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히든독식자-76화 (76/78)

누군가의 기억 (3)

“허억···. 헉···. 젠장, 더럽게 많네. 이 녀석들.”

많은 시간이 걸렸지만, 결국 이번에도 수혁은 자신에게 달려드는 몬스터를 전부 처치하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수혁의 눈앞에 메시지가 나타났다.

-그토록 열심히 노력했건만 자신을 알아주지 않고 오히려 매장하려 드는 사회에 그는 환멸을 느꼈습니다. 그리고 끝없는 어둠 속에 빠져들었죠.

주위의 공간이 또다시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내 수혁의 주변이 완전한 어둠 속에 물들기 시작했다.

***

끝없는 어둠이었다.

이전까지의 공간도 검은 공간이기는 했지만, 적어도 어둠은 아니었다. 수혁이 사물을 감지할 수 있을 정도의 빛은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동시에 느껴지지 않는다.

-당신은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아무리 노력해도, 실력을 키워도 알아주지 않는 아픔에 대해. 오히려 비난받게 되는 아픔에 대해.

수혁의 눈앞에 흰색의 빛으로 하나의 메시지가 떠오른다.

-주위가 칠흑 같은 어둠으로 물듭니다. 빛이 완전히 사라집니다. 끝없는 어둠만이 그대를 덮칩니다.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유령인 내가 보기에도 너무 어둡잖아!”

수혁은 이전 단계에서 배운 라이트 마법을 켰다.

그러나 켜지지 않는다. 아무래도 단순한 어둠뿐인 것은 아닌 듯하다.

이윽고 이 검은 어둠 속에서 붉은 화살표가 갑자기 생겨났다.

그 끝에 있는 것이 무엇인지 보이지는 않지만, 그것은 확실하게, 빠른 속도로 수혁을 향해 달려들고 있었다.

‘젠장, 도대체 뭐가···. 윽!’

화살표에만 집중하고 있는 사이, 뭔가 날카로운 것이 수혁의 뺨을 스쳐 지나갔다.

수혁은 반사적으로 뒤로 물러섰다.

감지할 수 없는 공격이 수혁을 덮쳐오고 있었다. 아마도, 저 붉은 화살표의 끝에 있는 대상이 무언가를 던진 것 같았다.

게다가 그뿐만이 아니었다.

또 다른 붉은 화살표들이, 차례차례로 생겨나 수혁에게로 다가오고 있었다.

한 치 앞조차 보이지 않는 완벽한 어둠 속에서, 수혁의 감각만이 날카롭게 벼려졌다.

‘위험해. 저 끝에 뭐가 있는지도 모르겠고, 뭐가 날아오는 건지도 알 수 없다. 육감 덕에 뭔가가 날아온다는 건 알겠지만, 보이지 않으니 제대로 피할 수가 없어. 젠장. 도대체 뭐가 일어나고 있는 거지?’

그런 가운데에서도 몸놀림만은 민첩하게 움직였다.

공격이 보이지 않으니, 붉은 화살표의 방향과 육감이 발동하는 타이밍을 고려하여 몸을 굴렸다.

수혁의 옆을 날카로운 공격들이 슉슉 소리를 내며 지나쳐 갔다.

일부는 피했지만, 전부는 피할 수 없었다.

수혁의 몸에 점점 늘어만 가는 상처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수혁은 자신의 내면에 무언가가 바뀌어 가는 듯한 감각을 느꼈다.

‘뭐지. 한없이 축소되어 가는 듯한 이 감각은···.’

수혁 자신이 축소되는 것이 아니었다.

수혁이 바라보는 무언가가, 한 점으로 축소되어 가는 듯한···.

마치 시속 300km로 달리는 레이싱 카에서 앞을 바라보는 듯한 감각.

깊이, 조금 더 깊이.

수혁은 마치 무언가에 이끌리듯 그 속으로 계속해서 빠져들어 갔다.

무아지경 속으로.

‘한 치의 실수도 용납되지 않는다. 하지만···. 어째서일까. 마음만은 편안한 듯한···.’

사실, 지금까지 수혁은 전투에 대해 제대로 된 훈련을 받아본 적은 없었다.

실력이 낮은 것은 아니지만, 본격적으로 무예를 수련한 자들에 비하면 움직임이 제한적이었던 것이 사실.

그러나 이 어둠 속에서 보이지 않는 공격들을 피해 가면서, 무언가의 실마리를 잡아가는 듯한 기분이었다.

‘오감이나 육감을 제외한 새로운 감각···? 아니야. 그렇다고 한다면 새로운 스텟이 생기거나 하지 않았을까.’

붉은 화살표의 방향을 기준으로, 옆으로, 뒤로, 혹은 고개를 숙여서.

갖가지의 공격을 피해 가면서, 수혁은 점점 감각이 예민해지는 것을 느꼈다. 다양한 움직임들이 더욱 익숙해지는 것을 느꼈다.

이런 식으로 공격들을 피하는 것이 어떻게 보면 리듬게임처럼도, 피하기 게임처럼도 느껴졌다.

다른 것이 있다면, 그것들은 손가락이나 팔을 이용해서 하는 것이지만, 지금의 것은 전신을 이용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

전신의 모든 감각을 일깨우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

‘아예 다른 새로운 감각이 아니야. 처음부터 가지고 있던 감각이었던 거야. 다만, 사용하는 법을 몰랐을 뿐.’

-전신의 감각이 확장됩니다. 신체가 정신에 동조하기 시작합니다. 신체의 운용 능력이 더 좋아집니다.

수혁은 피부로 공간의 떨림을 느꼈다.

단순히 감각 기관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닌, 공간 그 자체를 느꼈다.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작은 표창들.

그것은 분명, 일반적인 세계의 상식으로서는 결코 감지할 수 없는 것들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마치 두 눈으로 쳐다보는 것처럼 똑똑히 느껴졌다.

게다가 이전과는 달리 예민하게 반응하는 신체.

‘몸이 가벼워. 반응도 빠르다. 내 몸이 내 몸이 아닌 것 같은 기분이야.’

강해진다. 강해진다. 더 강해진다.

이제, 수혁에게 날아오는 표창들은 수혁의 털끝 하나 건드릴 수 없었다.

더 민첩해진 움직임을 가지게 된 수혁은, 이제는 표창을 던지는 녀석들에 대한 반격에 나서게 되었다.

휘익— 쿠웅!

“크허억!”

처음에는 보이지 않았지만, 이제는 그곳에 있는 닌자들의 모습이 또렷하게 느껴졌다.

닌자들은 빨랐고, 또 다양한 이동 기술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이 자신의 모습을 어둠 속에 숨기더라도, 붉은 화살표가 어디까지나 그들을 따라다닌다.

아무리 빠르다고 해도 잡힐 때까지 쫓아다니면 결국에는 잡히는 법이었다.

수혁의 대검이 어둠 속을 가르며 닌자들의 몸을 하나씩 도륙해 나갔다.

그렇게 한참 동안을 돌아다니며 닌자들을 사냥하였다.

마침내 마지막의 붉은 화살표까지 완벽하게 처리하자, 수혁의 앞에 메시지가 나타났다.

-그는 세상을 증오하기 시작했습니다. 모든 것을 파괴하려는 마음이 그의 내부에서 싹 텄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신과 마주치게 되었습니다.

쿠구구구구—

마치 지진이라도 일어나려는 것처럼 세계가 떨리기 시작했다.

빛을 만들 수 없는 완벽한 어둠이 깨어지며, 수많은 마정석의 조각들로 분해되었다.

그리고 그것이 전부 수혁의 몸속으로 빨려 들어오기 시작했다.

수혁의 스텟이, 수혁 자신조차 건드리지 않았는데도 계속해서 오르기 시작했다.

수혁의 몸이 하얗게 빛나고, 수혁은 말로 표현하기 힘든 고양감을 느꼈다.

그리고 한순간, 수혁의 몸이 빛나며 어디론가 이동되었다.

***

수혁이 다시 나타난 곳은 수혁의 몸이 찻잔만 하게 보일 정도로 거대한 테이블 위였다.

테이블의 양쪽에 약간 어두운 낯빛의 최태현이 있고, 반대쪽에는 약간 심각한 표정의 근엄한 남성의 모습이 있었다. 수혁은 그들을 모두 거인처럼 올려다봐야만 했다.

한편, 테이블의 중앙에는 약간 움푹 팬 공간이 있어서, 그 안에 여러 병종의 병사들이 서로 전쟁을 벌이는 장면이 연출되고 있었다.

약간씩 떨림이 발생하는 것으로 볼 때, 아무래도 진짜로 전쟁을 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전쟁을 영상으로 재현하는 것뿐인 모양이었다. 혹은, 상황에 비추어 볼 때 그들은 서로 병사들을 이용한 게임을 벌이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조금 전부터 계속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던 남성이 돌연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는 두 손을 들어 올렸다.

“내가 졌네. 처음에 약속했던 대로 그대의 소원을 이뤄주도록 하지. 자, 그대가 원하는 소원은 무엇인가?”

헬레나가 이전에 말했던 신이라는 게 바로 이 남자인 모양이었다.

수혁은 최태현이라는 남자가 무슨 말을 꺼낼지를 기다렸다.

분명, 자신을 위한 세계를 만들어 달라고 할 셈이겠지. 이미 그 부분은 들어서 알고 있는 터였다.

그러나 그가 꺼낸 말은 조금 달랐다.

“세계를···. 멸망시켜 주십시오.”

“세계를··· 말인가?”

신이라고 불린 남자는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하긴, 어쩌면 그럴지도 모른다.

세계라 함은 전지전능한 신의 앞에서 별것이 아닐지도 모르지만, 한편으로는 신이 이 세계에 애정을 품고 있다고 해도 특별히 이상하지는 않다.

한 인간의 소원으로 인하여 모든 것을 파괴해도 될 것인가?

“그것은 조금 힘들 것 같군. 다른 소원은 어떤가?”

“신이라는 자가 자기 스스로 한 말을 지키지 않겠다는 겁니까?”

“으음···.”

신은 고뇌하는 모습이었다.

그리고 얼마 후, 신이 숙였던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렇다면 이런 것은 어떤가? 세계를 멸망시키는 것은 어렵다네. 하지만 만약에 자네를 위한 세계를 만들어서, 자네가 그곳의 신이 되면 어떠한가? 자네가 그 세계를 어떻게 다루든 그대의 마음이라네.”

“······.”

약간 망설이는 듯한 표정의 최태현.

그러나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이렇게 덧붙인다.

“좋습니다. 대신, 그 세계의 구성원은 제가 있던 세계의 구성원으로 이루어지도록 해주십시오.”

“으음···. 알겠네. 대신, 인원수에는 제한을 두겠네. 하나의 세계를 만들려면 신인 나로서도 많은 것들을 투자해야 하니 말이야. 설령 그쪽에서 세계를 멸망시킨다고 하더라도, 나머지는 남길 수 있기도 하고.”

“그건 상관없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 사소한 소원을 말씀드리자면, 제가 신이 되어 스스로를 봉인시키고 난 뒤에 제가 인간이었을 때의 기억을 삭제해 주셨으면 합니다.”

“으음? 그건 어째서지?”

최태현은 어두운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그냥···. 모든 것을 잊고 싶습니다. 그저 그뿐입니다. 제가 봉인에서 풀려나고 나면, 저는 아마도 많은 이들을 죽이게 되겠지요. 그때 제가 인간이었을 때의 기억 때문에 괴로워하고 싶지 않습니다.”

“으음···.”

이번에는 여기까지였다.

눈앞의 영상이 점점 흐려지며, 수혁은 또다시 검은 세계로 돌아왔다.

수혁의 눈앞에 하나의 작은 빛이 떠올랐다.

-신과의 내기에서 이긴 그는 세계를 만들어 신으로서 군림했습니다. 현실의 세계가 멈춘 가운데, 그를 위해 만들어진 이 게임 세계에서는 사람들이 죽을 때마다 새로운 사람들이 들어오게 되었지요. 그리고 어느 날, 세계를 지켜보던 그는 자기 스스로를 봉인하고 긴 잠에 빠져들었습니다. 진실에 대한 것을 그가 만든 이 세계 곳곳에 뿌려놓은 채 말이에요.

작은 빛이 점점 커져, 하나의 형상을 이루어간다. 그러는 동안에도 메시지는 계속되었다.

수혁과, 그 뒤에 둥둥 떠 있는 벨리온이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벨리온은 이 상황에 대해 잘 이해하지 못하는 듯한 표정이었지만, 어쨌든 옆에 있었다.

-그가 깨어날 때, 그는 그를 위해 만들어진 이 세계를 멸망시킬 것입니다. 하지만 만약에 이 서바이벌 월드에 그가 그랬던 만큼 게임을 좋아하는 사람이 존재한다면, 그들은 세상에 대한 진실을 밝혀내고 세계의 멸망을 저지할 수 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마침내 빛은 은은하게 빛나는, 사람 크기의 요정 형상으로 수혁의 앞에 나타났다.

여성형으로 보이는 요정이 수혁을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소개 드리지요. 저는 저주받아 이 세계의 깊고 깊은 지하 속에 봉인 당한 존재. 13번째의 마신이라 불리는 존재. 아가레스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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