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여왕의 EX급 방랑기사-1화 (1/212)

제1화

#1.

― 고독한 설원의 여왕이여, 볕이 그대를 품을 것이다. ―

얼굴에 피가 튀었다.

검푸른 피.

촤아악.

이어서 더 많은 피가 얼굴에 튀었다.

볼에 묻은 검푸른 피는 뜨거운 열기에 의해 사라졌다.

빛의 갑옷을 입은 남자의 발아래, 5미터 신장의 검은 덩어리가 밟혀 있다.

사람 모습의 검은 덩어리.

머리와 어깨에 커다란 뿔이 나 있는 흉악한 덩어리.

지금 그 흉악함은 부러지거나 금이 가 있다.

“용사여! 네가 이겼다. 그러나 이것은 끝이 아니다!”

검은 덩어리는 마지막 발악을 하듯 꿈틀거리며 외쳤다.

증오 가득한 저주가 공기를 울렸다.

그러든 말든.

푸우욱.

남자는 뜨겁게 빛나는 태양검으로 괴물의 심장을 찔렀다.

“네놈을 저주하마! 너는 이 저주에서 자유로울 수 없도다!”

키아아아악!!

검은 괴물, 마왕은 비명을 지르며 몸부림쳤다.

그리고 얼마 안 가 잠잠해졌다.

파아앗.

괴물의 몸이 검은 재가 되어 흩어졌다.

흩어지던 검은 재는 얼굴에 묻은 검푸른 피처럼 불타 사라졌다.

“…….”

“…….”

함께 마왕 레이드에 참가했던 수많은 헌터들.

이를 중계하는 카메라와 이를 시청하는 수십억의 시청자.

이 자리에는 수많은 사람이 있었지만, 감히 가까이 오지 못하고 이 결전을 지켜보기만 했다.

용사의 뜨거운 기운에 몸이 타 버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마왕의 깊은 어둠에 타락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저 멀리서 바라보며 응원과 기도를 올릴 뿐이었다.

모두의 염원이 기적을 발한 것일까? 아니면 용사의 이능이 뛰어나서 그럴까?

용사와 마왕의 결전은 모두의 염원 속에서 인류의 승리로 끝났다.

와아아아아!!

간절한 침묵은 희망의 환호가 되었고.

“이, 이겼다!”

“우리가 이겼다! 인류의 승리야!”

“태광휘 헌터 만세!!”

전 인류가 마왕으로부터 지구를 구원한 용사를 찬양했다.

10년 전.

게이트가 열리고 마왕이 지구를 침공했다.

게이트는 몬스터 군단을 토해 냈다. 많은 사람이 죽고 도시가 파괴됐다.

발전한 인류의 과학은 마력을 앞세운 마왕군 앞에서 무력했다.

인터넷도 끊기고 인프라도 사라진 세계.

이와 함께 각성자와 헌터가 탄생했다.

각성의 축복은 무작위였고, 전형적인 집돌이로 직장을 제외한 대부분의 시간을 게임과 운동하는 데 쓰던 태광휘 또한 S급 각성자가 되었다.

그냥 S급 각성도 대단한데, 그 S급 중 가장 강한 태양의 축복이 태광휘에게 내려왔다.

평화롭던 지구를 원래대로 되돌리기 위해 집돌이인 태광휘 또한 검을 들고 싸웠다.

몬스터를 잡고 사람들을 구하니 태양검이니 뭐니 하는 거창한 칭호가 함께 따라왔다.

그렇게 10년이 흘렀다.

회사에서 조용하고 일 잘하던 태광휘 대리는 지구 최고의 헌터 길드 ‘검룡길드’의 길드장이 되어 있었다.

좀 더 많은 몬스터를 잡고 마왕의 사천왕까지 잡으니, 그는 절로 지구의 용사가 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마지막 싸움이 끝났다.

검룡길드의 (임시) 길드장이자, 세계 헌터 협회의 (임시) 협회장이며, 태양검의 주인인 용사 태광휘가 마왕 세피로스를 죽였다.

‘저주……?’

마왕 세피로스를 죽이고 태광휘는 자신의 몸을 살폈다.

마지막에 놈이 자신에게 저주를 걸었다.

하지만 딱히 몸에 이상이 없다.

빗나간 모양이다.

“마왕을 없앴으니 이제 EX급으로 불리겠네요?”

옆에서 고운 목소리가 들렸다.

“이제 뭐 할 거예요?”

마왕을 척살하고 빛의 갑옷을 해제하기 무섭게 한 여인이 그에게 다가왔다.

S급 치료계 헌터이자, 성녀 칭호를 보유한 어여쁜 여성 헌터가 태광휘를 빤히 바라본다.

“은퇴해야지.”

여자의 질문에 태광휘는 피로감이 짙은 미소로 답했다.

“……네?”

그녀가 되물었다.

“저기 수송기가 왔군.”

태광휘는 더 말하지 않고 헬기를 향해 걸었다.

“광휘 오빠! 잠깐……!”

뒤에서 그를 부르는 성녀의 목소리가 들렸지만.

와아아아아!

태양검! 태양검!

태광휘! 태광휘!

그를 환호하는 함성에 묻혔다.

‘쉬고 싶군.’

몸도 정신도 너무 지쳤다.

이번 결전에 의한 피로가 아니었다. 10년이라는 세월 동안 쌓이고 쌓인 모든 피로가 한꺼번에 터져 나오고 있었다.

헬기를 향해 걸어가는 태광휘의 머릿속에는 오직 쉬고 싶다는 생각뿐이다.

그렇게 세상은 평화를 되찾았다.

게이트가 닫히고, 헌터들은 공무원이나 용병, 스타가 되었다.

공동의 적이 사라진 인류에게 남은 적은 과거의 적대국들이다.

높은 등급의 헌터들은 그렇게 국가의 비대칭 전력이 되어 떵떵거리며 잘살게 되었다.

* * *

2년 후, 추운 겨울.

대한민국 경기도의 어느 전원주택.

휘위이이잉―.

혹한주의보가 내린 겨울이지만 집 안의 창문은 활짝 열려 있다.

각성하여 금발에 황금색 눈동자를 가지게 된 태광휘는 무심한 눈으로 컴퓨터 앞에 앉아 있다.

그는 혹한의 냉기를 시원하게 즐기며 모니터를 주시했다.

[안 돼!! 솔라, 솔라시우스!!]

모니터 안에서 들리는 절규 가득한 외침을 보고 들으며 태광휘는 미간을 찌푸렸다.

“난이도가 너무 어려워.”

결국 배드 엔딩을 맞이한 게임의 끝은 허무했다.

“흐음…….”

지금 그의 꼴은 백수의 몰골이다.

청결을 중요시하기 때문에 매일 아침저녁으로 샤워를 하는 편이다.

하지만 깨끗한 몸과 달리 그의 복장은 추리닝 한 벌이 다였다.

다른 헌터들은 나라의 고위 공무원이 되거나 수십억대 연봉을 받는 용병 일을 하고 있었지만, 태광휘는 아니었다.

그는 정부에서 주는 연금과 3대가 펑펑 써도 줄지 않을 포상금을 누리며 방구석 라이프를 원 없이 즐기고 있었다.

협회장을 연임해 달라는 정부의 요청을 거절하고, 검룡길드장을 계속 맡아 달라는 부하들의 애원을 무시하고, 거의 히키코모리처럼 대전쟁 기간 동안 하지 못했던 방구석 라이프를 작정하고 즐겼다.

‘여왕이 좀 더 일찍 마음을 열었다면 수월히 깰 수 있었을 텐데…….’

‘여왕이 내 캐릭터를 너무 경계하고 적대했던 게 문제야.’

‘무엇보다. 선택했던 캐릭터가 너무 약했어. 기사라서 강할 줄 알았는데 허당이었지.’

‘이 캐릭터로 여왕과 호감작을 하는 것은 미친 짓이야. 다음번엔 호감작을 하지 말고 다른 루트로 가 봐야겠어.’

그는 진지한 눈으로 자신의 플레이를 복기했다.

마왕 레이드 때나 보였던 진지함을 담은 황금빛 눈동자가 모니터를 향했다.

화면에는 게임 속의 배드 엔딩이 펼쳐져 있었다.

[흐으윽……! 솔라!!]

모니터 속의 여왕은 태광휘의 캐릭터 이름을 애타게 울부짖었다.

고전 게임이라서 도트 그래픽이다.

벼룩시장에서 우연히 얻은 USB에 담겨 있던 고전 게임.

“…….”

그러나 일러스트와 도트 그래픽만으로 설명 불가능한 애틋함을 태광휘는 느꼈다.

푸욱.

이어서 마왕이 여왕에게 다가가 그녀의 심장에 검을 찔러 넣었다.

여왕은 죽으면서도 금발, 금안의 기사를 품에 안고서 놓지 않았다.

여왕의 품속에 있는 기사가 바로 태광휘가 플레이하던 캐릭터다.

비록 게임 캐릭터지만 자신과 닮은 느낌의 금발, 금안의 기사 캐릭터. 속성도 빛과 바람이라서 자신과 비슷했다. 그랬기에 홀리듯 이 캐릭터를 골랐는지도 모른다.

“난 저렇게 약하지 않지만.”

이 캐릭터로 저 여왕의 호감도를 올리기 위해 했던 고생을 생각하면 절로 인상이 구겨졌다.

캐릭터의 과거와 신분이 문제였다. 이로 인해 여왕은 후반부까지 그를 적대하고 경계했다.

그러다가 막판에 그의 진심을 알고 조금이나마 마음을 열었다.

정말로 힘들었던 호감작. 하지만 그것도 이젠 끝이다.

[아아아아악!!]

통곡과 절규, 비명을 지르는 여왕의 목소리가 진짜처럼 아련하다.

“고전 게임이지만 잘 만들었어.”

게임의 이름은 ‘루한의 국서’. 처음 보는 이름이다.

도대체 어디서 만든 걸까? 대전쟁 전에 이런 게임은 듣도 보도 못했거늘.

그렇게 배드 엔딩을 감상한 태광휘는 고개를 끄덕인 후 리트라이를 하려 했다.

그런데.

“……?”

화면이 넘어가지 않았다.

이윽고 여왕을 찔러 죽인 마왕이 시선을 돌려 태광휘를 쳐다보았다.

―용사! 너는 이 저주에서 자유로울 수 없도다.

“?!”

모니터 속 마왕의 목소리가 스피커를 넘어 그의 머릿속에 울렸다.

마왕이 마지막에 남겼던 목소리이자 저주였다.

2년이나 지났지만 절대 잊을 수 없던 찜찜함에 태광휘는 몸을 벌떡 일으켰다.

‘어?!’

몸을 일으킨 그는 급격한 어지러움을 느끼며 쓰러졌고. 그 길로 의식을 잃었다.

* * *

익숙한 소리.

채앵, 카아앙, 채앵!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

아아아악!

와아아아!

끄악!

함성 소리, 고함 소리, 비명 소리.

태광휘는 미간을 찡그리며 눈을 떴다.

“?!”

그러곤 놀랐다.

눈앞에는 전장이 펼쳐져 있었다.

주르륵.

이마가 욱신거렸다. 손을 대 보니 피가 묻어났다. 머리를 다쳤던 거 같다.

‘뭐야?’

그는 황당한 눈빛으로 몸을 일으켰다.

빙의한 것인지 소환된 것인지 모를 육신은 판타지풍의 경갑옷을 입었다. 한 손에는 검 한 자루를 들고 있었다.

‘솔라시우스……?’

이어서 이 몸의 기억이 파도처럼 태광휘를 덮쳤다.

“게임 속이라고?!”

황당함에 목소리가 입 밖으로 나왔다.

자리 잡아가는 기억과 함께 눈앞의 상황을 파악했다.

도적인지 암살자인지 모를 적들은 상단으로 보이는 행렬을 털고 있었고, 방랑 기사였던 그는 이 상단과 함께 이동하다가 습격을 받은 모양이다.

상단에 고용된 용병들은 죽거나 도망친 모양이고.

“히이이익…….”

미처 도망치지 못한 상인들이 마차 바닥에 숨어 몸을 벌벌 떨고 있다.

“아직 한 놈 살아 있다!”

“전부 죽여!”

한창 살육과 약탈을 진행하던 적들이 태광휘, 즉 솔라시우스를 발견하곤 무기를 겨눴다.

그리고 그에게 둔기와 창, 도끼 등을 휘둘렀다.

처억.

솔라시우스는 이마의 피를 닦고는 소름 끼칠 정도로 깨끗한 자세로 검을 휘둘렀다.

휘두른 검에서 밝은 빛과 함께 검격이 날아갔고.

퍼어어엉!

그에게 무기를 겨눴던 도적 다섯을 터트려 버렸다.

“……?!”

“어?”

“으응?!”

마차 아래에 몸을 숨기고 벌벌 떨던 상인들.

괴성 지르며 살육과 약탈을 하던 도적들.

모두의 시선이 금발에 금안을 한 방랑 기사에게로 향했다.

* * *

비슷한 시각.

루한 왕국의 왕도 윈테라의 순백궁.

루한의 여왕 루시푸르네의 침실.

“안 돼!! 솔라, 솔라시우스!!”

여왕 루시푸르네는 그렇게 외치며 잠에서 깨어났다.

“허억…… 허억……!”

그녀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

방금까지만 해도 그녀는 무너진 왕궁에 있었다.

온몸에 마력을 구속하는 고통스러운 족쇄를 차고서.

마왕의 검을 심장에 맞았다.

덜덜덜덜…….

아직도 그때의 끔찍한 고통이 여운처럼 아른거린다.

무엇보다.

“솔라……!”

마지막까지 그녀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쳤던 기사.

솔라시우스의 창백한 얼굴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솔라시우스…….”

여왕의 어깨가 떨렸다.

‘여기는……?’

그녀는 어깨와 가슴의 떨림을 진정시키며 자신의 상황을 확인했다.

여기는 사후 세계인가?

그렇다면 아버지는? 어머니는? 시녀장 베네사는? 기사단장 하이마는? 그리고…… 무엇보다 솔라시우스는?!

그들에게 생전에 하지 못했던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었다.

특히 솔라에게는 미안하다는 말을 꼭 하고 싶었다.

“폐하, 괜찮으십니까?”

그때 밖에서 시녀장의 목소리가 들렸다.

“들어가겠습니다, 폐하.”

흐읍!

이어서 시녀장과 시녀들의 숨 들이쉬는 소리가 들렸다.

끼익,

문이 열리면서 각종 털옷으로 완전무장한 시녀장과 시녀들이 들어왔다.

거리는 여왕과 철저히 10미터 간격을 유지했다.

덜덜덜덜…….

“괜찮으십니까?”

시녀장과 시녀들이 추위에 덜덜 떨면서 물었다.

북부. 1년 중 절반 이상이 겨울인 나라.

이곳 사람은 다들 추위에 내성을 가졌다. 하지만 여왕 루시가 풍기는 추위는 격이 달랐다.

“……?!”

침실로 벌벌 떨면서 들어온 시녀들을 본 루시의 눈이 커졌다.

“베네사……?”

죽었던 시녀장 베네사가 서 있었다.

그런데 베네사의 얼굴이 죽기 전보다 훨씬 젊은 30대의 얼굴이다.

루시는 황급히 수정 거울을 보았다.

푸른 은발에 사파이어가 떠오르는 푸른 눈동자. 백설처럼 하얀 얼굴.

회귀 전과 큰 차이는 안 났지만, 좀 더 앳된 느낌의 자신이 눈앞에 있다.

“……지금이 몇 년도지?”

“제국력 964년입니다, 폐하.”

베네사가 고개를 갸웃하면서 답했다.

“……?!”

무려 10년 전이다.

여왕은 혼란스러웠다.

“어디 편찮으십니까?”

그런 루시를 보고 베네사가 걱정스러운 눈빛을 했다.

루시는 설원의 저주를 안은 고독한 여왕이다.

병에 걸리지 않는다. 하지만 그 대가로 그녀 주위에는 항상 모든 것을 얼려 버리는 냉기가 불었다.

지금 루시가 누워 있는 침대 또한 수정과 얼음으로 조각한 딱딱한 조각품이었다.

“어의를 부르겠습니다.”

베네사가 10미터 정도 떨어진 거리에서 조심스레 말했다.

하지만 어느 의사가 저주를 품은 여왕을 진찰할 수 있을까?

가까이 접근하면 모두 얼어 죽는데.

“그, 그냥 악몽을 꾼 것일 뿐이다.”

시녀들의 걱정을 눈치챈 루시가 재빨리 말했다.

“나는 괜찮다. 나가 보거라. 추울 텐데…….”

“네…… 그럼…….”

루시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추위에 벌벌 떨던 시녀들이 재빨리 방에서 나갔다.

“필요한 게 있으면 꼭 부르셔야 합니다, 폐하.”

유일하게 시녀장 베네사만이 추위를 견디며 말했다.

“알았다.”

루시는 그런 베네사를 보며 웃었다.

“!!”

시녀장 베네사는 여왕의 미소를 보곤 놀란 눈을 했지만. 서둘러 고개를 숙이곤 사라졌다.

시녀들이 다 사라지고, 언제나처럼 홀로 남은 여왕의 침실.

간만에 그녀의 이마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말이 식은땀이지, 실제론 살얼음 조각이 이마를 따라 흘렀다.

그녀는 살얼음의 촉감을 느끼며 조심스레 볼을 꼬집었다.

볼에서 통증이 느껴졌다.

이어서 왼쪽 손목에 찬 팔찌가 눈에 들어왔다.

‘팔찌?’

전대 여왕이자, 돌아가신 어머니가 물려주신 팔찌. 알 수 없는 나뭇잎으로 이은 팔찌였다. 설원의 저주 속에서도 유일하게 얼지도, 시들지도 않았던 팔찌. 하지만 이 또한 결국 부서졌었다.

‘분명 파괴되었었는데?!’

파괴되었을 당시 얼마나 상심이 컸던가. 그런데 언제 부서졌냐는 듯, 여왕의 손목에서 생생한 생명의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돌아왔다고……?”

여왕은 이제야 자신이 회귀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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