껴안았다.

수혁은 난처했다. 이런 상태에서는 제대로 입을 열 수조차 없었다.

“믿어주십시오, 주인님.”

“…….”

수혁은 어쩐지 마음이 차분해졌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수혁은 드디어 마음이 섰다.

수혁은 레밀리아에게 일의 전말과, 자신이 해야 하는 일에 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세계의 멸망이로군요.”

레밀리아는 심각한 표정을 지은 채 수혁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리고는 수혁과 눈을 맞추었다.

“저는 시스템으로부터 태어난 단순한 메이드이기 때문에, 솔직히 거창한 것들에 대해서는 알지 못합니다. 주인님이 짊어지신 그 짐의 무게가 어느 정도나 되는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적어도 응원 정도는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응원이라. 레밀리아에게서 이런 말을 듣게 될 줄은 몰랐는데.

아무튼, 수혁은 가볍게 미소 지은 채 그런 레밀리아를 오랫동안 바라보았다.

단지 눈을 마주치는 것뿐이지만, 뭔가 여러 가지로 걱정이 줄어드는 것만 같았다.

***

“그래서, 차단막의 바깥을 실제로 마주한 소감은?”

“환상적이더군.”

아바레카의 한 바.

수혁과 나연이 나란히 앉아 대면하고 있었다.

이번이 겨우 두 번째 보는 사이지만, 이전과 같은 팽팽한 긴장감은 그다지 흐르지 않는다.

아마도, 수혁의 마음에 여유가 생겼기 때문이리라.

세계의 멸망과 맞서 신과 싸워야 하는 임무를 가진 수혁에게 있어, 아바레카의 세력 다툼이니 뭐니 하는 것들은 오히려 유치하게까지 보일 정도였다.

나연이 지금 자신에 대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든, 수혁에게는 그 모든 것을 포용할 마음의 여유가 있었다.

나연 역시 수혁의 이러한 태도를 눈치챈 모양이었다.

“뭔가 분위기가 바뀌었군.”

“흐음, 그런가?”

“설마 거기에서 엄청난 보물이라도 얻은 건 아니겠지? 만약 그렇다면 소유권의 반 정도는 이쪽에 넘겨줘도 될 것 같은데.”

수혁은 그저 웃을 뿐이었다.

이전이었다면 이런 거 하나하나에 예민하게 반응했겠지만, 지금은 그런 걸로 소모할 감정이 오히려 아까웠다.

그보다도 수혁이 굳이 그녀를 만나러 온 건, 그래도 이 세계가 멸망할지도 모른다는 정보를 한 명 정도는 알고 있어야 하지 않겠냐는 생각에서였다.

믿고 말고야 뭐 개개인의 자유고 그것을 굳이 강요할 생각도 없었지만, 언질 정도는 흘려 두고서 특별 미션을 수행해도 수행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나연, 만약에 이 세계가 1년 안에 멸망한다고 하면 어떨 것 같아?”

“이 세계가 1년 안에 멸망이라고? 재밌는 소리를 하는군.”

나연은 반쯤 미소를 띤 채 수혁의 표정을 살폈다.

나연이 보기에 수혁은 애송이였다. 때때로 마음속이 그대로 표정으로 드러나 보이는 애송이.

그러나 그런 수혁의 표정을 쳐다본 나연은 살짝 놀라고 말았다.

‘뭐야, 표정이 뭐 이렇게….’

“뭐, 꼭 그렇게 된다는 법은 없겠지만, 세상일이라는 건 모르는 법이지. 필멸의 도시 아바레카라…. 그건 어쩌면 비유가 아니라 진실을 그대로 드러낸 말일지도 몰라.”

수혁은 거기까지 얘기하고는, 자리에서 일어서며 나연의 어깨를 툭툭 쳤다.

“정보의 제공에 대해서는, 일단 감사의 뜻을 표하지. 어쨌든 덕분에 많은 것들을 알게 되었으니까.”

“…뭔가 오늘의 넌 분위기가 조금 이상하군. 물론 아직 두 번밖에 안 보긴 했지만….”

수혁은 작게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는, 나연에게 아바레카의 멸망에 대해 열심히 조사해보라는 충고만을 남긴 채 바에서 유유히 사라져버렸다.

***

세계의 멸망까지 약 1년.

그러나 수혁은 신과 싸우는 게 두렵다는 이유로 여신 헬레나의 요청을 계속해서 미룰 생각은 없었다.

쇠뿔을 뺄 거라면 단김에!

어차피 할 거라면, 최대한 빨리하고 나서 쉬든지 어쩌든지 하는 것이 나았다.

그리하여 약 1주일 정도의 자체 휴가를 최대한 즐기고 난 뒤, 수혁은 드디어 헬레나의 요청에 응할 각오가 바로 선 것이었다.

‘은나비를 문지르면 된다고 했지.’

수혁은 컴퓨터 방에서 은나비를 인벤토리로부터 꺼내 그 날개를 문질렀다.

옆에서 레밀리아가 그런 수혁을 배웅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수혁이 날개를 문지르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은나비를 중심으로 하여 검은 포탈이 생성되었다.

-준비를 끝마치신 거군요. 자, 어서 포탈 안으로 들어와 주세요.

수혁은 레밀리아를 한번 돌아보았다.

기분 탓인지 레밀리아의 얼굴에 서운함이 묻어 있는 것만 같았다.

‘뭐야, 겨우 이런 걸 가지고….’

그러나 그런 생각을 하는 수혁도 차마 레밀리아에게 농담을 할 기분은 아니었다.

“그럼 다녀오지.”

“…네, 주인님.”

수혁은 새로 생긴 포탈을 향해 발걸음을 내디뎠다.

이제 이 안으로 들어가면 언제 다시 돌아올지 알 수 없었다.

어쩌면 영영 돌아올 수 없을지도 몰랐다.

‘칫, 일단 해봐야 아는 거지!’

수혁은 마음을 굳게 다잡았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수혁의 모습이 어디론가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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