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상단 흔들기 (22/37)

상단 흔들기

“모두 이곳을 주목하도록 하시오.”

“안녕하십니까? 크럭스 상단주님 저희는 어음을 청구하기 위해 이곳에 왔습니다.”

크럭스도 아는 인물 중 하나인 레비트 상단의 상단주가 손에 들린 종이를 흔들면서 어음의 청구를 요청하자 다른 상단주 역시 자신이 들고 있는 어음을 앞으로 내밀며 와일리 상단의 장내가 일시에 소란스러워졌다.

“조용! 조용! 잠시만 저의 말을 들어주시길 바랍니다.”

여러 차례 크럭스가 장내에 조용해줄 것을 요청하자 약간의 웅성거림은 있었지만 어느 정도 장내의 혼란이 수습 되었다. 분위기가 진정된 것을 확인한 크럭스는 레비트상단의 상단주에게 친근하게 말을 걸었다.

“레비트 상단의 상단주님이 맞으시지요?”

“그렇소.”

“가지고 계신 어음의 양이 어느 정도 되십니까?”

“대략 금괴로 300kg 정도를 준비하였소. 어음에 적힌 대로 지불을 부탁하오.”

그 말에 크럭스가 고개를 크게 끄덕이는 것으로 동의의 뜻을 나타내자 레비트 상단의 상단주가 한 걸음 더 크럭스에게 다가가 어음뭉치를 내밀었다.

“당연히 지급을 할 것입니다. 상단주님 잠시 연단위로 올라와 주시겠습니까? 이곳의 위치가 높아서 건네주시는 어음뭉치를 받기가 힘들군요.”

크럭스의 말에 레비트 상단의 상단주는 어음뭉치를 들고 연단위로 올라갔다.

“여기 레비트 상단의 상단주님이 계십니다. 혹시 레비트상단의 어음을 가지고 계신 분들은 마침 이곳에 있으신 상단주님에게 청구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그 말에 레비트 상단의 상단주가 무슨 말이냐는 듯이 크럭스를 바라보자 크럭스는 가볍게 웃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하였다.

여기저기서 자신이 가지고 있는 어음뭉치의 발행인을 확인하는 듯이 종이 넘기는 소리가 장내에 소음을 만들어 내기 시작했고 연단위에 올라온 레비트 상단 상단주의 표정이 사색이 되었다.

만약 저 어음이 일시에 청구된다면 자신의 상단은 한 번에 망해 버릴 수도 있었다.

그 역시도 금괴를 가지고 있지 않기에 이곳에 온 것이니 만큼 와일리 상단에 맡긴 준비금 외에 가진 금괴는 매우 소량 이었다.

“여기 있소. 대략 100kg어치의 금괴를 청구할 수 있는 금액의 어음을 가지고 있으니 레비트 상단에 넘겨줄 금괴를 나에게 주시오.”

“아… 비토르 상단의 상단주시군요 상단주님께서도 연단위로 올라와 주시기 바랍니다.”

레비트 상단의 상단주가 단숨에 올라간 반면 비토르 상단의 상단주는 주저하면서 연단위로 올라가지 못했다. 연단위에 올라간 순간 자신도 레비트 상단의 상단주와 같은 처지가 되는 것을 모르지 않는 까닭이다.

“어서 올라오시지요.”

만면에 미소를 띤 크럭스의 말에 비토르 상단주는 숫제 뒷걸음질까지 쳐댔다. 장내에 모인 상단주들은 그런 둘의 모습을 보며 곤혹스러움을 느꼈다. 자신들의 처지도 저들과 다르지 않은 탓이다. 모두에게 불안한 분위기가 전염되자 크럭스가 다시 입을 열었다.

“모두들 이런 식으로 어음을 일시에 요구하시면 곤란 합니다. 서로간의 거래를 원활히 하기 위한 약속으로 어음을 발행하고 수령해놓고 이런 식으로 막무가내로 상환을 요구하시면 누가 장사를 할 수 있겠습니까?”

만기가 도래한 어음을 갚는 것이 당연하기에 억지에 가까운 소리였지만 아무도 거기에 대해서 대놓고 반론을 제기 하지는 못했다. 좌중의 분위기를 한번 훑은 크럭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창고를 개방하도록 해라!”

크럭스의 지시에 연단 뒤에 창고가 열리자 창고의 안에는 그 양을 짐작하기 힘들 정도의 황금이 쌓여 있었다.

“아니… 저런.”

상인들 사이에서 그 엄청난 양의 금괴에 대한 탄성이 이어질 무렵.

“모두에게 돌려드릴 금은 충분합니다. 하지만 모두가 가진 어음을 일시에 처리하는 것은 저희로서도 곤란합니다.”

“그게 무슨 말장난이오, 크럭스 상단주? 우리가 상단에게 어음을 사용할 때마다 수수료를 지불하는 것은 어음을 발행한 상단에 갈 필요 없이 와일리 상단이 지불을 보증하기 때문 아니오?”

“일반적인 상황이라면 1골드도 남김없이 모두 지불 하였을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은 일반적인 상황이 아니지 않습니까? 일례로 모두가 필요한 금의 양은 대략 금괴로 300kg이 아니십니까? 그런데 여러분들이 가지고 온 어음의 양을 보면 적게 잡아도 300kg 많게는 600kg 이상의 금을 요청하는 분도 계신 것으로 압니다. 여러분에게 묻겠습니다. 여분의 금은 무슨 목적으로 청구하시는 겁니까?”

“그게 무슨 상관이오?”

그 말에 다시금 상단주들에게서 불만 섞인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상인은 돈을 버는 것도 중요하지만 어떻게 버는 가도 중요하다는 것을 모두 아실 것 입니다. 솔직한 속내를 털어 놓아 봅시다. 여러분들처럼 대량의 금괴를 확보할 수 있는 상인들의 수는 제한적일 것이고 시장에 금괴는 모두 씨가 말라가고 있습니다.

이 기회를 이용하여 평소보다 싼 가격에 금괴를 이용해서 시장의 상품을 헐값에 사들이려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건…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지 않소?”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닐 것입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이 그런 행동을 할 것이란 것을 이재에 밝으신 여러분들이라면 쉽게 짐작할 수 있지 않습니까? 솔직히 말씀 드리지요, 지난 주말 동안 저 역시도 그런 생각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잠시 입을 다문 크럭스가 주변을 살펴보았다. 이미 많은 상단주들은 크럭스의 말에 동조하는 분위기와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만이 섞인 분위기를 모두 동시에 보여주고 있었다.

“하지만, 우리 와일리 상단은 그런 부당거래를 통한 이득을 포기하기로 했습니다. 모두가 이기적으로 행동한다면 시장이 붕괴될 뿐입니다. 제 뒤에 있는 금괴를 보시지요. 모두가 상인이신 만큼 충분히 알고 계실 겁니다. 저 정도의 금괴가 지금의 상황에서 얼마나 강력한 힘을 발휘할지를 말입니다.”

“크럭스 상단주께서 본인의 이익들 포기하고 대의를 생각한다고 하시는 것은 매우 존경스러운 일이오. 하지만.”

“뜻에 공감해주신다니 감사합니다. 하지만 저 혼자만 시장에서 부당거래를 하지 아니 한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습니다. 모두의 협조가 필요합니다. 마탑에 제공할 계약금인 금 300kg어치의 어음은 당연히 교환해 드리겠습니다. 하지만 그 이상의 금액이라면 최초에 어음을 발행한 상단과의 어음을 서로 교환하는 조치가 있은 후에 내어 드리겠습니다. 본인의 빚은 갚지 않고 타인에게는 빚을 갚으라고 요구하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 요구가 아닙니까?”

크럭스의 시의적절한 끼어들기에 발언을 하던 상단주의 얼굴은 일그러졌지만 다른 상단주의 얼굴에는 납득이 간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 사람들의 수가 증가하기 시작했다.

“그럼, 먼저 오신 분부터 줄을 서주시기 바랍니다. 레비트 상단주님 실례가 많았습니다. 먼저 교환을 받으시지요.”

변화하는 분위기를 놓치지 않은 크럭스는 어음의 교환을 300kg으로 한다는 것을 기정사실화해버리고는 한동안 어음이 교환되는 것을 보다가 자리를 떠났다.

후버의 집무실 공중에서 수정구를 통해 촬영된 영상을 보던 후버와 사만다는 순수하게 감탄하였다. 노련하게 분위기를 자신에게 끌어오는 모습이 비록 적일지 몰라도 배울 점이 많다고 생각한 탓이다. 과연 범죄자는 아무나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생각보다 일처리가 깔끔한데.”

“예, 혼란은커녕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결론을 내 버린 걸 보니 보통 인물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래봤자지. 진짜 자금의 압박은 지금부터니까 일단 저 정도 인원이 모두 금괴를 신청하면 절반 정도는 털어먹는 셈이군.”

“그렇습니다.”

“사만다. 우리가 뿌린 어음의 최초 만기가 언제부터이지?”

“2주 후입니다.”

“그럼 레리하이트의 전 상단주를 2일 후에 보내서 기존 창고에 있던 나머지 진짜 인장이 찍힌 금과를 모두 수거해 오도록.”

후버와 기사들이 와일리 상단의 마법사 2명과 기사들을 처리한 그날 바이스가 알려준 정보와 이후 사만다가 와일리 상단에 제공한 금괴의 양을 합산한 것이 현재 후버가 생각하는 일차적인 진짜 금괴의 양이었다.

일단은 그것을 모두 회수하고 이들이 다른 장소에 비축해둔 금괴의 회수 마지막으로 가짜 금괴 역시 회수하는 것이 후버의 목표였다.

“예, 말씀하신대로 하도록 하겠습니다.”

사만다가 집무실 밖으로 나가자 후버는 통신구를 이용해서 아세타이트에게 통신을 넣었다. 진짜 인장이 박힌 금괴를 차지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와일리 상단을 좀 더 깊은 수렁 안에 밀어 넣어 버리는 것이었다.

수렁에 발을 들여 넣기 위한 첫 번째 조치가 아티펙트의 독점적 거래를 보장해주는 것이라면 두 번째 조치는 마탑으로 진짜 금을 보내게 하는 것이었다. 후버의 요청을 받은 아세타이트가 다시 와일리 상단을 방문하기 위해 텔레포트 마법을 사용하였다.

“상단의 주인을 뵙고자 왔소.”

“누구신지?”

정신없이 어음을 교환하러 온 상단주들에게 모두 금괴를 지급하고 한숨을 돌리던 총관의 뒤에서 상단주를 뵙고자 하는 요청이 들려오자 상단주는 상대방의 신분을 확인하기 위해 몸을 돌렸다.

총관의 물음에 아세타이트가 대답 대신 스태프로 바닥을 두 번 찍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 하자 총관이 황급히 고개를 숙이고 아세타이트를 크럭스의 집무실로 안내하였다.

“아세타이트 님, 다시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나 역시 그대를 다시 만나게 되어 반갑군. 그래, 계약금은 모두 준비가 끝났는가?”

“여부가 있겠습니까? 지금 운송을 위한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그거 다행이군, 내가 이렇게 온 것은 알다시피 이미 이 경쟁 입찰은 결과가 나와 있는 상태가 아닌가? 일단 이것을 좀 받도록 하게나.”

아세타이트가 로브의 안쪽에서 마법가방 5개를 꺼내서 크럭스에게 건네주었다.

“이것이 무엇입니까?”

“마탑에서는 이미 자네의 상단을 내정하여 뽑았지만 경쟁 입찰이라는 형식을 가지는 만큼 자네가 불안한 마음을 가질 수 있다는 주장이 원로들과의 회의에서 나왔네.”

“아! 그렇게까지 생각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고 다른 몇몇 원로들은 자네가 불안해하는 것은 차지하더라도 경쟁 입찰이 끝난 이후부터는 왕국에서 마탑의 모든 거래에 대한 감시가 심각해질 것이라는 현실적인 우려도 있어서 거래를 좀 더 앞당기는 것이 좋을 것이라는 판단이 있었네.”

크럭스 역시 고민하고 있던 문제인지라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아세타이트의 염려에 대해 동의의 뜻을 보냈다. 당장은 전국에서 쏟아지는 금괴를 보관하고 처리하느라 바쁜 왕국이지만 접수와 경쟁 입찰 결과가 발표되는 한 달여의 기간이 지나면 모든 정비를 마치고 경쟁 입찰에서 선택된 자신과 마탑을 주시할 것은 너무나 뻔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가 거래를 좀 더 서두르는 것이 어떨까 하는 의견이 나왔다네. 왕국의 감시가 삼엄해지기 전에 대략적인 거래를 끝내는 것이지. 자네는 당장에 아티펙트를 확보할 수 있고 마탑은 금괴를 먼저 확보할 수 있으니 일석이조가 아닌가?”

아세타이트의 말에 크럭스의 인상이 살짝 찌푸려졌다. 오늘만 해도 상단이 찾아와 10톤에 가까운 금괴를 인출해 가고 창고 안에 남아 있는 진짜 인장이 찍힌 금괴는 5톤 남짓한 양, 가짜 인장이 찍힌 것까지 생각한다면 여유가 있는 상황이었지만 마탑과의 거래에서 가짜 인장이 찍힌 금괴를 사용할 수는 없었다.

“그렇습니다만 당장에 제가 가진 금괴의 양이 많지가 않습니다.”

“15톤 정도는 된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것이… 저희가 어음의 결제 업무를 담당하고 있기에 오늘 하루 동안 찾아간 금괴의 양이 만만치가 않습니다.”

“나는 상인의 일은 잘 모르지만 뭔가 문제가 있는 모양이 구려, 그래. 최대한 준비할 수 있는 양이 어느 정도가 되겠소? 본 거래에서는 어음을 통할 수가 있지만 지금의 거래에서는 국가에서 추적이 가능한 어음을 사용하는 것은 곤란하오.”

“오늘 가지고 오신 양이 어느 정도의 양이신지요?”

“대략 금괴로 환산하면 3톤 정도의 가치가 있는 물품이오. 시장에서는 5톤 정도가 넘는다고 알고 있소.”

“상당한 양이군요.”

“경쟁 입찰이 시작되기 전에 이러한 거래를 3~4번 정도를 하고 한동안은 정상적인 거래만을 하고자 하는 것이 마탑의 입장이오.”

“솔직히 그 정도의 거래를 하는 것은 저희 상단으로서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렇소? 그럼 이만 실례하도록 하겠소. 마탑으로서는 거래 능력이 충분한 상단을 찾고 있는 만큼 이 정도의 거래도 하지 못한다면 다른 곳을 찾을 수밖에 없겠구려.”

아세타이트는 크럭스가 탁자 위에 올려둔 마법가방을 다시 품속으로 넣었다. 아무런 미련도 보이지 않는 모습에 한 발을 빼려고 하던 크럭스는 대경하여 아세타이트를 불러 세웠다.

“잠시만! 아세타이트 님, 잠시만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저희 상단의 지불 능력이 부족한 것은 아닙니다. 단지 이 정도의 금액을 집행하기 위해서는 투자자의 동의가 필요하기에 저 혼자서 거래하는 것이 불가능할 뿐입니다. 잠시 기다려 주시면 답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투자자? 상단주께서 상단을 소유하고 계신대 다른 사람의 허락이 필요한 것이오?”

“그것이… 일상적인 거래라면 투자자와 이야기할 필요는 없습니다만 거래 금액이 크다면 저 역시 투자해주신 분과의 상의가 필요합니다.”

“그 투자자의 입은 무거운 사람이오?”

“예, 비밀의 유지에 대해서는 거래가 성사되든지 아니든지 비밀을 지킬 것을 약속드릴 수 있습니다.”

“얼마의 시간이 필요하오?”

“대략적으로 한 시간 정도의 시간이 필요합니다.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아세타이트는 품속에 있던 수정구를 꺼내 시간을 확인하고는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승낙의 말을 대신했고 크럭스는 아세타이트에게 고개를 한 번 숙이고는 집무실을 빠져 나가서 밀실을 향해 걸어갔고 걷는 도중 여러 가지 생각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가 정말 상인이라면 이 일은 위험을 감수할 만한 가치가 있지만 그는 순수한 상인은 아니었다.

‘거래 자체는 대박이다. 수개 월 만에 순이익만 8톤 금괴의 가치를 가진 거래… 상인의 입장에서는 하지 않을 이유가 없는 거래이지만 거래 상대가 마탑인 것이 문제인데.’

밀실에 들어가기 전 생각을 정리한 크럭스는 품속에 수정구를 조심히 꺼내들어 통신을 연결했다.

“크럭스입니다.”

―무슨 일인가?

음성이 변조된 듯 목소리의 높낮이가 일정치 않은 목소리가 수정구로부터 들려왔다.

“전에 말씀드린 마탑과의 거래에 대한 최종 허가를 받고 싶습니다.”

―그것이라면 아직 경쟁 입찰의 결과도 나오지 않았는데 마탑에서 서두르는 것인가?

“그렇습니다. 아세타이트라는 마법사가 앞으로의 거래에 대해서 서두르고 싶다는 의지를 보였습니다.”

―그렇군. 상세한 사항에 대해 말해보라.

크럭스는 현재의 상황에 대해서 가급적이면 상세히 설명을 하기 시작했다. 마지막으로 마탑이 제시한 거래 목록에 대해서 설명을 하자 수정구 속의 목소리는 크럭스의 말을 중지시켰다.

―대부분이 전쟁에 필요한 물품이군.

“그렇습니다.”

―왜 그런 물품을 판매하는지는 이야기해주던가?

“규모가 큰 만큼 빠르게 현금화가 가능한 것들 위주로 준비하였다고 이야기했습니다.”

―거래 규모가 확실히 크기는 하군. 대략적으로 예상되는 규모가 어느 정도인가?

“기본적으로 마탑과의 밀거래를 위해서 필요한 금괴가 15톤 정도입니다. 정식 거래를 포함한다면 20~30톤 정도의 금괴가 필요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마탑과의 거래에서는 모두 정식 인장이 찍힌 금괴만을 사용해야 하는데 크럭스 네가 고민하는 부분도 이 부분이겠지?

“그렇습니다. 가짜 인장이 찍힌 금괴라면 왕세자님에게 보고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예비 창고에 있는 정식 인장이 찍힌 금괴를 포함한다면 대략적으로 가용 가능한 금괴의 양은 얼마인가?

“대략적으로 30톤 정도입니다. 하지만 이 정도 양이라면 제가 2년간 공들여서 시중에 풀은 가짜 인장이 사용된 금괴의 양과 비슷한 양입니다. 금화로는 대략적으로 1천만 골드 정도의 가치를 가지고 있습니다.”

―너의 노고는 알고 있다. 충실하게 나의 명을 수행하여 인장이 위조된 금괴를 유포하기 위해 노력한 너에게는 실망스러울지 몰라도 지금 왕국에는 전쟁 물자가 필요하다. 그것도 많은 양의 전쟁 물자가. 가짜 인장이 찍힌 금괴는 얼마나 가지고 있느냐?

“최대한 동원한다면 70톤 정도의 금괴를 가지고 있습니다.”

―어째서 그곳에 그렇게 많은 양의 금괴가 있는 거지?

“저희 상단을 중심으로 다른 왕국으로 분배하기 때문입니다. 실질적으로 저희 상단이 이곳에서 처리할 금괴는 20톤 정도입니다.

―그렇군, 앞으로 상단의 존속 기간은 2년 미만으로 한정한다. 왕국에 너를 위한 자리를 마련할 것이니 최대한의 능력을 발휘해서 전쟁 물자를 사 모으도록 해라. 더 이상 가짜 인장이 찍힌 금괴를 제공하지 않겠다. 가짜 인장이 찍힌 금괴 50톤을 반환하면 금괴 5톤 정도의 가치를 가진 보석을 제공할 테니 가짜 인장이 찍힌 금괴를 포함하여 모두 소모하도록 금괴의 반납처는 스바라 왕국으로 정한다.

“그럼 아티펙트 역시 스바라 왕국과의 접전지로 돌려보내면 되는 것입니까?”

―역시 눈치가 빠르군, 조만간 스바라 왕국의 패전이 확정될 것이고 아티펙트가 전투에 매우 기여하게 되겠지. 나머지 상황에 대해서는 크럭스 너의 판단을 믿도록 하겠다.

“신뢰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왕국에 영광이 돌아가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영상통신을 위한 수정구가 아니기에 모습이 보이지는 않는다는 것을 생각했을 때 타인이 보기에는 민망한 장면이었지만 어두운 밀실에서 통신구에서 뿜어져 나오던 빛이 사라질 때까지 크럭스는 허리를 펴지 않았다.

“그래? 투자자는 뭐라고 하시던가?”

“예, 마탑의 아티펙트를 인수할 수 있다면 상단이나 투자자 본인에게도 영광이라고 하셨습니다.”

“허허, 투자자께서 매우 화통하신 분이시군. 언제 한번 마탑에 시간을 내주셔서 방문해 주신다면 소홀이 접대하지는 않겠다고 전해드리게나.”

“배려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럼 저는 금괴를 준비하도록 하겠습니다.”

아세타이트는 품속에 있던 마법가방 5개를 꺼내놓고 추가로 5개의 마법가방을 더 꺼내서 탁상 위에 올려놓았다.

“내가 나이가 많아서 무거운 것을 들기는 힘드니 이 가방 안에 담아주었으면 좋겠군. 보관 용량은 적지만 무게 감소 능력이 뛰어나서 나 같은 늙은 마법사가 쓰기에는 제격이거든.”

“예, 그럼 바로 준비하도록 하겠습니다.”

크럭스는 아무런 의심 없이 아세타이트가 건네주는 마법가방을 들고 나갔지만 이 가방의 용도는 현재 창고 안에 쌓여 있는 금괴의 양과 인장의 유무를 판단하는 기능이 있는 가방이었다. 일반적인 경우라면 2명의 마법사가 창고를 교대로 지키는 만큼 아티펙트를 통해 발현되는 마법을 쉽게 발견할 수 있었겠지만 2명의 마법사가 모두 후버에 의해서 살해당한 지금의 시점에서는 그러한 마법적인 장치를 파악할 수 있는 인물이 상단에 존재하지 않았다.

그나마 인장의 유무를 판별하는 것은 아티펙트를 이용하여 판단이 가능하기에 크럭스가 둘의 구분을 할 수는 있었지만 그 이상 마법적인 처리나 발현을 감지해 내는 것은 불가능하였다.

크럭스가 금괴를 담는 시간 동안 창고 안의 상태에 대해서 아세타이트의 저장용 수정구에 차곡차곡 정리가 되었다.

기본적인 금괴의 양은 물론이고 여러 지역으로 이어진 비밀통로의 존재 역시 정밀하지는 않지만 대략적으로 함께 기록되어 고스란히 저장되고 있었다. 만약 크럭스가 알았다면 거래는 당장에 취소되었을 것이지만 크럭스에게는 불행하게도 그런 상황을 깨닫지 못하였다.

“아세타이트 님, 준비가 끝났습니다.”

“고맙군, 따로 무게는 확인하지 않도록 하겠네.”

“신뢰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럼 나는 이만 마탑으로 돌아가도록 하겠네. 3일 후 이 시간에 자네의 집무실로 바로 텔레포트를 해도 되겠는가?”

“아세타이트 님이라면 언제든지 저의 집무실로 오셔도 괜찮습니다. 불편하시다면 집무실을 비워두도록 하겠습니다.”

“아닐세. 그렇게 폐를 끼칠 수는 없지. 그저 이곳에 마나석을 하나 두고 가도록 하겠네. 혹시 모르니 가구의 배치는 바꾸지 않았으면 좋겠군.”

아무리 대마법사라고 해도 텔레포트 순간에 다른 물질이 끼어들게 되면 위험한 것은 마찬가지이기에 사무실 귀퉁이에 있는 공간에 아세타이트가 하나의 마나석을 떨어뜨렸다.

“예, 그런 일은 없을 것입니다.”

“고맙군, 그럼 다음에 다시 보도록 하지.”

아세타이트가 처음 이곳에서 돌아갈 때 그랬듯이 텔레포트 마법을 이용해서 와일리 상단을 빠져 나갔고 이번역시 후버의 책상에 한 장의 편지를 통해 대략적인 상황에 대한 메모를 전해 주었고 메모는 후버를 통해서 사만다에게 전해졌다. 생각보다 건재한 와일리 상단의 재정 상태에 사만다는 레리하이트 상단의 전 상단주인 하셀로프에게 와일리 상단에서 지불을 보장하는 어음을 몇 장 더 끊어 주는 것으로 최신의 정보를 반영하였다.

“무슨… 일이십니까? 하셀로프 님?”

상단주라는 명칭이 빠진 와일리 상단 총관의 물음에 하셀로프는 기분이 나빠지는 것을 느꼈지만 얼굴에는 영업용 미소를 지우지 않았다.

“다른 일은 아니고 어음을 청구하기 위해서 왔소. 총관은 이미 알고 있겠지만 이번에 운영하던 상단을 정리하고 타국으로 이주해서 새로운 상단을 차리려고 한다오.”

“아예 이 나라를 떠나시는 겁니까?”

“그렇소… 마탑에서 이번에 대규모 아티펙트를 판매한다는 소문 때문인지 요즘 이곳의 분위기가 너무 뒤숭숭하고 누가 될지는 몰라도 이번 거래를 잡는 상단이 앞으로 수십 년간은 최고의 상단이 될 것이 아니오? 경쟁이 되지 않을 것이 뻔한데 새로운 상단을 차리는 것보다는 차라리 타국으로 가서 새로운 상단을 차리는 것이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구려.”

“그래도 기반이 없는 곳에서 새로 시작하기가 쉽지 않으실 텐데… 고생이 많으시군요.”

“다 그런 것 아니겠소? 그래서 이 어음을 금괴로 바꾸어 주었으면 좋겠소. 대략 7톤 정도 될 것이오.”

“7톤이라는 말씀이십니까? 잠시만 기다려주시면 상단주님께 말씀 드리겠습니다. 너무나 많은 양인지라 제가 처리하기는 힘이 듭니다.”

“뭐 그 정도야, 나도 알고 있으니 부탁하오.”

총관이 달려가던 발길을 돌려서 다시 하셀로프에게 다가왔다. 생각해 보니 이곳에서 그런 거액의 금괴가 빠져나가는 것을 다른 상단들이 알게 된다면 문제가 생길 수도 있기 때문이다.

“아니, 그럴 게 아니라 상단주님의 집무실에서 이야기 하시는 것이 어떠십니까? 요즘 이곳이 혼잡하여서 기다리기에 불편하실 겁니다.”

“그것도 나쁘지 않겠군. 앞장서서 안내해주게.”

처음 와일리 상단이 300kg의 금괴를 교환하기 시작하면서 와일리 상단의 어음지급창구는 몇몇의 사람들이 모여서는 지나가는 사람들을 주시하고 있었다.

혼자서는 마탑의 입찰에 참여할 수가 없지만 힘을 합친다면 참가가 가능할 정도의 중소상단들이 이곳에 모여서 정보를 교환하고 그 자리에서 서로 간 상단을 합병하는 일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나고 있었다.

“상단주님 하셀로프 님이십니다.”

“하셀로프 님이? 들어오시라고 전하거라.”

“알겠습니다.”

“오랜만이오, 크럭스 상단주님. 이렇게 인사를 드리게 되는군요.”

“다시 뵙게 되어서 감사합니다. 저희 상단에는 무슨 일이십니까?”

“어음을 청구하려고 하는데 총관이 처리하기에는 금액이 너무 커서 이렇게 바쁜 분을 뵙고자 했습니다. 대략 7톤 정도의 금괴 인출을 요청합니다.”

“7톤이라… 잠시 어음을 보여 주실 수 있으십니까?”

어음을 건네받은 크럭스는 하나하나 위조 여부를 신중하게 확인하였다. 하지만 어음에서 위조의 흔적을 찾기는 힘들었고 한 가지 특이한 점은 발행한 상단의 이름이 모두 사만다가 이끌고 있는 상단이라는 것이었다.

“모두 사만다 상단주님께서 발행하신 것이군요.”

“그렇소, 이미 알고 있겠지만 그분께서 우리 상단을 인수하시고 잔금을 치룰 때 건네주신 거라오.”

“그렇군요. 그런데 상단을 굉장히 비싼 가격에 파셨습니다.”

“대신 거래처를 비롯해 모든 곳을 함께 넘겼다오. 가지고 있던 금괴의 양도 어느 정도 있었고 아티펙트 역시 어느 정도 양이 있었기에 사만다 상단주님께서 높은 가격에 구매해 주셨습니다.”

크럭스의 머릿속에 사만다가 처음 상단에서 어음을 발행하겠다고 하며 맡긴 금괴의 출처가 짐작되었다. 이후 아티펙트 역시 레리하이트 상단의 원래 재산일 것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금액이 너무나 큰 것은 의심이 드는 상황이었다.

게다가 이자의 말이 사실이라면 사만다는 돈 한 푼을 안 들이고 와일리 상단의 어음만을 가지고 하셀로프의 상단을 인수한 것이었다.

“혹시 사만다 상주님께서 다른 조건을 거신 것은 없으셨습니까?”

“조건이라기보다는 사실 대대로 내려오던 가보도 이번에 처분했소.”

“이거… 상심이 크시겠습니다. 그런데 굳이 이 금액을 모두 찾으실 필요가 있으십니까?”

“생각해줘서 고맙소. 이러한 요청이 부담스러울 것이란 것은 알지만 나는 국외로 떠날 생각입니다. 혹시 이번에 마탑에서 하는 경쟁 입찰에 와일리 상단도 참여하였습니까?”

“저희도 참가하기는 했지만 큰 기대를 하지는 않고 있습니다. 경쟁률이 너무 높더군요.”

“하하하, 너무 엄살이 심하십니다. 와일리 상단의 규모가 우리 왕국에서 3번째 정도의 규모인 것을 모르는 사람이 없는데 결국 3파전이 되지 않겠습니까?”

“저희 상단을 그렇게 높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런데 국외로 가는 것이 그것과 무슨 상관인 것입니까?”

“만약에 다른 상단이 그 경쟁 입찰에서 승리한다면 상계의 지도가 바뀌지 않겠습니까? 그 과정에서 저희와 같은 중소 상단은… 그저 도산하거나 규모가 줄어들겠지요.”

하셀로프의 걱정은 크럭스가 보기에도 합당하였다. 정상적으로 경쟁 입찰이 행해지고 정상적으로 그 상행을 한다면 차기 상계의 지도에서 큰 변동이 있을 것이란 것이고 마탑의 경쟁 입찰에서의 승자가 모든 것을 독실할 것이란 것쯤은 누구라도 알 수 있는 일이었다. 마음에도 없는 말이지만 크럭스는 혹시나 하는 기대를 가지고 하셀로프를 설득하였다.

“그런 걱정을… 하셀로프 상단주님의 능력에 맞지 않는 기우 같습니다. 저희 상단 역시 요즘 이 마탑의 경쟁 입찰로 인해서 매우 큰 곤란을 격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금액은 모두 한 번에 드리기는 곤란합니다.”

만약 그들이 왕국 내에 머물며 장사를 한다면 가짜 인장이 찍힌 금괴를 건네주면 되지만 이 정도 양의 금괴를 국외로 가지고 나간다면 왕국에 신고를 해야 하고 그 과정에서 만약 금괴가 문제가 있는 것이 밝혀진다면 어떤 문제가 발생할지는 너무나도 뻔했다.

그렇다고 진짜 인장이 박힌 금괴를 건네주게 된다면 가뜩이나 줄어든 금괴의 양이 바닥을 향해 곤두박질치게 될 것이다.

특히 마탑과의 거래를 위해 비축해 두었던 금괴들을 넉넉하게 운송하라고 지시한지 하루 만에 또다시 금괴의 운송을 요청하게 되는 것이 마땅치가 않았다.

후버가 크럭스에게 이런 고민을 하도록 사만다를 통해서 하셀로프가 해외로 갈 것이라는 설정을 지시한 것인 만큼 후버의 의도는 크럭스를 충분히 곤란하게 만들고 있었다.

“나도 이렇게 많은 금괴를 모두 받아가는 게 무리한 부탁이라는 것을 알고 있지만 국외로 떠나는 시점에서 어음만을 가지고 가는 것은 곤란한 일이 아니오?”

“그런데 어느 나라로 가실 것입니까?”

“일단 최근에 스바라 왕국과 스타치 왕국 간의 전쟁이 점차 과열되는 상황에서 스타치 왕국이 승기를 잡고 있다는 정보가 있더군요. 승전국이 될 확률이 높은 스타치 왕국으로 가려고 생각하고 있다오.”

이것까지 후버가 예상하지는 못했지만 스타치 왕국이라는 말에 크럭스는 내심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다른 곳은 모르지만 스타치 왕국으로 간다면 국경을 넘는 순간 군대를 이용해서 하셀로프의 금괴를 다시 빼앗아 오는 게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실제로 금괴가 그곳으로 갈 일은 없겠지만 하셀로프의 답변은 크럭스를 안심하게 해주었다.

“위험한 곳으로 가시는군요. 출발 일은 언제가 되시는 지요?”

“출발은 대략 3주 후로 생각하고 있소. 기존 신세를 진 상단주분들과 인사도 나누어야 하니 그 정도 시간은 필요할 것 같소. 이제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곳이니 말이오.”

“그렇군요… 그럼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저희에게 하루의 시간을 주실 수 있으신지요? 양이 적지 않은 만큼 운송을 위한 준비를 해야 하는데 지금 창고에서 그 정도의 금괴를 빼낸다면 저 밖에 있는 사람들이 괜한 의심을 심어주게 될 것 같아서 말이오.”

잠시 고개를 숙인 하셀로프가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동의를 표했다.

“그럼 내일까지 부탁하오.”

“내일 아침 해가 뜨기 전에 댁으로 보내드리겠습니다.”

“무리한 부탁을 들어주어 고맙소. 크럭스 상단주, 돌아가기 전에 작별 인사라도 하러 다시 들리겠소.”

“기다리겠습니다.”

하셀로프가 등을 돌려 떠나자 크럭스는 다시 한 번 자신에게 필요한 양을 계산하였다. 7톤의 금괴가 반출되는 것은 적지 않은 금액이기에 크럭스로서는 다시금 비밀장소에 축척해 두었던 금괴의 운송을 요청할 수밖에 없었다.

‘너무 촉박해… 이대로 다른 상단 역시 금괴를 요구한다면 마탑과의 거래를 위한 금괴가 부족할 수가 있어.’

회수할 수 있다는 자신감으로 7톤의 금괴를 내주기는 했지만 크럭스의 입맛은 썼다. 하지만 약속은 약속 자신의 주인이 마탑과의 거래를 성사시키기 위해서 전권을 맡겼기에 괜한 분쟁을 일으켜 입찰에 문제가 생기게 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새벽에 직접 금괴의 운송을 마치고 집무실로 돌아온 그의 표정은 한층 더 어두워져 있었다.

“총관 사만다 상단주에게 연락을 해주도록 하게.”

“예, 알겠습니다.”

총관이 시종에게 통신구를 건네받아 사만다 상단주에게 연결을 시도하자 얼마 지나지 않아 통신구가 연결되었다는 신호음이 울렸다.

“사만다 상주님이시오?”

“예, 크럭스 님. 무슨 일이신지요?”

“이번에 저희 상단에 하셀로프 전 상단주가 와서는 대량의 어음을 청구하였소. 혹시 그 사실을 알고 있소?”

“글쎄요… 워낙 많은 어음을 발행하고 받고 하다 보니 정확한 양을 알 수 없네요.”

“그럴 리가 있겠소. 사만다 상주께서 어음 용지를 받자마자 처음으로 끊어준 어음일 텐데, 뭐든 첫 경험은 오래 기억나는 것 아니겠소?”

약간의 빈정거림이 느껴지는 크럭스의 말에 옆에서 가만히 듣고 있는 후버나 사만다는 속으로 웃음을 지었지만 내색을 하지는 않았다.

“그러고 보니 그분의 가보를 입수하느라 적지 않은 금을 사용하기는 했습니다.”

“그렇소, 당신이 발행한 어음을 막 하셀로프 전 상단주가 찾아갔소. 사만다 상주는 그만큼의 어음을 수취하기는 한 거요? 이미 상단주가 맡긴 모든 자산을 초과할 만큼의 어음이 청구되었는데 사만다 상단주는 아무런 소식이 없구려.”

“그 부분은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필요하시다면 당장 지금까지 수령한 어음을 가져다 드릴 수도 있습니다만.”

“그럼 그렇게 해주길 바라오.”

“혹시 매번 이렇게 거래가 이루어질 때마다 까다롭게 요구하는 것이 와일리 상단의 방식인가요?”

“그게 무슨 말이오?”

“저희로서는 당장 태동하는 신생 상단으로서의 신용을 확보하고 일시적인 거래의 불균형을 해소하기 위해 와일리 상단을 이용하는 것입니다.”

“그게 어쨌다는 것이오?”

“그런데 이렇게 약간의 불균형이 있을 때마다 저희에게 상환을 독촉한다면 제가 굳이 높은 수수료를 드리면서 와일리 상단을 이용할 필요가 없을 것으로 보입니다.”

그 말에 크럭스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일단 상단에 비해 4배의 수수료를 지급하는 사만다는 확실히 좋은 봉이었다. 당장의 자금의 곤란함으로 인해 놓치기에는 너무나 구미가 당기는 물고기…….

“독촉한다기보다는…….”

다소 누그러진 크럭스의 목소리에 오히려 사만다가 목소리를 높였다.

“계속 이런 식으로 독촉하신다면 더 이상 와일리 상단하고는 거래를 하지 않을 것입니다. 어음을 발행해 줄 상단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특히 현재 시점에서는 말입니다.”

사만다의 말에 크럭스가 다시 고민에 빠졌다. 사만다의 말대로 지금처럼 금이 부족한 상황에서 약간의 금을 확보하기 위해서라도 어음을 대리하여 발행해 줄 상단은 얼마든지 있었기에 그녀의 말이 틀리게 느껴지지는 않은 탓이다.

“그렇다고 해도 어느 정도 불균형이 발생해야지, 이것은 너무 심하지 않소?”

“아까부터 불균형이라고 하시는데 그럼 하셀로프 상단주에게 일부는 어음을 발행하시고 일부는 지급을 하시면 되시는 것 아닙니까?”

“그렇게 하지를 못하니 그러는 것 아니오?”

“그게 무슨 말이십니까?”

“상단주도 아시다시피 하셀로프 전 상단주가 해외로 출국한다며 모든 어음을 금괴로 청구하였소.”

“그런가요?”

시치미 떼는 사만다의 목소리에 오히려 크럭스가 힘이 빠지는 것을 느꼈다. 사과는 아니더라도 조금이라도 미안한 기색이라도 보일 줄 알았건만 그런 기색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이미 일어난 일 어쩌겠소. 내 요즘 금괴가 충분치 않아 다소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인 것이니, 사만다 상단주께서 이해해 주시길 바라오.”

한층 누그러진 크럭스의 목소리.

“요즘 상황에 그 정도 금괴를 찾아갔으니 민감하게 반응하신 것은 저 역시 이해합니다. 하지만 이런 일이 반복된다면 와일리 상단을 저도 신뢰하기는 힘들 것 같습니다.”

오히려 불만을 강하게 표출하는 사만다의 목소리.

“크럭스 상단주님께서 계속해서 이런 일이 발생하실 것인지 아닌지를 확실히 해주셨으면 합니다. 만약 같은 일이 반복된다면 저희는 더 이상 와일리 상단과의 거래를 하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미안하게 되었소. 내가 실언을 했소. 사만다 상단주가 이해해 준다면 이런 일은 없도록 하겠소.”

그 말에 사만다가 생각에 잠긴 듯 잠시 수정구를 쳐다보며 아무 이야기도 하지 않았다. 무거운 침묵이 약간은 이어진 후.

“크럭스 상단주님의 마음이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아니니 이번에는 제가 이해하고 넘어 가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이만 통신은 종료하겠습니다. 제가 상단의 일을 처리할 것이 많군요.”

“알겠소.”

둘의 통신이 끝나고 후버와 사만다는 크럭스의 반응이 재미있다는 듯이 가벼운 실소를 지었지만 크럭스와 총관은 그러지 못했다.

“이 빌어먹을 년 같으니라고.”

“어쩌겠습니까? 그녀가 사실상 계약을 어긴 것은 없으니…….”

“이년에 대한 정보는 아직 없는 건가?”

“아쉽게도 정보가 많이 부족합니다. 그저 여러 왕국에 걸친 이동을 한 상단이라는 것밖에는…….”

“여러 국가라… 나이가 그리 많아 보이지는 않는데…….”

크럭스의 지적대로 사실 사만다가 실제로 여러 국가를 거친 상인은 아니었다. 단지 기록상 그런 흔적이 발견될 뿐.

“일단 출신 국가부터 찾고 있습니다. 처음부터 가진 금력의 규모 등을 볼 때 분명히 어느 국가인가에 속한 상인일 것입니다.”

“그렇겠지… 일단은 그년의 정체를 밝히는 것을 최우선으로 하도록 뭔가 느낌이 안 좋아… 최악의 경우에는 무력충돌까지 생각할 필요가 있을 것 같아.”

아직도 밝혀지지 않은 사만다의 정체에 대해 크럭스와 총관이 고민하는 반면 후버와 사만다는 수령한 금괴를 바라보면서 천천히 결실을 맺어가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사만다 와일리 상단에 맡겨둔 준비금이 어느 정도지?”

“대략적으로 금괴의 가치로는 5000kg 정도입니다.”

“그건 한 방에 회수했네.”

“사실 이미 기존에 매입한 상품을 판매하여 투자한 자금은 모두 회수한 상태입니다. 이것까지 포함을 한다면 창고에 쌓여 있는 상품의 가치를 금괴로 환산하면 30톤 정도의 가치가 있으며 상행으로 벌어들인 순수익이 1톤 정도의 금괴 그리고 7톤의 금괴를 합하면… 대략적으로 5톤의 금괴를 가지고 38톤 정도 규모의 자산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거 아슬아슬하군. 10배가 넘는 순간이 대략적으로 50톤이니 앞으로 어음의 발행은 좀 더 신중하게 해야 되겠는데. 문제는 저 상품을 어떻게 처리하는 것이냐인데… 쌓아두는 것은 쉽지만 이대로 상품을 처리하지 못하면 우리도 곤란하지 않은가? 잘못해서 우리에게 어음을 받고 상품을 넘긴 상단이 연쇄도산을 할 수 있으니 말이야. 금괴의 회수도 중요하지만 왕국 내의 다른 상단에 피해가 가서도 안 되니깐 말이야.”

“그 점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대륙의 정세가 혼돈스러운 만큼 수요는 어디에든지 있습니다. 벌써 저 상품 중 30% 이상이 구매자가 예정된 상태입니다.”

“그렇게 팔기 쉬운 것을 왜 다른 상단들은 재고로 쌓아두고 있던 건가?”

후버로서는 이해가 가지 않는 상황이었다. 사만다가 아무리 능력이 있다고 해도 기존의 상단 역시 상계에서 잔뼈가 굵은 만큼 상행에 대한 지식이나 경험이 사만다가 앞선다고 할 수는 없었다.

“마탑의 전폭적인 도움과 이익을 거의 남기지 않기 때문입니다. 마탑에서 상품의 운송을 위한 마법가방을 무상으로 지원해 주었고 텔레포트 마법진의 이용을 실비만으로 이용할 수 있도록 배려해 주고 있습니다. 이익의 폭 역시 기존 상단이 50% 이상의 이익을 기준으로 판매 하는 것과 달리 저희는 15~20% 정도의 이익만을 보고 판매하고 있습니다. 총 판매가는 기존 물품 가격의 65% 수준이니 마음만 먹으면 일주일 안에 모든 물량을 소화할 수 있습니다.”

“대단하군. 마탑의 지원만으로 이렇게 달라진단 말인가?”

“원가 자체도 저렴하게 구입한 요인도 있습니다.”

슬쩍 자신의 공을 이야기하는 사만다의 모습에 후버 역시 그 뜻을 알아차리고 간단하게 현재의 상황을 양피지에 기록하였다. 백 마디의 칭찬보다는 기록을 통해서 보고하는 것이 사만다에게는 더 크기에 굳이 칭찬을 하지는 않았다. 사만다는 신경 쓰지 않는 척하였지만 후버의 메모 내용을 슬쩍 훔쳐보았다.

“앞으로의 계획은 어떻게 되는 건가?”

“기본적으로 후버 님께서 짜놓으신 계획과 다르지 않습니다. 단지 와일리 상단이 쌓아둔 금의 양이 많은 만큼 규모가 좀 더 커지는 것뿐입니다.”

“좋군, 계속 수고하도록.”

“감사합니다.”

사만다가 이후 작업의 지시를 위해서 집무실을 빠져나가자 후버는 컨텍트 상단으로 통신구를 연결시켰다.

“오랜만이군요.”

“안녕하십니까, 후버 님. 그간 연락이 없어서 걱정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잘 지내고 있습니다. 상단주님께서는 잘 지내시는지요?”

“예, 저희와 마릴린은 잘 지내고 있습니다. 혹시 저희의 도움이 필요하십니까?”

“예, 한 가지 도움을 드리고 한 가지 도움을 받을 일이 필요합니다.”

“무슨 일이십니까?”

“컨텍츠 상단에도 가짜 인장이 찍힌 금괴가 있겠지요?”

“예, 사실 적지 않은 양의 금괴가 있습니다. 대략 300kg 정도 되는 양입니다.”

잠시 후버는 300kg 정도의 금괴의 가치에 대해서 생각했다. 요즘 들어 기본 1톤 정도의 금괴에 대한 보고를 사만다에게 받다 보니 어느 샌가 금괴의 가치에 대해서 다소 둔감해진 자신을 느낄 수 있었다.

갑자기 영지의 총관이 생각났다. 그 역시 자신과 같이 개인이 만지기 힘든 거금을 운영하고 있으니 가끔은 돈에 대한 현실 감각이 사라질 터인데 녹봉에만 만족하면서 수십 년을 한결같이 백작가를 보필해온 총관에 대해 좀 더 생각해 줄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금괴를 모두 저에게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진짜 인장을 찍어서 돌려드리도록 하지요.”

후버의 말에 칼이 대답하는 음색이 달라졌다. 드디어 골칫거리가 사라지는 것을 공식적으로 확약을 받은 까닭이다.

“드디어… 금괴를 바꿔치기 시작하는 겁니까? 감사합니다. 후버 님, 그런데 도움을 드릴 일은 무엇입니까?”

“일단 저희 저택으로 오시지요. 제가 어음을 한 장 써드릴 테니 와일리 상단에서 금괴를 수령하시면 됩니다. 가짜 인장이 찍힌 금괴들입니다.”

“어느 정도의 양입니까?”

“대략적으로 3톤 정도의 양이 될 것입니다.”

“많은 양이군요, 그들이 쉽게 내주려고 하겠습니까?”

“주지 않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언제까지 가면 되겠습니까?”

“경쟁 입찰의 신청이 끝난 다음 날 바로 오시면 됩니다.”

“그럼 그때 뵙도록 하겠습니다.”

당분간 해야 할 모든 조치가 끝나서인지 후버는 나른함을 느꼈다. 남아 있던 진짜 인장이 박힌 금괴는 록시나 자작가의 슈웨거 자작과 아세타이트가 모두 처리해 줄 것이다.

소량의 금괴가 남을지는 몰라도 그 역시 얼마 되지 않아 모두 소진되는 것은 물론 가짜 인장이 박힌 금괴 역시 모두 회수할 수 있을 것이다.

앞으로 10일 가량 남은 계약금 지급 기간 동안 다른 변수가 없다면…….

“슬렌, 너무 일이 잘 풀리는 것 같지 않아?”

“잘 풀리면 좋은 거 아닌가요? 주인님.”

“좋은 일이긴 하지… 하지만 이상한 느낌이 든단 말이야… 뭔가 놓치고 있는 듯한 느낌말이야.”

“아니에요, 주인님이 말했듯이 너무 그물이 촘촘하면 상대가 눈치챌 수도 있잖아요?”

“아니야… 내가 놓치고 있는 것이 있어… 그게 뭘까? 촘촘한 게 아니라 헐거운 게 문제 같은데 지금까지 많은 부분이 너무 순간적인 판단에 의해 처리되었단 말이야.”

“놓치고 있는 것이라면 와일리 상단 외에 다른 곳에서 가짜 인장이 찍힌 금을 유포한다던가 하는 거요?”

“그건 아닐 거야, 이 지역보다 효율적으로 금괴의 거래가 빈번한 곳은 없어… 여기가 최적지이니 다른 곳에 상단을 만들지는 않았을 거야. 설사 만들었다고 해도 그 영향력은 미미하겠지. 슬렌, 지금 우리가 와일리 상단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게 어떤 게 있지?”

“상단주 이름, 위치, 자금력, 등등 알고 있어요.”

“상단주라… 크럭스 그자가 상단주이긴 한데…….”

후버의 머리에 갑자기 한 가지 생각이 스쳤다. 상단주를 알지만 그 배후는 알지 못한다. 아세타이트의 편지에서 언급된 투자자의 존재… 일차적인 목표인 가짜 인장이 찍힌 금괴의 파악과 처리에 대해서만 고민하다 보니 중요한 배후의 존재에 대해서는 생각을 못한 것이다.

“바이스! 기사들을 소집시켜라. 오늘 저녁 산적으로 변장하고 다시 한 번 와일리 상단으로 침투한다. 소집 시간은 자정이다.”

천장에서 떨어진 바이스가 고개를 한번 끄덕하고는 어딘가로 사라져 버렸다. 그리고 얼마 안 되서 집무실로 하나둘 모이기 시작하는 기사들.

“좋군, 지금 와일리 상단으로 침투한다. 목표는 크럭스에게 치명적인 부상을 입히는 것 혹은 창고 중에 하나를 불태우거나 아니면 최소한 불태우는 시늉이라도 해야 한다. 질문 있는가?”

“없습니다.”

각자 충실하게 산적의 복장을 하고 소집 명령에 응한 기사들의 모습이 어느 정도는 믿음직스러웠다. 처음 사사건건 딴지를 걸던 모습은 국왕의 표창을 계기로 더 이상 나타나지 않았다.

“목표는 마법가방이 보관되어 있는 창고다.”

“그 많은 창고 중에 어떻게 마법가방이 보관된 창고를 알 수 있습니까?”

“뻔하지, 공중에서 수정구를 통해 영상을 찍을 것이다. 창고 중에 가장 깨끗하고 가장 많은 사람들이 지키고 있으면서 저번 작전에서 바이스가 파악한 금괴를 보관하는 창고가 아닌 곳이 바로 마법가방을 보관해둔 곳이겠지.”

“그곳만 몰래 불태우면 되는 것입니까?”

“아니다. 우리는 최대한 요란스럽게 공격해야 한다. 적당히 싸우다가 밀리는 척 뒤로 후퇴한 후에 분에 못 이겨서 건물이라도 불태우고 돌아가려고 불화살을 날린 듯이 연기하면 된다. 목표는 우리 측에서 넘긴 마법가방이 보관 되어 있는 창고로 할 것이다.”

“불화살만으로 전소는 힘들 것 같습니다.”

“걱정하지 마라, 전소는 목표일뿐이고 그들이 공격 받았다는 느낌만 들게 하면 된다. 각자 해산하여 1시간 후 와일리 상단 앞에서 다시 모인다. 시간은 충분하니 충분히 딴짓을 하다가 모이도록.”

“알겠습니다.”

한 명씩 차례대로 저택을 빠져나간 기사들이 저마다의 방식으로 와일리 상단을 향해 발을 놀렸고 후버는 와일리 상단을 향해 최단 거리로 움직였다. 소요된 시간은 약 10분 남짓 먼저 도착한 후버는 하늘에 수정구를 띄우고는 와일리 상단 내부의 모습을 대충대충 축약해서 그렸다.

“확실히 크럭스란 인물이 보통 인물은 아니군.”

와일리 상단의 내부를 들여다보던 후버는 다시 한 번 감탄사를 내뱉었다. 단순하게 창고를 지키는 인물이 많은 곳에 불을 지르면 될 것이라 생각했지만 상황이 그리 만만치 않았다.

“모두가 움직이고 있네요.”

“그러니깐 말이야, 어째 고정적으로 창고를 지키는 인원은 창고당 단 한 명밖에 없고 모두가 창고를 지키고 있으니 어떻게 한다? 기사와 병사들이 부족해진 만큼 효율적인 순찰 계획을 짜 놓았군.”

“그냥 아무 데나 불을 지르는 것이 어떤가요? 겁만 주려면 그 편이 더 나을 것 같아요. 오히려 콕 집어서 그 건물에 불을 붙인다면 크럭스가 의심을 할 것 같은데요. 저 정도로 꼼꼼하게 준비를 할 정도의 성격이라면요.”

슬렌의 말대로 크럭스는 매우 꼼꼼한 성격인 듯했다. 도둑들 역시 무언가를 훔치기 전에 사전 조사를 하게 된다. 그들 역시 후버와 마찬가지로 이런저런 방식으로 귀중품이 있는 곳의 위치를 추리하는 데 후버가 쓴 방법인 창고에 얼마나 많은 경비병인지를 보고 판단하는 방법은 단순하지만 확률이 높은 방법이었다.

“그것도 나쁘지는 않겠지 사실 불화살을 도둑들이 가지고 다닌다는 것부터가 흔하지는 않은 경우지.”

은밀함을 요구하는 도둑들이 한밤중에 불화살을 날린다는 것은 말 그대로 이해하기 힘든 일이었다. 어쩌면 그런 것을 미리 지참했다는 것 자체가 수상하게 여겨질 위험이 있었다.

“주인님, 어떻게 하실 건가요?”

“별수 없지. 경계를 도는 병사들의 움직임을 모두 기록하고 분석한다면 어느 곳이 집중적인 경계 대상인지는 알 수 있겠지만 그렇게 한다면 시간이 너무 소요될 것 같고…….”

“결국은 막 나가는 수밖에 없겠네요.”

“그렇게 되겠지.”

후버와 슬렌이 다른 방법이 없는지 고심하는 동안 기사들이 하나둘 약속된 장소로 모였다.

“후버 님, 모두 준비가 끝났습니다.”

“오는데 특별한 사항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좋다. 작전에 변경이 생겼다. 특정 건물이나 인물을 목표로 삼지 않는다. 외곽경비부터 하나씩 처리하도록 한다. 지시는 통신구를 이용해서 실시간으로 내리도록 하겠다.”

“알겠습니다.”

“제프, 알렉스, 스멧, 세르파. 이렇게 4명은 각각 동서남북 한 방향을 공격하도록 하고 바이스는 평소처럼 자유롭게 적을 상대하도록 한다. 마법적인 지원은 따로 해줄 수가 없으니 적병사가 2명 이상 모이면 탈출을 최우선으로 하도록.”

“옛.”

기사들이 각자의 방향으로 대기하자 후버는 한 명, 한 명 순찰을 도는 병사들의 위치를 알려 주었고 기사들은 지시에 따라 병사들을 처리해 나가기 시작했다. 기사들이 도합 9명의 병사를 처리하고 바이스가 3명의 병사를 처리하는 동안 와일리 상단은 후버와 기사들의 침투를 알지 못했는지 아직은 순차적으로 순찰을 돌며 평상시와 같은 경계를 유지했다.

“동쪽부터 순찰을 나간 병사들이 돌아오지 않는 것을 눈치챌 것이다. 모든 기사들은 저택 외곽으로 이동하여 대기한다.”

후버의 명령에 기사들이 일사분란하게 각자 맡은 방위의 외곽으로 자리를 잡자 와일리 상단의 병사들의 움직임이 소란스러워 지기 시작했다. 이내 2인 1조를 이루어 기존 순찰 경로를 거꾸로 다시 집으며 수색을 하는 와일리 상단의 병사들의 모습이 수정구에 잡혔다.

“원거리에서 석궁을 이용해 다가오는 병사들에게 한 발씩의 화살을 날리고 모두 후퇴하도록 하라. 적의 사망이나 부상 여부는 중요하지 않다.”

대답 대신 병사들은 횃불이 보이는 곳으로 한 발의 화살을 발사하고 후퇴하였다. 와일리 상단의 병사들의 경계는 좀 더 소란스러워졌고 서쪽의 건물에서는 작은 화염을 시작으로 창고가 불타기 시작했다.

“바이스 불을 질렀는가?”

대답 없이 후버의 통신용 수정구가 빛을 발하는 것으로 바이스의 대답이 돌아왔다.

“바이스도 후퇴하도록.”

저택 외부로 일단의 병사들이 빠져나오는 것이 후버의 눈에도 보였다. 기사들이 아무리 잘 숨는다고 해도 상대가 말을 이용해서 추격을 한다면 흔적을 잡힐 염려가 있었다.

“슬렌, 내가 먼저 후퇴할 테니 너는 지시에 따라 석궁의 시위를 붙잡고 있는 줄을 끊어 방아쇠를 당기고 후퇴하도록.”

“넵, 주인님.”

후버 역시 기사들과 같이 후퇴를 하기 시작했다. 상대방에게도 기사가 있고 그중 추적에 능숙한 자가 있을 수도 있지만 먼저 출발한 후버를 잡는다거나 사람의 발자국이 아닌 슬렌의 발자국을 쫓을 리는 없었다.

후버가 어느 정도 와일리 상단의 저택과의 거리를 벌리자 소란스러운 와중에도 일부 병사들은 창고에 붙은 불을 끄기 위해 노력 하는 한편 일단의 병사들은 정문에 정렬하여 모였다.

“슬렌, 지금이야.”

후버의 지시에 따라 슬렌이 석궁에 연결된 줄을 발톱을 이용해 끊어버리자 석궁의 화살이 적병이 있는 저택의 정문을 향해 날아갔다.

아쉽게도 단 한 발의 화살도 기사나 병사에게 꽂히지는 않았지만 위협이 되기는 충분했다. 정문의 기사와 병사들이 몸을 움츠리고 경계심을 끌어 올리는 동안 후버와 기사들은 더욱더 멀리 퇴각할 수 있었고 슬렌은 마법가 방 안에 석궁을 챙겨 후버의 뒤를 따라 후퇴하였다.

“총관, 이게 무슨 소란인가?”

한밤중 병사들의 시끄러운 소리에 잠에서 깬 크럭스는 총관에게 연결된 통신용 수정구를 이용해서 총관을 호출 하였다.

―누군가의 습격으로 보입니다.

“적의 목표는 무엇 같은가?”

―아무래도 저희 상단의 금괴를 노린 듯합니다.

“이유는?”

―외관부터 침입한 후 금괴가 보관된 창고에서 가장 멀리 있는 곳에 불을 질렀습니다. 일반 병사들만을 석궁을 발사해서 사살했습니다. 만약 병력을 감소시키는 것이 목적이었다면 최초의 한 발이 향한 곳은 분명히 기사들이었을 것입니다.

“그럼 사라진 상품은 있는가?”

―아직 파악 중입니다. 파악하는 대로 답을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수고해주게, 나도 확인을 해보도록 하지.”

크럭스는 통신구의 연결을 끊고 밀실과 연결된 통로로 몸을 움직였다. 이미 아세타이트에 의해 파악된 통로이지만 크럭스는 그 사실을 알 수 없었고 후버 역시 수정구를 이용해서 하늘에서 감시하고 있어 지하로 연결된 크럭스의 움직임을 확인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별 이상은 없군.”

눈앞에 쌓인 금괴와 마법가방을 확인한 크럭스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다행히 창고 안 어디에도 침투의 흔적을 확인할 수 없었다. 좀 더 세밀히 피해 상황을 확인하기 위해 크럭스가 발길을 돌리는 순간 다시 통신용 수정구가 빛을 발했다.

―상단주님, 금전적인 손실은 전혀 없습니다. 단지 병사들 중 12명이 사살 당했습니다.

“12명이라고? 적들은 몇 명이나 침투한 것이냐?”

―정확한 수는 모르겠습니다만 대략 7에서 8명 정도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근거는?”

―동서남북 네 방향에서 한 명씩의 흔적이 발견되었으며 창고에 불을 지른 인물이 한 명 그리고 상단의 정문에 석궁을 발사한 인원이 3명입니다.

“고작 3명이… 아니, 실질적으로 상단에 침입한 것은 겨우 5명 수준인데 상단의 병사들이 12명이나 살해 당했단 말이냐?”

―송구합니다. 아무래도 마법사가 없다는 것이 크게 작용한 듯합니다. 평소 알람마법 등으로 침입자의 존재를 미리 알 수 있고 최근 병사와 기사들이 많이 사망하여서 병사들의 순찰 방식을 2인 1조에서 1인 1조로 바꾼 것이 피해를 키운 것 같습니다. 죄송합니다. 상단주님.

총관의 말에 크럭스도 현재의 상황이 납득되었다. 그러고 보니 기밀을 요하기 위해서 최대한 병사들을 본국에서 요청했지만 현재의 상황에서는 이러한 습격이 몇 번만 더 있으면 상단을 지키는 병사들의 수가 부족한 것이 문제가 아니라 상단 전체가 한 번에 털려 버릴 수도 있었다. 아무래도 얼마 전 금괴의 양을 상인들에게 공개한 것이 지금 같은 상황을 만든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야, 그건 총관의 잘못이 아니니 괜한 자책은 하지 않아도 되네. 병사들의 수가 반절 이하로 줄어버렸네. 그 부분에 대해서는 생각을 못한 내 잘못이 크지.”

―죄송합니다.

“총관은 내일 날이 밝는 대로 용병들을 고용하도록 해주게. 일반 병사급보다는 높은 B등급에서 C등급 사이로 뽑고 B등급은 5명 이상으로 해주게. 그리고 A급 용병도 있다면 한 명 정도는 필요할 듯하고 마법사도 가능하다면 2서클 이상으로 한 명 부탁하네.”

―예, 상단주님. 날이 밝는 대로 명령하신대로 조치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수고해주게.”

몇 가지 주요 물품에 대한 사항을 확인한 크럭스는 다시 잠에 들기 위해 자신의 방으로 향했고 총관은 크럭스에게 보고하기 위해 피해사항을 꼼꼼히 기입하는 것으로 하룻밤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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