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여왕의 EX급 방랑기사-11화 (11/212)

제11화

#11.

처음 솔라는 리나의 정체를 1차 토벌에서 죽은 상급 마녀의 제자 정도로 추측했었다.

‘잘못 짚어도 한참 잘못 짚었군.’

하지만 아니었다.

‘게임에서 죽음의 대마녀 리나 리버스는…… 흉측한 모습이었어.’

솔라의 시선이 아까보다 자신의 눈치를 더욱 심하게 보고 있는 리나에게로 향했다.

‘일러스트는 마치 화상을 입은 언데드 같았지. 그래서 이자벨 리버스가 만든 키메라나 리치로 생각했었는데…….’

그러다가 문득, 리나가 방금까지 묶여 있던 화형대를 보았다.

‘그렇게 된 거였나?’

원래는 결국 화형을 당했을 것이다. 이후 제자가 불타 죽은 것에 분노한 이자벨이 나타나 2차 토벌대를 전멸시키고, 불타 죽은 리나를 리치로 만들었을 것으로 겨우 추리할 수 있었다.

그렇게 생각에 잠겨 있는데.

“저기…… 나 어떻게 할 거야?”

리나가 옆에서 조마조마한 눈으로 물었다.

“…….”

솔라시우스는 고개를 돌려 여전히 자신의 옷깃을 꽉 쥐고 있는 리나를 보았다.

훗날 죽음의 대마녀가 되었을 견습 마녀는 어깨를 잘게 떨고 있었다.

* * *

게임 ‘루한의 국서’에서 태광휘가 그렇게 개고생해 가며 여왕의 호감작을 했던 데에는 다 이유가 있다.

루한의 모든 백성과 귀족, 마녀, 마법사, 성직자가 각자의 앙금을 뒤로하고 한마음 한뜻으로 여왕 루시푸르네를 사랑하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다.

이세계 설정상, 마왕과 맞설 수 있는 잠재력을 지닌 유일한 존재가 바로 설원의 대마녀 루시푸르네이기 때문이다.

10년 전, 악황후이자 거짓의 대마녀 옥타나가 황족들을 사신으로 보내서 설원의 계승을 망치려 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그렇게 망쳐 버린 반쪽짜리 설원의 계승임에도, 설원의 가호는 암흑제국의 침략으로부터 왕국 루한을 보호했다.

대륙의 모든 왕국이 불타는 와중에도, 루한은 변경백의 국경에서만 피를 흘렸다. 전부 이 설원의 가호 덕분이다.

루한 사람들에게 여왕 루시푸르네는 설원의 저주를 품고 설원의 가호를 펼치고 있는, 안쓰럽고 고결한 성녀였다.

스스로를 희생하여 루한을 수호하는 성녀.

그랬기에 루한에서 여왕을 향한 백성들과 귀족들의 충성도는 굳건했다.

루한의 왕도 윈테라.

순백궁의 알현실.

차가운 알현실의 빨간 카펫이 깔린 바닥. 루시푸르네가 앉아 있는 옥좌에서 정확히 7미터 거리.

“최근 눈여겨보는 방랑 기사가 있다고 들었습니다.”

잿빛 머리에 붉은 눈동자를 한 여인이 부드럽게 물었다.

30대 초반의 아름다운 외모. 늘 미소 짓고 있는 입가에는 부드러움 분위기가 가득하다.

“그렇다, 재상.”

하지만 여왕 루시푸르네는 이 세상에서 저 미소만큼 차가운 미소는 없다고 확신했다. 그녀는 손목에 찬 나뭇잎 팔찌를 의식하며 애써 표정과 목소리를 다스렸다.

“저에게 얘기하셨으면 되었을 것을…….”

“재상은 공무에 바쁘니까, 개인적인 호기심을 재상을 시켜 풀 순 없다고 생각했다.”

루한의 재상이자 여공작, 재의 마녀 아리아 데스모를 루시는 태연히 상대했다.

‘옛날에는 일주일 중 오직 이 순간을 고대했었지.’

속으론 회귀 전의 어리석고 순진했던 자신을 책망하며.

“폐하의 배려에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가증스러운 배신자가 고개를 조아린다.

“그래서, 그 망명 황족 출신의 방랑 기사는 어찌하시겠습니까? 얼핏 듣기론 호의에 가까운 듯하던데.”

은밀히 행동할 것을 명했지만 결국엔 재상의 귀에 들어간 것 같았다.

하긴, 그녀의 명을 수행하는 기사와 관리만 이제 두 자릿수다.

루한의 거의 모든 행정을 총괄하는 재상의 귀에 안 들어가는 게 이상하다.

“비록 황족이라 하나, 지금같이 암울한 시기에는 인재가 필요하다. 나는 어머니를 잃고 저주를 받은 여인이 아닌, 루한의 미래를 걱정하는 여왕으로서 결심한 것뿐이다.”

“혹시 대마녀의 예지와 관련된 일입니까?”

여왕의 대답에 재상이 눈을 빛냈다.

“예지와는 관련 없다.”

루시는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그저 망명 황족이라는 점과 그가 펼친 무용 때문에 주시하는 것뿐이다.”

“그렇군요. 저도 기사 로안 샬루트의 무용담은 들었습니다. 혼자서 변경백 동부의 도적들을 척살하고 그 일대의 치안을 안정시켰다는 소문 말입니다. 다소 과장된 거 같긴 하지만 소문의 반이라도 맞다면 분명 루한의 흥복이옵니다.”

“그래. 설원의 가호가 옅은 변방에 큰 도움을 주었지.”

루시는 1초라도 이 알현이 끝나기를 바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사령술사 이자벨을 척살할 2차 토벌을 준비한다 들었습니다.”

하지만 재상은 당장 알현실을 떠날 생각은 없어 보였다.

“그렇다. 이번엔 교단이 함께한다고 했도다. 지금쯤 집결을 끝냈을 것이다.”

“제가 직접 나설까요? 폐하.”

아리아의 말에 루시는 눈을 작게 찡그렸다.

‘회귀 전에는 내가 역으로 부탁했는데.’

사령술사의 폭주는 아주 큰 사건이었다. 변경백, 그것도 설원의 가호가 옅은 외곽 쪽에서 일어난 일이지만, 그렇게 큰 살육을 벌이고도 설원의 가호가 가동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중에 안 사실이었지만. 설원의 가호에 저항할 수 있는 그림자 핵 때문이었지.’

회귀 전에는 2차 토벌을 준비하면서 루시가 재상에게 직접 나설 것을 부탁했었다. 하지만 당시 재상은 공무가 바쁘다며 2차 토벌대를 믿어 보자고 했었다. 그리고 2차 토벌은 실패했었다.

‘날 가지고 놀았었군.’

루시는 속으로 이를 갈았다.

“아니다. 재상은 업무가 많으니 괜찮다.”

회귀 전과 정반대가 된 지금 상황에 슬그머니 기쁜 마음이 들었다.

‘역시, 사령술사 이자벨과 죽음의 대마녀는 재상과 관련 있었어.’

결국 2차 토벌이 실패하자, 회귀 전의 루시는 다시 한번 아리아에게 사령술사의 척살을 부탁했었다.

아리아는 마지 못하는 척 연기하며 여왕의 명을 따랐다.

하지만 정작 그곳에 갔다 온 재상은 아무것도 없다고 보고했다.

그리고 몇 년 후, 제국에서 이자벨과 유사한 사령술을 쓰는 죽음의 대마녀, 리나 리버스가 나타났다.

“알겠습니다. 2차 토벌은 부디 성공해야 할 텐데요.”

“2차 토벌은 반드시 성공할 것이다.”

재상의 말에 여왕은 확신에 찬 어조로 말했다.

“……?”

확신에 찬 여왕의 태도에 아리아는 의아한 눈을 했다.

‘하긴 아직 그림자 핵의 상태가 아쉽기는 했어. 2차 토벌대까지는 먹어 줘야 잘 숙성될 것 같으니. 2차 토벌이 실패하면 그때 가서 수확해야지.’

속으로는 나름의 계략을 구상하면서.

“그럼, 폐하. 아쉽게도 이만 알현을 마쳐야 할 것 같습니다.”

재상은 아쉬움이 가득 묻어나는 목소리로 여왕에게 퇴실을 청했다.

“그래, 바쁠 텐데 어서 가 보거라.”

루시는 기다렸다는 듯이 재상의 퇴실을 반겼다.

“……?”

더더욱 아리아의 표정이 의아해졌다.

불과 얼마 전만 해도 자신과의 알현을 고대하던 여왕이었다. 그녀가 퇴실이라도 하려 하면 아쉬운 티를 대놓고 보였다.

왜냐면 재상은 현재 왕도에서 여왕과 가장 가까이 있을 수 있는 유일한 마녀였기 때문이다. 또 그녀 앞에서 1시간 가까이 버틸 수 있는 마녀였다.

늘 혼자라서 외로웠던 루시에게 누군가와 오랫동안 마주하고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것은 커다란 즐거움이었다.

‘뭐지?’

그랬던 여왕이 어느 순간 바뀌었다.

재상 아리아 데스모는 찝찝한 의문과 함께 알현실을 나갔다.

재상이 나가고 다시 텅 빈 알현실.

“휴우…….”

루시는 크게 숨을 내쉬었다.

본능적으로 어머니의 팔찌를 만지작거렸다. 그녀가 맡을 수 있는 유일한 풀 내음이 여왕의 피로한 마음을 달랬다.

회귀 전에는 참으로 보기 싫었던 텅 빈 알현실이지만, 지금은 차라리 이렇게 텅 빈 알현실이 보기 편했다.

‘내가 변했다는 것을 눈치챘을 거야.’

재상의 알현을 받은 것은 이번이 3번째다. 회귀 이후에 말이다.

‘하지만 그녀를 앞에 두고서 예전처럼 매달리는 짓은 정말이지 할 수 없어.’

루시는 치를 떨었다. 회귀 전의 재상이 자신에게 했던 짓을 떠올리면 당장이라도 그녀를 죽이고 싶었다.

설원의 저주를 받았다고 하나, 루시의 마력이면 재의 마녀 따위야 어렵지 않게 죽일 수 있었다.

더구나 지금은 대마법진 이노센티아가 만들어진 시기도 아니다.

‘하지만 그건 하책이야.’

그럼에도 루시는 쭉 참고 재상을 살려 뒀다.

‘재상은 악황후 옥타나의 수하. 이를 역이용할 것이다.’

루시푸르네는 작게 미소 지었다.

“친구는 가까이, 적은 더 가까이.”

여왕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회귀 전 솔라의 망명을 받아 줄 당시, 재상이 루시에게 했던 말이기도 했다.

그렇게 재상이 퇴실하고서 30분 정도 지났을 때.

“폐하! 왕실 기사단장 하이마 경이 알현을 청했사옵니다.”

알현실 문 쪽에서 시녀장 베네사의 외침이 들렸다.

“어서 들라 하라!”

루시는 반가운 얼굴을 하고서 하이마의 알현을 반겼다.

기사단장 하이마가 알현실에 들어섰다. 10미터의 거리. 재상 아리아와 달리 추위에 잘게 떠는 목과 어깨.

여왕은 미안함을 느꼈지만, 한편으론 그가 가져왔을 소식을 기대했다.

“전대 국서께서는 답장이 없던가?”

“송구하옵니다.”

“그런가? 어쩔 수 없지.”

루시는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그…… 기사 로안 샬루트는 교단과 잘 합류했고?”

이내 얼굴을 풀고선 가장 고대했던 소식을 물었다.

“그렇습니다, 폐하.”

루시의 질문에 하이마는 곧바로 대답했다.

원래 역사와 달리 솔라는 토벌대에 참가했다.

‘호의를 베풀어서 바뀐 것인가?’

루시는 미안함을 느낌과 동시에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만약 그가 토벌대에 참가하지 않았다면 위험을 각오하고 자신이 직접 나설 각오까지 했었다. 재상에게 이 찜찜한 일을 맡길 생각은 없었으니까.

“자세히 말해 보거라.”

“예, 통신 구슬로 받은 내용을 정리하자면…….”

그렇게 기사단장 하이마는 변경백에서 왕궁까지 이어진 통신 구슬의 전보를 여왕에게 전했다.

설원의 저주는 아주 강력해서 그녀 근처에 오면 마도구도 고장 났기 때문에 이렇게 직접 보고해야 했다.

루시는 재밌는 라디오 사연을 듣는 애청자의 기분으로 하이마가 가져온 솔라의 소식을 경청했다.

“……그렇게 지금은 캐리어 휘센 에어컨이라는 이름의 마녀와 합류한 상황입니다. 지금은 사라진 제국의 에어컨 학파 출신이라고 했습니다.”

“……?”

하이마의 보고를 듣던 루시의 표정은 점점 굳어졌다.

“둘의 사이는 꽤 가까운데…… 제국에서 그가 데리고 있었던 몸종이라는 얘기도 있고, 애인이라는 얘기도 있습니다. 그러나 둘 다 아직 확실하진 않습니다.”

“……!”

덜덜덜덜덜…….

보고가 이어질수록 루시의 손발이 떨렸다.

‘솔라 옆에 여자라니?!’

이어서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나이는 15세 정도로 보였습니다. 회색 머리카락과 회색 눈동자에…….”

그런 루시의 눈치를 보며 하이마는 보고를 이었고.

“예쁜가?”

그의 보고를 더 이상 듣기 힘들었던 루시는 짧게 물었다.

“예?”

“예쁘냐고 물었다.”

“……귀여운 상이라고 했습니다.”

쿠웅!

다시 한번 그녀의 심장이 내려앉았다.

‘솔라의 취향이 귀여운 여자였었나?’

루시는 수정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슬쩍 보았다. 머리에 얼음으로 조각한 꽃이라도 꽂아야 할지 진지하게 고민했다.

“알겠다…….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 그 마녀에 대해 알아…… 하아…… 보도록…….”

루시는 아찔함과 어지러움을 동시에 느끼며 간신히 하이마에게 명했고.

“알겠습니다.”

기사단장 또한 여왕의 심기를 눈치챘기에 어떤 반론도 하지 않고 바로 고개를 조아렸다.

휘이이잉.

여왕의 심경 때문인지 알현실에 한파가 더 크게 부는 느낌이다.

“가 보겠습니다, 폐하.”

하이마는 예를 표하고는 황급히 알현실을 떠났다.

“…….”

다시 홀로 남은 알현실.

루시는 알현실 뒤에 있는 자신의 침실 문을 열고 들어갔다.

‘여자라니! 솔라시우스에게 다른 여자라니!’

침실 안에서 그녀는 어지러움을 느끼며 서성거렸다.

‘조심해야 할 여자는 딱 두 여자! 변경백의 딸 유리아와 요정 숲의 리리아만 주의하면 될 줄 알았거늘!’

전혀 예상치 못한 곳에서 연적이 튀어나왔다.

‘그래……. 솔라시우스 정도면 여자에게 인기가 없을 수 없지.’

잘생겼다. 신분도 좋다. 능력도 출중하다.

특히 그의 인격과 충성심은 자신이 직접 경험했다.

그런 그였기에 회귀 전에도 솔라에게 호감을 보이던 여자들이 당연히 있었다.

물론 솔라시우스는 그녀들 대신 마지막까지 자신을 선택했었지만.

‘오히려 그가 아깝지. 이런 나랑 비교해서…….’

루시는 수정에 비친 자신을 보았다.

솔라와 비교해서 루시푸르네는 어떤가?

회귀 후 개과천선했다고 하지만 본래 성격은 좋지 못했다. 아둔하고 어리석어서 암군 그 자체였다.

무엇보다, 그녀에겐 설원의 저주가 있었다.

‘나처럼 더럽고 위험한 여자에게 솔라는 과분하지. 너무나.’

순식간에 그녀의 자존감이 뚝 떨어졌다.

죄책감과 함께 자기혐오가 또다시 밀려온다.

으으으으.

루시는 어깨를 움츠리고는 몸을 살짝 떨었다.

뚝, 뚝, 뚝…….

눈물이 몇 방울 나오기 시작했고 이내 눈꽃이 되어서 바닥에 쌓였다.

돌아가신 어머니의 팔찌를 꼭 쥐었다. 풀 내음이 어느 때보다 진하나, 혼란스러운 마음은 진정되지 않았다.

그렇게 얼마나 소리 없이 울었을까?

“아니! 아직 포기해선 안 돼! 무, 무엇보다, 둘이 연인 관계라는 게 확정은 아니니까! 추정일 뿐이잖아? 그래!”

루시는 이를 악물고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마력으로 침실 바닥에 마법진을 그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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