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리카겔
수정구를 다시 아공간 배낭에 넣어둔 슬렌은 그 길로 자작의 집무실로 몸을 옮겼다.
어두운 저녁이지만 아직까지는 침실보다 집무실에 있을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이다.
네 발을 열심히 놀려서 도착한 자작성의 가장 깊숙한 곳, 자작의 방이 열려 있는 것을 확인한 슬렌은 두 발로 일어나서는 몇 번 움직여보았다.
“흠흠…….”
“누구냐?”
“영지의 주인은 여기 계신가?”
누구냐는 자작의 물음에 짐짓 위엄 있는 척을 하는 슬렌의 목소리.
“누구냐고 묻지 않았냐?”
“나는 위대한 마도사 실리카겔이오.”
“뭐, 인마! 어디서 이게 장난질이야?”
벌컥 문을 연 자작의 눈앞에 웬 고양이 한 마리가 허리를 빳빳이 세우고는 자신을 쳐다보는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
“영지의 주인 되시오?”
“이게 무슨? 고양이가 말을…….”
“나 대마도사 실리카겔이오. 그쪽의 이름은 무엇이오?”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이. 고양이가 두 발로 일어나서 말을?”
“허허. 대마도사가 물어보는데 대답을 안 해?”
그 말과 함께 슬렌은 1서클 라이트 마법이 메모라이즈 되어 있던 스크롤을 몰래 찢자, 밝은 빛이 자작 집무실의 복도를 가득 채웠다.
말하는 고양이에 놀란 자작은 슬렌이 스크롤을 찢는 것까지는 보지 못했다.
“마법까지 썼으니 이 고양이에 대해서 놀랄 것은 다 놀랐을 것이오. 이제 이름을 말해보시오. 그대가 이 영지의 주인이오? 난 대마법사 실리카겔, 이 고양이는 나의 패밀리어라오.”
“예. 예. 저는 보헴 자작가의 슬레인이라고 하옵니다. 경황이 없어서 대답이 늦은 점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뭐 내가 고양이의 모습이니 그럴 수도 있지. 내가 실험을 하는 동안 요놈이 던전을 빠져 나간 것을 찾기 위해 감응을 시작했더니 자작의 성이었소. 나의 애완동물을 보살펴 주어서 감사하오.”
“예. 당연히 해야 될 도리를 한 것입니다.”
사실 자작은 그저 고양이 한 마리가 록시나 자작가의 영애와 같이 왔다는 말을 들었을 뿐 실제로 본 것은 처음이지만 마치 자신이 구해주었다는 듯이 대답하였다.
“아무튼 고맙소. 도움을 받았으면 다시 도와주는 것이 인지상정일 것인데 자작의 양해를 좀 구해야 할 것 같소.”
“무슨 말씀이신지?”
“일단 좀 앉을 곳으로 갔으면 좋겠구려. 나는 상관없지만 고양이는 본래 서 있도록 만들어진 동물이 아니라 힘들어하는구려.”
“예. 일단 이쪽으로.”
자작이 슬렌을 안내하자 슬렌은 여전히 허리를 쭈욱~ 편 자세로 우아하게 걸어 슬레인 자작이 안내해주는 가장 상석에 앉았다.
슬레인 자작 역시 패밀리어 마법과 말하는 고양이를 보고는 예사 고양이가 아니라고 여겼는지 그 행동이 매우 정중했다.
“내가 양해를 구할 것은 도움을 받았으니 도움을 주어야 할 것인데 나는 슬레인 자작을 모르오. 혹시 슬레인 자작은 나를 아시오?”
“아~ 예. 위대하신 마도사 실리카겔 님에 대해서는 많이 들어 보았습니다. 주로 대외적인 활동보다는 실험에 몰두하셔서 자세한 소식은 제가 귀가 어두워 듣지 못하였습니다.”
“흠흠. 그 정도만 해도 많이 아는 것이지, 내가 아슐란 그 아이에게 나의 이름은 알려지지 않게 해달라고 부탁을 했거든. 그래도 내 이름을 아는 것을 보니 자네는 신분은 비록 자작이지만 꽤나 중앙의 요직에 있나보군. 흠흠, 좋은 징조야.”
당연히 들어본 적도 없는 급조한 이름을 자작이 들어보았다고 하자 혹시 정말로 그런 마도사가 있는 것인지 슬쩍 당황이 되었지만, 자신이 한 말만을 반복하는 자작의 말과 당황한 표정을 보니 그저 장단에 맞춰주는 안부 인사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머리가 좋아서 요리조리 피하는 걸까? 멍청해서 뒷감당할 생각 안 하고 거짓말부터 하는 걸까?’
원래 이름을 모른다고 하면 꾸짖듯이 말해 자작을 당황시킨 후 전대의 왕인 아슐란의 이름을 팔아서 소문을 통제하려고 해서 어쩔 수 없다고 이야기하려 했지만, 자작이 아는 척을 하자 관대한 분위기를 만들어 주었다.
후버의 각본과 슬렌의 애드리브가 빚어낸 성과였다. 반면 아슐란의 이름을 들은 자작은 크게 놀랐다.
전대 왕인 아슐란의 이름을 친구 부르듯 하는 슬렌의 태도에 그의 나이를 짐작하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마법사는 나이가 많을수록 경지가 높다는 것을 생각해보았을 때 실리카겔의 경지가 짐작되지도 않는 것이다.
“혹시 아슐란 님이라시면 전대의 왕인 돌아가신 아슐란 국왕을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전대라니? 아슐란 그 친구가 벌써 죽었단 말인가? 역모라도 발생한 건가?”
“아닙니다. 역모라니요. 천수를 누리시고 70세의 나이에 사망하시고 지금은 아스트라 국왕께서 다스리고 계십니다.”
“흠흠. 이거 혼자 마법만을 연구하다보니 가끔 감정을 다스리지 못하네. 자작 자네가 이해를 해주게. 허허. 내 7서클의 경지에 오르고 세상을 등지고 던전 안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았다고 생각하였는데 벌써 그렇게 시간이 흘렀다니…….”
“7서클? 7서클이란 말이십니까?”
망할 놈의 크롤라이드로 인해 거액의 배상금을 물게 될 뻔한 슬레인 자작으로서는 7서클이라는 그의 말이 더욱더 무겁게 느껴졌다.
마탑에는 아무런 인연이 없고 중앙 정치에도 적극적으로 참여를 못하는 자신으로서는 평생 가도 7서클 마법사를 만날 수도 없었다고 여겼었는데 레빌리온 백작가는 그런 7서클의 마도사가 손님으로 머물고 있다는 말에 배가 아팠던 것이다.
“흠흠, 이미 지나간 경지의 일이네. 그 일에 대해서는 더 이상 이야기하지 말게나.”
“예, 실리카겔 님.”
7서클을 이미 지나간 일이라고 하는 슬렌의 말에 너무 놀라 다리가 풀려 버릴 뻔한 자작이었지만 애써 몸의 중심을 잡고는 더 깊게 고개를 숙였다.
남이 본다면 자작이 엎드려 있는 고양이에게 고개를 연신 숙이는 웃기는 광경이었지만 자작은 그런 것을 신경 쓰지 않았다.
“내가 양해를 구하고 싶은 것은 내가 아끼는 슬렌을… 아, 슬렌은 이 고양이의 이름이네. 자네가 돌봐준 것에 보답을 하기 위해 고양이의 기억을 읽기 위함인데 그래도 되겠나?”
슬레인 자작은 슬렌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동의를 표했다.
“의외로 동물이라는 것이 말을 못해서 그렇지, 알아선 안 될 것도 아는 경우가 있기에 먼저 허락을 구하려 하네. 혹시 다른 원하는 게 있다면 말을 해도 좋네.”
“아닙니다, 대가라니요. 저는 상관이 없으니 편하신 대로 하시지요.”
“흠. 그럼 잠시 고양이가 축 늘어질 것이니 다치지 않게 보호해주게.”
“예, 알겠습니다.”
대가를 바라지 않는다면서 편하게 기억을 읽으라고 하는 슬레인 자작의 행동이 우스웠지만 슬렌은 끝까지 진지한 표정을 지으면서 몸이 축 늘어진 듯 소파에 아예 몸을 파묻어 버렸다.
그렇게 약 5분간 몸을 파묻던 슬렌은 늘어지는 자세로 기지개를 펴고는 슬레인 자작을 응시했다.
“흠… 미안하게 됐네. 아무래도 자네의 부탁을 들어주진 못하겠군. 먼저 말하고 이렇게 말을 바꾸어서 미안하네.”
“갑자기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어벙해진 슬레인이 슬렌을 향해 되물었다.
“아무리 내가 대마법사라고 하나 고양이가 기억하는 것 이상을 알 수는 없네. 그리고 그 기억력은 단 하루밖에 안 되지. 그런데 자네가 데리고 있던 수석지배인이 슬렌을 때리고 괴롭히는 것도 모자라서 자신이 술안주로 먹겠다고 했네. 혹시 슬렌이 길을 잃었을 때 먹으라고 준비해둔 아공간 주머니의 육포까지 빼앗아 먹었더군.”
“저… 그것이 제가 그런 것이 아니라 수석지배인이 한 것인데.”
“그래도 너무했어. 말 못하는 것이 육포까지 빼앗기고 말이야. 그것은 나를 발로 차고 내 마법도구를 빼앗은 것과 같네. 고작 고양이 한 마리 거두었다고 신세를 갚는 것이 아니라 내가 이 고양이를 가족처럼 여겨 그러는 것인데, 크흠! 밥을 주지는 못할망정 때리는 것은 너무하지 않나?”
이 부분은 후버의 지시가 없는 부분이었지만 자작가에 머무는 며칠간 수석지배인이란 놈이 자신을 때리고 육포와 술을 빼앗아 먹은 것에 화가 난 슬렌은 그 비난을 자작에게 퍼부었다.
뒤로 갈수록 노한 목소리에 슬레인은 자신이 7서클 마법사를 적으로 만들까봐 대경했다.
“그, 그놈은 제가 충분히 반성을 시키겠습니다. 화를 푸시지요. 저는 정말 잘 대하라고 했는데 그놈이 관리를 제대로 못한 저의 잘못입니다.”
쿵, 쿵, 쿵!
테이블에 머리를 박고 수석지배인을 처벌한다는 자작의 말을 듣자 슬렌은 그제야 원한이 풀리는 것을 느꼈다.
“되었다. 자네의 진심은 알았으니 그를 벌하는 선에서 끝내기로 하지.”
“감사합니다. 실리카겔 님.”
“그리고 내가 슬렌의 기억을 읽어보니 어쌔신 한 명을 찾고 있는데 그 어쌔신이 어디 있는지 몰라서 걱정인가보군.”
“예, 예. 그렇습니다.”
“그 어쌔신이 어디 있는지 찾아주도록 하지. 지금부터 하루 간격으로 슬렌이 현재 위치를 알려 줄 테니 그 정도면 슬렌이 진 신세는 모두 갚은 것 같은데 어떠한가?”
“감사합니다. 그렇게만 해주시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습니다.”
“그래, 그럼 다행이군. 근데 혹시 어쌔신이 가지고 있던 물건이나 그런 것은 없는가?”
그 말에 자작이 후다닥 일어나서는 자신의 책상 서랍 한편에 넣어둔 어쌔신이 쓴 편지를 가지고 왔다.
진본을 받아 왔으니 실리카겔이 말한 요건을 충분히 충족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저… 이것이 그 어쌔신이 사용한 종이입니다.”
“음… 이거 마나가 희미해서 찾기가 힘들지도 모르겠군. 대륙 전체에 탐지마법을 거는 것은 나라도 쉬운 일이 아니거든.”
“대륙 전체에 말입니까? 그것이 가능하십니까?”
자작도 바보는 아니었기에 탐지 마법의 한계를 알고 있었다.
아무리 서클이 높은 마도사라도 영지 한두 개를 커버할 수 있을 뿐이고 그 정확성이라는 것도 그다지 높지는 않았다.
“나는 가능하지. 설마 나를 그저 그런 팔푼이 마법사로 아는 것은 아니겠지?”
“아닙니다. 제가 어찌 그런.”
“그럼 슬렌에게 먹을 것 좀 가져다주고 편히 쉬게 해주고 있으시게. 한 시간 정도는 소요될 것이니.”
“예. 감사합니다.”
굽실거리던 자작이 자고 있던 주방장을 직접 깨워서는 최고의 요리를 만들라고 지시하고 요리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직접 감시하기까지 했다.
분명히 마법사는 슬렌을 아끼는 것으로 보이기에 우습지만 고양이를 잘 대접한다면 그에 대한 보답을 나중에도 또 받을 수 있다는 기대가 작용한 것이다.
‘어서 서둘러라. 그렇다고 맛이 없어서는 안 된다.’
슬레인 자작의 다그침은 끝이 없었다.
아직 결과가 나오지는 않았지만 설사 어쌔신을 찾아내지 못한다고 해도 고서클의 마법사와 알고 있다는 것은 절대로 손해 볼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자작이 요리사를 닦달하는 그때 슬렌은 후버에게 말을 걸고 있었다.
“완전히 넘어왔습니다. 주인님 변화는 있습니까?”
―아까 말한 부분에서 동쪽으로 이동 중이야. 8km/h 뛰어가고 있고 어쌔신 길드에서 파견된 인원과는 20km, 자작의 기사와는 확인이 불가능해.
“넵 알겠습니다. 이만 통신 끊습니다.”
후버와의 통신을 끊고 얼마 지나지 않아 자작이 직접 음식을 가지고 왔다.
“일단 이것부터 드시고 계시면 다른 요리도 준비될 것입니다.”
“야옹~”
의뭉스럽게 자신의 털 손실을 하며 자작이 가지고 온 요리를 바라볼 뿐 슬렌은 그 음식에 손도 대지 않았다.
어차피 배가 고프지도 않기에 더 많은 것을 얻기 위한 추진력으로 남겨둔 것이다.
수차례 새로운 요리가 오고 슬렌은 그 요리를 한 번씩 쳐다만 볼 뿐 아예 신경을 쓰지 않았다.
“야~~~옹.”
한가한 슬렌의 울음소리에 자작의 요리사에 대한 닦달은 심해졌고 급기야 요리사는 울상이 되어버렸다.
그러고 보니 저 고양이가 자작가에서 음식을 먹는다는 이야기는 듣지 못했고 주방장 역시 식사를 만들 때 아레스와 슈웨거 자작의 음식만을 만들었지 고양이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고 대답했다.
“자네 이 음식들은 뭔가?”
“예. 슬렌 님의 기호를 맞추기 위해 다양한 음식을…….”
“어허! 뭐 모르니 그럴 수도 있지. 지도를 가지고 와보게. 설마 이런 것들을 슬렌이 먹으려고?”
자작이 자신의 집무실 한쪽 벽에 전시되어 있던 대륙 전도를 떼서는 바닥에 깔아 두었다.
‘마음에 들지 않으니 마지막으로 한번만 더 놀려 먹어야겠어.’
슬렌의 속마음은 그대로 슬레인 자작에게 표출되었다.
“이익! 자네 좋게 보려 했건만 나를 뭐로 보고 이딴 지도를 가지고 오는 건가? 내가 우스운 건가? 고작 이딴 지도로 장소를 가리킬 만큼 내 마법 실력이 형편없다는 거야? 당장 상세히 지방별로 따로 그려진 지도를 가지고 오지 못할까?”
“죄송합니다. 실리카겔 님. 바로 제대로 된 지도를 가지고 오겠습니다.”
“흠흠. 이번이 처음이니까 봐주는 것이야. 아무리 내 이름이 알려지지 않았다고 해서 이런 대접을 받다니. 흐흠!”
“여기 있습니다. 제가 가진 가장 상세한 지도가 이것이라서.”
자작이 가져온 지도를 슬쩍 쳐다본 슬렌이 못마땅하다는 듯이 지도를 휘리릭 넘겨서는 한쪽을 가리키고는 말했다.
“여기서 동쪽으로 시간당 8km씩 움직이고 있군. 뒤를 따르는 어쌔신들은 20km를 떨어져서 따라오고 있고 자네 기사는 어디쯤 있는가?”
“저희 기사는 2일 전쯤 출병해서 이제 막 이쪽의 협곡을 지나갔을 것입니다.”
“그런가? 내가 자작의 기사들의 수준은 모르겠지만 그 정도 위치라면 어쌔신들에게 먼저 잡히겠구먼. 차라리 이 어쌔신을 생포하려면 뒤따르는 어쌔신들을 척살하고 이진을 보내서 그를 생포하는 게 좋을 거야.”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이제 나는 피곤하군. 그럼 슬렌을 잘 부탁하네. 돌아오는 길은 슬렌도 알고 있을 테니 이만 요놈도 쉬게 하는 것이 좋겠군. 그리고 나를 보았다는 것은 비밀일세. 다행히 아슐란이 정보를 잘 차단해주었구먼. 만약 나를 보았다는 말이 내 귀에 들어올시 뒷일은 책임을 못 지네.”
“예. 당연히 비밀을 지켜야지요. 실리카겔 님 도움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실리카겔 님…….”
“야~~~옹.”
“계신가요? 실리카겔 님?”
“야~~옹.”
이상하다는 듯 바라보는 슬렌의 눈을 확인한 슬레인 자작은 시종을 부르는 벨을 신경질적으로 흔들고는 슬렌에게 들은 대로 지도에 이곳저곳을 표시해서 당장 영지의 수정구 통신을 담당하는 마법사에게 전해줄 것과 이진의 출병을 내일 당장 서두르라는 지시를 내렸다.
“시간이 없다. 오늘 잡지 못하면 내일까지 손가락 빨고 기다려야 하니 서둘러라!”
바쁘게 움직이는 자작을 본 슬렌은 껑충 뛰어서 소파에서 내려와 기지개를 쭉 한 번 피고는 네 발로 걸어서 자신을 기다리는 아레스에게 돌아가기 전 육포로 배를 한껏 채우고는 방으로 돌아갔다.
다음 날이 밝고 저녁이 되자 아레스와 슈웨거, 슬렌 그리고 슬레인이 한 테이블에 앉아서 식사를 하고 있었다.
아니, 슬렌을 제외하고는 모두 식사를 하고 있었지만 슬렌은 자신의 눈앞에 있는 음식을 마음에 안 든다는 듯 바라보다가 털 고르기에 여념이 없었다.
“자, 그럼 식사를 드시지요.”
말을 하면서도 자작의 시선은 슬렌에게 향해 있었다.
마법이란 워낙 신기한 학문이니 동물을 통해서 말을 하거나 마나를 감지하거나 마법을 쓰는 게 가능하냐는 질문에 영지의 마법사는 말도 안 된다는 듯이 웃으며 ‘아마 9서클쯤이면 가능하지 않을까?’라는 대답을 해주었다.
못해도 7서클, 최고 9서클이다. 슬렌은 반드시 잡아야 할 동물이었다.
“아버지, 나비가 입맛이 없나 봐요.”
“그렇구나. 오늘 아침부터 아무것도 먹지를 않으니…….”
“그런데 나비와는 어찌 알게 되신 겁니까?”
식사 내내 불안한 듯 눈알을 굴리던 슬레인 자작이 슈웨거 자작을 향해 질문했다.
“그냥 우연히 관도에 있던 나비를 마차에 태웠을 뿐입니다.”
‘재수도 좋은 놈 같으니라고. 이제 보니 저 고양이가 아레스 년을 따르는구나.’
그의 말대로 아레스가 조금씩 집어주는 음식만을 받아먹을 뿐 그마저도 싫은 기색을 팍팍 내고 있었다.
고작 고양이의 눈치를 봐야 하는 자신의 신세가 우스웠지만 왠지 모르게 꼬인 슬렌의 태도에 조바심이 났다.
“다른 음식은 안 먹고 육포만 먹나 봐요.”
“그런가 보구나. 이거 참…….”
“수석 시종장이라는 사람이 다 뺏어간 것 같던데…….”
슬레인 자작에게까지는 안 들리게 아레스 영애가 조용히 말했지만 그 말에 슬레인 자작은 자신이 잊어버린 사항이 생각났다.
수석 시종장의 처벌을 깜빡한 것이다.
당장 조금만 더 지나면 실리카겔과 대화를 할 것인데 만약 그가 이런 사실을 알게 되면 자신은 몇 서클인지 짐작도 못하는 전대의 대마법사의 공격을 받게 될지도 몰랐다.
슬레인 자작의 마음이 급해지는 것도 모른 채 슈웨거 자작이 입을 열었다.
“사실 제가 이렇게 찾아뵌 것은 슬레인 자작의 도움이 필요해서 입니다.”
“어떤 도움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사실 저희 영지가 지속적인 사업의 실패로 쉽지 않은 시절을 보내고 있습니다.”
“그러시군요. 참 불행한 일입니다. 자작님 같으신 분이 곤란을 겪다니요.”
“그래서 저희 영지를 자작님께서 좀 도와주셨으면 합니다.”
“구체적으로 도움이라면 어떤 도움을……?”
“5만 골드를 10년간 빌려주신다면 3년 후부터 매년 1만 골드씩 갚아 나가도록 하겠습니다.”
“차관이라… 저희 영지도 요즘 사정이 어려워서…….”
“캬~~~악.”
뒷말을 흐리며 거절을 준비하던 슬레인 자작에게 슬렌이 불쾌하다는 듯 큰소리를 내고는 아레스 영애의 가슴에 안겼다.
마치 그 모습이 슬레인 자작에게는 자신이 좋아하는 아레스에게 돈을 주지 않아서 불쾌하다는 듯 비춰졌기에 얼른 뒷말을 바꾸었다.
“자금을 융통하기는 쉽지 않으나 과거 시장의 마법사라고 불리셨던 슈웨거 님의 명성을 생각해서 빌려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이자는 필요 없으니 5년간 사용하시고 6년간 균등하게 갚으시면 됩니다.”
슬레인 자작의 그런 반응에 슈웨거 자작이 오히려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과거 자신이 시장의 마법사, 혹은 타이밍의 승부사라고 불린 적은 있었지만 최근 10년간은 지속적인 사업의 실패로 오히려 퇴물 소리를 듣는 자신에게 저렇게 관대한 조건이라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도대체 무슨 심경의 변화가 있기에?’
문전박대 수준의 대우에서 갑자기 자신을 추켜 세워주니 이해할 수 없었지만 준다면 받으면 그만이었다.
과연 그는 대답할 타이밍을 놓치지 않았다.
“감사합니다. 그럼 그렇게 알고 있겠습니다.”
“부디 앞으로 좋은 일이 있으시길 바랍니다.”
슬렌으로서는 최대한 슬레인 자작가의 힘을 빼 놓으라는 후버의 지시를 받았기에 대충 인상을 한번 쓴 것인데 생각보다 슬레인 자작의 눈치가 빨라서 쉽게 목적을 이룰 수 있었다.
약간의 환담과 함께 슬레인 자작과 슈웨거 자작이 헤어진 후 슬레인 자작은 슬렌이 보는 앞에서 수석지배인에게 채찍형 20대를 내리는 한편, 슬렌 앞에 수석지배인을 무릎 꿇려 사과하게 했다.
“어떻습니까? 만족스럽습니까?”
이제 숫제 고양이에게 경어로 말을 거는 슬레인 자작의 모습에 전후 사정을 모르는 자작가의 시녀와 시종들은 고작 고양이 한 마리를 괴롭혔다고 자신의 수석지배인에게 채찍질을 하는 자작을 미친 사람 쳐다보듯이 쳐다보았고, 그렇게 자작가는 내부부터 무너져 내릴 준비를 하고 있었다.
*
*
*
“그래? 별일은 없었고?
“예. 실리카겔 님의 지시대로 이진을 출발시켜 텔레포트 게이트를 이용해서 가까운 영지로 보내 두었습니다. 현재 일진과 이진 사이의 거리 차는 그다지 크지 않습니다.”
“일단 추격하는 어쌔신들의 움직임을 더 빨리 막아야겠어. 쯧쯧쯧!”
“어째서입니까?”
“멍청하게 도망치던 놈이 비트를 파고 숨어버렸거든. 지금 그 주변을 어쌔신들이 수색하고 있으니깐 위험해.”
“그럼 차라리 추격자들이 지나치면 도망치던 어쌔신을 잡아오는 것이 더 안전하지 않겠습니까?”
이제 이성을 되찾은 자작의 솔직한 심정은 어쌔신 길드와 충돌을 하지 않는 것이었다.
대리인 정도야 돈으로 잘 무마하면 되지만 정말로 어쌔신을 죽이게 되면 그 이후는 전쟁뿐이기 때문이다.
“그들이 그냥 지나갈 거면 이야기를 안 하지. 쯧쯧쯧! 낮에 10km 정도 추격자들이 잘못 추격하다가 돌아온 거야. 확신을 가지고 있는데 왜 그냥 지나치겠어?”
슬레인 자작에겐 미안한 일이었지만 후버의 뜻은 최대한의 전력 낭비였고 슬렌은 그런 후버의 지시에 충실히 따르는 애완동물이었다.
다시금 지도책을 펼친 슬렌이 산의 정상 부근을 가리켰다.
“대충 이쯤으로 일단 군사를 보내. 얼마나 걸릴 것 같나? 현재 자네의 기사단과는 3km 정도 떨어진 위치야.”
“예. 한 50분 정도 걸릴 것 같습니다.”
“그래? 그럼 2시간 정도 후에 결과를 알려 주지.”
“감사합니다. 실리카겔 님.”
“근데 자네 슬렌을 굶기나?”
“아닙니다. 제가 어찌…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그런데 슬렌이 왜 이렇게 힘이 없어? 자네가 밥을 안줘서… 아, 그 수석지배인인가 뭔가 하는 놈이 뺏어 먹었지. 그래, 그 녀석은 벌했나?”
“아~ 예! 다시는 그런 일을 못하게 모든 가신들과 시종 시녀들을 불러두고 단단히 혼냈습니다.”
“그건 잘했군. 그래도 웬만하면 좀 잘 먹여주게. 슬렌은 내 하나뿐인 가족이야. 그럼 이따 보지.”
“예. 들어가십쇼.”
그 말과 함께 슬렌의 몸이 축 늘어져서는 힘없다는 듯이 자작을 바라봤다.
슬렌이 최신 상황을 알기 위해서는 후버와의 교신이 필요했고 교신을 위해서는 자작이 요리사를 닦달하기 위해 나가는 것이 중요했다.
두어 시간 동안 끊임없이 요리가 만들어졌지만 슬렌은 그런 요리에 아무런 손도 대지 않고 그저 힘없는 표정으로 자작과 요리를 바라보다가는 아예 고개를 돌려 버렸다.
“도대체 무엇이 그리 마음에 안 드십니까?”
‘네가 맘에 안 든다. 네가!’
더 많은 것을 얻기 위한 도약의 준비, 슬렌이 본능적으로 이런 행동을 하는 것은 주인에게 영향을 받는 자신의 특성과도 높은 관계가 있었다.
대략 2시간여가 지나고 식은 음식은 다시 덥혀지고 새로운 요리가 끝없이 나왔지만 슬렌의 손을 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흠흠! 슬렌이 힘이 없으니 한마디만 하고 그만 돌아가겠네.”
“예. 말씀하시지요.”
“동쪽으로 200미터 가면 추격하던 어쌔신들과 만날 수 있네.”
“감사합니다.”
“그리고 좀 먹이게. 자네 내 말이 우스운 건가? 만약 슬렌이 살이라도 빠져서 돌아온다면 난 자네에 대한 실망을 감추지 못할 거야.”
“예예, 알겠습니다. 그럼 잠시…….”
자작이 다시금 방밖으로 나가자 슬렌은 육포를 질겅질겅 씹으며 앞에 있는 요리들을 바라봤다.
너무나 먹고 싶다.
하지만 참아야 한다.
어차피 조만간 영지 밖으로 나가서 후버에게 부탁하면 까짓것 음식은 충분히 먹을 수 있을 것이다.
대마법사 실리카겔의 체면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일단 지금은 참을 필요가 있었다.
*
*
*
“이건 뭐 하루하루가 순식간에 지나가는군.”
낮에는 영지 예비 병사들의 기초 훈련과 신무기의 개발까지 하는 후버는 요즘 눈코 뜰 새 없이 바빴지만 밤에도 슬렌과의 교신을 위해 잠을 잘 수 없었다.
그저 병사들의 숫자나 알아오면 충분할 것이라고 생각한 후버였지만 슬렌은 생각보다 너무나 잘해주고 있었다.
구워삶은 자작은 슬렌의 말이라면 맹신하는 분위기로 가고 있었으며 오늘 어쌔신들과 충돌만 하게 되면 자신의 능력을 믿게 될 것이었다.
‘이제 곧 충돌하겠군.’
매복해 있는 어쌔신들에게 슬레인 자작의 제1기사대가 점점 접근을 해갔다.
고화질과 360도 자유로운 카메라 워크로 즐기는 전투의 생생한 감동을 느끼기 위해 양옆의 아카이브와 크롤라이드는 팝콘과 닭다리를 뜯으며 수정구가 허공에 뿌린 화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니깐 저기 검은 옷을 입고 숨어 있는 놈들이 너를 죽이려고 한 놈이고 하얀 풀 플레이트 아머와 말을 타고 있는 놈이 그걸 사주한 놈의 기사단이란 말이지?”
“네 그렇습니다. 기사단 전체는 아니지만 없어지면 곤란할 정도의 숫자는 되지요.”
“괜히 레빌리온 백작가를 건드려서는, 쯧쯧쯧! 암살이나 해대는 놈이지만 불쌍하구나. 숫자도 비슷하니 어쌔신들이 최소 반은 남을 텐데.”
“그렇습니다. 스승님 그러기에 잘 확인을 하고 덤벼야지, 욕심은 많은데 능력이 안 되는 놈인가 봅니다.”
아카이브와 크롤라이드가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는 순간 두 세력이 충돌했다.
어쌔신들의 섬광과 같은 근거리 석궁 발사와 함께 이어지는 직선적인 찌르기.
이미 장전되어 있던 두 개의 석궁을 하나는 말에, 하나는 기사에게 동시에 날림으로써 최소한 기사의 이동수단인 말을 묶어 두거나, 운이 좋을 경우 기사가 그 자리에서 사망하는 경우도 보였다.
“쯧쯧! 벌써 5명이나 죽었구먼.”
“어쌔신이 굉장히 동작이 부드럽군요. 저렇게 나무 위에서 찔러 내려가면 자신도 위험하지만 기사들은 투구 때문에 다른 기사가 당할 때까지 어쌔신이 어떤 방식으로 공격할지도 모르니까요.”
아카이브의 말대로 기사들의 투구는 머리를 보호해줄지는 몰라도 바로 위에 있는 어쌔신의 찌르기를 보는 것은 힘들었다.
가장 가까운 적이 아닌 멀리 있는 적에게 석궁을 발사함으로써 머리 위에 있다는 것을 숨기고 석궁이 날아온 곳에 신경을 집중할 때.
“투구를 쓰면 위를 못 보지…….”
위에서 찔러 내려오는 단순한 방법에 기사 5명이 순식간에 사망 또는 전투 불능이 되어 버린 것이다.
하지만 기사들 역시 피해를 전혀 주지 못한 것은 아니었다.
순간적인 기지를 발휘해서 자신의 동료를 공격하고 물러나는 어쌔신에게 브로드소드를 휘둘러 2명의 어쌔신을 전투 불능으로 만들어 버렸다.
“둘의 분쟁이 어쌔신 2명에 5만 골드를 지급하라고 해서 생긴 일이라고 하지 않았느냐? 후버.”
“그렇습니다. 그것도 깍은 것이지만 대략 그 정도입니다.”
“이것 참! 저 두 명이면 또 5만 골드인데 자작이 돌아올 수 없는 길을 건넜구나.”
“이미 각오를 했겠지요.”
쨍쨍 하는 검끼리 부딪히는 소리가 들려 왔지만 아카이브의 방 분위기는 그런 상황과 다른 분위기를 보여주고 있었다.
한가로운 아카이브의 방과 죽음과 삶을 결정짓는 전장의 거리는 너무도 멀었다.
“대충 어쌔신들이 기선을 잡았군요.”
“의외구나. 수적 우세가 아니라고 해도 처음 암살의 실패한 후 일방적으로 밀리는 구간이 있을 줄 알았거늘 생각보다 많이 살아남았어. 슬레인 자작에겐 안 된 일이지만.”
“아무래도 자작가의 기사들이 너무도 약한 듯합니다.”
그 후로 무려 2시간이나 계속된 싸움, 어쌔신들로서는 강력한 풀 플레이트 아머의 방어를 뚫으며 일격 필살의 기술을 사용할 수 없었고 기사들은 어쌔신들의 빠른 동작을 잡아내지 못하는 지루한 대치 상황이 계속되었다.
“아무래도 기사들이 지치기를 기다린 듯하구나.”
“스승님의 말씀대로인 것 같습니다. 항상 독침을 쓰는 어쌔신이야 아무리 피곤해도 원하는 대로 독침을 날릴 수가 있지만 기사들은 손끝이 떨리면 석궁의 정확성이 떨어질 테니까요.”
싸움의 흐름은 어쌔신들이 원거리에서 독침을 날리기 시작하며 급격히 기울어져 기사들 모두가 땅에 눕는 것으로 끝이나 버렸다.
독침을 막아내며 다른 기사들의 보호를 받아 풀 플레이트 아머를 벗으려 하던 기사에게는 석궁을, 풀 플레이트 아머를 입은 기사에게는 손끝과 얼굴 부위에 독침을 발사하면서 시간을 끈 것이 주효했다.
그러한 두 집단의 충돌을 보며 한가로운 감상평을 나누고 있을 때 다시 한 번 후버가 가지고 있는 수정구가 빛을 발했다.
슬렌에게서 온 연락이었다.
“어쌔신에게 전멸했고 2부대와는 다시 10분 거리이니 자작에게 이야기해서 완전히 몰살시켜 버리라고 해.”
―옙! 그럼 그렇게 전하겠습니다.
짤막한 통신이 끝나고 10분 거리 밖에 있던 슬레인 자작의 병사들이 속도를 높여 움직이는 것이 수정구에 잡혔다.
전투가 길어지면서 벌어진 거리 차가 좁혀진 것이다.
슬레인이 텔레포트 게이트를 사용하는 덕분에 기사도 잃고 인질도 잃는 사태는 일어나지 않을 듯했다.
최소한 지금은 언뜻언뜻 마나의 흐름까지 느껴지는 것이 말 그대로 죽기 살기로 어쌔신들을 처리하기 위해 달려오는 듯했다. 그리고 또다시 격돌.
“이번에는 어쌔신들이 당연히 쓸리겠지?”
“그것은 알 수가 없지요. 두 분께서는 잘 모르시겠지만 저들은 늦게 출발해서 선발대를 따라잡기 위해 죽기 살기로 뛰어와서 체력 상태가 좋지 않거든요.”
“흠… 병사들을 쉬게 하는 것은 기본이거늘 슬레인 자작이라는 자가 똑똑하지는 않은가보군.”
“애초에 똑똑하다면 어쌔신들과 마찰을 일으킬 리도 없으니까요. 대리인까지 죽였다고 하더군요.”
“거참… 고작 그런 놈이 레빌리온 백작가를 노리다니 당대 영주는 너무 성품이 부드러워서 탈이야.”
대화를 나누는 동안 또다시 격전이 벌어지면서 당황한 것은 어쌔신들이었다.
설마 상대가 10분도 안 되어 자신들을 공격하기 위해 들이 닥칠지 몰랐던 어쌔신들은 독침과 석궁의 화살을 회수도 하기 전에 모두 몰살당하고 말았다.
“오! 이건 예상과 다른 결말이군.”
단 한 명의 어쌔신만이 자리를 피하고 나머지들은 4명의 기사를 길동무로 삼아 장렬히 산화하였다.
그리고 다시 슬렌의 연락이 왔다.
―결과와 도망자 어쌔신의 위치를 말씀해주세요.
“기사 4명 사망, 어쌔신 전멸, 한 명 도주, 도망자는 현재 서쪽으로 20분 거리 비트에 매복. 이상!”
―접수했습니다!
쾌활한 슬렌과 후버의 목소리, 이정도면 자작가의 기사 병력에 절반 가까운 피해를 준 것이나 다름없었다.
도망간 어쌔신이 자신의 본부에 이와 같은 상황을 전하면 피해는 기하급수적으로 늘 것이다.
“후우! 역시 영주가 똑똑해야 영지가 잘되지. 저 정도의 기사 병력이라면 최소 10년 이상은 기를 써서 키웠을 텐데.”
“그래도 남은 기사들이 풀 플레이트 아머는 챙기는군요. 아마도 사이즈가 맞는 병사들을 기사로 속성으로 키워내기 위함이겠죠?”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아카이브 님?”
“후버, 자네는 잘 모를 수도 있겠군. 기사를 키우기 힘든 데에는 풀 플레이트 아머 같은 값비싼 보호구를 자신이 직접 사야 한다는 것이 큰 제약으로 작용을 한다네. 그래서 저렇게 기사가 죽으면 유가족이 있는 경우 풀 플레이트 아머를 돌려주고 아닌 경우 영주의 소유가 되지.”
“그럼 영지병 중 풀 플레이트 아머가 맞는 사람에게 수습기사 자리와 풀 플레이트 아머를 모두 주는 것입니까?”
“그건 아니지. 풀 플레이트 아머는 대금을 분할로 상환하는 조건으로 빌려주는 거지. 그래야지 기사가 풀 플레이트 아머만 받고서 다른 곳으로 가지를 못하니깐. 그 대금이 끝날 때쯤이면 말을 지급하고 집을 주면서 평생 빚으로 얽어 놓아야 하거든.”
“모든 기사들이 그런 것입니까?”
“그건 아니지. 그래서 영지 대대로 내려오는 기사의 경우는 자식에게 부모가 풀 플레이트 아머를 마련해 줌으로써 빚으로 얽혀 있기 보다는 충성심으로 해당 영지에 머무르게 되는데 그런 기사들은 저런 자리에 함부로 보내지는 않지. 말 그대로 영지의 자원이니깐.”
“그럼 지금 저렇게 시체와 풀 플레이트 아머를 구분해서 땅해 묻어두는 것도 당장은 가져가기 힘들지만 나중에 찾으러 왔을 때 피와 체액으로 녹슬지 않게 해두기 위해서군요.”
“그렇지. 오히려 저 중 방랑기사가 자신의 돈으로 풀 플레이트 아머를 구입하여 자작의 영지에 유입되었다면 영주로서는 환영할지도 모르겠구먼. 불확실한 방랑기사 보다는 확실하게 빚으로 옭아 맨 상태이니까.”
그 말에 후버는 한 가지 계획이 떠올랐다.
아카이브와 크롤라이드까지 합세하여 영상을 본 것은 그저 자신의 수정구를 이용한 감시에 매력을 느끼게 하려고 한 것이다.
하지만 이곳 세상에 대해서 아는 것이 부족한 후버는 아카이브의 이야기를 통해 많은 것을 알 수 있었다.
“후버, 무슨 생각을 그렇게 골똘히 하느냐?”
“아닙니다. 그냥 재미있는 생각이 떠올라서요.”
그 후 후버와 아카이브, 크롤라이드는 후버가 인공위성이라고 이름 붙인 수정구를 이용한 영지 감시 시스템에 대해 좀 더 이야기를 나눈 후 협력을 약속 받고 헤어질 수 있었다.
크롤라이드나 아카이브로서는 후버의 마법을 응용한 장치에 많은 관심을 가졌기 때문이다.
이런 후버의 요청이 있을 때는 자신들이 사용하던 마법도구 보다는 저렴한 도구를 사용하지만 새로운 관점에서의 응용, 특히 초대 레빌리온가의 백작의 이야기를 알고 있는 크롤라이드로서는 쌍수를 들고 환영하며 후버의 계획을 즐겼다.
*
*
*
“후~~ 버~~~”
“도련님, 세실리아 아가씨 같은데요.”
사랑을 가득 담아 외치는 세실리아의 목소리가 섬뜩하지만 후버는 마릴린에게 방문을 열어 줄 것을 요청했다.
“후버, 내 사랑하는 동생. 오늘 내가 좀 달라 보이지 않니?”
“세실리아 누님께서는 언제나 아름다우십니다.”
“그리고 또?”
세실리아의 말에 후버의 머리가 팽팽 돌아가기 시작했다.
뭔가를 원하는 것은 알고 있으나 뭔지를 모른다. 이럴 때는 그저 모르는 척하는 것이 얻으려고 한 것만 뺏기는 현명한 대처라는 것을 후버는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괜한 짐작은 쓸데없는 1+1 행사만을 만들뿐.’
“항상 어제보다 아름다운 누님의 모습에 달라진 것을 못 느끼겠습니다.”
“그래? 우리 후버 영특하기도 하지. 근데 나는 아름다워지지만 복장은 어떠니?”
“기사로서의 기품이 느껴지십니다.”
방 안까지 풀 플레이트 아머를 입고 온 세실리아의 모습에 흔히 말하는 기사의 기품 따위가 아닌 탈영기사가 어느 화전민 마을 촌장의 집을 약탈하기 직전의 모습.
혹은 영지전이 끝나고 상대 영지의 영주성을 군화발로 짓밟는 패기가 느껴졌지만 세실리아 앞에서 만큼은 생각과 반대로 이야기하는 것이 언제나 옳다는 것을 확실히 알고 있는 후버였다.
“흠… 후버야, 눈을 씻고 내 복장을 잘 보거라.”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누님.”
슬쩍 뭉개며 모르쇠로 일관하는 후버의 모습이지만 세실리아는 그런 동생의 귀여운 행동에 직접 알려줘야 할 필요를 느꼈다.
큐리오와 다르게 이 녀석은 하루 종일 물어봐도 원하는 대답을 하지 않을 놈이란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난 잘 모르겠지만 후버가 말했듯이 나는 날마다 아름다워지는데 내 풀 플레이트 아머는 날마다 낡고 녹스는 것 같구나. 이러한 사태에 대해서 후버는 어떻게 생각하니? 큐리오를 도와준 그 영특한 머리를 누나를 위해서도 쓰지 않으련?”
“글쎄요… 저는 잘… 기사가 아니다 보니.”
“호호호. 기사가 아니더라도 소영주로서 기사들의 장비에 관심을 가지는 것은 반드시 필요한 것이란다. 특히 이 관절 부분을 자세히 보려무나. 점점 닳아서 사람이라면 관절염에 걸리고 말았을 거야. 그리고 지금 딱 네 머리에 스쳐지나가는 생각이 있을 텐데?”
특히 세실리아의 끝말이 싸늘하게 후버의 가슴에 박혔다.
자신은 지금 무언가를 생각해내야 한다. 세실리아의 목적을 들어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 상황을 빠져나가기 위해서라도.
“…….”
“이 누나도 아직은 젊지만 슬슬 도구에 의지할 나이가 되어가는 것 같지 않니? 젊은 혈기로 안 되는 것도 있단다. 특히 이 무거운 철 덩어리 풀 플레이트 아머를 운용하는 것은 말이야.”
이제야 직감적으로 세실리아와 격월간 잡지인 체인 아머와의 부적절한 관계, 그리고 공포의 3만 골드짜리 블링블링이 떠올랐다.
왜 슬픈 예감은 틀린 적이 없는 것인지… 순간 영지의 상회를 맡고 있는 두 명의 얼굴이 떠올랐다.
‘나프틸, 아민 이 개새끼! 비소, 니켈, 벤젠만큼 백해무익한 새끼! 내 언젠간 끊으리라.’
자조하고 있는 후버에게 구원의 소리가 들려왔다.
영지의 사람이 아니기에 백작보다 세실리아가 어려워하는 인물의 등장.
“흠흠. 후버, 그리고 세실리아 영애, 안녕하십니까?”
“크롤라이드 님 그리고 스승님 안녕히 주무셨습니까?”
“허허. 사실 안녕히 주무시지는 못하였구나. 이제 수도관을 파묻을 시간이 슬슬 다가오니 전에 네가 말한 녹 방지 장치 실험을 준비하느라 실험 준비가 끝났으니 너도 같이 보겠느냐?”
“예. 그렇게 하도록 하겠습니다.”
“세실리아 영애께서도 함께 가시겠습니까?”
“예. 권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크롤라이드 님. 저 역시 구경하고 싶군요.”
후버는 빨리 이 상황을 벗어나길 원했고 세실리아는 아직 바라는 것을 다 이야기하지 못했기에 반색하고 쫓아가는 후버를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
*
*
“이 부분이 철이고 이 부분이 마그네슘, 그리고 이 구리선이 둘을 연결시켜 주는 것입니다. 세실리아 아가씨, 이해하시겠습니까?”
“예. 아카이브 경.”
일단 왜 이해해야 하는지에 대한 설명 없이 크롤라이드의 설명이 이어졌지만 후버가 여기 있는 이상 자신도 이곳에 있어야 했다.
“그럼, 스승님. 수고 부탁드립니다. 저는 영상구를 통해 저장을 해두겠습니다. 세실리아 아가씨는 저쪽 각도에서 찍어 주시지요.”
갑작스레 시작된 아카이브의 짤막한 산화―환원 반응에 대한 강의를 듣고는 얼떨결에 실험에까지 촬영 담당으로 참여하게 되어 마뜩찮은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다시금 화사하게 웃으며 이미지 관리에 들어갔고 크롤라이드는 마그네슘과 구리선을 연결한 파이프와 대조군 파이프에 동시에 러스트 마법을 걸어 강제로 녹슬게 만들었다.
“오오! 스승님. 역시 산화 방지 장치를 연결한 것은 녹이 거의 슬지 않습니다.”
“어허! 아카이브 오디오에 잡음 들어간다. 학회에 제출할 영상인데 우리가 이렇게 호들갑을 떨어서야… 당연하다는 듯 반응을 하여라. 다시 촬영한다.”
그 말과 함께 영상미를 위해서 세실리아의 풀 플레이트 아머 차림이 아닌 살랑거리는 드레스를 아공간에서 꺼내 입히고는 수정구에 잘 잡히게 설정하고 촬영하며 마치 주변은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뭔가 학구적인 대화를 아카이브와 나누며 12번의 NG와 5편의 제출대상작을 촬영하는 것으로 촬영을 마쳤다.
“그런데 세실리아 영애의 풀 플레이트 아머 가 좀 녹슬어 보이는 구나?”
“그러고 보니 좀 그렇게 보이는군요.”
“예 크롤라이드 님. 안 그래도 녹이 슬어 움직이기가 불편하였습니다.”
반색을 하고 말하는 세실리아는 기대가 담긴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후버와 크롤라이드를 바라보았다.
다시금 분위기는 반전되어 후버의 위기.
“근데 아카이브 잘하면 녹슨 것도 복원할 수 있지 않을까?”
“아니, 이런! 스승님도 저랑 같은 생각을 하시다니.”
“과연 크롤라이드 님과 아카이브 경의 마법에 대한 탐구심과 응용력은 감탄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어지는 후버의 맞장구.
“흠흠. 세실리아 영애.”
“예?”
“레이디에게 미안한 말이지만 영애의 풀 플레이트 아머를 잠시 빌려줄 수 있겠소? 내 새것처럼 만들어서 돌려주겠소.”
“아… 예, 크롤라이드 님께서 원하신다면 부탁드리겠습니다.”
표정은 전혀 부탁하지 않는 표정이었지만 세실리아는 자신의 풀 플레이트 아머를 두 마법사에게 넘겼고 은근히 노려보았지만 녹슨 부위를 확인하는 둘은 그런 세실리아의 시선을 눈치채지 못하고 오직 세실리아의 눈치를 살피던 후버만이 그런 세실리아의 노려보는 눈을 눈치챌 수 있었다.
“그럼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두 분 말씀 나누시지요.”
“그럼 멀리 나가지 않겠네. 조심해서 가게나.”
“예. 그럼 소녀도 이만 물러나겠습니다.”
‘설마 거기서 크롤라이드 님이 껴들 줄이야.’
처음 세실리아가 후버를 찾은 목적을 이루지 못한 채 세실리아와 후버의 블링블링 풀 플레이트 아머 협상 1차는 이렇게 두 노 마법사의 개입으로 세실리아는 포문도 열지 못한 채 싱겁게 끝나고 말았고, 큐리오는 그날 온몸에 포션을 바르는 호사를 누리게 되었다.
항상 후버에게 도움이 되는 크롤라이드지만 누군가에게는 나프틸과 아민처럼 백해무익한 존재가 되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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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쯤 어디일 텐데.’
어두운 골목길을 이리저리 두리번거리며 무언가를 찾는 듯이 종이쪼가리 하나를 들고 20분 동안 해매이던 사내의 눈에 쪽지에 그려 있던 표식과 일치하는 표식이 그려진 집이 눈앞에 들어왔다.
“드디어 찾았다.”
반가운 마음에 한걸음에 문을 열고 적힌 대로 준비된 탁자에 앉아 누군가가 들어오기를 기다렸다.
“자네가 슬레인 자작성에서 8년째 일반 병사로 근무하고 있는 한스인가?”
“예, 그렇습니다. 그런데 어떤 분이신지?”
“그건 알 것 없다. 우선 슬레인 자작의 사람이 아니라는 것만 밝혀두지. 우리 사이가 아직 신뢰 있는 사이는 아니니깐.”
“예. 그런데 저를 이쪽으로 오라 하신 것과 기사가 될 수 있다고 하신 것은 무슨 말씀이십니까?”
“말 그대로 나는 너를 기사로 만들어 줄 수도 있지. 너도 슬레인 자작을 지키기 위해서 병사를 하는 것은 아닐 텐데.”
그 말에 움찔하는 한스. 어둠속에 들리는 남자의 말대로 한스는 슬레인 자작을 위해서 영지 병사를 하는 것은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자신의 어머니를 겁탈한 슬레인 자작을 죽이고 싶지만 그럴 기회가 없다는 것이 아쉬울 뿐이었다.
세금을 내지 못해 병사로 끌려와 자신을 죽인 원수를 위해 일 년에 한두 번 사열 행사를 할 때에는 당장 눈앞에 있는 슬레인 자작을 죽이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그를 호위하고 있는 기사들을 제치고 슬레인 자작의 심장에 칼을 찌를 수 있는 실력은 가지고 있지 않았다.
“저에 대해 잘 아시는 것 같습니다.”
“너에 대해서는 누구보다 잘 알지. 어떤가? 내 제안을 들어 보는 것이?”
“저는 무식한 평민입니다. 그러니 간단하게 말씀해 주십쇼. 그쪽은 슬레인 자작과 어떤 사이이신지? 그리고 저를 어떻게 알게 된 것인지?”
“일단 어떤 사이인지에 대해서는 원수라고 할 수 있지. 같은 하늘을 두고 살 수 없는… 너를 알게 된 것은 슬레인 자작에게 가족을 잃은 자 중에서 네가 가장 슬레인 자작과 가깝기 때문이지. 사실 슬레인 자작과 원수진 놈들은 많아. 하지만 너는 글을 알더군.”
“그럼 제가 그쪽분과 손을 잡으면 슬레인 자작을 죽이는 것이 가능하단 말씀이십니까?”
“눈앞의 서랍 안에 계약서를 읽어보게. 내가 목표로 하는 것은 슬레인 자작의 죽음이 아닌 슬레인 자작가의 몰락이네.”
“그럼 슬레인 자작을 살려주신다는 말씀이십니까?”
“몰락을 당해 몰살당할 수도 있지. 뭐로 가든 목적지만 가면 되는 것 아닌가?”
그 말에 한스는 눈앞의 계약서를 읽었다.
단 한 번, 남자가 지시하는 중요한 순간에 자신을 돕는다면 슬레인 자작가를 몰락시킨다는 내용의 계약서. 그리고 계약금은 100골드, 이후 100골드를 매달 3골드씩 나누어서 지불하고 실패해도 지시를 따르다 죽는다면 500골드를 가족들에게, 성공시 1,000골드를 지불한다는 계약서. 계약서상에는 아무런 문제도 없었다.
“그런데 저는 어떻게 기사가 되는 것입니까?”
“자네도 알다시피 얼마 전부터 어쌔신 길드와 슬레인 자작과의 충돌이 계속되면서 기사들이 죽어나가고 있지.”
“그것이 어쌔신 길드였습니까?”
어둠 속에서 들리는 목소리가 말하는 대로 최근 기사들이 죽어나가는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어쌔신 길드와의 충돌이라는 것은 일개 병사인 그가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럼 오늘 기사들이 출정을 나간 이유도?”
“어쌔신 길드의 본단으로 출정을 나가는 것이지.”
“그것이 제가 기사가 되는 것과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어쌔신 길드와의 충돌로 이미 절반 이상의 기사 병력을 잃은 자작으로서는 새로운 기사들을 뽑을 수밖에 없지. 그리고 새로운 기사의 기준은 풀 플레이트 아머의 사이즈가 맞는 병사, 그래서 내가 너를 위해 너의 사이즈에 딱 맞는 풀 플레이트 아머를 준비해 뒀으니 며칠 이내에 자작성으로 회수되게 될 거야.”
어둠 속 목소리의 정체는 슬렌, 마릴린과 한 방에서 잘 때 어두운 초승달 빛마저 반사해서 밝게 보이는 슬렌의 눈을 보고 허공에 눈이 떠 있다고 경기를 일으킨 적이 있기에 자신의 정체가 드러날 수 있는 눈을 가리기 위해 엎드려서 눈을 가리고 있는 이상한 자세였지만 중후한 그 목소리는 슬렌이 맞았다.
‘후버 주인님은 똑똑한 건지 음흉한 건지?’
슬렌이 한스에게 기사의 자리를 약속할 수 있는 것은 어쌔신과 자작의 기사가 충돌하던 날 풀 플레이트 아머를 묻는 곳을 확인한 후버는 포로로 잡힌 어쌔신과 그 행렬을 수정구의 폭발을 이용하여 폭사시켜 이번 일을 꾸민 자신의 정체를 숨기기 위해 도망자 어쌔신을 확실하게 처리하고 나머지 기사들에게 부상을 입혀 시간을 벌었다.
‘저놈에게는 다시없을 기회겠지만.’
영지의 사람을 시켜 한스에 대한 정보를 정보 길드를 통해 확인해 한스의 치수에 맞는 풀 플레이트 아머를 제작, 한 기의 풀 플레이트 아머를 회수하고는 제작한 풀 플레이트 아머를 묻어두는 것으로 준비를 한 후 한스를 회유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럼 그것을 제가 입으면 되는 겁니까?”
“그렇지. 사인을 하고 네가 그 풀 플레이트 아머를 입고 수습기사가 된 순간부터 계약은 유효하다. 그리고 1년 후 한 가지 일만 해주면 남은 계약금의 잔금을 지급하고 정착할 돈과 장소를 지원해주지. 새로운 신분도 발급해주고 그 풀 플레이트 아머 역시 너의 소유다. 하겠는가?”
한스는 고민에 빠져 들어갔다.
충분히 구미가 당기는 조건, 하지만 그가 정말 자작의 원수인지는 확신할 수 없다.
“저를 조사하신 것을 보면 언제든지 그쪽 분께서 저와의 약속을 어길 수 있는 것 아닙니까?”
“두 번째 서랍을 열어봐라.”
머뭇거리며 두 번째 서랍을 여는 한스, 혹시라도 이들이 질이 안 좋은 무리라면 부정적인 말을 내뱉는 자신을 처리하고 다른 사람을 회유할 수도 있기에 목소리가 들려오는 어둠을 응시하며 천천히 서랍을 열었다.
“이것은? 설마 진짜 마나석인 것입니까?”
한스는 처음으로 보는 영롱한 보석을 보고 그것이 마나석이라고 짐작했고 그 짐작은 맞았다.
“그래, 그 마나석과 보석들의 가치를 합치면 1,000골드 이상의 가치가 있지. 계약서를 작성하고 그 마나석을 어딘가에 숨기고 그 장소를 가족에게만 말한다면 설사 네가 실패하더라도 최소한 가족들은 잘 먹고 잘 살 수 있어. 단, 나의 지시를 따르지 않는다면 너뿐만 아니라 너의 가족도 모두 몰살당하겠지.”
다시금 고민하는 한스, 말로만 이야기하는 1,000골드, 500골드 보다는 눈앞에 있는 보석이 탐나는 것을 부정할 수 없었다.
“그럼 하겠습니다.”
“그럼 사인을 하고 이 방에서 나가면 된다. 자네가 수습기사가 되지 못하면 이 계획은 취소되고 내가 맡긴 물건은 돌려받을 것이고 지시에 따르지 않으면 물건과 함께 자네의 가족은 몰살당할 것이다. 동의하면 최종적으로 사인을 하면 계약은 성립된다.”
슬렌의 말에 남자는 계약서 한편에 사인을 하고는 밖으로 나갔다.
그로서는 손해 볼 일이 없는 조건인 것이다. 그가 좀 더 생각이 깊다면 마나석을 맡긴 이가 거사를 치루고 자신의 가족을 몰살하고 다시 마나석과 보석을 회수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할 수도 있었지만 다행히 후버는 그럴 생각이 없었다.
자신의 목숨을 노린 어쌔신의 폭사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지만 후버가 살인귀는 아니었다.
“이제 영지로 가서 주인님한테 보고만 하면, 흐흐흐!”
슬렌의 등에는 후버가 준 가방 말고도 2개의 아공간 가방이 더 매달려 있었다.
후버의 가방보다 압축률이 더 높은 두 가방은 슬레인 자작이 실리카겔에게 전해주라며 슬렌에게 매어준 가방이었다.
슬레인 자작으로서는 영지의 기사 전력이 약해진 만큼 실리카겔의 환심을 사는 것이 중요했기에 전해준 것이지만 존재하지도 않는 대마법사에게 그는 너무 많은 것을 주고 말았다.
훗날 자신의 목줄을 스스로 죄어올 정도로…….
<2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