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히든독식자-78화 (78/78)

최후의 결전 (2)

바람이 가라앉은 뒤, 수혁은 자세를 일으켜 드래곤을 바라보았다.

불같이 타오르는 두 눈과, 거친 비늘. 날렵한 몸매에, 거대하게 펼쳐진 피막의 날개.

너무나도 전형적인 드래곤의 모습이라, 그 정체가 신이 된 최태현일 거라고는 의심조차 하지 못했다.

“넌 또 뭐냐.”

-나…. 나는 이 세상을 다스리는 파괴신, 초이. 언젠가 잠에서 깨어 이 세상을 멸망시킬 존재. 예정으로는 조금 더 뒤에 잠에서 깨어나 세상을 멸망시킬 생각이었지만, 이곳에서 도저히 눈 감아줄 수 없는 힘의 파동을 감지하고 말았다.

“힘의 파동이라니, 그게 대체 뭐야.”

그러자 드래곤은 수혁을 쳐다보며 음흉한 웃음을 흘렸다.

-모르는 척하지 마라. 지금도 네 녀석에게서 이 세상의 근간을 위협할 정도의 기운이 흘러나오고 있다. 아직 완전히 개화되지는 않은 것 같지만, 그것이 이 세상에 나오게 되면 틀림없이 내가 원하는 것과는 다른 일이 일어나게 되겠지.

힘의 파동이라.

설마 방금 자신이 얻게 된 각성 어빌리티를 말하는 건가?

어쩌면 그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 역시, 그 어빌리티에서는 어쩐지 특별한 기분을 느껴야만 했으니까.

수혁이 그 각성 어빌리티를 사용하려는 순간, 수혁의 인벤토리에서 은나비가 튀어나왔다.

-수혁님! 듣고 계신가요?

“이번엔 또 뭐야.”

-지금 깊이 잠들어 계시던 최태현 님이 깨어났습니다! 어떤 힘의 존재를 느끼고 그곳으로 사라졌는데, 아마도 수혁님이 계신 근처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일이 어렵게 되었으니 지금 당장 수련을 중지하고 그곳을 나와주세요!

“잠깐, 최태현이 깨어났다고? 어라, 근데 혹시 그 녀석 생김새가 어떻게 생겼지?”

수혁은 눈앞의 드래곤을 쳐다보며, 어쩐지 불길한 예감을 받았다.

최태현에 대해 막연히 인간 남성의 생김새를 하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돌이켜 보면 정말로 그것이 맞는 것일까 하는 생각이 스쳐 지나간다.

아니나 다를까, 은나비에게서 당황한 듯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예전에는 인간이었지만, 지금은 아니에요. 그분께서는 인간의 모습을 버리고 용의 모습으로….

수혁은 눈썹을 추어올리며 눈앞의 드래곤을 쳐다보았다.

인제 와서 남을 탓할 생각 같은 건 없었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걸 지금 와서 말해 주는 건 무슨 짓이냐고 말하고 싶은 기분이었다.

-죄, 죄송합니다. 설마 이런 일이 일어날 줄은 몰랐기에….

칫. 수혁은 속으로 작게 혀를 찼다.

어쨌든 지금은 눈앞의 드래곤, 아니 최태현을 상대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만이 확실한 사실이었다.

물론, 약간 불안한 감은 있었다. 이곳에서 한 달 정도를 체류하며 여러모로 수련을 하긴 했지만, 애초 예정된 정도의 실력에는 다다르지 못했으니까.

듣기로는, 신급의 스텟에 다다르기 위해서는 약 10000 정도의 스텟이 필요하다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아직 수혁은 그 절반 정도의 스텟밖에는 다다르지 못했다.

눈앞의 최태현, 초이라는 녀석은, 신급 중에서도 신급이니 분명히 초월적인 스텟을 가지고 있을 터. 그런 녀석을 이기려면 평균 5000 정도의 스텟으로는 아직 부족하다. 게다가 스킬이나 마법의 응용 능력을 생각하면 더더욱 그랬다.

-어리석은 인간이여. 겨우 인간의 격으로 그 정도의 힘을 다룰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다니, 우습군. 그것은 인간인 네 녀석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힘이다.

“글쎄, 그건 과연 어떨까.”

수혁은 약간의 긴장감을 느꼈다.

안 그래도 묘한 기운이 흘러나와서 수상하게 생각했는데, 눈앞의 드래곤으로부터도 그런 말을 들으니 경계심이 생기지 않을 수가 없었다.

각성이라. 도대체 무슨 어빌리티인 걸까.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지금에 와서 징징거릴 생각은 없었다.

수혁은 자신을 대상으로 하여 각성 어빌리티를 발동했다.

수혁의 전신이 무지개의 빛으로 물들었다.

***

엄청난 힘이 차오른다.

수혁은 자신의 몸이 확장되어 가는 고양감에 휩싸였다.

에너지가 차오르고, 차오르고, 차올라서, 수혁은 자신이 하나의 거대한 에너지 덩어리가 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할 정도였다.

-새로운 힘에 눈을 뜹니다. 강력한 힘이 내부를 채우기 시작합니다.

수혁은 이전과는 달라진 세상을 느꼈다.

이전과는 달라진 눈높이를 느꼈다.

그리고 동시에, 차분함이 자신의 마음속을 흐르는 것을 느꼈다.

-어리석은 녀석. 분수에도 맞지 않는 힘에 몸을 맡기다니!

드래곤으로부터 거대한 분노가 휘몰아치는 것이 느껴졌다.

공간이 떨리며 다양한 형상들이 나타났다가 사라진다.

이곳은 기본적으로 불안정한 기억들로 이루어진 공간. 드래곤이 힘을 내뿜을 때마다, 기억의 파편들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가 다시 사라지곤 하는 것이었다.

물론 눈앞의 드래곤은 그것이 자신의 기억 일부라는 것도 알지 못한 채 수혁을 노려보았다.

그리고 단숨에 수혁에게 브레스를 뿜어낸다.

쿠우우웅!

처음부터 봐주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단숨에 본론으로 들어가, 클라이막스까지 몰아친다는 느낌의 필살 일격.

단순히 물리적, 마법적 에너지를 집적한 것을 넘어 공간 자체를 가르는 일격이었다.

그 공격의 범위 내에 있던 수혁이 양자 단위로 분해되리라는 것은 누가 보더라도 뻔해 보이는 일이었다.

하지만 브레스의 후폭풍이 지나가고 난 뒤, 수혁은 여전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무, 무슨…. 감히 인간 주제에!

수혁은 라인플레임을 가로로 세워 브레스를 막아낸 상태였다.

단지 서 있을 뿐인 수혁의 주변으로 찬란한 오색의 빛이 솟아나고 있었다.

수혁은 한쪽 어깨 위에 라인플레임을 올려놓은 채 드래곤을 올려다보았다.

“아무래도 이것이 네가 두려워할 정도의 힘이라는 건 맞는 것 같군.”

-크윽….

드래곤은 진땀을 흘리며 믿을 수 없다는 눈빛으로 수혁을 쳐다보았다.

하지만 그에 밀리지 않고, 수혁은 라인플레임에도 역시 각성 어빌리티를 시전했다.

라인플레임이, 한층 진화하여 신급에 해당하는 무기로 변화하였다.

빛나는 황금의 불꽃과, 태양과도 같이 스스로 빛을 발하는 몸체.

모든 것을 불살라 버릴, 신의 무기.

그리고 눈앞의 드래곤 역시 그것을 눈치챈 것인지, 더더욱 초조해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머, 멈춰라! 나는 신이란 말이다! 이 세상을 모조리 불살라 버리지 않으면 안 될 파괴신! 처음부터 그것만이 나의 숙명이었고, 그때만을 기다려 왔다. 그런데 감히 평범한 인간인 네 녀석 따위가 그것을 막으려는 것이냐!

“파괴라고? 무엇 때문에 그런 짓을 하려는 거지?”

-그, 그건….

수혁의 날카로운 눈빛이 드래곤을 파고들었다.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이었다.

모든 기억을 잃어버린 드래곤. 그 정체는, 세상에 환멸을 느끼고 세계를 멸망시키려 한 천재 게이머.

분명히 강하고, 또 신에 걸맞은 힘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였지만, 이렇게 눈앞에 마주하고 보니 너무나도 초라해 보이는 것이 사실이었다.

-나는…. 파괴신이기 때문이다. 이 세계를, 파멸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 그들이 저지른 죄를 벌하기 위해. 모든 것을 벌하기 위해!

드래곤이 입을 벌렸다.

그리고 수혁을 으깨버릴 듯한 기세로 수혁을 향해 달려들었다.

말이 달려드는 것이지, 거의 공간 자체를 뛰어넘을 정도의 속도였다.

하지만 수혁은 공간 자체를 접어가며 달려드는 그 공격을 눈치채고 피할 수 있었다.

드래곤을 스쳐 가며, 수혁은 드래곤의 몸통 쪽으로 길게 라인플레임을 휘두른다.

사악—

“신…이라고 했지. 분명히 대단한 녀석이라고 들었다. 내가 본 기억 속의 너는, 정말로 대단하더군. 천재 게이머. 그 말이 정말로 네 녀석에게 어울리는 모습이었어.”

-게, 게이머라고? 무슨 소리를 하는 것이냐! 나는 태어날 때부터 이 세계를 파괴하기 위해 창조된 파멸신. 그런 내가 어째서 인간 따위에게….

드래곤의 말을 기다리지 않고, 수혁은 또다시 일격을 날렸다.

드래곤의 거대한 몸에 또다시 검 자국이 새겨졌다.

커다란 비명이 공간을 가득 채운다.

“왜 그렇게 변해야 했던 거냐.”

-…….

드래곤은 대답하지 않았다.

다만 보통의 세계에서였다면 천재지변이나 다름없을 정도의 마법을 생성해 내어, 그대로 수혁에게 몰아쳤을 뿐.

하지만 여전히 수혁에게는 미치지 못했다.

수혁은 모든 마법을 간파해내고, 그것을 그대로 드래곤에게 되돌려주었다.

퍼엉! 투콰광!

-크아아악!

주위가 잠잠해지고, 수혁은 가만히 드래곤을 쳐다보았다.

이전에 본 기억 속의 최태현과도 같은 세련미나 우아함이, 눈앞의 드래곤에게서는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물론, 힘 자체는 눈앞의 드래곤이 더 강할 것이다.

하지만 그가 실제로 게임을 플레이하는 것을 본 수혁에게는, 그때의 최태현이야말로 생기가 있고 살아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던 것이다.

약간은 쓸쓸한 듯한, 허전한 그런 가슴의 뚫림.

그런데 그때, 드래곤의 기세가 변화하였다.

-후후…. 대, 대단하구나. 인간이여. 인간 주제에 이 나를 이렇게까지 몰아붙이다니. 네 녀석을 인정하지.

그리고 조금 뒤, 드래곤의 주위에 수혁으로서도 거의 감지하기 어려운 어떤 투명한 막이 생겨났다.

수혁은 당황했다. 저, 저건 설마….

-네 녀석을 인정하기에 이런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어쩔 수 없군. 이렇게 된 이상 네 녀석이 나를 이길 방법은 전혀 없다. 네 녀석은 이 세계를 둘러싼 차단막에 싸여 죽어가게 되는 것이다!

드래곤의 주위를 감싼 막이, 일순 반전하여 수혁을 덮어 싸기 시작했다.

그 전에 육감으로 이런 일이 벌어지리라는 것을 이미 예측한 수혁이었지만, 안다고 해서 막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공간 전체로부터 천천히 생겨나, 점점 좁혀져 수혁을 조여오는 공격인 것이었으니까.

‘차단막이라니. 그건 시스템적인 요소 아냐? 너무 반칙 같은데?!’

처음에는 어느 정도 당황한 수혁이었지만, 이내 생각을 가다듬고 마음을 바로잡았다.

그러고 보면 상대는 이 세계를 만든 창조주나 다름없는 존재. 아무리 치사하고 야비한 방법이라도, 이러한 공격이 벌어지리라는 것은 어느 정도 예상했었어야 했다.

‘그래, 아무리 그래도 지금의 나는 강하다. 이런 차단막 정도는 간단히 뚫을 수 있을 거야.’

수혁은 멀리서부터 서서히 좁아져 오는 차단막을 향해 라인플레임을 휘둘렀다.

단순한 물리공격이 아닌, 각성의 힘을 빌려 강화된 공격.

웬만한 산 정도는 가볍게 바스러뜨릴 맹공에도 불구하고, 차단막을 뚫어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수혁은 당황하고 말았다.

‘젠장, 이 정도의 파워로도 안 되는 건가! 그때 무인도 미션에서는 도대체 어떻게 해서 차단막을 뚫어냈지?’

수혁이 몇 번이고 차단막을 뚫어내려 함에도, 차단막은 금이 가거나 다른 반응을 보여주지도 않은 채 서서히 수혁을 향해 좁아져 가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수혁은 차단막에 갇힌 채 그대로 눌려 죽을 것이 뻔했다.

그리고 드래곤은 그런 수혁을 쳐다보며 한껏 비웃음을 높인다.

-크하하하! 결국 피조물일 뿐인 인간은 어쩔 수 없군. 그것은 이 세계를 이루는 근간이 되는 막. 세계를 구분 짓고 경계 지어 유지하기 위한 힘이라고 할 수 있지. 아무리 네 녀석이 강하다 한들, 어차피 신은 아니지. 네 녀석은 그렇게 공간 속에 압축되고 작아져, 결국에는 아무것도 없는 것이나 다름없는 상태로서 환원될 것이다. 그러면 나는 이 어리석은 인간의 말로를 천천히 지켜봐야겠군. 흐흐흐.

‘젠장, 빠져나갈 방법이 없잖아! 도대체 어떡해야 하는 거지?’

수혁의 머리가 빠르게 돌아갔다.

어쩌면 헬레나가 이것에 대해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황급히 은나비를 꺼내 연락을 시도해 보지만, 차단막으로 둘러싸인 이곳은 아무래도 바깥과의 연락이 불가능한 모양이었다.

로코야 꺼내봐도 쓸모는 없을 테고.

이래저래 위기인 상황이라고 할 수 있었다.

‘젠장, 생각해라. 생각해. 어떻게 해야 이곳에서 빠져나갈 수가 있을까. 이 차단막은 대체 정체가 뭐고, 어떻게 해야 이걸 깨부술 수 있는 거냐고. 생각해라. 생각해라.’

그러고 보니 수혁은, 아가레스와의 대화 도중, 그녀가 한 말을 떠올렸다.

그녀가 자신에게 최태현의 잊혀진 기억을 넘겨주면서, 그녀는 이 기억이 최태현을 물리칠 때 도움이 될 거라고 말했었다.

그것이 무슨 의미인지, 수혁은 깊이 고민해볼 필요가 있었다.

‘그러고 보면 녀석은 기억을 잃고 있는 모습이었어. 이 기억이, 녀석에게 뭔가 변화를 일으키는 건 아닐까.’

생각해 보면 황당했지만, 어쨌든 그것밖에는 방법이 없었다.

문제는, 어떻게 해서 자신의 기억을 녀석에게 넘겨주느냐 하는 것.

‘젠장, 일단은 방법이 없잖아! 좋아. 우선은 말이라도 걸어보자.’

“이봐, 드래곤 형씨. 너는 정말로 네가 파괴신이라고 생각하는 건가?”

드래곤의 입가가 한쪽만 삐뚤어져 비웃음을 연출한다.

수혁은 열이 받는 것을 느꼈지만, 어쨌든 지금은 대화를 해야 할 때였다.

-흥, 잔꾀를 부리려는 수작이겠지만 어림도 없다. 네 녀석은 그 차단막 속에서 비참하게 눌려 죽게 될 것이다!

“아니아니, 내 얘기를 잘 들어봐. 너도 사실은 알고 있을 거야. 너는 사실 신이 아니야. 너는 원래 다른 녀석들보다 게임을 조금 더 잘하는 평범한 인간에 지나지 않았어.”

-흥, 무슨 소리를 하나 했더니 쓸데없는 소리를….

수혁이 그 말을 꺼내는 순간, 차단막이 아주 살짝 흔들리는 것을 느꼈다.

뭐지? 수혁은 의아함을 느끼며 말을 이어나갔다.

“그래, 솔직히 말하지. 너는 게임을 굉장히 잘하는 녀석이었다. 아마도 게임에 인생을 바쳤겠지. 솔직히, 다른 녀석들로서는 너를 발밑까지도 쫓아가지 못했을 거라고 생각해. 그런 너였으니, 인정받고 싶어 하는 것도 당연하겠지. 그 마음은 충분히 이해하고 있어.”

-큭큭큭, 그런 소리를 꺼내면 내가 받아들이기라도 할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 너무나도 순진하군.

점점 좁혀져 오는 차단막.

수혁은 긴장으로 이마에 땀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말을 꺼낼 때마다, 수혁은 차단막이 심상치 않은 떨림을 보이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자신의 가슴 안에서부터, 무언가 흰색의 가루 같은 것이 빠져나와 드래곤에게로 흘러가는 모습도.

“하지만 너는 다른 사람들에게 버림받았다. 수없이 모욕을 당하고 린치를 당한 끝에, 너는 이 세계를 오히려 증오하게 되어버린 거야. 그리고 우연히도, 너는 신이 될 기회를 얻었지. 그곳에서 너는 너를 미워하던 사람들을 모조리 없애려는 계획을 세웠다.”

-그만! 그만! 헛소리가 지나치구나, 인간이여. 감히 인간 주제에 이 신에게 대들려고 하는 것이냐!

차단막이 좁혀지는 속도가 점점 빨라져 갔다.

그러나 그와 마찬가지로 반짝이는 가루가 드래곤에게 흘러가는 속도도 빨라져 갔다.

차단막이 눈에 띌 정도로 요동치는 것이 느껴졌다.

수혁은 그제야 뭔가를 깨달았다.

이 차단막의 정체에 대해서.

“너는 사실 괴로웠던 거다. 그래서 수없이 많은 마음의 벽을 치고 이 세계를 다른 곳으로부터 분리했지. 그건 확실히 창조주인 너를 이길 정도의 나로서도 뚫지 못할 정도로 강력하지만, 그래도 완전히 부수지 못할 정도는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네 녀석 도대체 지금 무슨 소리를…. 크으윽! 크아아아아!!!!

마침내 수혁의 가슴으로부터 나온 빛의 가루가, 드래곤에게로 완전히 흘러들어 갔다.

이제는 수혁을 완전히 짓누를 정도까지 좁혀진 차단막이, 더는 나아가지 못하고 부들부들 떨려왔다.

그리고 조금 뒤, 차단막이 완전히 벗겨져 내렸다.

-크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

상처가 나 있던 드래곤의 몸체가, 환한 빛과 함께 인간의 모습으로 변화하여 갔다.

그 변화의 끝에 나온 것은, 아니나 다를까 최태현의 모습이었다.

최태현이, 어쩐지 허무한 표정을 지은 채 수혁을 쳐다보고 있었다.

“당신…. 당신이 나를 이 세계에….”

원망이라도 할 줄 알았는데, 뜻밖에도 담담한 표정이었다.

마치, 모든 것을 해탈해버린 사람과도 같은 모습.

“그래. 너를 이 세계에 되돌려놓은 녀석이지. 이제 더 이상의 현실 도피는 없어.”

수혁은 라인플레임을 든 채 녀석에게 다가갔다.

이제, 녀석에게서 더 이상 강력한 힘 같은 것은 느껴지지 않았다.

아마 이 세상을 위협하려고 해도, 더 이상은 손을 쓸 수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미 너무 늦어 있었다.

녀석은 이미 너무 많은 죄를 저질렀다.

이미 죽어간 사람만 해도 얼마던가.

자신이 그 죽어간 사람들의 대변자는 될 수 없겠지만, 어쨌든 마무리는 확실하게 끝맺어야 했다.

수혁이 다가오는 것을 보는 최태현 역시 그것을 받아들이는 듯한 모습이었다.

“어쩔 수 없지요. 모든 것을 잊고 그저 도망치고 싶을 뿐이었습니다. 아니, 망치고 싶었지요. 누구보다 열심히 했는데도 세상에서 버림받은 저에게는 그럴 자격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그건 전부 저의 착각이었던 모양이네요.”

최태현이 고개를 떨궜다.

그리고 수혁이 라인플레임을 치켜들었다.

바로 그때였다.

“잠깐만요!”

수혁의 앞을 막아서는 여신 헬레나의 모습이 보였다.

실제의 모습을 보는 것은 처음이지만, 굳이 묻지 않아도 그녀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수혁은 검을 멈추고 그녀의 얼굴을 노려보았다.

“뭐지? 설마 여기까지 와서 봐달라는 소리를 하는 건 아니겠지? 어찌 됐든 녀석을 없애야 원래의 세계로 돌아갈 수가 있다. 그렇지 않은가?”

“네. 맞아요. 이 세계는 최태현님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세계. 이 세계의 중심이 되는 태현님이 사라지면, 이 세계도 역시 사라지고, 남아 있는 당신들은 원래의 세계로 돌아가게 될 거에요.”

“그렇다면 역시 죽여야겠군.”

수혁이 헬레나를 밀치려 하지만, 그녀는 여전히 버티고 서서 수혁을 막았다.

수혁은 그녀를 노려보았다.

“무슨 짓이지?”

“저는 태현님이 원래의 모습을 찾으셨으면 했기에 당신을 도운 거에요. 태현님께서 본래의 모습을 되찾은 지금, 저는 태현님을 지키지 않으면 안 돼요.”

“…….”

거의 다 왔다고 생각했더니, 난감해진 수혁이었다.

겨우 원래의 세계로 돌아갈 수 있다고 생각했건만, 끝에 와서 이런 일이 벌어지다니.

아무래도 좋으니 베어 버릴까 하고 생각한 그때, 헬레나의 말이 수혁의 귀에 날아와 꽂혔다.

“게다가 당신 역시, 현실에서보다 이곳의 삶이 더 만족스럽지 않던가요?”

수혁은 대꾸할 말을 찾을 수 없었다.

이곳에 들어오기 전, 자신보다 그리 나을 것도 없는 여자에게 차여 우울해하던 자신과, 지금 이렇게 강해져서 신과도 맞먹을 정도의 힘을 가진 자신이 오버랩되며 수혁을 망설이게 만들었다.

현실에서의 잘난 것 없고 찌질하기만 했던 자신과, 이렇게 강력한 힘을 얻은 자신.

게다가 거점으로 돌아가면, 자신에게 한없이 헌신적인 레밀리아가 자신을 기다리고 있다.

자신은 이런 세상을 버려 가면서까지 현실로 돌아가야만 하는 이유가 있는 것일까.

“그건….”

수혁이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해 곤란해 할 때였다.

순간, 수혁은 불길한 감각을 느끼고 방어 자세를 취했다.

하지만 그것은 수혁을 향해 날아온 공격이 아니었다.

거의 모든 힘을 잃은 최태현의 뒤에서 그림자가 나타나, 그의 가슴을 꿰뚫었다.

“커헉!”

“태, 태현님!”

여신 헬레나가 다급하게 태현의 이름을 부르며 그에게 달라붙었다.

수혁은 태현의 가슴을 찌른 그림자의 정체를 확인하고 놀라고 말았다.

13번째의 마신 아가레스.

그녀가 태현의 뒤에서 나타나 그의 가슴을 찌른 것이었다.

“저의 숨겨진 이름은…. 마주치고 싶지 않은 진실. 이 세계의 창조주이신 태현님께서 의도적으로 자신에게서 분리한 존재. 그것은 한 자루의 날카로운 검과 같아서, 마주치는 순간 그 주인을 해치기 마련이지요.”

“태현님! 태현님!”

수혁은 필사적으로 태현의 이름을 부르는 헬레나와, 입에서 피를 흘리면서도 그런 그녀를 향해 미소를 짓는 최태현을 쳐다보았다.

이 세상의 창조주이자, 모든 것의 중심인 그.

그가 죽음으로써, 이제 이 세계도 사라질 것이다.

그리고 자신은 원래의 세계로 되돌아가게 될 것이다.

그것을 확인시켜주려는 듯, 수혁은 이 공간, 아니 이 세계 전체가 서서히 흔들리는 것을 느꼈다.

세계가 무너지려 하고 있었다.

“쿨럭! 하아…. 하아…. 세계 멸망이라니, 나도 참 무슨 짓을. 이렇게 예쁜 헬레나를 옆에 두고서 나는 무슨 생각을 했던 거지.”

“아아…. 태현님….”

수혁 자신이 의도한 것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이렇게 되고 나니 수혁은 후련함마저 느꼈다.

이제 모든 것이 끝났다.

이 검은 공간을 이루고 있는 기억의 잔재들이, 모두를 향해 서서히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각양각색의 장면들이 떨어져 내리는 그 광경은, 너무나도 몽환적이었다.

새삼, 수혁이 지금까지 거쳐 온 이 세계가 게임 세계라는 것을 다시 알려주기라도 하는 것 같았다.

‘이제 정말로 끝이구나.’

자신의 몸이 서서히 공간과 함께 서서히 무너지는 것을 느끼며, 수혁은 생각했다.

끝으로 마지막까지 태현에게 달라붙어 있는 헬레나를 쳐다보며, 수혁은 어렴풋이 어릴 적의 추억 같은 것을 떠올렸다.

그러고 보면 고전 격투 게임 중에 천사 같은 이미지를 가진 여자 캐릭터 하나가 있었는데, 그 이름도 헬레나였던가.

수혁은 어딘가 쓰디쓴 입맛을 느끼며 서서히 의식을 잃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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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필로그

수혁은 천천히 눈을 떴다.

어딘가 묘하게 익숙하면서도 낯선 천장이 보였다.

여긴….

“일어나셨습니까, 주인님.”

“어…?”

수혁은 예상하지 못한 목소리에 어안이 벙벙한 기분이었다.

익숙한 레밀리아의 목소리가 수혁의 귀에 흘러들어오고 있었다.

“레밀리아? 어째서…?”

수혁은 당황한 채 주위를 둘러보았다.

거점이었다.

분명 최태현이 죽고 세상이 무너져 내리는 모습까지를 보았었다. 만들어진 세계인 이 세계가 무너졌으니 당연히 원래 세계로 되돌아갈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어째서 거점으로 되돌아오게 된 걸까.

“어떻게 된 거지? 레밀리아?”

“저…. 주인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전혀….”

레밀리아는 당황해하고 있었다.

하긴, 그러고 보면 레밀리아가 자신이 한 일에 대해 알고 있을 리가 없었다. 그 정체불명의 공간에서는 거점으로의 통신 역시 불가능했었으니까.

이 상황에 관해 설명해줄 누군가가 필요했다.

그때, 수혁의 앞에 하나의 노란 화살표가 떠올랐다.

당황스러웠다.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자신에게 노란 화살표를 표시해준 여신인 헬레나는, 최태현과 함께 그 공간 속에서 사라졌을 테니까.

아니, 생각해 보면 정말로 그런 것인가 하는 점에는 의문이 생겨났다. 자신 역시도 이렇게 거점에 와서 살아 있을 정도이니까, 사실은 어딘가에 살아 있는 것이 아닐까?

수혁은 약간의 긴장감을 느끼며 노란 화살표를 따라갔다.

그것은 방 안에 있는 유일한 컴퓨터를 가리키고 있었다.

수혁은 조심스레 컴퓨터를 켰다.

기존에는 볼 수 없던 하나의 새로운 아이콘이 생겨나 있었다.

노란 화살표가 그 아이콘을 가리키고 있었다.

아이콘의 이름은….

세계.

“축하드립니다! 당신은 이 세계를 다스리게 될 2번째 신으로 임명되었습니다!”

수혁은 황급히 뒤를 돌아보았다.

하나의 요정이 자신의 주위를 돌아다니며 마법으로 만들어진 꽃가루를 날리고 있었다.

“무슨 소리지? 신이라니.”

“어라, 당연히 알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상하네요. 이 세계의 창조주를 죽인 것이 그쪽 아닌가요?”

“죽이지는 않았어. 이기기는 했지.”

“앗, 죽인 게 아니에요? 흠…. 뭐, 상관없겠죠! 아무튼, 축하드립니다! 당신은 이제 신이에요!”

수혁은 불쾌한 표정으로 요정을 쳐다보았다.

“좀 더 자세히 설명해. 내가 어째서 신이 된 거지? 왜 원래의 세계로 되돌아가지 않는 거야?”

“흐음, 아무래도 정말로 모르시는 것 같네요. 그러면 자세히 설명해 드리는 수밖에 없겠죠!”

요정은 설명했다.

처음 최태현에게 이 세계를 만들어 준 신은, 세계를 만들 때 그에게 세계를 다스릴 권한을 부여하였고, 그것을 멸망시킬 권한 역시도 함께 부여하였다.

그런데 그가 죽게 됨으로써, 그 권한들이 전부 붕 떠 버리고 말았다.

신으로서도 예상외의 사태였다. 설마 이 세계의 신이자 모든 것을 짜낸 창조주나 다름없는 그가 자신이 다스리는 존재에 의해 죽음을 맞이하게 될 줄이야.

물론 이 서바이벌 월드 자체를 없애는 것도 그에게는 가능한 일이었지만, 이래서야 흥이 깨진다.

그래서, 신은 조금 더 이 세계를 다른 누군가의 손에 맡겨 보기로 했다.

“그래서 당신에게로 그 권한들이 넘어가게 된 거예요. 이제 당신은 이 세계의 관리자인 거죠! 이제 모든 게 당신의 마음먹기에 달려 있는 거예요. 물론, 당신이 원한다면 이 세계를 없애버리고 현실로 나가는 것도 가능하죠!”

“과연, 그렇게 된 건가.”

요정의 설명에 따르면, 이 노란 화살표는 헬레나가 아니라 그 신이 보여주는 화살표라는 모양.

마지막에 세계가 무너져 내린 것은, 어디까지나 그곳이 최태현 자신의 기억들을 모아놓은 특별한 공간이기에 그런 것이라는 이야기였다.

꽤 갑작스러운 이야기였지만, 납득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수혁은 이제 이 세계의 신이었다.

‘자, 그러면 이제 어떡한다.’

이제, 수혁의 앞에는 두 가지의 선택지가 놓여 있었다.

첫 번째는 원래의 계획대로 이 세계 자체를 없애고, 현실로 돌아가는 것.

두 번째는 원래의 세계로 돌아가지 않고 이 세계에 남아 신으로서 남은 인생을 보내는 것.

‘고민할 필요가 있나?’

수혁은 씨익 웃었다.

대답은 이미 처음부터 결정되어 있었다.

“레밀리아.”

“네, 주인님.”

수혁은 레밀리아를 향해 여유로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신이 된 지금, 그에게는 모든 것이 가능했다.

그래도 일단은, 확실하게 하는 게 좋을 듯했다.

“나와 함께 세계를 다스리지 않을래?”

레밀리아는 약간 당황한 듯 얼굴을 붉혔다.

하지만 이내 굳은 눈빛으로 수혁을 쳐다보며 대답했다.

“네, 주인님. 주인님께서 원하신다면 어디까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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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기

마지막 화가 올라오기까지 텀이 너무 길었네요. 기다려주신 독자분들께는 죄송한 마음뿐입니다.

사실, 마지막 화를 올리기 전에 연중을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를 상당히 고민했습니다. 이대로 가면 결말이 너무 이상하게 나올 것 같아서, 차라리 연중을 하는 게 낫지 않나 하는 생각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기 때문이죠. 원래 100화에서 완결을 지을 예정이었지만, 쓰면 쓸수록 점점 힘들어지는 탓에 내용도 많이 줄어들고, 결말도 제대로 낼 자신이 없었거든요. 많은 사람에게 글을 보인다는 게 생각보다 얼마나 힘든 일인지 깨닫게 된 요즘입니다. 그나마 무료 연재에서도 이 정도인데 유료 연재라는 건 얼마나 힘들지. 새삼 다른 작가분들이 존경스러워지더군요. 아무튼, 그런 가운데에서도 어떻게든 결말은 내서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작품은 여러모로 감정들이 교차하는 작품이었습니다. 사실, 이 작품이 제가 처음으로 연재하는 작품인 것은 아닙니다. 이전에도 몇 번인가 다른 작품들을 올린 적이 있었고, 그때마다 저 자신이 글에 재능이 없다는 걸 통감하곤 했었죠.

그래서 이 작품을 연재하기 시작할 때만 해도, 솔직히 잘 안 될 줄 알았습니다. 상식적으로 10 작품을 올려서 10 작품이 전부 선작 100을 못 넘었으면, 다음 작품도 못 넘는 게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어찌어찌 선작이 10000을 넘고…. 기쁘기도 하지만 여러 가지로 부담도 많이 되고. 정말 여러 가지로 의미 있는 작품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전개에 대해서도 여러 가지 아쉬움은 많지만, 어쨌든 자세히는 언급하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중요한 건 작품을 연재하면서, 여러 독자분의 피드백을 얻을 수 있었고, 그만큼 여러 가지를 얻었다는 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앞으로 어떤 글을 쓰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분명히 이 경험이 큰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언제 다음 작품을 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개인적으로도 안정적으로 글을 쓸 환경이 아직 아니기도 하고, 이번에 얻은 것들을 소화할 시간도 필요해서, 확실히 이렇다 저렇다 말씀 드리기는 힘들 것 같습니다. 기다려주시는 분들께는 죄송하다는 말씀밖에는 드릴 수가 없네요.

아무튼, 지금까지 봐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나중에 더 나은 모습으로 돌아오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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