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권
목차
출생
크고 아름다운 알
지도를 만들다
영지 순례
크롤라이드를 낚다
슬레인 자작, 그리고 어쌔신
정보의 가치
슬렌, 보헴 자작가로
실리카겔
출생
아쉽게도 그에 대한 기록이 모두 남아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들의 행적을 쫓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다.
나는 후대의 사학자들을 위해 이 기록을 남겨 두려고 한다.
대부분 이야기는 구전으로 전해져 출처를 밝히기 곤란하지만, 매우 신뢰할 수 있는 인물들로부터 구전과 일치하는 내용의 문서를 전달받았을 때 내가 느낀 감동을 독자 여러분 역시 느낄 수 있기를 바라며 앞으로 전개되는 글의 상권은 구전으로 전해져 오는 이야기를 각색, 하권은 문서로서 그 사실이 확인 된 경우만을 간추려 설명하도록 하겠다.
―대륙력 15323년 현자이자 ‘5인의 영웅’ 저자 자비오스.
틱!
아무렇게나 후벼 판 코딱지를 역시 아무렇게나 던지는 대략 13~15세쯤으로 보이는 소년이 나이에 맞지 않게 권태로운 눈으로 한창 추수를 벌이고 있는 가을 들판을 바라보고 있었다.
끝없다고 까지는 할 수 없지만 한 눈에 들어오기 힘들 정도의 넓은 면적을 가진 농지를 바라보는 후버의 눈은 권태로 가득 차 있었다. 바람에 따라 이리 저리 무리를 풀어 헤치듯이 움직이는 들판을 처음 보았을 때는 약간의 감동과도 비슷한 느낌을 받기도 했지만, 이제 무감각 해진 후버의 눈에서 그때와 같은 감탄을 찾기는 힘들었다.
후버가 이 이상한 세계로 온 지도 어언 17년, 처음에는 그가 살던 지구에서의 TV 등이 주는 인공적이고 자극적인 상황에서 벗어나 상쾌한 느낌도 들었다.
하지만 오염된 현대에서 느낄 수 없었던 진득한 마나의 느낌은 시간이 지날수록 후버에게 답답함으로 다가왔다.
처음 그것이 마나라는 것을 안 것은 후버의 나이 3세 때의 일, 자신이 중세시대의 귀족 가문 정도로 환생한 것을 알아서일까?
3세 아이에게는 안 맞는 이야기이지만 타성에 젖은 후버는 평범한 삶을 원했기에 그 마나의 기운을 거부하였지만 거부는 한계가 있었다.
돌이켜 보면 자신의 인생이 꼬이기 시작한 것은 이곳이 마나로 가득 찬 세계라는 것을 안 이후부터였다.
‘더 이상은 버틸 수가 없군… 괜히 수재라는 말을 들으면 더 곤란해질 텐데.’
어찌된 영문인지 후버의 몸은 마나와의 친화력이 엄청났다.
마법사에게는 신이 주신 축복이었지만 후버는 그런 마나가 달갑지 않았다.
그는 매일 밤 몸속으로 침투하려는 마나를 거부하기 위해 몸부림을 쳤다.
후버는 좀 더 효과적으로 마나를 거부를 하기 위해서라도 마나의 성격을 더 잘 알 필요가 있었다.
때문에 후버는 마나에 대해서 분석하고, 고심에 고심을 거듭했다.
하지만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이건 뭐 무서운 이야기에 나오는 귀신도 아니고…….’
전생에서 인터넷을 통해 귀신이야기를 읽다보면 누군가 한 명은 꼭 리플에 ‘귀신들은 자신의 이야기를 하면 그걸 알고 모인다’고 하는데 마나 역시 그런 듯했다.
거부하기 위해서 마나의 성질을 살피면 살필수록 마나는 후버에게 집착하는 듯했다.
“안티 팬도 팬이라고 생각하구요.”
모 연예인이 자신의 안티 팬에 대한 소신을 밝히고 개념 연예인이 돼서 보살이라느니 부처라느니 하는 호칭이 붙은 걸 볼 때 마나의 성격은 부처와 간디가 합쳐도 이보다 좋을 수는 없어 보였다.
‘쫌 떨어지라고!’
매일 소리 없는 거부와 구애는 계속되었고 후버는 결국 그 끈질긴 마나를 받아들이고 말았다.
조금만 방심하면 자신에게 더 다가오는 마나의 압박을 이길 수가 없었던 것이다.
‘아카이브 경이 이 사실을 알까?’
가장 먼저 걸리는 것은 영지의 마법사인 아카이브였다.
그가 이상하게 여겨 마나 스캔만 한 번 사용해도 자신이 이미 마법사가 되기 위한 최소 조건이자 가장 어려운 조건을 달성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마법사를 꿈꾸는 사람이라면 누구도 탐을 낼만한 경이적인 능력이었다.
하지만 후버는 자신의 천재성이 평탄한 삶을 방해할 수 있는 요소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이미 깨우치고 있었다.
‘혹시라도 아카이브가 나를 천재라느니 뭐라느니 하면서 추켜세운다면…….’
언젠가는 알려야 할 일이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가신들의 등살에 떠밀려 형과의 후계자 다툼이 일어날 수도 있었다. 그것이 바로 후버가 가장 우려하는 일이었다.
자신이 계획하는 삶은 친형을 죽인 막장 인생도 아니었고, 후계자가 되겠다고 설치다가 비명횡사한 동생도 아니었다.
‘제발 좀 평범하게 살 수 있게…….’
후버는 가능하면 마나의 기운을 안으로 숨기려고 노력했다.
후계자 싸움이 일어날 수 있는 가능성은 최대한 없애려는 것이 후버의 생각이었다.
그래서 자신의 재능을 숨기기로 한 것이다.
영지의 마법사인 아카이브에게 들키지만 않는다면 어느 정도의 시간이 지난 뒤 스스로 밝힐 생각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의 몸으로 들어오기 시작한 마나를 숨겨야 했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마나석이었다.
‘일단 마나석을 항상 가지고 다녀야겠군.’
태양 앞의 등불처럼 마나석을 항상 쥐고 다닌다면 아카이브는 자신의 변화를 눈치채기 힘들 것이다.
단지 영지의 도련님이 마법에 흥미가 생겨 마법사가 되려나 보다 정도의 수준으로 생각을 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후버는 자신의 마나를 숨기기 위해 마나석을 가지고 다니는 한편 외부에서 흘러들어오는 마나는 몸 안으로 받아들여 압축을 했다.
외부의 마나가 흘러 들어오는 족족 압축한 지 어느 정도의 시간이 지나자 더 이상의 마나가 후버의 몸에 들어오지 않았다.
“이제 좀 살겠네. 어디보자!”
책상을 뒤져서는 아카이브가 선물한 마나석과 자신이 가진 마나를 비교하자 얼추 비슷한 크기의 마나로 느껴졌다.
“젠장! 이게 불행 중 다행이라는 건가? 퍽이나 마음이 편해지네.”
마나를 받아들일수록 평범한 삶과는 점차 거리가 멀어지는 것이 불안했다.
하지만 고민도 잠시였다.
그는 평범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힘이 있어야 한다는 자기 합리화를 통해 마나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한편, 평범한 인생을 유지하기 위해 보다 적극적으로 자신의 인생을 살기로 하였다.
*
*
*
‘이제 잠도 없는 거냐?’
누군가를 향한 불평의 말이다. 마나를 받아들인 후버는 더 이상 어린아이 특유의 수면욕을 느끼지 않았다.
‘불평하면 뭐 하냐…….’
피곤함이 가신 후버는 앞으로의 진로에 대해서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가족끼리 피 뿌리는 것은 절대 안 되니 형의 자리를 뺏을 수는 없고… 이대로 집을 나가면 객사하기 딱 좋겠군.”
집을 나가는 것도 안 되고, 백작가를 두고 싸워도 안 된다면 결론은 단 하나였다.
“일단 몸이 클 때까지는 두 가지 길을 열어둔다. 첫 번째는 먹고 살만큼의 능력이 생기고 때가 되면 영지를 떠나는 일, 두 번째는 다른 영지를 먹어버리고 내가 거기를 대리영주로 다스리는 일.”
무난한 쪽을 선택한다면 이대로 능력을 숨기다가 성년이 되면 영지를 떠나는 것이 가장 좋았다.
하지만 만약 상황이 된다면 영지전을 통해 다른 영지를 흡수하고 그곳의 영주가 되는 것도 나쁘지는 않았다.
어느 쪽으로 인생이 흐르던지 반드시 필요한 작업이 있었다.
“일단 무조건 큐리오 형님을 확실하게 차기 백작가의 가주로 만드는 게 중요하겠어, 그러려면 우선 나도 준비는 해야겠군.”
마나를 받아들인 이상 마법을 능숙하게 사용하기 위해서 마나를 이해하는 것이 가장 중요해 보였다.
“평범해지기 위해서 비범하게 살아야 하다니…그리고 그렇게 해서 얻는 위치가 고작 영지내의 은둔형 히키코모리 같은 삶이라니…….”
보통 수재라고 불리는 마법사들이 처음 마나를 받아들이는 시기가 대략 10세 전후라는 것을 생각해볼 때 후버의 시작은 분명히 빨랐다.
그것도 수재의 수준을 넘어선 희대의 천재라고 볼 수 있었다. 하지만 후버는 그것이 그리 달갑지는 않았다.
“아니야. 내 인상이 꼬이기 시작한 것은 여기서 다시 태어나기 전부터지. 창창한 나이에… 아, 씨발!’
자신의 과거를 회상하다 갑작스레 찾아온 상념에 후버의 의식은 자신이 처음 이 이상한 세상에서 환생했을 때를 떠올렸다.
*
*
*
“남자아이입니다!”
산파의 우렁찬 목소리가 분만실을 뒤흔들었다. 순간 조금 전까지만 해도 산모의 고통스런 신음으로 가득한 분만실 밖을 초조하게 배회하던 레빌리온 백작의 발걸음이 멈추었다.
“하필…….”
산고의 시간이 길었지만, 신관까지 동원한 출산에서 산모가 잘못되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으며 미리 위급 상황에 대비해서 산모의 생명을 최우선으로 하라는 부탁을 신관에게 했기에 산모가 잘못될 가능성은 더욱더 드물었다.
게다가 초산이 아닌 3번째 출산이기에 백작부인 역시 아이를 낳는 데는 그다지 위험할 것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어 산모에 대한 걱정보다는 남자아이라는 말에 잠시 머리가 아파졌다.
“딸아이가 한 명 더 태어나길 바랐는데.”
“허허… 백작님도 참 너무 많은 것을 바라는 것이 아닌지요?”
옆에 있던 영지의 마법사 아카이브가 가볍게 그의 그런 태도를 책망하지만, 말투나 표정에는 악의 보다는 산모와 아이가 모두 무사하다는 안도감과 함께 약간의 장난기가 어려 있었다.
마법사인 아카아브는 지금의 백작이 아직 어리던 시절 3서클에 오른 아카아브가 잠시 백작가에 의탁했었다.
마법사인 아카이브가 백작의 가정교사가 되어 맺어진 사이였기에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 사이가 매우 돈독한 편이었다.
특히 전대 레빌리온 백작에게 5서클에 이른 아카이브가 레빌리온 백작가에 대한 존경심과 함께 ‘자제분의 성취가 기대된다’는 말로 현 레빌리온 백작을 인정해주는 발언을 하였었다.
백작은 고위 마법사인 아카이브가 자신의 마법적 재능을 크게 보고 있다고 믿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과는 다르게 5서클에 이른 아카이브는 그저 평범한 삶을 원했던 것뿐이었다.
“저야 아들 문제로 고민이 생겼다지만 아카이브 경은 무슨 생각을 그리 하시오?”
“제가 이 영지에 온 경위를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하하하! 혹시 우리 장남인 큐리오에게도 뭔가 기대되는 것이 있는 것이오?
백작은 아카이브가 자신의 재능을 탐하여 레빌리온 백작가에 온 것이라 믿고 있었기에 자신을 자랑하듯 말을 한 것이다.
물론 아카이브가 백작가에 온 이유는 백작의 생각과는 많이 다른 부분이 있었지만 아카이브는 굳이 그런 말은 꺼내지 않고, 백작의 이야기에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해주었다.
“예, 그렇습니다. 자제분들이 워낙 훌륭하지 않습니까?”
하지만 아카이브는 대답과 함께 자신의 마법주머니에 아직도 보관되어있는 6면체 주사위를 만지작거렸다.
당시 5년간의 종군 마법사 생활을 마쳤던 아카이브는 마법 주사위를 통해 자신의 운명을 결정했다.
수습마법사 시절 가장 많은 은혜를 입은 5개의 영지와 6서클을 향한 마도사의 삶을 6면체 주사위에 세기고 굴려서 나온 것이 바로 이곳 레빌리온 백작가였던 것뿐이다.
하지만 백작은 지금도 여전히 아카이브가 자신의 재능에 반해서 온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역시 그런 것이었소?”
백작의 의심 없는 미소를 보자 아카이브는 웃음이 나오는 것을 참아야 했다.
“그때 그대가 이곳으로 와준 게 얼마나 다행이었는지 아버지께서 특히 그대를 반기셨지…….”
“완전히 환영하지는 않으셨던 걸로 기억합니다.”
실제로 전대 레빌리온 백작가의 백작은 아카이브가 만약 마도사가 되기 위한 후원자를 찾는 것이라면 일개 백작가로서 5서클 마법사를 감당하는 것은 재정에 많은 무리가 따르기에 많은 고민을 했었다.
“뭐 그런 걸 가지고 아직도 꽁해 있는가? 그대도 6서클에 도전하는 5서클 마법사들이 돈을 얼마나 잡아먹는지 알지 않소?”
“예, 그렇지요. 저도 제가 그리 많은 돈을 마탑에서 쓰고 있는지 몰랐습니다.”
“그러면 이제 좀 그만 꽁해 있으시게, 그나저나 설마 저 아이가 커서 사고를 쳐 5서클 마법사처럼 영지의 재정을 축내지는 않겠지?”
백작이 태어난 후버를 보면서 말을 했다.
“뭐 그런 비유를 들고 그러십니까?”
가벼운 농담에 다시 분위기가 풀릴 듯도 했지만 후계구도에 대한 백작의 걱정을 스스로의 농담 정도로는 풀 수가 없는 듯 다시 표정이 어두워졌다.
“아버지로서 아들이나 딸이나 경사스러운 일이지만 한 영지의 수장으로서 복잡한 후계구도는…….”
“백작님은 현명하시니 두 공자님을 포용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미리 심려치 마시옵소서.”
아카아브의 말에 백작은 자신이 너무 미리 걱정한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모든 고민이 사라지지는 않았다.
귀족가에 아들이 많다는 것은 분명 축복이다.
하지만 그것은 혈육 간에 피를 부르는 상잔의 씨앗이 되기도 했다.
“응애~”
아이의 울음소리가 터지자 백작은 그런 자신의 근심이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미리 준비하면 되겠지…….’
하나의 미신이라고 할 수 있지만, 백작령에서는 신생아를 바로 남편에게 보여주지 않고 일주일간의 시간을 두고 아이를 남편에게 공개하는 것이 하나의 풍습으로 자리 잡고 있었다.
백작 역시 그 풍습을 존중하기에 아쉬움을 남기고 무사히 아기가 태어났다는 것에 안도를 하며 자신의 집무실로 밀린 업무를 하기 위해 복귀하였다.
*
*
*
‘어… 씨발! 이게 뭐야?’
갑작스레 느껴지는 무거운 공기에 철현은 자신이 교통사고를 당하고 병원에 누워 있다고 생각했다. 반사적으로 몸을 움직여보려 하지만 말도, 움직임도 자유롭지 않았다.
주변에서 느껴지는 분주한 움직임은 자신의 상태가 생각보다 심각하다는 것을 알리는 듯했다.
보통 교통사고가 나면 차에 치인 사람은 3단계 중 하나의 상처를 입는다고 하는데 아마 자신의 부상이 그중 딱 중간에 있을 것이라는 짐작이 머리를 스쳐갔다.
죽음, 중상, 멀쩡 아마 자신은 중상을 입었을 것이다.
그것도 아주 심각한 중상을…….
‘근데 왜 고통이 느껴지지 않고 이렇게 나른하지? 혹시 몰핀이라도 맞고 있는 건가? 내 상태가 그렇게 심각한가?’
철현의 머릿속에 언젠가 TV에서 보았던 전쟁 영화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총상을 당한 한 명의 군인을 둘러싸고 3~4명의 군인이 의무병을 호출해서 모르핀을 투여하면 잠시 총상을 당한 병사는 잠시 편해지다가 이내 숨을 거두고 마는 상투적인 장면…….
“으~응!”
안타까운 자신의 신세를 생각하며 씨발이라고 반사적으로 말을 하려 했지만, 입 밖으로 나온 말은 자신도 알아들을 수 없는 이상한 소리였다.
마치 바람이 새는 듯한 소리… 유언이 씨발인 것도 문제가 있지만 이 옹알이 같은 소리도 문제가 심각하다는 생각이 실없이 머리를 스쳤다.
‘도대체 왜?’
혹시나 하는 생각에 철현은 자신의 혀를 움직여 자신의 이가 무사한지 느껴보려 했지만 아쉽게도 혀를 움직일 힘도 없었다.
‘모르겠군. 너무… 나른해… 일단 잠깐 자두는 것이.’
짧은 생각을 끝으로 철현이 잠이 들려는 찰나 철현의 몸이 거꾸로 들리는 듯한 느낌이 들더니 엉덩이에 강한 충격이 느껴졌다.
순간적으로 나오는 울음소리와 욕지거리가 입 밖으로 나갔다.
“응애~”
그와 동시에 졸음이 몰려와 죽은 듯이 잠을 자려다 짜증이 나서 큰 소리로 뭐라 했던 철현로 말미암아 철현의 엉덩이를 때린 시녀가 사색이 될 정도로 큰소리였다.
그것이 철현이 후버로서 이 세상에 다시 태어난 시작이었다.
어느덧 철현이 이 세상에 후버라는 이름을 달고 태어난 지 1년의 세월이 지나자 후버는 대충 자신의 상태를 파악할 수 있었다.
다행인 점은 자신이 반신불수와 같은 부정적인 이유로 침대에 누워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 부정적인 부분은 자신이 앞으로 최소 1년은 더 식물인간과도 같은 상태로 지내야 한다는 것.
‘이게 무슨 꼴인지… 하아…….’
다소 의미가 다르지만 시한부의 식물인간, 냉정하게 자신의 상태를 판단한 후버가 스스로에게 내린 진단이었다.
이름 역시 기존의 철현에서 후버로 바뀌는 등 많은 변화가 있었지만 가장 곤란한 것은 지금 자신의 주위에서 유모와 함께 빙글빙글 돌면서 장난을 치는 두 명의 꼬맹이들이었다.
후버의 예비 전속 시녀인 마릴린은 7살이라는 나이에 걸맞지 않게 조용한 편이였고 이제 막 4살이 된 형 큐리오는 장녀인 세실리아가 없는 동안 자신의 세상이라도 된 듯이 유모인 실리아를 끊임없이 귀찮게 하고 있었다.
그리고 미처 유모가 치우지 못한 블록을 치우는 큐리오의 전속 시녀 엘레나의 고사리 같은 손길.
‘쯧쯧. 저러다가 또 처맞지…….’
그리고 그때 문 여는 소리가 나자 방 안에 있던 다섯 명의 눈길이 한곳으로 모였다.
그 시선의 끝에는 장녀인 세실리아가 자신의 전속 시녀인 루이나를 대동한 채 방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세실리아의 등장에 큐리오는 장난감에서 손을 떼고는 세실리아의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큐리오, 말썽부리지는 않았지?”
짐짓 위엄을 부리듯이 가슴을 쭉 펴고 엄한 목소리로 세실리아가 큐리오에게 말하자 큐리오는 금방 장난감을 뒤로하고 세실리아에게 안겼다.
좀 더 시간이 흐르면 지금의 권력관계가 뒤바뀌겠지만, 아직은 나이가 가장 많은 세실리아가 이 중에서는 연장자로서 이들을 조율했다.
사실상 종일 누워 있는 후버를 제외한 큐리오만을 제지하는 것이지만 시녀들은 세실리아의 등장과 함께 안도감을 느꼈다.
지난 6개월간 항상 오전은 세실리아의 수업과 함께 큐리오의 짓궂은 장난에 희생당해야 하는 시녀들이었지만, 세실리아가 나타난 이상 세실리아와 후계자들을 관리하는 시녀장인 실리아가 교대로 후버와 큐리오에게 동화를 읽어 주는 정적인 시간이 돌아온 것이다.
“큐리오, 얼른 네가 어지른 거 정리하고 가서 동화책 하나 뽑아와!”
“우엉~ 하지만……!”
“어허! 얼른!”
‘내 형이지만 왜 저렇게 학습 능력이 없을까? 꼭 문 잠그는 소리가 나야 정신을 차리니…….’
한심한 큐리오의 모습… 과연 저 모습이 자라면 어떻게 백작가의 위엄 넘치는 가장이 될지 지금의 후버는 상상조차 되지 않았다.
“큐리오… 누나는 피곤하단다. 얼른 치우고 동화책을 가져오렴.”
“할 거야. 할 거야. 오늘은 영웅 놀이할 거야!”
최근 들어 5살이 되더니 유독 자신의 말에 대해 엉까는 모습을 보이는 큐리오의 모습에 세실리아가 느낀 단 하나의 감정.
“아… 빡친다.”
언젠가 영지의 기사인 필러 경이 그 부하이자 수습기사인 제이드를 보면서 한탄하듯이 한 말이 세실리아 자신도 모르게 혼잣말로 나왔다.
“덤벼라, 마녀야~”
이제 숫제 장난감 칼까지 꺼내서 마녀 아니 세실리아를 도발하는 큐리오.
“이야~!”
기세 좋은 큐리오의 기합과 함께 세실리아에게 장난감 칼을 휘두르며 달려들었지만, 세실리아는 그런 큐리오를 슬쩍 피하고는 옆에 떨어진 블록을 주워들었다.
“파이어 볼.”
딱~!
세실리아의 간단한 영창만큼이나 경쾌한 소리를 내는 것으로 파이어볼과 큐리오의 머리는 맡은 바 임무를 다 했다. 그리고 큐리오를 향한 세실리아의 구타.
“네가… 감히 이 누나한테 대들어? 어디서 나쁜 것만 배워서… 어디 너 오늘 한번 죽어봐라! 로이나 빨리 문 잠가!”
그리고 장난감 칼까지 빼앗아서 큐리오를 구타하는 세실리아.
“네?”
“문 잠가! 아무도 못 들어오게 해.”
이 역시 필러 경이 가끔가다 수습기사인 제이드에게 사사로운 가르침을 내릴 때면 창고 안에서 어김없이 들리던 말이다.
큐리오에게는 그만큼 불행한 일이었지만… 자신의 전속 시녀인 로이나 에게 빠르게 명령을 하고는 큐리오를 난타하기 시작했다.
“엘레나, 도와줘 넌 영웅을 돕는 마법사잖아!”
큐리오를 도우려는 엘레나와 큐리오를 구타하던 세실리아의 눈길이 허공에서 맞닿은 순간……!
“마, 마나 역류가.”
힘없이 풀썩 쓰려지며 자연스럽게 눈을 뒤집는 엘레나.
“이를 어쩌나! 용사님, 마법사는 마나가 역류해서 못 도와준다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