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여왕의 EX급 방랑기사-5화 (5/212)

제5화

#5.

또 누구를 찾아보라는 여왕의 지시. 그리고 설명.

“……?”

왕실 기사단장 하이마는 고개를 갸웃했다.

또 금발, 금안이다. 하이마는 뭔가 짚이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금발, 금안은 흔하지 않습니다만. 이것만으론 찾기 힘들 겁니다.”

여왕의 말에 그는 우려를 표했다. 그래도 아까보단 확실히 누그러진 기사단장의 어조가 인상적이다.

“나도 많이는 알지 못한다. 신비를 담은 로사리오를 목에 걸고 있을 것이고, 로안 샬루트와는 남매 관계다.”

루시는 자신의 기억을 최대한 짜냈다.

“하지만 가명을 쓰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약 10년 전, 제국에서 루한으로 왔을 것으로 추정된다.”

하이마는 추위를 버티며 여왕의 설명을 경청했다.

그러다 어느 순간.

“?!”

하이마의 머릿속에서 어떤 생각이 번쩍 들었다.

금발, 금안. 10년 전. 누구보다 악황후 옥타나를 증오하는 황족. 무엇보다 로안 샬루트와 남매 관계.

“폐하, 설마……! 말씀하신 두 사람이……?”

기사단장의 조심스러운 질문.

하이마는 본능적으로 여왕이 찾고 도우라 명한 이들의 정체가 누구인지 깨달았다.

“…….”

루시는 어찌할까 짧게 고민하다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자 하이마는 어깨를 흠칫 떨었다.

“죽었다는 말은……?”

“살아 있다.”

“맙소사!”

여왕이 누누이 당부한 망명 황족은 죽은 것으로 알려진 1황자 솔라시우스와 1황녀 루나시르네였다.

기사단장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이 암울한 국운에 작게나마 희망이 비쳤다.

그는 숙였던 고개를 번쩍 들어 여왕을 올려다보았다.

제법 떨어진 거리임에도 그의 눈동자가 요동치는 게 보였다.

여왕 루시푸르네는 말없이 다시 한번 고개를 끄덕였다.

‘제국의 적통이 살아 있다니! 신께서 루한을 버리지 않으신 겁니다.’

기사단장 하이마는 성호를 그었다.

생각을 입 밖으로 뱉지 않았다. 혹여나 누가 들을 수도 있을 테니까. 쥐부터 새, 개와 고양이까지, 모든 게 대마녀 옥타나의 귀와 눈이 될 수 있었다.

여왕이 이를 어떻게 알고 있는지는 딱히 궁금하지 않았다.

‘폐하 또한 여왕 이전에 대마녀. 비록 계승에 실패해 저주를 받은 상태지만 엄연히 설원의 대마녀시다.’

대마녀들은 종종 고위 사제들처럼 예지를 본다고 했다.

분노와 답답함 그리고 안타까움으로 가득 찼던 기사단장의 얼굴에 믿음과 희망이 찾아왔다.

“최대한 은밀하게 행동해야 한다.”

그런 하이마를 보며 여왕은 다시 한번 주의를 주었다.

“무엇보다, 재상이 알면 안 된다.”

특히 재상과 관련된 부분에서는 더욱 목소리에 힘을 줬다.

“……! 명심하겠습니다.”

여왕의 말에 뭔가를 직감한 하이마는 깊은 눈으로 고개를 숙이곤 알현실을 빠져나갔다.

홀로 남은 설원 같은 알현실.

“하아…….”

루시는 한숨을 내쉬며 알현실의 천장을 보았다.

수정으로 장식된 천장에는 서늘하면서도 맑은 북부의 하늘이 보였다.

오른손으로 왼쪽 손목에 있는 잎으로 엮은 팔찌를 만지작거렸다. 풀 냄새가 심란한 그녀의 기분을 다독였다.

‘황제가 죽고 악황후 옥타나의 아들 흑태자가 황위에 오른다.’

악황제가 탄생한다.

‘악황제는 결국 마왕으로 각성하고 그 힘은…….’

루시는 흠칫 어깨를 떨었다.

회귀 전, 마왕은 루한에 펼쳐진 설원의 가호를 찢고 루한을 범했다. 마지막엔 그녀의 심장에 검을 쑤셔 넣었다.

“…….”

회귀를 했지만 그때 그 느낌은 여전히 생생했다.

‘지금부터 움직여도 빠듯해.’

여왕의 상념은 깊게 펼쳐졌다.

‘암흑제국의 사천왕도 문제야. 거짓의 대마녀, 암흑대공, 죽음의 대마녀, 파괴왕까지. 하나하나가 재앙이었어.’

회귀 전에 상대했던 암흑제국의 사천왕을 떠올렸다.

‘그 사천왕 중 둘은 솔라시우스가 죽였지. 심지어 암흑대공에게도 큰 부상을 입혔고. 하지만 솔라도 크게 다쳤었지.’

피투성이가 돼서 왕궁으로 복귀했던 솔라가 떠올랐다. 그는 피투성이가 되었음에도 웃는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았었다.

그런 그를 회귀 전의 자신은 냉대하고 홀대했었다.

찌릿!

그때의 기억이 떠오르자 루시는 심장이 저렸다.

훌쩍, 눈물이 나오려는 것을 꾹 참았다.

그리고 애써 그때의 기억을 미뤄 뒀다.

‘다행인 점은 지금은 아직 사천왕이 모이지 않았다는 것. 현재 제국에 있는 사천왕은 둘뿐. 황후이자 거짓의 대마녀인 옥타나와 암흑대공뿐이다. 적어도 죽음의 대마녀와 파괴왕만큼은 사천왕이 되지 못하게 막아야 해!’

차가운 알현실, 루시는 생각에 잠겼다.

그녀는 눈을 감고 심상으로 루한의 전도를 펼쳤다.

‘공교롭게도, 죽음의 대마녀의 태동으로 가장 의심되는 곳이 하나 있긴 해.’

심상 속 그녀의 인지가 루한의 남동부, 문라이트 변경백으로 향했다.

‘마침 솔라도 그곳에 있어.’

찌릿!

또다시 가슴이 찌릿하다. 속죄를 해도 모자랄 판에 염치없게 그에게 의지하려 한다.

‘하지만…….’

그녀가 알기로 이 일을 해결할 수 있는 사람은 솔라시우스, 오직 그밖에 없었다.

과거에 자신은 솔라에게 다섯 가지 버거운 시련을 내렸다.

자살에 가까운 시련들. 그녀를 포함한 모두가 불가능할 것이라 생각했던 시련들.

하지만 솔라시우스는 이를 해냈었다.

그런 그를 잘 알기에, 누구보다도 솔라시우스의 가치를 잘 알기에.

“…….”

루시는 갈등했다. 여왕은 고민했다.

속죄를 품은 여자로서의 양심과 냉정해야 하는 여왕으로서의 고뇌가 팽팽히 맞섰다.

“폐하, 아리아 데스모 공작이 알현을 청했나이다.”

그때, 알현실 밖에서 시녀장 베네사의 외침이 들렸다.

“……! 들어오라 해라.”

재상이 왔다는 말에 루시의 표정이 돌변했다.

아련함과 애틋함 그리고 고뇌와 갈등이 순환되던 그녀의 얼굴은 어느새 무표정해졌고 굳어졌다.

끼이익, 터억.

잠시 후, 알현실의 차가운 문이 열렸고 한 여성이 입장했다.

“어서 오게, 재상.”

루시는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여공작 아리아를 반겼다.

―친구는 가까이, 적은 더 가까이.

문득, 회귀 전 재상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

여왕은 침을 삼키며 회귀 후 처음 마주하게 된 재상을 응시했다.

눈앞의 재상은 결코 평범한 귀족이 아니다.

그녀는 루한의 여공작이자, 재상이며, 설원의 저주에 걸린 여왕을 대신하여 왕실 마녀회를 관리하는 고위 마녀였다.

또각, 또각, 또각.

알현실 수정 의자에 앉아 있는 루시푸르네를 향해 재상 아리아가 걸어온다.

실제 나이는 중년을 넘겼지만, 고위 마녀답게 30대의 외모를 유지하고 있다. 그녀를 상징하는 회색 머리카락과 붉은색 눈동자는 여전히 인상적이다.

한 걸음, 두 걸음, 세 걸음.

15미터, 10미터, 8미터 그리고 7미터.

무려 7미터의 거리.

현재 왕도에서 여왕에게 가장 가까이 접근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 7미터의 거리에서도 몸이 얼지 않는 강인한 마녀.

“폐하, 그간 강녕하셨습니까?”

여재상 아리아 데스모가 루시를 보며 작게 미소 짓는다.

* * *

솔라시우스와 칼트 상단의 상인들은 생각보다 쉽게 도시 오스키로 들어왔다.

늦은 밤.

게임 속 이세계로 온 이후 처음으로 벽과 천장이 있는 곳에서 식사를 했다.

“하하하하! 아마 기사님의 위용이 도시까지 퍼진 모양입니다.”

상인 도미닉은 뭐가 그리 기분 좋은지 웃으며 말했다.

“하긴, 그렇게 압도적인 용력을 펼치셨으니 소문이 안 퍼질 수가 없지요.”

여기까지 오면서 적지 않은 도적단을 무찔렀다.

그 과정에서 살아서 도주한 도적도 분명 있다.

상인들은 그렇게 살아남은 도적들이 기사 로안 샬루트의 무용담을 소문냈을 것으로 확신했다.

‘게임보다 압도적으로 도적을 토벌해서 그런가?’

나비효과라는 것이 이런 식으로 발현됨을 느꼈다.

‘하지만 여전히 손님 취급은 받기 힘들 것 같군.’

이곳 여관에도 그를 감시하는 듯한 눈초리가 느껴졌다.

솔라는 이러한 감시를 그러려니 넘겼다. 루한 왕국에서 제국인, 그것도 황족의 이미지가 어떤지 잘 알기 때문이다.

“기사님! 저희는 로안 기사님 덕분에 목숨과 재산을 구했습니다.”

“다시 한번 정말 감사드립니다.”

“보상은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기사님을 위한 답례는 물론, 도망친 용병 놈들 수당까지 전부 합쳐서 드리겠습니다.”

“아마 기대하셔도 좋을 겁니다.”

칼트 상단의 상인들은 솔라를 향한 감시의 눈초리를 의식하지 못한 듯하다.

그들은 취기에 붉어진 얼굴로 그저 해맑게 웃고 있다.

호화롭게 차려진 식탁. 상인들은 너도나도 커다란 술잔을 쥐고 계속해서 마셔 댔다.

“내일 날이 밝으면 바로 상단으로 가서 신분패 발급을 도와 드리겠습니다.”

“저희 칼트 상회는 규모는 작지만 역사와 전통이 있는 상회입니다. 저희가 보증한 신분패라면 루한에서의 활동이 수월할 겁니다.”

“그러고 보니 내일은 오스키의 시장님과 만난다고 들었습니다. 시장님과 만나시기 전에 꼭 저에게 들리셔야 합니다. 도시에서 제일 좋은 옷을 기사님께 바치도록 하겠습니다.”

“무기! 무기는 제가 바치겠습니다!”

“말도 필요하실 겁니다. 영주님이나 타는 최상품의 말을 수배해 놓겠습니다.”

칼트 상단의 상인들이 기사 로안 샬루트에게 가지는 호감도는 최대치였다.

비록 그가 제국에서 온 망명 황족이라도 말이다.

그들의 재산과 목숨을 구해 준 이유도 있지만, 솔라시우스와 태광휘가 무의식적으로 뿜어 내는 매력이 크게 작용했다.

그래서인지 상인들은 솔라를 향해 무엇이든 주려고 안달이었다.

* * *

자정까지 이어지던 만찬이 끝났다.

목욕을 마친 솔라시우스는 자신에게 배정된 방 침대 위에 누웠다.

이 도시에서 가장 좋은 방이라지만 현대에서 살다 온 그에겐 딱히 와 닿지 않았다.

‘마왕을 잡아야 돌아갈 수 있겠지?’

태광휘이자 솔라시우스는 흐릿한 눈으로 천장을 보았다.

‘어떻게 마왕을 잡을까? 지금 내 능력으로 잡을 수 있을까?’

잠은 딱히 오지 않았다. 그랬기에 이런저런 상념이 그의 머릿속을 휘감았다.

‘문제는 능력을 쓸 때마다 부작용이 심하다는 거다.’

최근엔 태양 이능을 사용하지 않았음에도 강한 더위를 느꼈다. 지구에서는 겪지 않았던 문제다.

마왕이 자신에게 내린 저주의 일종인 것 같았다.

이런 식으로 태광휘의 능력을 제한한 상태에서 죽일 생각이겠지.

하지만 그는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여왕 루시푸르네를 만나면 이 제한을 풀 수 있을 거야.’

당장 태광휘의 속성과 완전히 반대되는 인물이 떡 하니 있으니까.

설원의 저주를 품은 여왕 루시푸르네. 설원의 대마녀라면 방법을 알 것이다.

‘문제는 그녀를 어떻게 설득하냐는 건데…….’

천장을 바라보던 그의 미간이 구겨졌다.

여왕의 히스테리를 받으며, 그녀가 주는 시련을 수행하면서 호감작을 해야 한다는 생각에 절로 불쾌해졌다.

‘태양 이능을 최대로 펼친 상태라면 설원의 저주에서 버틸 수 있지 않을까?’

누구도 여왕에게 가까이 다가가지 못한다. 평범한 사람은 10미터 이상 접근하면 목숨이 위험하다.

현재는 루한의 재상 아리아 데스모의 7미터가 최대다.

게임에서는 만렙을 찍은 최후반의 솔라시우스가 3미터까지 접근했었다. 그게 최대였지.

하지만 태광휘와 합쳐진 솔라시우스라면 어떨까?

그런 여왕에게 아주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유일한 사람. 그녀의 피부에 손을 댈 수 있는 사람.

‘그 정도 업적이라면…….’

황족을 증오하는 여왕에게도 다르게 와 닿지 않을까?

괜한 추측을 해 본다.

‘아니.’

하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목숨을 건 도박은 금물이다. 이건 게임이 아니야.’

확실치 않은 추측만으로 여왕에게 가까이 갔다가 얼어 죽으면 개죽음이다.

게임에서처럼 죽으면 다시 시작한다는 보장도 없다.

‘마왕이 아닌 여왕에게 죽을지도 몰라. 어쩌면 그게 마왕이 의도한 것일 수도 있고.’

설령 얼어 죽지 않는다 해도 역으로 오해와 경계심이 더 커질 수도 있다. 태광휘의 기억으론 게임 초반부 루시푸르네의 경계심은 엄청났으니까.

‘신중해야 한다. 지구에서 마왕과 싸웠을 때처럼. 확신이 들어도 두 번 세 번 또 의심해 봐야 한다. 이건 마왕 세피로스가 짠 저주니까.’

솔라시우스이자 태광휘는 속으로 되뇌었다.

―루시, 루시를 부탁해요.

문득, 원작 플레이에서 들었던 목소리가 떠올랐다. 여왕 루시푸르네의 인성과 별개로 그녀의 저주는 풀어 주고 싶었다. 비록 게임상에서 받은 부탁이지만 약속은 약속이니까.

‘여왕에게 걸린 설원의 저주야 태양샘 반지와 세계수 묘목을 제대로 쓴다면 가능할 거야. 정 안 되면 내 태양 이능도 보태면 될 테고.’

게임에선 재상이 방해하는 바람에 실패했지만, 이번엔 다르다. 적어도 자신은 재상이 배신자라는 것을 알고 있다.

‘문제는 여왕에게 재상이 배신자라는 사실을 납득시켜야 한다는 거다.’

다시 원점이다. 태양 이능의 부작용도, 설원의 저주를 해주할 방법도, 일단 여왕의 호감도를 얻어야만 가능하다.

생각은 꼬이고 꼬여서 결국 원점에 도달했다. 깔끔한 해답은 없었다.

“정말 빌어먹을 저주로군.”

상념 속에서 솔라는 짜증 가득한 한마디를 육성으로 내뱉었다.

빌어먹을 저주. 빌어먹을 게임. X망겜!

괜히 몸에서 열이 뻗치는 기분이다. 기분 탓인지 몰라도 머리와 몸이 뜨겁고 더워졌다. 이래서는 곤란하다.

솔라는 급히 마왕과 여왕에 대한 생각을 접었다.

‘그러고 보니 솔라시우스의 여동생도 있었지.’

그러고는 그의 피와 머리를 차갑게 식힐 다른 주제를 떠올렸다.

바로 솔라시우스의 하나밖에 없는 여동생이자 1황녀인 루나시르네다.

어릴 적 황후 옥타나의 추격을 피해 도망치던 중 잃어버린 여동생.

그는 목에 건 목걸이 형태의 로사리오를 셔츠 안에서 꺼내 만지작거렸다.

‘이 로사리오가 빛나는 것을 보니 죽지는 않았어.’

그랬기에 게임 플레이 당시에도 후반부까지 여동생 찾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1황녀의 생존을 알리던 로사리오는 후반부까지 빛났기 때문이다.

사아아아.

루나시르네를 생각하자 끓어올랐던 열기가 서서히 식는 게 느껴졌다. 태광휘와 합쳐진 솔라시우스의 염원 때문인가 싶다.

“그래, 이번엔 반드시 찾아보자.”

솔라의 염원을 향해 말하는 것인지, 솔라와 하나가 된 태광휘 자신에게 하는 것인지 모를 혼잣말이 방 안을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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