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화
#17.
로안 샬루트.
본명은 솔라시우스 디 미테일 룬 마하.
본래 신분은 제국의 1황자.
여왕 루시푸르네는 그의 본명을 먼 훗날에야 알았다.
그가 악황후 옥타나의 추격을 피하기 위해 로안 샬루트라는 이름으로 활동했기 때문이다.
처음 그를 봤을 때 루시는 그를 제대로 보지 않았다.
설원의 저주로 10미터 넘게 떨어진 거리.
금발, 금안의 방랑 기사는 추위에 벌벌 떨면서도 눈동자는 진실되게 고요했다.
하지만 루시푸르네는 그 눈동자를 보지 않았다.
그저 황족임을 상징하는 금발, 금안과 그가 제국에서 망명 온 황족이라는 사실만이 눈에 박혔다.
황족이다. 옥타나의 사주를 받고 설원의 계승 당시 난입하여 계승식을 망쳤던 황족들.
덕분에 선대 여왕이었던 어머니는 목숨을 잃었다. 자신은 설원의 저주를 받아, 살아도 산 몸이 아니게 되었다.
늘 차가웠던 몸속의 피가 끓어오름을 느꼈다. 얼음처럼 차가운 심장은 더더욱 냉기를 뿜어 댔다.
참을 수 없는 짜증과 분노, 서러움이 갑자기 몰아쳤다.
“악황후 옥타나와 너희 황족들이 나와 내 어머니에게 한 짓을 알고도 여길 온 것이냐?”
애써 위엄 있게 입을 연 여왕의 목소리에는 참을 수 없는 격노가 묻어 있었다.
“이 설원의 저주를 봐라! 너희 친족들이 내게 저지른 과오를!”
알현실에는 모든 것을 얼려 버릴 것 같은 혹한이 몰아쳤다.
“…….”
하지만 솔라시우스, 당시엔 로안 샬루트라는 이름을 쓰던 남자는 묵묵히 버텼다.
자칫하면 얼어 죽을 수 있었음에도 꿋꿋이 견뎠다.
루시의 매서운 격정 앞에서도, 이 망명 황족은 물러서지 않았다.
“황실의 죄를 조금이라도 속죄하기 위해 왔습니다.”
그러다가 처음으로 들린 망명 황족의 육성.
“……!”
높은 제국어와 요정어 억양이 골고루 섞인 그의 공용어는 잠깐이었지만 루시를 멈칫하게 만들었다.
“그래…… 모든 황족이 나쁜 것은 아니지. 실제로 옥타나와 흑태자를 증오하는 황족도 많지. 오히려 이렇게 용기를 내서 온 황족은 그대뿐이니. ……참으로 기특할 뿐이다.”
여왕은 이를 악물었다. 목소리와 억양이 좋다고 그를 향한 감정이 나아진 것은 아니었다.
머리로는 이해했다. 하지만 가슴은 답답했다.
“로안 샬루트, 제국의 방계 황족이여. 그대의 망명을 받아 주겠다. 대신, 경의 직위는 지금의 방랑 기사 직을 유지하겠다.”
여왕은 마음에 내키지 않는 결정을 내렸다.
“감사합니다, 폐하.”
방랑 기사 로안 샬루트가 추위에 벌벌 떨면서도 최선을 다해 예를 표했다.
루시푸르네는 그런 모습마저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만 나가 봐라. 그대가 속죄할 임무를 조만간 내려 주겠다.”
여왕은 그렇게 제국에서 온 망명 황족을 알현실에서 내보냈다.
로안이 알현실에서 나가고 몇 분 후.
“폐하, 재상 아리아 데스모 공작이 들어옵니다.”
시녀장 베네사의 외침과 함께 알현실의 문이 열렸다.
루한의 재상 아리아 데스모 공작이었다.
여왕은 다소 누그러진 어조로 알현실로 입장한 재상을 보았다.
“사령술사 토벌은 어찌 되었는가?”
“제가 도착했을 때에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폐하.”
“아무것도?”
“네, 아마 폐하의 설원의 가호가 뒤늦게 작동한 듯하옵니다.”
“아까운 목숨만 버렸구나. 이럴 줄 알았다면 내버려 두는 것인데…….”
여왕의 목소리에는 안타까움이 가득 담겼다.
“그나저나, 저 금발, 금안의 기사가 바로 로안 샬루트라는 기사입니까?”
“아는가?”
“비록 망명 온 방계 황족이라 하나, 그가 왕도까지 오면서 보인 그의 능력은 출중합니다.”
재상의 붉은 눈동자에 흥미가 담겼다.
“알고 있다. 그래서 받아 준 게 아닌가? 요즘 같은 시기엔 인재가 더더욱 귀하니까.”
루시는 로안이 나간 알현실의 문을 응시했다.
“하지만 찝찝해. 제국의 어느 가문에도 샬루트라는 가문은 없었어.”
악황후와 척을 진 망명 황족들은 본명을 숨기고 가명을 쓴다는 얘기는 들어 알고 있었다.
그들은 언제, 어디에 있을지 모를 제국의 귀를 의식해 망명지의 군주에게도 본명을 알리지 않았다.
그랬기에, 루시 또한 찝찝함을 느끼면서도 가명인 것이 뻔한 로안의 본명을 묻지 않았다.
“확실히 수상하긴 합니다. 높은 제국어를 사용하긴 하지만 억양이 살짝 다릅니다. 어쩌면…… 악황후 옥타나가 보낸 첩자일 가능성이 있습니다.”
“!!”
재상의 은근한 말에 루시푸르네는 표정을 굳혔다.
“하지만 첩자면 어떻습니까?”
그런 여왕을 보면서 재상은 작게 미소 지었다.
회색 머리카락에 붉은 눈동자를 지닌 여공작의 미소는 차가웠다.
“폐하, 적일수록 더 가까이하소서. 그를 이용해 제국의 정보를 빼내소서. 그의 능력을 이용하여 아까운 루한의 인재들을 보존하소서.”
재상은 말을 이었다.
“꼭 필요하지만 불가능에 가까워 시도하지 못했던 임무를 그에게 내리소서. 그리하여 그가 쓸모를 다 했을 때, 과감히 버리소서.”
그녀의 말을 들을수록 루시푸르네의 표정이 풀었다.
“그래, 그대의 뜻대로 하지. 저 망명 황족에겐 속죄할 시련을 줄 것이다.”
“첫 번째 시련으로 볼카 광산의 태양샘 반지가 어떻습니까? 그곳에 똬리를 튼 고대의 데몬을 그가 없애 준다면 참으로 좋을 텐데 말입니다.”
쐐기를 박는 것 같은 재상의 제안.
“좋은 생각이로다.”
여왕은 고민조차 안 하고 첫 번째 시련을 결정했다. 손목에 찬 녹색 나뭇잎 팔찌가 은은히 빛났다.
그렇게 제국에서 망명 온 방랑 기사와 설원의 저주를 품은 여왕의 인연이 시작됐다.
* * *
“허억……! 허억……! 헉!”
잠에서 깨어난 루시푸르네는 서리로 가득한 자신의 몸을 털었다.
몸에 묻은 서리는 꿈을 꾸면서 흘린 식은땀이다.
“우읍!”
뒤이어 루시는 헛구역질을 했다.
설원의 저주를 품으면서 루시는 먹지도 마시지도 못했고, 먹고 마시지 않아도 됐다.
그랬기에 지금 하는 헛구역질은 음식 때문이 아니다.
“흐으…….”
순전히 정신적인 문제.
방금 꾼 꿈과도 관련이 깊을 것이다.
그녀가 제일 싫어하는 기억 중 하나. 회귀 전 솔라시우스를 증오하고 못살게 굴었던 기억들.
그토록 보고 싶은 이의 얼굴을 꿈에서 본 것이지만 기분은 우울하다.
이미 잠은 다 잤다. 창밖은 여전히 깊은 새벽이었지만, 여왕은 얼음으로 된 딱딱한 침대에서 완전히 벗어났다.
운동장처럼 넓은 침실을 걷고 걸어 그녀의 공방 앞에 섰다.
다양한 마법 서적, 마석 등이 어지럽게 널려 있었고, 그 중심부엔 전에 그녀가 사용했던 공간 이동 마법진이 새겨져 있다.
은은한 빛을 흘리는 공간 이동 마법진 중심부에는 푸른색 검 한 자루가 놓여 있었다.
“…….”
루시는 말없이 국서의 검, 윈테이라를 보았다.
이어서 그녀가 잠들기 전까지 했던 작업을 이어서 했다.
옷감을 짜듯이 수식을 짜고, 옷감에 색을 물들이듯 마나를 물들이고, 하나의 예술 작품을 만드는 기분으로 작업을 이어서 했다.
머릿속에선 낮에 있었던 기사단장과의 알현이 재생됐다.
전날 점심.
순백궁의 알현실.
루시는 두근거리는 기분으로 하이마의 알현을 반겼다.
“2차 토벌대가 성공했다고?!”
“그렇사옵니다, 폐하!”
역시!
하이마의 보고에 루시는 속으로 박수를 쳤다.
‘역시 솔라야.’
그녀는 회귀 전의 그를 떠올렸다. 늘 불가능에 가까운 임무를 해결하고 왕궁으로 귀환하던 방랑 기사.
괜히 얼굴이 붉어졌고 가슴이 두근거렸다.
“어떻게 이긴 거라고 하던가?”
루시는 사파이어를 담은 것 같은 눈동자를 빛내며 물었다.
그의 무용담을 잘 듣고 자기 전에 되새기는 거다. 잘하면 꿈속에서 솔라와 만날 수도 있을 거다.
“그게…… 토벌대와 교단에선 그 경위에 대해 이상하게 함구했습니다.”
기사단장 하이마가 여왕의 기대 어린 눈빛에 큰 죄를 지은 기분으로 말했다.
“토벌대에 파견한 기사들도 마찬가지로 뭔가 숨기는 거 같은데…… 마나의 맹세라도 했는지 시원하게 말을 안 합니다.”
“??”
기사단장의 보고에 루시는 고개를 갸웃했다.
‘솔라가 자신의 실력을 숨기려 한다고?!’
기억을 더듬어 봤다.
‘1황자라는 신분이 들킬 거 같아서 그런 걸까? 하지만 회귀 전에는 딱히 힘을 숨기지 않았었는데…….’
회귀 전의 솔라는 1황자 신분은 끝까지 숨겼지만, 힘이나 업적은 숨기지 않았었다.
루시는 추측을 이었다. 다른 건 몰라도 솔라와 관련된 부분에 대해서는 꼼꼼하게 살펴야 한다.
그리고 얼마 안 가, 여왕은 그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다.
‘회귀 전에는 내가 그를 너무 무시하고 미워했었지. 그래서 자신의 무용담을 알릴 필요가 있었던 거야. 원랜 이렇게 겸손하고(?) 신중했던 사람을…… 내가…… 그렇게 절박하게 만들었던 거야.’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그녀의 어깨가 축하고 처졌다.
“송구하옵니다, 폐하…….”
그런 여왕을 보는 하이마는 괜히 주눅이 들었다.
루시는 자기혐오가 끓어 오르는 것을 느끼며 다시 한번 속죄를 다짐했다.
“괜찮다. 로안 샬루트…… 그의 동생에 대한 건 성과가 있는가?”
그녀의 속죄 중 하나, 솔라의 동생이자 1황녀 루나시르네의 행방에 대해 물었다.
“지금까지 금발, 금안의 18세 소녀를 다섯 명 찾았으나…… 다섯 모두 루한에서 나고 자란 토박이들이었습니다.”
그러자 하이마가 더욱 주눅 든 얼굴로 답했다.
“……그래?”
루시는 아쉬움을 느끼며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서 뭐라 했다간 괜히 기사단장만 우울하게 만들 것 같았기 때문이다.
“어쩔 수 없지. 그래도 계속 찾아보도록.”
‘솔라가 왕궁에 오기 전에 찾아 주고 싶은데…….’
회귀 전의 안 좋았던 첫 만남 대신, 행복하게 웃으면서 마주하는 첫 만남을 바랐다.
하이마의 보고는 길지 않았다.
솔라의 무용담도, 1황녀의 행방도, 딱히 알아낸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죄송해서 죽으려는 기사단장에게 루시는 다른 질문을 했다.
가장 듣기 싫지만, 가장 관심을 가지고 있으면서, 어쩌면 제일 중요한 사안.
“옆에는 여전히 그 마녀가 붙어 있나?”
휘센인지 뭔지 하는 괴상한 이름의 마녀에 대한 질문이었다.
“예, 그런데…….”
마침내 제대로 보고할 것이 생긴 하이마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표정은 밝지 않았다. 그 이유를 루시는 이어지는 그의 보고로 알 수 있었다.
“사실 그 마녀의 이름은 캐리어 휘센 에어컨이 아닌, 리나 샬루트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기사 로안 샬루트의 여동생이라고 합니다.”
“응?”
하이마의 말에 루시는 멍청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했다.
“개인적인 견해론 로안 경이 몸종이었던 그 마녀를 면천시키고 의남매로 삼은 듯합니다.”
“……그래? 애인 사이는 아닌 모양이구나.”
말과 달리 루시푸르네는 혼란을 느꼈다.
‘도대체 뭐지?’
고작 토벌대에 참가했다는 이유 하나로 회귀 전엔 한 번도 듣도 보도 못한 여자가 나타났다.
의남매라고 했지만 오히려 더 찜찜했다.
‘그러고 보니? 리나라는 이름은…….’
회귀 전, 사천왕이기도 한 죽음의 대마녀의 이름과 같다.
리나라는 마녀가 나타난 시점과 장소도 공교롭다.
‘우연이겠지. 리나라는 이름은 굉장히 흔하기도 하니까.’
단순한 우연으로 치부할까 싶었지만.
‘리나 리버스…… 리나 샬루트…….’
그럴수록 의심은 커져만 갔다.
‘최악의 경우, 리나 샬루트가 죽음의 대마녀의 과거일 수도 있어. 어쩌면…… 솔라를 홀린 것일지도 몰라.’
불안하고 초조해졌다. 한시라도 빨리 솔라시우스와 그 불길한 마녀를 봐야 할 것 같았다.
리나가 그토록 찾고 있는 1황녀라는 생각은 루시도 하이마도 전혀 하지 않았다.
일단 리나는 금발, 금안이 아니었고, 리나의 발육이 또래보다 늦어 나이 추정도 어긋났기 때문이다.
오히려 루시는 죽음의 대마녀로 의심할 뿐이다. 물론 이 또한 맞았지만.
“그리고 로안 경, 그가 유독 더위를 심하게 탄다고 합니다.”
“더위? 그건 저번에도 얘기하지 않았나?”
“그게 보통 더위를 타는 게 아닌 모양입니다. 리나 샬루트라는 마녀를 종일 곁에 두고서 냉기 마법을 사용하게 한다고 합니다.”
그 말에 루시의 가슴이 철렁였다.
솔라가 더위를 비정상적으로 느낀다는 말도 중요했지만. 그보다 더 충격적으로 다가오는 단어가 루시의 가슴을 후벼팠다.
‘종일?! 곁에 두고서?!’
어지러움을 느꼈다. 게다가 냉기 마법이라니!
‘다른 건 몰라도 그건 내가 더 잘할 수 있는데!’
마법을 쓸 필요도 없이 근처에만 와도 모든 더위가 사라질 텐데!
다른 건 몰라도 이 부분에서 다른 마녀의 힘을 빌린다는 것에 루시는 서운함을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