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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여왕의 EX급 방랑기사-12화 (12/212)

제12화

#12.

회귀 전, 설원의 저주를 풀기 위해 루시는 혼자서 여러 가지 연구를 했었다.

그녀 또한 여왕 이전에 대마녀 칭호를 얻은 마법사였으니까.

그 과정에서 다양한 발명품이 나왔다. 마도구도 있었고 마법진과 마법도 있었다.

비록 마도구는 설원의 저주 반경에선 쓰지 못하지만, 마법진과 마법은 아직 쓸 수 있었다.

회귀 전에는 이러한 것들을 너무 늦게 발명했었다.

발명했을 때에는 저주가 극에 달했던 때라서, 마법진 또한 마도구처럼 사용하지 못했다.

결국 그때 그녀가 발명한 마법진들은 사장되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재상이 설치할 예정인 증오스러운 대마법진 이노센티아는 아직 구상 단계에 있을 뿐이고, 이런 이유로 설원의 저주도 많이 안정적이다.

‘서둘러야겠어!’

그녀는 위험을 무릅쓰고 침실 바닥에 마법진을 그렸다.

머릿속으론 수식을 계산했다.

자신의 마력을 침실 안의 얼음과 수정에 부여해 마석으로 만들었다.

우우우웅.

어느덧 마법진이 빛나기 시작했고 그녀의 침실이 잘게 흔들렸다.

루시는 침을 꿀꺽 삼키고는 마법진 정중앙에 섰다.

우우우웅, 파앗―!

뒤이어 환한 빛과 함께 그녀의 몸이 사라졌다.

* * *

루한의 왕궁 순백궁에서 10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곳.

주위에는 아무도 없었고, 외롭게 붉은색 탑 하나가 서 있었다.

화아악.

텅 빈 공터에 환한 빛이 터지더니 여왕 루시푸르네가 나타났다.

꽈드득, 쏴아아아.

동시에 설원의 저주가 발동되어 사방 10미터를 꽁꽁 얼렸다.

“…….”

이를 본 루시의 표정이 굳었다.

텅 빈 공터였기에 망정이지, 만약 누군가가 있었다면 참사가 일어날 뻔했다.

‘경솔했어.’

아무리 급했다고 해도 생각이 짧은 행동이었다. 최소한 시녀장 베네사에게 얘기는 했어야 했다.

‘얼마나 남았지?’

여왕은 심각한 눈으로 설원의 가호와 설원의 저주를 머릿속에서 저울질했다.

‘30분. 왕궁이랑 가까워서 이 정도인가?’

그 이상 왕궁을 비우면 설원의 가호가 약해지고 설원의 저주가 강해질 것이다.

“그럼.”

루시는 조급함과 조마조마한 가슴을 안고서 발걸음을 옮겼다.

‘우와…….’

한편으론 설원의 저주를 받은 후 처음 보는 왕궁 밖 전경이 신기하기도 했다.

하지만 신기함과 신남은 짧았다.

그녀가 한 걸음 한 걸음 걸을 때마다 설원의 저주도 같이 이동했기 때문이다.

5분 정도 조심히 걸었을까.

저 앞에 검은 로브를 입은 마법사가 보였다. 흑마법사처럼 보이진 않았다. 상복을 입은 것 같은 어둡고 단정한 마법사 로브였다.

그 마법사를 본 루시는 걸음을 멈췄다.

그러자 검은 로브와 검은 후드를 쓴 마법사가 천천히 여왕에게 다가왔다.

그리고 약 7미터 정도 되는 거리에서 멈춰 섰고 이내 무릎을 꿇었다.

“폐하…….”

검은 로브를 입은 마법사의 목소리가 들렸다. 중년 남성의 목소리다.

쿵, 쿵, 쿵, 쿵.

목소리를 들은 루시의 심장이 잘게 뛰었다.

“오랜만이에요.”

루시의 입에서 무언가를 억누른 인사말이 나왔다.

한편 그녀의 두 눈은 마법사와 자신의 거리를 뚫어져라 쟀다. 재상 아리아와 마찬가지로 7미터였다.

“정말…… 오랜만이에요.”

결국 마법사를 향한 루시의 목소리에 떨림과 먹먹함이 묻었다.

“……아버지.”

회귀 전, 설원의 계승이 실패로 끝나고 그녀는 한 번도 전대 국서인 아버지를 찾지 않았다. 회귀 후에는 급히 불렀지만, 아버지 쪽에서 계속 거절했었다.

“저는 그저 죄인입니다. 선대 여왕과 지금의 폐하를 지키지 못한 무능하고 한심한 죄인입니다.”

전대 루한의 국서이자, 루시푸르네의 아버지 루카스 에버가든 대공은 힘없는 목소리로 답했다.

“그래서 저의 부름을 거절한 겁니까?”

“저는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게 없습니다.”

“…….”

후드 속, 그의 얼굴이 보였다. 붉은 머리카락에 붉은 눈동자, 미중년이라고 볼 수 있는 중후한 이목구비. 다만 붉은 눈동자는 탁했다. 실명한 것은 아니다. 모든 의욕을 잃고 자기혐오에 빠진 사람의 눈동자일 뿐. 회귀 전, 루시의 눈빛과 비슷하다.

“저는 지금도…… 저주를 품은 폐하를 목도하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너무 아픕니다. 미칠 것 같습니다.”

루카스의 흐릿한 붉은 눈동자에서 눈물 한 줄기가 흘렀다.

“그날의 일은 아버지, 당신의 잘못이 아니에요.”

그런 루카스를 보던 루시는 고개를 저었다.

10년 전, 설원의 계승식 당시.

루한의 국서였던 루카스는 아내와 딸의 계승식을 준비하고 경호했다.

그는 국서 이전에 상위 마법사였고 루한의 마탑주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가 준비했던 경호는 어처구니없이 뚫렸다. 결국 설원의 계승은 실패로 끝났다.

전대 루한의 여왕이자, 루시푸르네의 어머니는 자신을 희생하여 루시의 목숨을 구했다. 그러나 루시는 설원의 저주를 품게 되었다.

자신의 무능과 실책으로 한순간에 아내를 잃고 딸에게 저주를 품게 만든 루카스는 좌절했다.

자기혐오와 죄책감에 반쯤 미친 루카스는 왕궁 외진 곳에 조잡한 붉은 탑을 짓고는 스스로를 그곳에 유폐했다.

‘회귀 전의 나는 당신을 원망했었죠. 어리석게도.’

회귀 전, 루시는 그런 아버지 루카스를 원망했고 한 번도 찾지 않았다.

‘당신의 얼굴을 그토록 보고 싶었는데…… 저도 당신도, 용기가 없었죠.’

루카스의 최후는 자살이었다. 루시의 설원의 저주가 더 악화됐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자결한 것이었다.

짧은 상념을 뒤로하고, 루시는 자신과 7미터 거리에 선 루카스를 응시했다.

그가 재상과 동일한 거리까지 가까이 올 수 있다는 사실 또한 이제야 알았다.

“그날의 일, 설원의 계승식의 실패는 아버지의 잘못이 아닙니다.”

루시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전부 재상…… 아리아 데스모의 계략이었습니다. 그녀는 거짓의 대마녀인 악황후 옥타나의 수하였고요.”

“!!”

그녀의 말에 루카스의 고개가 처음으로 번쩍 들렸다. 눈동자 또한 여전히 탁했지만 격렬히 떨렸다.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나요? 어떻게 제국의 사신들이 아버지와 마탑의 결계를 쉽게 뚫었을까요?”

“……!”

“황족으로만 이뤄진 사신단의 구성도 이상했지요.”

“재상이 첩자란 말입니까?”

만약 재상이 배신자라면 충분히 가능했다. 루카스와 마탑 마법사들이 펼친 결계의 파훼식을 아는 마녀는 재의 마녀가 유일했으니까.

“하지만 그녀는…… 마나의 맹세로 결백을…….”

“그녀가 누구의 수하라고 했지요?”

재상 아리아는 거짓의 대마녀의 수하다. 거짓의 대마녀는 어떤 상황에서도 거짓을 말할 수 있었다. 그녀는 이를 이용하여 오래전부터 대륙에 혼란을 파종했었다.

“재상이…… 거짓의 대마녀의 권능을 받았다는 뜻입니까? 그게 가능하단 말입니까?”

루카스의 목소리에 불신보단 경악이 서렸다. 설원의 권능도 그렇고 거짓의 권능도 그렇고, 대마녀의 고귀한 권능은 계승식을 하지 않는 한 절대 공유할 수 없다.

그것이 이 세계의 마법 상식이었다.

“거짓의 대마녀는 찾은 듯합니다. 계승식을 하지 않아도 제한적으로 거짓의 권능을 공유하는 방법을.”

루시는 확신에 찬 어조로 고개를 끄덕였다. 회귀 전에 자신이 직접 확인한 것이니까.

“폐하는 그걸 어찌 아시는 겁니까?”

그 물음에 루시는 회귀에 대해 얘기할까 하다가 관뒀다.

“왕궁에 혼자 갇혀 있다 보면…… 온갖 상상을 하게 됩니다. 그러다가 의문이 들었고 오랜 시간 은밀히 알아본 결과입니다.”

“…….”

루시의 말에 루카스는 말이 없었다. 하지만 입을 열지 않아도 그의 눈빛과 표정이 모든 것을 표현했다.

분노. 오직 이 한 가지 감정이 그의 얼굴에 담겼다.

“저를 도와주세요. 섭정이 되어 주세요.”

여왕의 부탁.

“……!”

루카스의 눈이 커졌다.

동시에, 이상하게 누군가가 떠올랐다.

아내도 딸도 아닌 어떤 남자가.

잠깐이지만 그의 머릿속에 그날의 일이 펼쳐졌다.

갑작스러운 황족들의 침입으로 엉망이 된 계승식.

폭주하던 설원의 권능.

무능하게 절망하여 아무것도 하지 못했던 자신.

그런 자신과 달리, 필사적으로 설원의 폭주를 막던 남자.

늘 후드를 깊게 눌러썼던 정체불명의 남자.

“…….”

짧은 상념을 마친 루카스의 눈에 결심이 서렸다.

아버지의 붉은 눈동자와 딸의 푸른 눈동자가 서로를 비췄다.

“……물론입니다. 이 루카스 에버가든은 폐하의 방패가 되겠습니다.”

아버지는 딸의 부탁을 거절하지 않았다.

시간은 어느덧 30분을 채워 갔다.

둘은 이후에도 이런저런 대화를 나눴다. 오랜만에 만났지만 어색함이 짙었다. 대화는 많지도, 길지도 않았다.

“슬슬 시간이 다 되어 가는군요.”

루시는 슬슬 자신의 발아래에서 빛나기 시작하는 마법진을 보며 말했다.

“폐하.”

“네?”

루카스는 그런 딸을 보면서 그 남자에 대해 얘기해 줄까, 생각했다. 당시 루시는 의식이 없었고, 설원의 폭주 속에 있던 남자는 자신과 그자뿐이었으니까.

“……그 마법은 새로 개발하신 마법입니까?”

하지만 결국 입에서 나온 말은 생각과 전혀 다른 말이다.

“그렇습니다.”

“이토록 깔끔한 공간 이동 마법이라니, 대단합니다.”

루카스가 여왕을 대견하다는 듯 바라봤다.

“그런데 폐하.”

이어서, 그는 대견하단 눈빛을 뒤로하고 품 안에 손을 집어넣었다.

“제게 진실을 말하고 저를 섭정에 앉히기 위해 여기에 오신 것이 맞습니까?”

“……!”

그런 루카스의 말에 루시는 멈칫했다.

“그게…….”

사실 다른 부탁이 있었다. 부탁하려 했지만 막상 그의 얼굴을 보니 하지 못했다. 너무나 오랜만에 만난 아버지를 보자, 다짜고짜 그걸 달라고 말하기가 뭐했다.

“폐하…… 혹시 사랑을 하고 계십니까?”

“!!”

하지만 루카스는 루시를 대하면서 뭔가 눈치를 챈 모양.

“그, 그게 무슨……!”

생각도 못 한 발언에 루시는 눈에 띄게 당황했다.

“누군지 모르겠지만 저는 찬성입니다.”

그런 딸의 모습을 기쁘게 바라본 루카스는 웃으면서 품속의 손을 꺼냈다.

아공간 인벤토리를 뜻하는 마법진과 함께 푸른색 검이 나타났다.

“국서의 검, ‘윈테이라’입니다.”

루한은 대대로 설원의 대마녀가 여왕이 되어 통치하는 국가.

그리고 그런 여왕의 반려인 국서에겐 대대로 전해지는 보물이 있었다.

역대 루한의 국서들이 패용하는 검, ‘윈테이라’다.

“그러니까……!”

루카스가 윈테이라를 꺼내자 루시는 어쩔 줄 몰라 한다.

보통 윈테이라는 국서가 죽었을 경우에나 다음 대의 국서에게 이어진다.

그랬기에 지금의 루카스에게서 윈테이라를 달라는 것은 무례함 그 자체였다. 그는 아직 살아 있었고, 루시는 아직 결혼조차 하지 않았으니까.

“받으시지요.”

하지만 루카스는 상관없다는 듯 윈테이라를 루시에게 던졌다.

곧 왕궁으로 귀환할 여왕의 품에 푸른빛의 검이 안겼다.

루시가 서 있는 땅 위에는 공간 이동 마법진이 밝게 빛났다.

“하지만…….”

검을 받은 루시가 루카스를 바라보았고.

“저는 괜찮습니다. 조만간 섭정이 되어 알현하겠습니다.”

루카스는 바보 같은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딸을 웃으면서 배웅했다.

화아아악.

이윽고 눈부신 빛이 터졌다.

여왕은 사라졌고, 그녀가 있었다는 흔적은 꽁꽁 얼어붙은 땅만이 증명했다.

“…….”

딸이 사라지고.

“아리아 데스모.”

방금까지 부드러운 표정을 짓고 있던 루카스의 얼굴이 분노로 굳었다.

화르르륵.

뒤이어 그의 몸 주위에 불길이 치솟았다.

‘폐하께서는 살려 두라고 하셨어. 역으로 이용해야 한다고 하셨지.’

검은색 가득했던 그의 로브와 후드는 순식간에 붉은색으로 변했다. 마치 분노를 상징하는 것 같았다.

‘운 좋은 줄 알아라, 데스모! 폐하의 주의가 없었다면 당장 네년을 태웠을 것이다.’

길게 못 본 사이에 참으로 대견하게 성장한 딸이다.

‘일단 마탑부터 방문하자. 마녀회에 재상의 입김이 닿지 않은 마녀가 있는지도 확인해 보고.’

북부 대공이자, 전대 루한의 국서 루카스 에버가든은 딸을 위해 모든 것을 불사르기로 결의했다.

* * *

왕궁 순백궁으로 귀환한 루시는 여전히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느라 애먹었다.

‘사랑…… 사랑이라고? 내가 솔라를……!’

딱히 놀랍진 않았다.

그녀가 솔라에게 가진 감정은 사랑이 맞았으니.

입과 귀로 인지하는 것은 처음이었지만.

‘나 따위가…… 그를 사랑할 자격이 있긴 할까?’

괜히 자존감 떨어지는 생각만이 들 뿐이다.

잠시 침울해 있던 루시는 문득 침실 안 수정 거울에 비친 자신을 보았다.

‘그렇게 티가 났나?’

아버지는 어떻게 자신이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아신 걸까?

잘 모르겠다.

어떻게 아버지가 알았는지 여전히 미스터리였지만. 루시는 일단 넘어가기로 했다.

‘어쨌든 잘됐어.’

그녀는 당장 할 일이 많았다. 품 안에 있는 검을 만지작거렸다.

공간 이동 마법진을 응용해서 이 검을 솔라에게 전해야 했다.

‘윈테이라.’

정말 오랜만에 보는 검이다. 어릴 적 설원의 저주를 받기 전에는 종종 아버지 루카스가 허리춤에 착용했던 검이다.

회귀 전에는 루카스가 자살함에 따라 그가 가지고 있었던 윈테이라도 행방불명됐었다.

“…….”

윈테이라를 바라보는 루시의 눈에 그리움이 번졌다.

그리움 속 기억에는 어머니와 아버지의 모습이 떠올랐다.

뒤이어 두 사람의 얼굴이 루시와 솔라의 얼굴로 바뀌었다.

솔라는 기사답게 제복을 입고서 허리에 윈테이라를 멋지게 패용했다.

화악!

여왕의 얼굴이 홍시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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