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2화
#22.
루한의 재상 아리아 데스모는 자신의 집무실에 앉아 서류를 보고 있었다.
‘이쪽은 얼굴 크기가 달라. 이쪽은 키 차이가 심하고.’
재상이 보고 있는 서류에는 사람 얼굴이 그려져 있었고 아래에 인적 사항이 세세히 기록되어 있었다.
서류에 그려진 초상화의 공통점은 금발, 금안을 한 남성이라는 점.
‘한마디로.’
마치 이상형 월드컵을 하듯 수십 명에 달하던 황족들을 분류하던 아리아는 어느덧 마지막 남은 두 황족의 초상화를 응시했다.
‘둘 다 아니란 말이지.’
일을 끝냈지만 결국 헛수고였다는 사실에 재의 마녀는 인상을 썼다.
마녀들이 즐겨 피우는 곰방대가 집무실 책상 구석에 놓여 있다.
그녀는 곰방대를 입에 대고는 찌푸린 얼굴로 창가를 보았다. 구름 한 점 없는 시원한 하늘이 약 올리듯 반겼다.
까악, 까악, 까악.
창밖 어디선가 까마귀 울음소리가 들렸고, 까마귀 한 마리가 푸른 하늘을 가로질러 재상의 집무실 창가로 날아오고 있었다.
“왔구나.”
까마귀를 발견한 아리아는 인상을 펴고는 곰방대를 책상 위에 내려놨다. 그리고 손가락을 까딱여 창문을 열었다. 곰방대를 내려놓은 손으로는 까마귀에게 줄 비스킷을 집었다.
까악, 깍.
열린 창문으로 쑥 들어온 까마귀가 재상의 팔뚝에 앉았고, 그녀가 주는 먹이를 쪼아 먹는다. 새가 먹이를 먹는 동안 아리아는 까마귀 발목에 달린 쪽지를 풀었다.
푸더덕.
비스킷을 다 먹은 까마귀가 다시 창밖으로 날았고, 아리아는 검지를 까딱여 집무실의 창문을 다시 닫고는 까마귀가 가져온 쪽지를 폈다.
‘여왕과 기사단장이 뭘 그렇게 몰래 찾았는지 드디어 알아냈군.’
재의 마녀의 붉은 눈동자가 쪽지의 내용을 읽었다.
‘18세의 금발, 금안의 소녀. 10년 전 제국에서 온?!’
여왕과 기사단장이 은밀히 찾고 있던 존재의 정체.
“……?”
이를 확인한 아리아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러다 문득 고개를 돌려 집무실의 책상을 응시했다.
‘20대 초반의 나이대, 금발, 금안의 청년. 과거 알려지지 않음.’
금발, 금안을 한 남자들의 초상화가 책상 위에 수북하다.
‘18세의 금발, 금안의 소녀. 10년 전 제국에서 왔으나 현재 행방불명.’
책상을 향했던 그녀의 시선이 다시 손바닥의 쪽지로 이동한다.
‘이 둘을 붙이면 남매.’
고요한 재상의 붉은 눈동자.
“솔라시우스. 루나시르네.”
잠시 후, 그녀의 입에서 답이 나왔다.
‘여왕이 관심 가질 만하군. 1황자, 1황녀라면 다른 황족과 급이 다르지. 그런데 여왕은 어떻게 둘이 살아 있다는 걸 확신한 거지?’
한편으론 여왕이 어떻게 이들이 살아 있다는 걸 확신하는지가 궁금했다.
‘어찌 되었든, 재밌게 되었어.’
무표정했던 그녀의 입가에 차가운 미소가 피었다.
* * *
어전회의.
임금이 보는 앞에서 왕국의 대신들이 모여 국정을 논하는 회의.
설원의 계승식이 실패로 끝난 후, 루한에서 단 한 번도 열리지 않았던 회의다.
그랬던 어전회의가 최근 일주일 사이에 세 번이나 열렸다. 무려 세 번이나.
알현실의 끝부분, 대신들이 좌우로 무리를 지어 대열을 맞춰 기립해 있었고.
화르르.
그 사이에 화로가 놓여 있다.
화로는 평범하지 않았다. 마법진 위에 마석을 박아 넣은 화로.
기억조차 희미한 전대 여왕의 어전회의에선 없었던 화로다.
애초에 전대 여왕 대에는 어전회의를 편전에서 했지, 알현실에서 하지 않았지만, 알현실의 옥좌는 비어 있었고 대신들은 멍하니 눈앞의 화로를 보며 여왕을 기다렸다.
“섭정 각하께서 복귀하니까 확실히 변화가 있군요.”
화로를 보던 한 대신이 무심코 말했다.
“설원의 저주는 참으로 극심해서 폐하 주위에 오래 있을 수 없었는데 말입니다.”
지금까지 여왕이 한 번에 한 사람씩 알현을 받은 것 또한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섭정께서는 화염 마법사시니까요. 참으로 신기한 마도구입니다. 폐하와 10미터 떨어진 곳에서도 작동하다니.”
“덕분에 이렇게 모두 모여서 폐하를 알현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1시간 동안 폐하 근처에서 국정을 논할 수 있다는 게 어딥니까?”
많은 것이 루카스가 섭정이 되면서 바뀌었다. 그는 화염의 마법사였고, 복귀하자마자 마탑과 함께 연구를 통해 마도구를 하나 만들었다.
이 화로만 있으면 각자가 접근할 수 있는 최대 거리에서 좀 더 오래 있을 수 있었다. 그래 봤자 1시간이 최대였지만 말이다.
여왕을 기준으로 알현실 왼쪽에 선 무리가 섭정 루카스를 칭송하자, 맞은편 오른쪽에서 이를 아니꼽게 보는 시선이 모였다.
그 시선의 제일 중심에는 회색 머리카락과 붉은 눈동자가 인상적인 재의 마녀가 있다. 물론 재의 마녀는 루카스 쪽에는 시선 한 번 주지 않고 비어 있는 알현실의 옥좌를 지긋이 올려다볼 뿐이다.
“그나저나 이 화로는 믿을 수 있는 겁니까?”
“괜히 10년 전 그때처럼 대참사를 일으키지나 않았으면 좋겠네요.”
대신 재상을 따르는 귀족과 마녀, 마법사들이 루카스의 화로를 어떻게든 폄하하기 시작했다.
“게다가 마석의 소모가 극심하니…….”
“확실히 지금 같은 전시에는 부담이 되긴 합니다.”
그들의 말처럼 화로의 문제는 마석의 소모량이다. 이 화로는 마석을 엄청 잡아먹었다. 그랬기에 개인 알현 때는 화로를 사용하지 않았고 어전회의에서만 사용했다.
“참나, 꼬투리를 잡아도 그런 거로 잡다니.”
“당신네들 좋은 시절 끝난 게 더 우려스러우시겠지.”
이에, 섭정과 함께 서 있는 귀족과 마법사들이 지지 않고 대꾸했다.
그들의 숫자는 재상 쪽과 비교하면 밀렸다. 작위와 재산과 마법 등급 같은 권력의 급도 밀렸다. 그래도 루카스가 10년 동안 은거했던 것치고는 제법 많이 모인 것이기도 했다.
“말이 좀 이상하오?”
“마치 우리가 부정을 저질렀다고 하는 거 같소?”
“지금까지의 장부를 보면 우린 부정은커녕 사재를 털어 루한을 위해 사용했소.”
“참나, 그날의 가장 큰 책임자들께서 못 본 사이 뻔뻔함을 단련했나 봅니다?”
섭정 측 사람들의 대꾸에 재상 쪽 사람들이 기다렸다는 듯 대응에 나섰다.
양측의 분위기가 살벌해지고, 아직까진 계승식을 지키지 못했다는 원죄에서 자유롭지 못한 섭정 측의 사람들은 그저 분을 삭일 뿐이다.
아리아 데스모가 실은 배신자이고 악황후 옥타나의 수하라는 사실은 현재 루카스만 알고 있다.
아직 재상의 죄를 밝힐 결정적인 증거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좌우 두 무리의 분위기가 엄해지고 있을 때, 알현실의 옥좌 쪽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폐하께서 곧 나오실 겁니다.”
알현실의 제일 끝, 여왕의 옥좌 뒤에서 문이 열리더니 시녀들과 시녀장이 벌벌 떨면서 침실 문을 열고 나왔다.
“다들 거리 유지 바랍니다.”
시녀들은 털옷을 잔뜩 껴입었음에도 와들와들 떨면서 알현실을 빠르게 건너 화로 뒤에 섰다.
“폐하! 준비가 완료되었습니다!”
모두가 화로 뒤로 서자, 침실 문 앞에 서 있던 시녀장 베네사가 여왕께 알렸다.
그녀의 목소리는 우렁차지 않았지만 멀리까지 깨끗이 전달됐다. 베네사는 시녀장 이전에 하급 마녀였으니까.
그 말을 끝으로 베네사 또한 빠른 걸음으로 알현실의 화로 옆에 섰다. 그리고 시녀들과 함께 알현실의 문밖으로 사라졌다.
시녀장과 시녀들이 사라지고 10초 정도 흘렀을까.
침실 문이 열리고 루한의 주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는 알현실 끝에 놓인 화로와 화로 뒤에 서 있는 대신들을 본 뒤 옥좌에 앉았다.
또각, 또각, 또각.
여왕이 옥좌에 앉자, 재상 아리아와 섭정 루카스가 발걸음을 옮겼다.
10미터, 8미터, 9미터, 7미터.
둘은 동시에 같은 거리에서 척 하고 멈춰 섰다. 뒤를 이어 대신들이 각자가 버틸 수 있는 최대 거리까지 걸어와 멈춰 섰다.
“폐하를 뵙습니다.”
섭정이 인사를 시작하자, 뒤이어 다른 대신들도 고개를 숙이며 예를 표했다.
“그래. 다들 잘 지냈는가?”
루시는 알현실의 좌우를 내려다보며 반갑게 맞이했다.
신하들을 내려다보는 여왕의 사파이어를 닮은 눈동자에는 작은 흥분이 담겼고, 양 볼 또한 상기되어 있었다.
‘폐하께서 오늘따라 유독 기분이 좋아 보이시는군.’
‘밤에 좋은 꿈이라도 꾸셨나?’
7미터에서 11미터까지 사람마다 여왕을 보는 거리는 달랐지만, 오늘따라 유독 행복해 보이는 주군의 모습에 모두가 의아한 눈을 했다.
앞서 두 번의 어전회의에서의 여왕은 차갑고, 외롭고, 무표정하고, 어두운 분위기를 풀풀 풍겼었으니까.
“어서 시작하거라. 제국의 움직임은 어떠한가?”
신하들의 의아한 시선을 받으며, 루시는 어전회의의 시작을 알렸다.
어째 서두르는 것 같은 여왕의 태도.
‘어서 솔라를 보고 싶은데.’
실제로 그녀는 서두르고 있는 게 맞았다. 본인은 인지하고 있지 못했지만 말이다.
그녀는 밤을 새웠지만 전혀 졸리지도, 피곤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기분이 붕붕 뜨는 것 같고, 가슴도 여전히 콩콩거렸다.
지금도 눈앞에 어젯밤 보았던 솔라의 모습이 흐릿하게 비치는 것 같다. 눈을 감으면 당시 느꼈던 그의 숨소리와 살결, 체온, 단단함 등이 느껴질 것 같았다.
저주 이후 처음 느꼈던 따듯함과 포근함. 아니, 어쩌면 태어나서 처음 느낀 것일 수도 있다.
여왕의 눈동자는 몽롱함과 멍함의 사이에 있었고, 입가는 연신 작게 열렸으며, 양 볼의 홍조와 함께 맹한 미소는 그치지 않았다.
그런 여왕을 옥좌에 모시고 어전회의가 시작되었다.
“제국군이 문라이트 변경백의 국경을 촘촘하게 포위했습니다.”
“그렇게 크게 움직이더니만 결국 촘촘한 포위라니.”
“도대체 무슨 속셈일까요?”
대신들이 나누는 회의의 주제는 제국군의 움직임. 일주일 사이에 어전회의가 세 번씩이나 연달아 열린 이유기도 했다.
‘역사가 바뀌었어.’
지난밤의 흥분에 취해 있던 루시 또한 이때만큼은 진지한 눈으로 회의를 지켜봤다.
“설원의 가호가 있는 한, 놈들이 전면전을 일으킬 가능성은 낮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저 움직임은 무엇일까요? 설마 설원의 가호를 파훼할 방법은 찾은 걸까요?”
모두의 머릿속에 얼마 전 있었던 사령술사의 폭주가 떠올랐다.
변경백의 외곽과 국경은 설원의 가호가 옅다.
정당하지 못한 살육을 해도 규모가 크지 않으면 작동하지 않았다.
한 사람이 한 번에 십 수 명씩 죽여야만 설원의 징벌이 내린다.
“사령술사는 분명 수백 수천의 인명을 학살했습니다. 하지만 설원의 가호는 징벌을 내리지 않았어요.”
“역시 사령술사 배후엔 제국이 있는 것일까요?”
“아직 그 사령술사와 제국과의 연관성은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밝혀지지 않다니요? 사령술사가 죽자마자 제국군이 대대적으로 움직이고 있지 않습니까?”
“설원의 가호가 없다면, 기존의 제국군만으로도 충분히 루한을 정복할 수 있습니다. 굳이 저렇게 대대적인 증원군이 추가될 이유도 없지요.”
국경에서 설원의 가호는 기사나 마법사같이, 한 번의 전투에서 수십 명씩 죽일 수 있는 강자들에게만 부담이었다.
한 번의 전투에서 많아야 네다섯 죽이는 일반 제국군 병사들에겐 큰 의미가 없었다.
하지만 루한에겐 이마저도 감지덕지다. 제국과 비교하면 기사와 마법사 같은 고급 전력도 압도적으로 부족한 그들에겐 없는 것보단 나았다.
“이미 가용할 수 있는 모든 병력을 국경으로 보냈거늘.”
“새로 징병하고 보급을 꾸리려면 못해도 3개월은 걸립니다.”
“징병을 하고 싶어도 나라에 남자가 없습니다. 이미 농사부터 사냥까지 아낙네들이 도맡아서 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더 징병을 하게 되면 노인과 여자까지 징병해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나라가 완전히 망가집니다.”
“징병은 못 하더라도 변경백에 보급은 계속해야 합니다. 금전적 지원도요! 듣자 하니 문라이트 후작가가 파산 직전이라는 얘기가 돌고 있습니다!”
“애초에 지금 필요한 건 일반 병사보다 기사와 마법사 같은 고급 인력입니다. 병사들은 차라리 전역시켜서 농사를 짓게 하는 게 낫습니다.”
대신들이 너도나도 목소리를 냈다. 여왕과 재상 그리고 섭정은 일단 그들의 목소리를 들었다.
“아무리 그래도 숫자를 무시해선 안 됩니다. 변경백의 외곽을 포기할 순 없잖습니까? 우리 기사들은 제국군을 한 번에 수십 수백씩 죽여도 된다지만, 그렇다고 해도 제국군은 많아도 너무 많습니다.”
이쯤 되면 변경백의 외곽을 포기하고 설원의 가호가 짙은 내곽으로 물러나면 되지 않냐고 생각하겠지만, 전혀 아니다.
설원의 가호는 유기적인 결계라서 루한의 행정력이 미치는 곳까지만 영향을 발휘한다.
즉, 영토가 줄면 설원의 가호도 줄어든다.
“흐음…….”
“놈들은 도대체 무슨 의도인지…….”
의견을 내던 좌우 대신들이 생각에 잠겼다.
이때만큼은 모두가 재상이니 섭정이니 편 가르지 않고 루한을 걱정했다. 정말로 걱정하는 것인지, 아니면 연기인지는 모르겠지만.
‘무슨 속셈이지?’
루시 또한 옥좌에 앉아 회귀 전의 기억을 더듬으며 제국의 의도를 생각했다.
역사는 바뀌었다. 그림자 핵과 죽음의 대마녀는 이제 없다.
악황후 옥타나와 재의 마녀 아리아는 분명 대안을 찾았을 것이다. 그러니까 이렇게 군을 움직였겠지.
‘태양샘 반지? 세계수 묘목? 동부 대초원?’
짚이는 게 너무 많다. 그녀는 고개를 숙이고 조용히 서 있는 재상을 보았다. 저 회색 정수리를 얼려 버리고 싶었다.
“폐하! 급보입니다!”
그때, 알현실 문이 거칠게 열리더니 기사단장 하이마가 다급히 들어왔다.
“변경백 문라이트 후작이 마법 통신으로 급보를 보내왔습니다.”
알현실로 들어온 하이마의 표정은 어느 때보다 무거웠다.
“루한의 최남단, 볼카 광산 인근에 암흑군단과 암흑대공이 나타났다고 합니다.”
기사단장이 들고 온 급보에 알현실의 분위기가 무너졌다.
‘…….’
여왕 루시의 표정이 굳어졌고, 섭정 루카스의 얼굴도 일그러졌다. 다른 대신들도 마찬가지.
오직 재의 마녀만이 무표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