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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여왕의 EX급 방랑기사-6화 (6/212)

제6화

#6.

날이 밝았다.

솔라시우스는 상인들의 안내를 받아 칼트 상단이 들어선 건물로 향했다.

‘서프라이즈를 노렸나?’

그리고 칼트 상회에 도착한 솔라는 피식 웃었다.

부드러운, 어떻게 보면 흐릿해 보이는 미소지만 만족이 담긴 미소기도 하다.

“로안 샬루트 기사님, 제대로 다시 인사드립니다. 제가 바로 칼트 상단의 상단주 칼트입니다.”

비단으로 만든 화려한 옷을 입은 남성이 솔라를 반겼다.

상단주 칼트. 익숙한 얼굴이다. 그의 팔에는 이젠 더 이상 붕대가 감겨 있지 않았다.

그저 문신처럼 진한 흉터만이 팔에 남았을 뿐이다.

“상단주가 직접 상행을 다니는 건가?”

“제 신분을 이제야 밝히게 된 점을 사과드립니다, 로안 기사님. 요즘 같은 시국일수록 직접, 그리고 몰래 나서야 해서 말입니다.”

“용병들이 단체로 도망친 것도 우연은 아니었나 보군.”

“그렇습니다. 경쟁 상단에서 작업을 친 용병단이었습니다. 아마 도적단 습격 중 일부도 그들 짓일 겁니다.”

칼트는 이를 갈면서 답했다. 머릿속으론 복수와 응징을 구상 중일 것이다.

“기사님이 아니었다면 목숨을 잃었을 겁니다. 설령 목숨을 구했다 하더라도 재산과 신용 그리고 팔 한쪽을 잃어야 했을 겁니다.”

칼트는 팔에 깊게 난 흉터를 만지작거리며 다시 한번 감사를 표했다.

그런 칼트 상단주의 옆에는 이전까지 상인들의 대표로 알려져 있었던 도미닉이 비서처럼 조용히 서 있었다.

‘도시 오스키에서부터 본격적인 분기점이 시작될 것 같군.’

솔라는 직감했다. 오스키에 생각보다 쉽게 입장한 것부터, 본래 게임에선 죽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칼트 상단주의 생존까지, 많은 부분이 바뀌었다.

“기사님은 저 칼트와 저희 칼트 상단의 구원자십니다.”

금발의 방랑 기사를 보는 칼트와 상인들의 눈이 빛났다.

“그리고 저희는 상인입니다. 주군에 충성하는 기사처럼, 진리를 탐구하는 마법사와 마녀처럼, 상인 또한 언제나 정확한 값을 치르기로 맹세한 직업이지요.”

칼트는 그 말과 함께 상단 직원들에게 시선을 돌렸고.

쿠웅!

뒤이어 직원들이 거대한 상자 하나를 낑낑 들고 오더니 솔라 앞에서 내려놓은 뒤 활짝 열었다.

“도망친 용병 놈들 몫에다가 기사님의 업적까지 더한 금액입니다. 거기다 전리품 값도 더했습니다.”

사람 몸통보다 큰 상자 안에는 금화와 은화가 가득 들어 있었다. 비율을 보면 은화가 8할, 금화가 2할이었다. 동화는 하나도 없었다.

“이 돈이면 왕도에서 괜찮은 저택 두 채는 사고도 남을 겁니다.”

돈더미를 본 솔라는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게임을 통해 이세계에서 금화와 은화의 가치를 어렴풋이 알았기에 더욱 만족할 수 있었다.

‘적어도 활동 자금으로 부족하진 않겠어. 문제는 이걸 보관할 인벤토리인데.’

문제는 이걸 어떻게 보관하냐는 것이다.

“아직 끝이 아닙니다, 기사님.”

하지만 그 걱정은 뒤이어 칼트가 탁상 위에 올린 마도구를 보고서 사라졌다.

“그리고 이건 저의 목숨값이자, 기사님이 알려 주신 치료법에 대한 값입니다.”

칼트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탁상 위의 마도구를 솔라에게 건넸다.

그가 건넨 마도구는 마법진이 복잡하게 새겨진 금으로 된 팔찌였다. 황금 팔찌 정중앙엔 엄지손톱 두 개 크기만 한 붉은 보석이 박혀 있었다.

“아공간 인벤토리?”

“그렇습니다. 참고로 신분패 기능도 겸하고 있습니다.”

평범한 사람은 평생을 가도 볼까 말까 한 최상위 마도구다. 하지만 솔라시우스는 이 마도구를 한눈에 알아봤다.

‘이렇게 달라지는군. 게임 중반부에서나 얻었던 아이템이었는데.’

아공간 인벤토리. 심지어 상등품이다. 이 정도면 어지간한 마차 하나 크기의 아공간을 쓸 수 있다.

“저희 칼트 상단이 보유한 가장 값비싼 마도구입니다. 상단주인 저도 아까워서 쓰지 않았던 상품이지요.”

“아주 만족한다. 잘 쓰겠다.”

과한 보상 같지만 솔라는 흔쾌히 받았다.

그는 아공간 인벤토리를 손목에 찼다.

처억, 척!

손목에 가져다 대자마자 착용자를 인식하기라도 했는지 절로 크기가 맞아떨어졌다.

이어서 솔라는 옆에 있던 금화 상자를 팔찌를 찬 손으로 잡았다.

그리고 이 상자를 아공간에 담고 싶다고 생각했다.

우우웅.

팔찌의 붉은 보석에서 홀로그램처럼 마법진이 생성되더니 상자를 아공간 안으로 집어삼켰다.

중세 판타지는 이런 점이 재밌다. 아래 신분들은 중세 그대로의 생활을 하는 반면에, 귀족과 마녀, 마법사는 어떤 부분에선 현대보다 더 나은 마도구를 누렸다.

“그나저나 치료법에 대한 값이라니? 그게 무슨 뜻이지?”

만족스러운 보상을 받은 솔라시우스는 칼트에게 물었다.

“예, 제 팔을 치료하게끔 공유해 주신 치료법을 저희가 쓸 수 있게 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키트로 만들어서 팔 생각인가?”

“정확하십니다.”

“마음대로 하게.”

“감사합니다! 이 키트의 이름을 기사님의 이름을 따서 로안 키트라고 부르고 대대로 찬양하겠습니다.”

솔라는 왼손에 찬 아공간 팔찌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보상이 과하다 싶었는데 이런 식으로 머리를 굴리다니.’

피와 철이 가득한 시대다. 잘만 팔면 1년도 안 가 이 마도구 값은 뽑고도 남을 터.

‘애초에 내가 만든 것도 아니니까.’

아깝거나 손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저작권 개념이 없는 세상이다 보니 로열티 주장은 거의 지켜지지 않을 것이다. 애초에 이세계에서 계속 살 생각도 없고.

‘보아하니 제국 황실에서 사용하는 치료 키트라고 홍보할 셈이군.’

저번에 얼핏 들으니까 그렇게 오해한 듯싶었다. 뭐, 상관은 없다.

이후로도 상인들의 보은은 계속됐다.

드워프가 만들었다는 숫돌 마법이 인챈트된 검과 단검을 받기도 했고, 최고급 천으로 만든 여벌의 속옷과 옷, 신발도 받았다.

통풍이 잘된다고 하는 가죽 갑옷도 받았는데, 마법 처리된 게 아니라서 아마 입을 일은 없을 듯하다.

그 외 여행에서 필요한 다양한 물품들을 전부 고급으로만 선물 받았다.

‘마치 조공받는 기분이군.’

문득 지구에서 헌터로 있을 때, 팬들과 기업들로부터 받았던 각종 후원품이 떠올랐다.

그는 이 모든 선물을 아공간 인벤토리에 넣었다.

그렇게 서로가 만족하는 보은의 시간을 마치고.

솔라는 칼트 상단주가 선물한 비단으로 만든 옷을 입었다. 그리고 함께 오스키의 시장을 만나러 이동했다.

* * *

루한 남동부의 도시 오스키는 문라이트 변경백에 위치해 있다.

그러나 오스키는 문라이트 후작이 다스리는 도시가 아니다.

도시 오스키 자체는 왕실 직할령이고, 왕도 윈테라에서 파견된 관리가 시장이 되어 도시를 관리했다.

때문에 오스키의 시장은 왕도의 분위기에 민감할 수밖에 없었다. 특히 여왕이 계시는 순백궁의 메시지에는 더더욱.

―로안 샬루트라는 방랑 기사가 오면 받아 줄 것.

―그에게 절대 적개심을 가지지 말 것.

―그가 요청하는 모든 것에 협조하고 지원을 아끼지 말 것.

―이 모든 사항은 은밀히 행해야 하고, 절대 발설하지 말 것.

순백궁, 그것도 여왕 폐하께서 직접 내리신 밀명이다.

여왕 루시푸르네는 백성과 귀족들의 사랑을 받는 성녀 같은 존재.

하물며 자신 같은 관리에게는 성녀를 넘어 신과 같은 존재시다.

“로안 경, 여왕 폐하와 관계가 어떻게 되시오?”

그가 로안 샬루트라는 망명 황족을 보자마자, 첫인사 대신 이런 질문을 하게 된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딱히 없소만?”

그런 시장의 질문에 솔라시우스는 고개를 갸웃하며 답했다.

“그렇소? 이상하네…….”

“뭐가 말이오?”

“아니오. 내가 착각한 모양이오. 당신의 무용담이 그새 윈테라의 순백궁까지 퍼진 듯하더라고.”

“여왕께서 나를 알고 계신다는 것이오?”

‘도적 좀 많이 죽였다고 일이 이렇게 커지나?’

솔라는 고개를 갸웃했다.

“추…… 추측일 뿐이니 괜한 오해는 하지 마시오. 그나저나 루한으로 망명 왔다는 것은 여왕 폐하를 알현하러 간다는 뜻이겠구려?”

“그렇소.”

게임에서의 여왕을 떠올린 솔라는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폐하를 알현하게 되면 나에 대해 잘 좀 전해 주시오. 내, 경이 원하는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을 테니.”

“……그러지.”

졸지에 청탁을 받아 버렸다. 솔라는 떨떠름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 도시를 떠나면 시장의 얼굴은 기억에서 자연스레 잊을 것 같았지만.

시장과의 이상한 첫인사를 마치고, 오스키 시장이 주최하는 만찬이 열렸다. 만찬의 이름은 ‘칼트 상단의 무사 귀환과 도적단을 토벌한 로안 샬루트 경의 업적을 축하하는 만찬’이다.

언제부터 오스키가 중소 상단을 챙겼나 싶겠지만, 로안 샬루트를 도와주라는 여왕의 명을 행하기 위한 시장의 눈물겨운 꼼수였다.

‘아무리 시장이라고 해도 이 정도 만찬이면 부담일 텐데?’

솔라는 손에 든 차가운 수정 잔을 들고서 식탁에 올라온 음식들을 보았다.

육해공의 고기들이 찌거나 굽거나 스튜로 끓여서 푸짐하게 차려져 있었고, 루한에서는 귀한 후추와 같은 향신료도 아끼지 않고 팍팍 넣었다.

‘심지어 튀긴 음식도 있어.’

이세계에선 볼 수 없을 것 같았던 튀긴 음식도 보였다. 고기를 빵가루가 든 배터에 적셔서 끓는 기름에 튀긴 프라이드 같은 음식 말이다.

‘맛은…… 치킨보다 못하지만.’

그래도 간만에 먹어 보는 바삭한 식감이 즐거웠다.

‘도대체 왜? 칼트 상단주가 생각보다 거물이었나? 내가 죽인 도적단이 그렇게 많았나?’

한편으론 의구심도 들었다. 귀족이라고 해도 매번 이렇게 먹지는 않았다. 루한에 소환된 지 얼마 안 됐다고 해도 말이다. 게임 ‘루한의 국서’를 몇 주간 플레이하고 배드 엔딩까지 본 경험이 있다. 더불어 솔라시우스의 기억도 있고.

“더 따라 드리겠습니다.”

만찬을 돕는 하인이 다가와 솔라의 빈 수정 잔에 음료를 따랐다. 진한 사과 향이 났다. 술을 마시면 몸에서 열이 나와 더울 것 같아서 사과주로 대신했다.

싸아아아.

수정 잔에 음료가 들어오자, 수정잔 바닥에 마법진이 은은히 빛난다. 그러더니 잔 안에 든 사과주를 차갑게 만들어 줬다.

마도구다.

수정잔뿐만 아니라 식탁에 올라와 있는 몇몇 식기들도 마법진을 은은하게 빛내고 있다. 음식 상태를 조리 직후로 유지시켜 주는 마도구들이다.

‘요리 값보다 마석 값이 더 나가겠어.’

아무리 생각해도 이 만찬은 이상했다. 그렇지만 이상한 건 이상한 거고 음식은 음식이다.

솔라는 다시없을 호화로운 음식과 시원한 음료를 일단 즐기기로 했다.

한편, 솔라와 얼마 떨어지지 않은 자리에선 오스키 시장과 칼트 상단주가 만찬도 뒤로하고 진지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왕도에서 사령술사를 토벌할 2차 토벌대를 준비하라는 명령이 있었네.”

“1차 토벌대는 실패한 겁니까?”

“그러하네.”

“저런……. 바깥은 제국군에 안으로는 사령술사까지……. 참으로 난세입니다.”

“어쩌면 사령술사의 폭주도 제국이 저지른 것일 수도 있지.”

“놈들이 설원의 가호 안에서 살육을 벌일 방법을 찾은 것일까요?”

칼트가 걱정 가득한 눈을 했다.

사령술사가 폭주한 곳은 변경백의 내곽과 외곽 사이였다.

설원의 가호가 옅어지는 경계선이라고 해도, 이렇게 큰 살육이 일어나는데 아무 기척도 없는 것이 불안하다.

“지금의 사령술사를 보면 그럴 수도 있지. 부디 제국과 관련 없길 바라야지.”

시장은 칼트와 심각한 이야기를 나누면서도 틈틈이 시선을 돌렸다. 만찬을 즐기고 있는 방랑 기사를 살폈다.

‘술은 안 마시는군. 음식은 튀김류를 좋아하나? 보고서에 넣을 게 더 생겼어.’

여왕에게 그에 대한 보고서를 작성해서 올려야 한다. 늘 은둔에 가까운 생활을 하시는 폐하께서 모처럼 관심을 가진 기사. 일생에 몇 번 없을 폐하와의 직통 보고.

무엇 하나 중요하지 않은 게 없다. 어찌 보면 인생이 걸린 일.

‘은밀히! 은밀히 도와야 해!’

마음 같아선 그에게 다가가 이런저런 말도 걸고 싶다. 하지만 은밀히 도우라고 하셨다.

‘아까는 너무 경솔했어.’

처음 다짜고짜 폐하와의 관계를 물어본 것도 뒤늦게 후회 중인 시장이었다.

‘이 만찬의 이름도 괜히 걸리는군. 하지만 도적 무리를 토벌한 로안 경의 업적을 무시할 수도 없으니……. 그래, 이건 티가 안 났을 거야.’

좀 걸리는 부분이 있었지만, 나름 합당한 이유를 만들어 정신 승리를 했다.

‘뭘 어떻게 도와야 잘 도왔다고 어필할 수 있을까?’

시장은 칼트와 대화를 나누면서도 고민을 이었다.

‘밤 시중 들 여자도 보낼까?’

종종 들리는 창관에 얘기할까도 생각했지만.

‘아니야. 여왕께서 관심 가지는 남자다. 괜히 오버해선 안 돼. 내 딸아이와 도시 귀족들의 여식을 만찬에 부르지 않은 것도 이 때문이니까.’

이내 생각을 접었다. 로안이 직접 요구해 오지 않는 한 섣불리 행동하지 않기로 했다.

‘시장의 온 신경이 로안 기사님께 가 있어.’

그런 시장을 보는 칼트 또한 눈을 빛냈다. 명색이 상단주다. 눈앞에서 시장의 눈동자가 대놓고 왔다 갔다 하는데 모를 수가 없다.

‘로안 기사님은 생각보다 더 거물인가 보군.’

그의 실력, 그의 인품, 그의 신분, 무엇 하나 평범하지 않았다만.

‘분명 시장은 기사님 앞에서 여왕 폐하를 언급했어.’

여왕께서도 유독 관심을 가진다는 것은 의외였다.

‘관심도 경계나 적대가 아니야. 호의에 가까워. 도대체 뭐지?’

제국 황족은 루한에서 환영받는 신분이 아니다. 여왕에게는 더더욱.

‘복잡하게 생각할 필요는 없지. 결론은 간단해. 로안 기사님은 매우 대단하신 분이 맞고, 우리 칼트 상단은 기사님에게 목숨의 은혜를 입었어. 그분을 위한 도리를 다하기만 하면 돼.’

칼트는 결의에 찬 표정으로 다짐했다.

‘아까 드린 아공간 인벤토리 말고 로안 기사님이 좋아하실 게 뭐가 있을까? 그래, 탈것! 말을 준비하자!’

‘어떻게 하면 티 안 내고 로안 경을 만족시키지? 폐하께 자랑스레 보고를 올려야 하는데…… 이 만찬으론 부족하단 말이지.’

시장도 상단주도, 솔라시우스에게 어떻게 하면 더 잘해 줄 수 있을지 고민에 빠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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