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화
#18.
우우우웅.
국서의 검, 윈테이라의 공명하는 소리.
루시는 상념에서 깨어났다.
마지막 수식이 완성되었고, 공간 이동을 개조한 마법진이 은은한 빛을 발광했다.
이제 보내기만 하면 된다.
하지만 루시는 보내지 않았다.
대신 윈테이라에 인챈트를 부여하기 시작했다.
‘솔라가 더위를 심하게 타는 거…….’
낮에 하이마를 통해 들은 보고 때문이었다.
‘사령술사와 싸우다가 저주라도 걸린 건가?’
괜히 더 걱정되었다.
루시는 이런 이유로 국서의 검, 윈테이라에 추가적인 인챈트를 진행 중이었다.
속죄와 걱정을 담아, 윈테이라에 냉기 마법 기능을 추가하기로 한 것이다.
‘이것만 있으면 그 냉찜질 마녀는 필요 없을 거야!’
리나 샬루트라는 마녀에 대한 견제는 덤이다.
‘바람의 정령이여!’
루시는 오랜만에 정령술을 펼쳤다.
그녀 주위에 차가운 바람이 몰아치기 시작했다.
‘그 남자가 얼마나 뜨거운 남자인지 알아봐 줘.’
설원의 대마녀의 부름에 바람의 정령들이 모였고, 고독한 여왕의 속삭임에 바람의 정령들이 응했다.
평소라면 저주가 무서워 다가오지도 응하지도 않았겠지만, 지금의 그녀는 너무나 절박해 정령들은 거절할 수 없었다.
쏴아아아.
바람이 불었고, 여왕의 바람이 멀리 전달됐다.
우우우웅.
바람 정령들이 돌아올 동안, 루시푸르네는 두 눈을 감고 설원의 권능을 윈테이라에 담기 시작했다.
여왕이 보낸 바람은 바람의 정령을 타고 순식간에 저 남동쪽 금발, 금안의 남자에게까지 불었다.
휘이잉, 휘잉.
바람의 정령들은 여왕이 부탁한 남자의 뜨거움을 확인했다.
!!
남자가 품은 거대한 열기에 정령들은 깜짝 놀랐다.
그들은 설원의 저주와 정반대되는 두려움을 느끼며 서둘러 여왕이 있는 순백궁으로 도망쳤다.
휘이이잉.
멀리 나갔다 온 바람, 남쪽 숲 내음이 가득한 바람이 순백궁으로 귀환했다.
‘바람의 정령들아, 너희가 확인한 것만큼 설원의 추위를 사용하렴!’
정령들이 돌아오자 루시는 곧바로 바람의 정령들을 인챈트에 투입했다.
솔라의 뜨거움을 그녀는 확인하지 않았다. 그녀에겐 설원의 권능이 있다. 설원의 가호와 설원의 저주가 있다.
아무리 뜨거워 봤자다. 루시는 자신 있었다.
그리하여.
파아아아아앗!!
“엄맛!”
거대한 양의 냉기가 윈테이라로 흡수되기 시작했다.
여왕이 깜짝 놀라 비명을 지를 정도의 냉기가 검에 빨려 들어갔다.
얼마나 많이 흡수되었는지, 루시의 주변이 아주 잠깐이었지만 따듯해졌을 정도다. 설원의 저주를 품은 이후 처음 있는 상황이었다.
“너희들! 이런 장난은 위험해!”
일순간 스쳐 간 따듯함. 하지만 루시푸르네는 그 순간을 느낄 정신이 없었다.
“이건 아주 중요한 사람에게 보내는 선물이라고! 이렇게 많이 넣으면 위험하다고!”
그녀는 지금 이 상황을 정령들이 장난친 것으로 오해했다.
휘잉, 휘잉.
바람의 정령들이 억울하다고 아우성이다.
“어서 빼내야……!”
루시는 급히 검에 부여된 냉기를 거두려고 했다.
위우우우웅!
하지만 그러지 못했다.
“아앗! 지금 가면 안 돼!”
거대한 설원의 에너지 때문인지 공간 이동 마법진이 환한 빛을 내기 시작한 것이다.
마법진 위에 놓여 있던 윈테이라가 빛에 묻히기 시작했다.
휘이잉, 휭.
뒤에서는 억울해 하는 정령들이.
위이이이잉.
앞에서는 빛과 함께 공간 이동 중인 윈테이라가.
“아앗……!”
여왕은 정신없었고, 그렇게 당황하는 사이.
파앗!
푸른 검 윈테이라는 그녀의 침실에서 사라졌다.
정확히는 푸른빛이 되어 창밖으로 화살처럼 쏘아졌다.
정령들이 확인한 장소. 솔라가 있는 곳으로 향했을 것이다.
“어떡해! 어떡해!”
루시는 발을 동동 구르며 윈테이라가 사라진 창밖을 보았다.
* * *
이른 새벽.
솔라는 조용히 몸을 일으켰다. 그의 몸은 땀이 줄줄 흐르고 있었고, 표정 또한 잔뜩 일그러져 있었다.
‘진짜 심각하군.’
사령술사 이자벨과 싸우면서 각종 스킬과 궁극기를 사용한 것이 원인이다.
이토록 길고 굵게 후유증이 이어질 줄은 몰랐다.
“오라버니, 또 그래?”
옆에서 졸고 있던 루나가 그런 솔라의 기척에 깼다.
“아직 버틸 만하니까 좀 더 쉬고 있어.”
잠에서 깨어난 루나의 눈가엔 피로와 다크 서클이 진하다.
아무리 루나가 재능 많은 마녀라고 해도 마력이 무한한 것은 아니다. 그녀 또한 매일 탈진 직전까지 솔라에게 냉기 마법을 사용했기에 많이 지쳐 있었다.
“근처 개울가에서 몸 좀 식히고 올게.”
솔라는 그 말을 끝으로 텐트 밖으로 나갔고.
“아니야! 같이 가!”
루나는 간신히 재회한 오라버니를 잃을 것 같은 불안감에 부랴부랴 뒤를 쫓았다.
“진짜 괜찮은 거야?”
“그래, 괜찮아.”
괜찮다는 대답과 달리, 그의 몸은 바로 옆에서도 느껴질 정도로 붉고 뜨거웠다.
“안 괜찮은 거네!”
루나는 서둘러 빙결 마법을 펼쳤다.
그리고 함께 개울가로 향했다.
“앞으로도 그 힘을 쓰면 계속 이렇게 되는 거야? 해결될 방법은 없고?!”
상의를 벗고 개울 안에 입수한 솔라를 향해 루나의 질문이 이어졌다.
질문하면서도 냉기 마법은 계속해서 사용 중이다.
“말 좀 해 봐!”
이번이 몇 번째 질문인지 모른다.
하지만 그녀의 오라비는 시원한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저 힘을 쓰면 이런 후유증이 온다고 답해 줬을 뿐이다.
“이 빙결 마법, 원래 시체 보관할 때 쓰는 마법이라고…….”
괜히 송장 치르는 것 같은 기분에 루나는 울먹였다.
그러는 사이 솔라는 개울에서 나왔다.
차가운 물과 동생이 뿌려 주는 냉기에 많이 나아졌다.
언제 다시 재발할지 모르겠지만 당장은 괜찮았다.
그는 다크 서클 진 눈으로 자신을 노려보는 동생을 보았다.
스윽, 슥.
그리고 검게 변한 루나의 머리를 쓰다듬어 줬다.
“상인들이 냉기 마도구를 더 구해 올 때까지만 고생 좀 해 줘.”
인근에서 구할 수 있는 마도구는 전부 다 쓴 지 오래.
대부분 아이스붐처럼 1회용에 지속 시간도 짧았다.
“추운 북부에 냉기 마도구는 거의 없어. 차라리 직접 만드는 게 더 빠르겠다!”
마녀다 보니 마도구 관련된 지식은 풍부한 루나는 입을 삐쭉 내밀었다.
그러면서 공방에서 가져온 물건과 스승의 유품들을 뒤지기 시작했다.
“차라리 이따 날 밝으면 상인들에게 내가 말한 재료들을 구해 달라고 해.”
루나는 자신의 아공간 인벤토리를 뒤지면서 부족한 재료들을 적었다.
“그러지.”
솔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잠도 다 잤겠다, 둘은 개울가에 멍하니 앉아 새벽 공기를 맡았다.
멍하니 개울가의 경치를 구경하던 솔라는 우연히 동생의 목덜미를 보았다.
그녀의 목에는 하나로 합쳐진 로사리오가 걸려 있다. 그 로사리오 안에는 그림자 핵이 담겨 있다.
‘그림자 핵을 완전히 가뒀기 때문에 에너지원처럼 쓸 수 있을 것 같은데…….’
어찌 보면 이보다 완벽한 마법 보주도 없다.
정작 보주의 주인인 루나는 이 그림자 핵을 사용할 생각이 없어 보였지만. 스승을 죽인 원흉을 좋다고 쓰기엔 그녀의 성정이 너무 여리다.
“그런데 말이야, 오라버니.”
“어.”
“이 샬루트라는 성은 무슨 뜻이야?”
리버스라는 성은 악명이 높아 이제 쓸 수 없기에, 루나는 성을 바꿔야만 했다.
에어컨 같은 성도 있었지만 그녀는 솔라가 사용하는 가명을 따랐다.
지금 루나시르네가 사용하는 가명은 리나 샬루트였다.
“샬루트, 고대 요정어로 송풍이라는 뜻이야.”
동생의 물음에 솔라는 친절히 답해 줬다.
“엘프들이 지어 준 이름이야?”
“응. 그리고 로안은 요정어로 ‘따듯한’이라는 뜻이야.”
“로안 샬루트, 따듯한 송풍……. 좋다.”
그러고 보니 사령술사를 토벌하고 이렇게 안정된 상태에서 단둘이 대화를 나눈 것은 처음인 듯싶다.
그동안은 태양 이능 후유증 때문에 솔라도 루나도, 정신이 없었으니까.
솔라의 상태가 잠시 안정되었을 땐, 그를 찾아온 상인과 사제, 토벌대의 기사들을 상대해야 했다.
“오라버니는 그럼 쭉 요정의 숲에서 자란 거야?”
“그렇지.”
동생의 질문이 이어졌다.
“어머니는?”
루나는 희미하지만 분명 기억에 있는 어머니에 대해 물었다.
“돌아가셨다.”
“…….”
예상이라도 했다는 듯 루나는 덤덤히 받아들였다.
“요정의 숲에 묻히신 거야?”
“응.”
솔라와 루나의 어머니이자 1황후는 요정의 숲에 솔라를 데려오자마자 숨을 거뒀다.
옥타나의 추격을 받으며 입은 무수한 독과 저주를 견디지 못한 것이다.
더불어 딸을 잃어버렸다는 정신적 충격이 그녀를 더욱 약하게 만들었었다.
“나중에 나도 참배하러 갈래.”
“그래, 꼭 같이 가자.”
두 남매는 기약 없는 약속을 하고서 시선을 하늘로 향했다.
서서히 끝나가는 새벽하늘이 펼쳐졌다.
‘별이 엄청 많군.’
나름 중세 판타지의 감성인지, 하늘에는 두 개의 달과 함께 어지러울 정도로 많은 별이 떠 있었다.
새벽 감성인지 모처럼 원작이 떠오른다. 지구에서 플레이했던 게임 ‘루한의 국서’가.
‘루나가 사천왕, 죽음의 대마녀였다니.’
게임의 후반부. 설원의 가호는 약해졌고, 그림자 핵은 완성됐다.
죽음의 대마녀 리나 리버스는 그림자 핵으로 설원의 가호를 뚫고 루한의 수도 윈테라를 침공했다.
여왕 루시푸르네는 솔라에게 네 번째 시련으로 죽음의 대마녀를 척살할 것을 명했다.
새삼 운명의 잔혹함을 느꼈다.
당시 태광휘가 플레이하던 캐릭터 솔라시우스는 그때까지도 한참 동생의 흔적을 추적 중이었다.
숱한 방해와 어려움을 헤치고 몇 가지 실마리를 확보한 상태였다.
‘그래서 당시 솔라가 전투에 소극적이었던 건가?’
태광휘는 몰랐지만, 게임 캐릭터 솔라시우스는 죽음의 대마녀에게서 알 수 없는 무언가를 느낀 모양이다.
‘결국 죽음의 대마녀는 죽게 되지.’
리나 리버스는 죽는다.
솔라가 아닌, 당시 합류했던 동료인 성자 시몬에 의해.
‘솔라가 아닌 시몬에 의해 죽었으니까 그나마 덜 비극적일지도.’
솔라시우스는 옆에서 성자 시몬이 리나에게 집중할 수 있도록 죽음의 군단을 저지하기만 했다.
그렇게 네 번째 시련이 끝나고, 솔라가 지니고 있던 로사리오의 빛도 사라졌다.
그날 이후, 솔라시우스는 더 이상 동생을 찾지 않았다.
후우욱!
생각에 잠겨 있는 중에, 또다시 더위와 뜨거움이 올라왔다. 원작을 떠올리던 솔라의 상념이 끊어졌다.
“……!”
그는 표정을 굳히고는 일단 참았다. 앞에는 개울이 있고 옆에는 동생이 있다. 모처럼 여유를 즐기고 있는 루나를 최대한 쉬게 해 주고 싶었다.
“별똥별이다!”
옆에서 문득 루나가 하늘을 가리키며 외쳤다.
동생의 손가락이 가리킨 방향에는 정말로 별똥별이 있었다.
‘별똥별이 저렇게 천천히 움직였나?’
후유증을 참고서 별똥별을 보던 솔라는 의문이 들었다.
“저거, 이쪽으로 오는 거 같은데?”
무엇보다, 저 별똥별이 여기로 내려오는 것 같았다.
아무리 천천히 내려온다지만 그래도 무시할 수 없는 속력이었고, 별똥별로 추정되는 푸른빛 덩어리가 지상으로 내려오면서 주위를 환하게 밝혔다.
“꺄아악!”
당장 머리 위 수십 미터까지 다가오자 루나가 비명을 질렀다.
‘젠장!’
피하기엔 너무 늦었다.
파아앗!
솔라는 더 큰 부작용을 각오하고서 태양의 이능을 사용했다.
그와 루나 앞에 빛의 방어막이 생성됐다.
“크윽!”
스킬을 사용하자마자 고통이 밀려온다.
이러다 정말로 죽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하지만 당장 급한 것부터 막아야 한다.
빛의 실드를 최대로 펼쳤고, 고통에 이를 꽉 물었다.
이윽고 눈부신 빛 덩어리가 코앞까지 도달했다.
솔라와 루나는 동시에 눈을 감았다.
“……?”
“……!”
하지만 시간이 지나도 어떤 폭음도 충격파도 느껴지지 않았다.
‘?!’
오히려 솔라는 다소 약해진 더위가 의아해 눈을 떴다.
여전히 덥고 뜨거웠지만 방금처럼 죽음을 걱정할 정도는 아니었다.
“히이익! 추워!”
반면 솔라 옆에 있던 루나는 당장이라도 얼어 죽을 것 같다는 듯이 온몸을 벌벌 떨었다.
주위를 둘러보니 사방이 한파라도 닥친 듯 서리투성이다.
앞에 있던 개울가는 순식간에 빙판이 되었다.
“루나.”
솔라는 아공간 인벤토리에서 두툼한 망토를 꺼내 루나에게 덮어 줬다.
“여기에 있어.”
그리고 어딘가를 향해 걸었다. 그가 향하는 곳에서 10미터 정도 거리, 푸른 빛을 내는 무언가가 꽂혀 있다. 아마 저게 별똥별의 정체인 듯싶다.
“오라버니!”
루나가 오들오들 떨면서 오빠를 불렀다.
그런 동생을 향해 솔라는 괜찮다고 손짓하곤 마저 걸었다.
한파와 서리가 가득한 공간.
상의를 탈의한 금발, 금안의 남자는 오히려 편안한 표정으로 걸었다.
꽂혀 있던 무언가는 푸른 빛을 크게 내다가 이내 빛을 머금고 본연의 모습을 드러냈다.
“검?”
푸른색의 고급스러운 검이었다. 마석이 박혀 있는 것을 보니 마검이 분명하다.
“오라버니! 조심해! 그거 마검일 수 있어!”
뒤에서 루나가 발을 동동 구르며 외쳤다.
그런 동생의 외침을 한 귀로 흘린 솔라는 푸른색의 검의 칼자루를 잡고 뽑았다.
화아아앗!
그러자 한순간에 주위를 꽁꽁 얼렸던 한파가 사라졌다.
추위와 걱정에 벌벌 떨면서 발을 동동 구르던 루나 또한 갑작스러운 기온 변화에 얼떨떨한 표정이다.
하지만 가장 놀란 사람은 따로 있었다.
“……!!”
검을 쥔 솔라는 너무 놀라 입을 다물지 못했다.
검을 잡자마자 지금까지 그를 괴롭혔던 모든 더위와 뜨거움, 답답함이 한 방에 사라졌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