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여왕의 EX급 방랑기사-21화 (21/212)

제21화

#21.

설원의 가호.

루한의 건국과 동시에 루한 전역에 펼쳐진 여왕의 축복이다.

오늘날의 제국 침략뿐 아니라, 역대 무수한 외침으로부터 루한을 보호한 결계이기도 하다.

효과는 단순하면서도 위대하다. 결계가 펼쳐진 곳에서 살육을 벌이면 설원의 가호가 발동된다.

가호가 발동되면 살육을 벌이던 존재는 꽁꽁 얼어 죽는다.

게다가 아주 똑똑한 결계라서, 정당한 이유에 의한 살육에선 작동하지 않는다.

그래서인지 루한의 짐승과 몬스터들은 사람을 잘 공격하지 않았다. 자기들끼리 잡아먹는 것은 정당한 살육으로 인정하지만, 사람을 공격하는 것은 정당하지 않다고 결계가 판단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설원의 가호는 왕궁이 있는 왕도 윈테라가 가장 두텁고. 그곳에서 멀어질수록 옅어진다. 그리하여 변경백의 외곽 같은 곳은 설원의 가호가 매우 옅었다.

* * *

남매는 노숙에 임했다.

이렇게 적은 인원으로 야영하는 것은 처음이다.

종일 레이더 역할을 했던 루나는 피곤했는지 초저녁임에도 바로 곯아떨어졌고, 솔라는 그런 동생을 대신하여 불침번을 섰다.

루나가 설치한 알람 마도구와 결계가 있고 설원의 가호가 짙은 내곽이라서 안전하다지만, 아직 이런 상황이 익숙하지 않은 솔라는 괜히 불안해 잠들지 못했다.

‘허공에 검을 휘두르는 취미는 없는데.’

무료한 밤을 지내기 위해 솔라는 윈테이라를 들었다.

보검에 가까운 디자인. 마검이다. 예리한 칼날이 있긴 하지만 베거나 찌르기에는 적합하지 않다.

앞으로도 이 검으론 싸우지 않을 터.

부웅, 부웅.

하지만 지금처럼 목검 휘두르듯 연습할 때는 상관없겠지.

‘결국 짐승이나 몬스터, 도적단은 만나지 못했어.’

솔라는 주위를 살폈다. 루나가 잠든 텐트에서 최대한 거리를 넓혔다.

바위 언덕이 보이는 공터에 서서 눈을 감았다.

후우우욱.

몸속의 마나를 활성화하여 태양 이능을 발현했다.

제일 먼저 태양검이다.

바스스슷.

푸른색 검의 검날에 서리와 함께 수증기가 뿜어져 나왔다.

“!!”

이를 본 솔라는 눈을 크게 떴다. 본래라면 눈부신 빛에 휩싸여야 할 태양검이 발동되지 않았다.

그는 윈테이라를 허리품에 다시 걸고는 다른 검을 꺼냈다.

파아앗!

태양검을 발동하자, 검면이 빛났다.

“…….”

하지만 이전처럼 검 전체를 집어삼킬 정도로 밝고 크진 않았다.

은은한 빛 입자가 검날을 타고 흐를 뿐이다.

부웅, 부웅.

검을 휘두르자, 빛 입자가 아름답게 휘날리며 광휘를 뽐냈다.

파아앗, 파앗.

뒤이어 다른 태양 이능들도 사용했다.

원거리 스킬인 ‘빛의 추적’을 저 앞의 바위 언덕에 쏘았다.

퍼엉! 하는 소리와 함께 폭음이 들렸지만, 이전 같은 화력은 없다. 가까이서 보니 바위에 주먹만 한 구멍이 아주 깊게 파여 있었다.

“……?”

심각해졌던 솔라의 얼굴이 의아함에 펴졌다.

화르르륵.

뒤이어 광역 스킬 열사의 필드를 사용했다. 루한의 여름밤은 쌀쌀하지만, ‘열사의 필드’ 때문인지 스킬이 쏘아진 영역은 불구덩이처럼 뜨겁다.

다만 이전에 사용했던 ‘열사의 필드’보다 범위도 화력도 약했다.

“흐음…….”

마지막으로 궁극기, ‘태양의 후예’를 사용해 보기로 했다.

파아아앗!

솔라의 몸에 영롱한 빛 입자가 넘실거렸다. 어두운 저녁임에도 그의 몸은 등대처럼 빛났다. 빛나는 몸 주위에서 각종 후광과 헤일로가 휘날렸다.

하지만 오리지날 빛의 갑옷과는 확연한 차이가 있다.

‘새벽의 등불’과 빛의 실드는 사용하지 않았지만, 아마 비슷하게 위력이 약해졌을 것이다.

‘태양의 후예’를 해제하고 태양검을 다시 펼쳤다.

서거걱.

그리고 바위 언덕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기존의 태양검 때처럼 터지지 않았다. 대신 바위가 서걱 하고 단번에 절단됐다.

“……?!”

솔라는 이걸 좋게 받아들여야 할지, 나쁘게 받아들여야 할지 헷갈렸다.

그래도 태양 이능을 사용하고도 후유증은 없다.

‘하나를 얻는 대신 하나를 내준 건가?’

그는 허리에 찬 푸른색 검을 땅바닥에 내려놨다. 그리고 5미터 정도 떨어졌다.

멀어질수록 윈테이라가 놓인 땅 주위가 얼기 시작했다.

‘으음…….’

반대로 솔라에겐 태양 이능 후유증이 강하게 왔다.

그는 이를 악물고 들고 있던 검에다 태양검을 주입했다.

파아앗!

그러자, 오리지널 태양검의 눈부신 빛이 생성됐다.

후우욱!

동시에 몸속에서 급격한 뜨거움이 강한 고통과 함께 밀려왔다.

오랜만에 느끼는 부작용은 전혀 감소하지 않았다. 오히려 태양 이능을 쓸수록 고통은 더 중첩되는 듯했다.

“!!”

너무도 심한 고통에 솔라는 정신을 잃을 뻔했다.

솔라는 급히 태양검을 끄고는 윈테이라를 집었다. 후유증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

‘생으로 태양 이능을 썼다간 죽을 수도 있다!’라는 생각이 머릿속에 경고등처럼 켜졌다.

“어이가 없군.”

황당함 담긴 그의 혼잣말이 파괴된 작은 바위 언덕 위를 쓸었다.

정리해 보자.

하늘에서 내려온 푸른색 마검(윈테이라)을 소지하고서 태양 이능을 쓰면 부작용이 없다. 대신 위력이 감소한다.

푸른색 검을 곁에 두지 않고 태양 이능을 쓰면 원래의 위력이 나온다. 대신 부작용이 재발한다. 심지어 이 부작용은 중첩되는 것 같다. 마치 복리처럼.

그의 시선이 바위 언덕으로 향했다.

‘마냥 나쁘진 않아.’

깊고 좁게 구멍 나고, 깔끔하게 절단난 바위 덩어리가 보였다.

‘더 정밀하고 깔끔해. 무엇보다 안전하고.’

비유하자면, 지금까진 핵미사일로 싸워 왔다. 전차나 전투기, 심지어 보병을 상대할 때도 핵을 쓴 셈이다.

하지만 이젠 토마호크 미사일 수준으로 섬세하고 안전하게 싸울 수 있다. 위력이 크게 떨어졌다는 게 문제지만, 사실 미사일 정도면 어지간한 적은 쓸어 버리고도 남았다.

문제는 태양 이능의 본래 위력은 여전히 못 쓴다는 거다.

‘마검이 없는 상태로 단 한 번이라도 ‘태양의 후예’를 쓰게 된다면…… 그건 자폭과 같은 의미라고 봐야 해.’

방금 느낀 부작용을 생각하면 사실상 쓰지 못한다고 봐야 했다.

‘일반적인 적이나 최대한 사천왕까지는 지금의 위력으로 싸울 수 있어. 하지만…… 마왕과 싸우려면 태양 이능을 100퍼센트 발휘해야 한다.’

차가운 푸른색 마검을 쓰다듬으며 솔라는 생각에 잠겼다.

어떻게 하면 부작용 없이 태양 이능을 100퍼센트 낼 수 있을까?

방법이 없진 않을 것 같았다.

* * *

일과를 마친 루시푸르네는 침대 위에 앉았다.

그녀는 망설이는 눈으로 침대 옆에 놓인 보주를 보았다.

마지막에 보았던 솔라의 반응이 여전히 신경 쓰였다.

영지와 작위를 준다고 했는데 왜 기뻐하지 않은 것일까? 어째서 싫어하는 것 같은 기색을 낸 것일까?

이런 이유로 윈테이라와의 동기화를 망설였다.

궁금은 했지만, 혹여나 그 이유를 알게 되었을 때 자신이 감당할 수 없을까 봐 두려웠다.

“그래도.”

하지만 망설임은 오래가지 않았다. 그녀는 눈을 감고 보주 위에 손을 올렸다.

‘리나 샬루트, 어쩌면 리나 리버스일지도 모를 그 마녀가 뭔 짓을 할지 몰라.’

죽음의 대마녀와 이름이 같은 수상한 여자, 그 여자가 무슨 짓을 할지 걱정됐다. 두려움과 망설임은 사랑하는 남자를 위하는 마음으로 극복할 수 있었다.

동기화를 이룬 루시는 급히 주변을 살폈다.

그녀의 눈에 솔라시우스가 들어왔다.

그는 달빛과 별빛이 그려진 밤하늘을 망토처럼 입고서 검술을 펼쳤다.

검술에 대해 잘 모르는 그녀가 보아도 멋지고 아름다웠다.

부웅, 붕, 휘익.

그의 검술은 언제는 현란하고 언제는 실용적이다.

지구에서 습득한 검술도 있었고, 솔라시우스가 요정 숲에서 익힌 엘프식 검술도 있었다.

두 세계의 검술이 한 공간 안에서 펼쳐졌고, 전혀 다른 검술들이 자연스레 이어졌다.

순서대로 펼쳐지던 검술은 어느 순간 섞이고 섞여 새로운 검술로 진화하기 시작했다.

솔라는 어느덧 무아지경이 되어 검무를 추기 시작했다.

그의 검에 광휘가 일었다.

‘훈련 중이었구나.’

이건 또 이것대로 좋았다. 솔라의 훈련하는 모습은 면도한 얼굴과 마찬가지로 처음 보는 거니까.

‘저건 훈련 흔적인가?’

주변에 바위 언덕이 보였는데, 인위적으로 파괴되어 있었다.

‘대단해!’

루시는 순수하게 감탄했다. 회귀 전, 그녀가 내린 불가능에 가까웠던 임무를 완수했던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부웅, 휘이익, 휙, 촤라랑.

검을 휘두르는 솔라의 몸에서 빛 물결이 아지랑이처럼 피었다. 그의 훈련은 검무 그 자체였다.

‘아름다워…….’

루시는 솔라의 검술을 보면서 황홀함을 느꼈다.

‘솔라시우스.’

한편으론 괜히 떠오르는 옛 기억에 가슴이 아렸다.

그녀가 직접 본 솔라가 싸우는 모습은 맨 마지막에 있었던 마왕과의 전투가 유일했다.

빛과 바람을 휘날리며 마왕과 싸우던 솔라의 모습이 지금과 겹쳐 보였다.

‘정말 어리석고 한심했었지. 그때의 내가 저주스러울 정도로.’

훗날 진실을 알게 되고 그에게 마음을 열었을 때에는 너무 늦은 후였기에, 그녀는 지금 이 순간이 너무나 소중했다.

‘와아……!’

처음 솔라에게 말을 걸어 볼까? 했던 생각은 저편으로 사라졌고. 왜 그가 자신이 보낸 선물을 반기지 않았는가에 대한 궁금증도 사라졌다.

지금은 그저 아름답고 황홀한 검무만이 눈에 담겼다.

늘 고독하고 심심한 여왕에게 지금 같은 광경은 신선했고 즐거웠다.

새벽까지 이어지던 검무가 끝나고.

“후욱, 후욱, 후…….”

무아지경이 되어 검술을 휘두르던 솔라시우스는 거친 숨과 땀을 흘리며 검을 내려놨다.

꿀꺽.

루시는 왜인지 모르지만 침을 삼키며 땀과 숨결에 젖은 남자를 보았다.

“덥군.”

윈테이라를 차고 있음에도 더울 정도로 솔라는 간만에 격렬히 훈련했었다.

‘태양 이능을 완전히 복구하기 전까진 검술에 집중해야 해.’

그가 난데없이 검무를 춘 이유였다. 본래에도 종종 했던 훈련이다. 감을 잃지 않기 위한 현상 유지에 가까웠던 훈련. 하지만 이제부터는 좀 다르게 격렬히 해야겠지.

솔라는 아공간 인벤토리를 열어서 물이 가득 담긴 바가지를 꺼냈다.

좀 아깝긴 했지만, 지금 있는 곳은 물가와 멀었기에 어쩔 수 없었다.

바가지의 덮개를 연 솔라는 씻기 전에 땀에 젖은 상의를 벗었다.

‘!!’

상상도 못 했던 장면. 루시는 너무 놀라 동기화에서 이탈할 뻔했다.

땀에 젖은, 달에 비친 그의 상체가 아름답게 빛났다.

고르게 잘 발달된 상체 근육에 선명한 복근과 단단한 가슴, 넓으면서 날렵한 어깨가 인상적이다.

촤악, 촥, 촥.

머리와 얼굴, 목, 가슴, 등, 팔을 씻는 솔라의 모습을 루시는 멍하니 보았다.

‘혹, 혹시…… 아래도 씻는 건가?’

불현듯 떠오른 생각. 자꾸만 이동하는 시선. 루시는 심장이 빠르게 뛰었고 이상하게 코피가 날 것만 같았다. 과연 자신이 그의 하체까지 감당(?)할 수 있을지에 대한 두려움과 기대가 일었다.

그러나 솔라는 간단히 상체만 씻었다. 물의 양이 적었고, 허리춤에 찬 윈테이라 때문인지 하체 쪽은 땀을 거의 흘리지 않아서다.

‘아…… 휴……!’

그가 상체만 씻고 일어서자, 루시는 아쉬움과 안도를 느끼며 심호흡을 했다.

얼마 남지 않은 물에다가 땀에 젖은 상의를 넣고는 간단히 손빨래한 그는 이어서 텐트가 있는 곳으로 걸었다.

야영지의 텐트는 두 개가 있었다.

‘다행히도 같이 안 자는구나!’

이를 본 루시는 더 큰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솔라는 손빨래한 상의를 텐트 앞에 대충 걸어 널고는 텐트 안으로 들어갔다.

내부는 좁았지만 아늑하기도 했다.

‘……?!’

좁고 밀폐된 공간에 단둘이 있게 된 상황. 심지어 지금 솔라의 복장은 상의를 완전히 탈의한 상태다.

콩, 콩, 콩, 콩, 콩.

윈테이라에 동기화된 루시는 비록 간접 체험이지만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았다.

여왕의 심장 소리를 들을 리 없는 솔라는 아무렇지 않게 바닥에 펼쳐 놓은 돗자리에 누웠다.

곧 아침이지만 잠깐이라도 눈을 붙일 생각이다.

밤새 검을 휘두르면서 인정하게 되었다. 설원의 가호가 강한 지역의 치안은 대전쟁 이전의 대한민국 수준으로 안전하다는 것을. 어차피 루나도 곧 일어날 것이고.

바닥에 누운 솔라는 허리춤에 있던 윈테이라를 풀었다. 머리맡에 두고 잘까 하다가, 이내 가슴에 안았다.

그리고 죽부인 끌어 안 듯 품에 넣고서 눈을 감았다.

‘……!!’

솔라시우스의 벗은 상체, 그의 살 색으로 가득 찬 시야.

루시는 본능적으로 동기화 수치를 최대로 올렸다.

그러자 그의 체온과 부드러운 살결, 단단한 상체 근육이 윈테이라를 통해 여왕에게 전달되었다.

솔라의 입과 코에서 나는 숨결도 바로 옆에서 듣는 것처럼 가까웠다.

‘!!’

루시푸르네는 머릿속이 하얘짐을 경험했다.

지금 이 순간, 그녀는 아무 생각도 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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