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의 기억 (1)
수혁의 시야에, 뭔가 알 수 없는 영상이 비치고 있었다.
조금 열려 있는 문틈 사이로 들려오는 목소리.
“하여튼 그놈의 컴퓨터를 부수든지 해야지 원….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게임만 처하고 있으니.”
“에휴, 그러게나 말이에요. 옆집 창수네는 이번에 올림피아드 대회 나간다던데. 우리 태현이는 고등학생이나 되어서도 아직도 정신 못 차리고….”
“게임이 밥 먹여줘? 도움도 안 되는 것만 하고 있으니 참….”
수혁이 고개를 돌리자, 그곳에는 얼굴과 배에 멍이 든 남학생 한 명이 어두운 방 침대 위에 누워 있었다.
분명히 목소리가 들릴 텐데도, 입술을 꽉 다문 채 움직이지 않는다.
이상하게 생각하는 가운데, 영상이 점차 흐려져 간다.
수혁의 귓가에 메시지가 들려왔다.
-알 수 없는 영상을 보았습니다. 지력과 마력이 1씩 올랐습니다.
‘뭐, 뭐지 이건.’
어느새 수혁은 어두운 공간 위에 서 있는 상태였다.
은나비가 열어준 포탈을 열고 나왔더니 이런 상황이 되어 있었다.
사방을 둘러보아도 보이는 것 하나 없고, 잡히는 것도 하나 없었다.
“여긴 어디지…?”
혼잣말로 중얼거리자, 어디선가 나타난 은나비가 수혁에게 날아와 대답해 주었다.
-이곳은 다른 이들에게는 알려져 있지 않은 13번째의 마신이 잠들어 있는 장소. 당신은 그에 도달하여 신을 이길 힘을 얻어야만 합니다.
“13번째의… 마신이라고?”
수혁은 기억해냈다.
이 서바이벌 월드의 배경이 되는 판데라 대륙에는 7의 천신과 12의 마신이 있으며, 이들의 힘과 관련된 유적들이 대륙 곳곳에 배치되어 있다.
하지만 13번째의 마신이라는 것은, 수혁으로서는 들어본 적도 없었다.
-모르시는 것도 어쩌면 당연합니다. 하지만 당신도 이 서바이벌 월드에서 13이라는 숫자가 얼마나 불길하게 여겨지는지는 익히 알고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사람을 13번 죽인다거나, 파티원의 숫자가 13명이 된다거나. 이러한 일이 일어날 경우에 상당히 불행한 일들이 일어나게 되지요.
“설마 그 이유가….”
-존재가 인정되지 않는 마신. 저주받은 13번째의 마신 아가레스. 당신은 그의 힘을 얻어야만 합니다.
약간 충격이었다.
설마 숨겨진 또 하나의 마신이 있었을 줄이야….
“…그렇군. 하지만 내가 뭘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이 주변은 아무것도 없는 것 같은데….”
그러자 수혁의 눈앞에 하나의 노란 화살표가 떠올랐다.
-따라가 주세요. 그리고 그 끝에 나오는 모든 시련을 돌파해주셨으면 합니다.
“시련이라…. 과연. 마신의 시련이라는 거로군.”
-네. 하지만 당신이 지나왔던 시련과는 상당히 다를지도 모릅니다. 때로는 감각적인 판단이 중요할 것이고, 때로는 민첩한 움직임이 필요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 모든 시련을 헤쳐나갔을 때, 당신은 분명 그분을 상대할 수 있을 정도로 강해질 것입니다.
“흐음, 어렵군. 아무리 그래도 신과도 같은 힘을 얻을 수 있다니….”
-신이지요. 하지만 완벽한 신은 아닙니다. 이 세계 역시도, 그분만을 위해 만들어진 세계인만큼 곳곳에 부족한 점이 있지요. 한꺼번에 많은 인원을 수용하기 힘들기 때문에 일정한 인원을 유지하게 되어 있다든지, 당신이 본 차단막처럼 구멍이 있는 곳이 존재한다든지. 분명 어렵겠지만, 길은 있습니다. 당신은 그것만을 바라봐 주세요.
“…뭐, 좋아. 어차피 처음부터 포기할 생각은 없었어.”
-고맙습니다. 저는 이쯤에서 당분간 사라지게 될 것 같군요. 세계의 시스템에 접속하여 화살표를 만들어내는 것도 그렇지만, 직접 말을 거는 것은 너무나도 많은 에너지를 소모하는지라….
“조언은 없다는 건가. 뭐, 좋아.”
-죄송합니다. 혹시 모르니 이 은나비는 당신에게 붙여 두도록 하겠습니다.
은나비가 펄럭거리며 날갯짓을 하더니, 수혁의 인벤토리로 들어갔다.
수혁은 각오를 다지고 앞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노란 화살표를 따라 똑바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
‘가도 가도 끝이 없군. 이 검은 공간은 도대체 어디까지 이어져 있는 걸까.’
눈앞에 이정표가 있으니 따라가기는 해도, 솔직히 불안했다.
벌써 30분째 무작정 걷고 있긴 하지만, 아무것도 보이는 것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설마 여신이라는 녀석이 거짓말을 한 게 아닐까.’
너무나도 보이는 것이 없다 보니 이런 식의 의심마저 떠올랐다.
그런데 그때, 수혁의 눈에 하나의 홀로그램 같은 환상이 보이기 시작했다.
한 명의 남자가 땅에 엎드린 채 여러 명에게 맞는 장면이었다.
환상으로부터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이게 어디서 선배 앞에서 건방지게! 게임 좀 잘한다고 나대긴!
-쿨럭! 쿨럭쿨럭!
-그깟 게임 좀 잘한다고 뭐라도 될 것 같냐? 프로게이머? 흥, 그것도 지금뿐이지. 조금만 나이 먹어서 손 느려지면 그것도 못할걸?
“…….”
환상이 조금씩 옅어진다.
그 대신, 그 사라진 환상 속에서 갑자기 검은 그림자가 나타나 수혁에게 덤벼온다.
“크와앗!”
“뭐, 뭐야!”
수혁은 재빨리 라인플레임을 꺼내 그림자의 손톱을 막아냈다.
머릿속에 있는 악령의 이미지처럼 검은 몸체에 붉은 눈, 그리고 뾰족한 손톱을 가진 몬스터였다.
정체는 잘 모르지만, 일단 덤벼온 이상은 봐줄 수 없었다.
한 손에는 마가의 서를 꺼내 들고, 엘리멘탈 차지를 이용하여 검을 강화한다.
물러서지 않고 맹렬히 공격을 가해, 그림자를 처치하는 데 성공한다.
“그르륵….”
슈우우—
연기처럼 사라진 몬스터의 자리에서 하나의 빛나는 것이 떨어져 있었다.
수혁은 무심코 그것을 들어 올렸다.
“이건…. 고대 문자잖아.”
-고대 문자 1개를 획득하였습니다. 현재 획득한 고대 문자(6/17)
뒤를 이어 공중에 연기로 하나의 메시지가 떠올랐다. 수혁은 그 메시지를 쳐다보았다.
-사람들은 때때로 자신보다 잘난 사람을 질투하곤 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많은 경우 그 사람에 대한 악의의 표출로 나타나곤 하죠.
연기는 곧이어 허무하게 사라졌다.
그러자 마치 처음부터 아무것도 없었던 것처럼 주위가 조용해졌다.
‘뭐야, 이건….’
보이는 것은 노란 화살표뿐. 다른 방법이 없었기에, 수혁은 노란 화살표를 따라 계속해서 나아갔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또 하나의 그림자와 마주쳤다.
“캬아앗!”
“칫, 귀찮게시리!”
수혁은 그리 어렵지 않게 녀석을 처치했다.
그러자 이번에는 녀석에게서 처음 보는 스킬북이 떨어졌다.
<스킬북: 에어 블래스트>
등급 – C
위력 – 150
설명 – 공기를 압축하여 적을 타격하는 마법. 원거리로부터 강력한 타격을 줄 수 있다.
이번에는 여기까지였다.
방금과 같은 환상이 떠오르거나 하지는 않았다. 아마도 환상 자체는 항상 나타나는 것은 아닌 모양이었다.
‘뭔가 간단하게 얻는 것 같기는 한데. 그래도 이 정도라면….’
수혁은 노란 화살표를 따라 앞으로, 앞으로 계속 나아갔다.
계속해서 나타나는 검은 그림자와 녀석들을 처치하였을 때 떨구는 아이템들이 수혁의 마음을 풍족하게 채워주고 있었다.
***
-고대 문자 2개를 획득하였습니다. 현재 획득한 고대 문자(8/17)
-고대 문자 3개를 획득하였습니다. 현재 획득한 고대 문자(11/17)
-고대 문자 2개를 획득하였습니다. 현재 획득한 고대 문자(13/17)
-라인플레임의 검신에 그려진 고대 문자 중 하나의 정체를 밝혀냈습니다. 라인플레임의 능력이 일부 활성화됩니다
-…….
<대검: 라인플레임(+4)>
등급 – A+
희귀도 – 전설
공격력 – 1875
고유 스킬 – 라인플레임
옵션 – 1. 증열: 화염 상태의 적에 대해 공격력 50% 추가 적용. 고유 스킬에도 적용됨.
2. 냉염: 라인플레임의 상태를 반전하여 냉기의 불꽃을 발산한다. 냉기 상태의 적에 대해 공격력 50% 추가 적용. 고유 스킬에도 적용됨.
3. 파이어 가드: 검으로 물리/마법 공격을 쳐낼 경우 대미지 70% 감소
4. 화염의 궤적: 검의 궤적에 화염이 깃들어, 이에 닿은 대상에 공격력의 20%에 해당하는 대미지를 입힌다.
설명 – 강력한 불의 힘이 깃들어 있는 대검. 검신에 새겨진 고대 문자가 의미심장한 빛을 발하고 있다. 현재 밝혀진 고대 문자(4/5)
단지 묵묵히 앞을 나아갈 뿐인데도 고대 문자들이 쏟아져 나왔다.
덕분에 라인플레임이 2번의 진화를 거쳐 벌써 4강.
공격력만 해도 1875라는, 무시무시한 수치를 자랑하게 되었다.
게다가 그 외에도 여러 가지를 얻었다.
-스킬북 ‘브루탈 어택’을 획득하였습니다.
-A등급 마정석을 획득하였습니다.
-‘혹한의 장갑’을 획득하였습니다.
도대체 어떤 이유인지는 몰라도, 보통의 방법으로는 얻을 수 없는 것들이 당연한 듯이 계속해서 나오고 있었다.
수혁이 상대하는 적들은 계속 강해지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수혁이 강해지는 속도가 더 빨랐기 때문에 여전히 상대하기는 쉬웠다.
‘엄청나군. 벌써 아바레카에서도 나보다 강한 녀석은 찾기 힘들 거야. 하지만 상대는 신이다. 이 정도라고 해도 녀석과 겨루기에는 한참이나 모자라겠지.’
수혁은 인연 탭을 열어, 지금까지 맺은 인연들 가운데 벨리온과의 맹약을 선택하였다.
벨리온을 소환하는데 드는 우호도는 30. 현재의 우호도는 100으로 최대 상태였고, 3시간마다 우호도를 1씩 소모하므로 약 9일 밤낮 동안 벨리온을 소환해둘 수 있었다.
그리고 벨리온의 능력은 주변의 아군에게 쿨타임 감소 버프를 전해주는 것! 발현 어빌리티를 통한 스텟의 상승에 크게 기여하는 측면이 있었다.
“음? 그대는 어디선가 본 것 같은…. 아! 그때의 그….”
“오랜만이군. 벨리온.”
예전과는 달리 특별히 벨리온에게 아양을 떨 필요까지는 없었다.
벨리온을 데리고 다니며 자기 자신에게 발현을 걸고, 사역마인 로코를 소환하여 로코의 스텟을 강화한다.
“주, 주인? 이렇게 스텟이 빨리 올라도 되는 건가?”
“돼. 그러니 빨리 강해져서 밥값을 해야겠지?”
수혁의 스텟이 300에서 400으로, 400에서 500으로, 쑥쑥 올라 나가기 시작한다.
뿐만 아니라 이에 따른 매지컬 스텟의 등급이 상승하고, 그 때문에 마가의 서에 달린 제한이 풀려 관련 스텟이 엄청나게 올라갔다.
마가의 서에 달린 법력, 지력, 마력 스텟만 500, 250, 500의 증가로서, 수혁의 매지컬 스텟과 합치면 A등급에 해당하는 엄청난 수치였다.
당연히 성장에 가속이 붙는 것은 당연한 일!
‘강해진다. 더 강해져야만 해.’
한편, 그런 가운데 처음 수혁의 눈앞에 나타났던 영상은 그 이후로는 보이지 않는 모습이었다. 그 대신, 한참을 걸은 수혁의 눈앞에 하나의 거대한 괴물의 실루엣이 나타났다.
노란 화살표의 종착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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