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3화
#23.
암흑대공과 암흑군단. 제국 최강의 무력이다. 루한에게는 악몽과도 같은 존재.
이 둘은 설원의 가호가 펼쳐진 루한의 국경에서 주기적으로 엄청난 학살을 벌였다.
그들이 한번 뜨면 지도를 새로 그려야 했고, 군 편제를 다시 짜야 했으며, 변경백의 호구 조사를 다시 해야 했다.
이쯤 되면 ‘아무리 옅어도 설원의 가호가 있을 텐데?’라는 의문이 들었을 것이다.
그 의문에 암흑대공과 암흑군단을 상대한 사람들은 입을 모아 이렇게 답했다.
설원의 가호가 있었기에 이나마 버틴 것이라고.
* * *
역사가 바뀔 것은 각오하고 있었다. 오히려 안 바뀌는 게 이상하다. 하지만…….
‘태양샘 반지는 예상했지만. 암흑대공이라니…….’
루시푸르네는 재상을 노려봤다. 그녀 뒤에 있을 악황후를 생각했다. 재의 마녀는 고개를 숙인 채 여전히 말이 없다.
“현재 문라이트 후작과 그의 기사들이 급히 볼카 요새로 향했으나, 오래 버티진 못할 듯 보입니다.”
기사단장 하이마의 보고가 마저 귓가에 들렸다.
“도살자 대공과 암흑군단이 벌써 회복을 마친 것일까요?”
한 대신이 목소리를 떨었다.
“말이 안 됩니다. 이번 주기는 너무 빠릅니다. 그들이 설원의 징벌에서 이렇게 빨리 회복하다니…….”
“믿을 수 없습니다. 설원의 징벌을 그렇게 처맞았는데!”
“내성이라도 생긴 건가?!”
모두가 치를 떨면서 고개를 저었다.
“믿어지지 않는군. 암흑군단 정도 되는 정예군을 이렇게 빨리 충원한다는 게.”
섭정 루카스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 눈을 떨었다.
“저는 도살자 대공이 더 의문입니다. 사람이 아닐 거라는 확신도 들고요. 어떻게 사람이 설원의 징벌을 무수히 맞고도 부상으로 끝날 수가 있는지…….”
“현재 회복한 루한의 전력으론 놈들이 설원의 가호에 의해 전투 불능될 때까지 버틸 수 없습니다.”
“어쩌면 변경백 외곽을 포기해야 할 수도 있습니다.”
대신들의 표정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저기…… 뒤늦게 덧붙여서 송구하지만, 볼카에서 관측된 암흑군단의 숫자는 이전 침공과 비교해서 3분의 1 수준이었다고 합니다.”
그때, 기사단장 하이마가 마저 보고를 이었다.
“암흑군단 충원은 아무리 제국이라도 힘든가 보군. 불행 중 다행이야.”
그 말을 들은 루카스가 혼잣말을 했고, 알현실에 있던 모두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이제야 놈들의 의도를 알겠어요.”
“암흑군단의 공백을 일반병들이 머릿수로 대신한 거요.”
“암흑대공이 볼카 요새 공략에 집중할 수 있게 하기 위함이었어.”
이제야 제국이 왜 이렇게 움직였는지 이해가 갔다.
“제국은 볼카 광산의 태양샘 반지를 노리는 게 분명합니다.”
놈들의 궁극적인 목적도 말이다.
루한 최남단의 볼카. 설원의 가호가 가장 약한 곳이지만 제국도 루한도, 섣불리 전투를 치르지 않았던 곳이기도 했다.
“제국은 볼카의 데몬을 처치할 묘책이 있는 것인가?”
그곳에는 고대의 데몬이 똬리를 틀고 있었기 때문이다.
―함부로 소란 피우면 죽음을 면치 못하리.
그 데몬은 매우 예민하고 포악해서 작은 소란에도 민감하게 반응했다.
따라서 볼카 인근에서의 전투는 오래전부터 금기였다.
“뭔가 방법을 찾았으니까 저렇게 직접 볼카로 왔을 겁니다.”
“솔직히 이상하긴 했지요. 루한 침공을 지휘했던 암흑대공은 유독 볼카 광산에는 관심을 안 가졌으니까요.”
“하지만 아니었다는 거군. 뒤에서 몰래 방법을 찾고 있던 거였어.”
모두가 제국과 암흑대공의 치밀함에 인상을 썼다.
“어찌 되었든 볼카를 제국에게 내줘선 안 됩니다. 최악의 경우 태양샘 반지가 제국에 넘어갈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는 순간…….”
한 대신은 말을 하다가 결국 끝맺지 못했다. 끝맺지 않았음에도 모두가 무슨 의미인지 잘 아는 표정이다.
태양샘 반지는 거대한 열기를 품은 고대의 마도구다.
어쩌면 여왕이 품고 있는 설원의 저주를 해결할 수 있는 실마리.
하지만 이를 악용하면 설원의 가호는 약화시키고 저주는 강화시키는 최악의 사태도 가능하다.
“하지만…… 더 이상 보낼 군대가 없습니다. 촘촘한 포위 때문에 국경에 있는 부대를 빼 오기도 힘들고요.”
루한은 치안을 유지할 최소한의 병력을 제외한 모든 병력을 변경백 외곽에 투입한 지 오래다.
“애초에 일반 병사를 보내 봤자 의미도 없습니다. 상대는 도살자 대공과 암흑군단일 테니.”
알현실의 분위기는 무거우면서 어수선했고, 화로의 제한 시간인 1시간도 거의 다 되어 간다.
“…….”
여왕 루시푸르네는 무표정한 얼굴로 앉아 이들의 대화를 들었다.
풀 내음 나는 팔찌를 습관처럼 만지작거렸다.
머릿속 한구석에서는 회귀 전의 일들이 떠올랐다.
‘태양샘 반지.’
회귀 전, 루시는 솔라에게서 태양샘 반지를 구해 오란 시련을 내렸고 솔라는 이를 구해 왔다.
하지만 재상은 중간에서 그 태양샘 반지를 가로챘다. 혹시 모르니 검사를 해 봐야 한다는 핑계로.
‘아리아 데스모.’
그리고 재상은 태양샘 반지를 대마법진 이노센티아에 악용했다.
설원의 저주를 강화하고 설원의 가호를 약화시켰다.
‘……솔라시우스.’
멍청했던 루시는 그런 것도 모르고 재상을 응원하고 재상과 함께 이노센티아를 열심히 만들었다. 효과가 없거나 저주가 강해지면 그 원흉으로 솔라를 의심했었다.
눈시울이 붉어진 루시는 급히 상념에서 벗어났다. 괜히 더 과거를 떠올렸다간 오늘 밤엔 악몽을 꿀 것 같았다.
그리곤 지금까지 유독 말이 없는 재상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
회의 시작부터 고개를 숙이고 있던 재상이 어쩐 일로 고개를 들어 여왕을 그대로 응시한다.
‘과거의 나는 무슨 생각으로…… 저런 마녀에게 의지했던 거지?’
재상의 붉은 눈동자를 본 루시는 소름이 돋았다.
“…….”
루시푸르네는 말없이 자신을 바라보는 재상을 보았다. 할 말이 분명 있어 보이는 재상의 표정.
‘대놓고 섭정을 무시하겠다는 뜻이군.’
본래라면 재상이 섭정에게, 섭정이 여왕에게 의견을 전달해야 한다. 하지만 아리아 데스모는 그럴 생각이 없는 모양이다.
‘생각해 보니 앞선 두 번의 어전회의에서도 재상은 입을 열지 않았지.’
“재상, 의견이 있다면 말하라.”
여왕은 결국 아리아를 지목했고.
“폐하.”
그녀가 지목하자, 재상은 기다렸다는 듯 입을 열었다.
“정말 안타까운 현실이지만, 지금 루한에는 암흑대공을 막을 수 있는 인재가 없습니다.”
그녀의 말에 루시는 계속하라는 듯 고개를 까딱였다.
“물론, 마녀회와 마탑이 전부 나선다면 상대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만큼 피해는 크겠지만.”
“본론을 말하라, 재상.”
아리아의 말에 루시는 미간을 구겼다.
어수선하게 떠들던 대신들이 어느덧 조용히 재상의 입을 바라보았다.
루카스는 그저 굳은 표정으로 재상을 노려볼 뿐이다.
“폐하.”
재상이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
“현재 왕궁으로 오고 있는 기사 로안 샬루트에게 볼카로 가라 명하소서.”
아리아 데스모의 말에, 루시는 옥좌에서 벌떡 일어났다.
여왕의 반응이 어떻든 간에 회색의 마녀는 말을 이었다.
“그는 사령술사를 무찌른 기사 중에 기사. 분명 큰 도움이 될 겁니다. 혹시 모르죠. 암흑대공과 데몬을 무찌르고 폐하께 태양샘 반지를 바칠지.”
재의 마녀의 차가운 미소가 루시의 눈에 비쳤다.
“……!!”
여왕은 어머니의 팔찌를 꼭 쥐고서 재상을 노려봤다.
‘저 가증스러운 마녀가 지금 뭐라고 했지?’
솔라를 볼카로 보내라고?!
재상은 여왕을 향해 ‘왜 저를 노려보시나요?’라는 듯한 순진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한다.
―볼카 광산에서 태양샘 반지를 가져와라.
문득, 과거 자신이 솔라에게 명령했던 차가운 목소리가 머릿속을 울렸다.
‘이러면 회귀 전과 똑같잖아!’
회귀 전, 자신이 솔라시우스에게 내렸던 첫 번째 시련.
지금 재상이 제안한 상황과 놀랍도록 유사했다.
‘오히려 지금이 더 위험해!’
아니, 암흑대공과 암흑군단이 추가되었으니 더더욱 위험하다.
“…….”
그녀는 입을 다물고 생각을 해 봤다. 솔라를 보내지 않고 이 일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처음 재상이 예시로 들었던 상황을 떠올렸다.
‘마탑의 마법사와 마녀회의 마녀를 보낼 순 없어. 애초에 응하지도 않겠지만.’
아직 누가 누구의 편인지 명확하지 않다. 괜히 보냈다가 제국군만 도와줄 수 있다.
‘기사단장 하이마와 섭정 루카스를 보낼 수도 없는 노릇.’
애초에 둘은 암흑대공과 상대가 안 될 것이다.
재상에겐 이 둘만큼 거슬리는 존재도 없을 테니 그들이 볼카 요새로 가는 길에 죽일 것이 분명하다.
‘내가 직접?’
공간 이동 마법진도 떠올렸다. 직접 가서 데몬을 잡고 암흑대공도 무찌를까 생각했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왕도에서 10킬로미터 떨어진 곳으로 잠시 이동했음에도 30분밖에 있을 수 없었다.
하물며, 저 멀고 먼 볼카 요새로 간다고 한들 얼마나 있을 수 있을까?
‘솔라시우스…….’
아무리 생각해도 가장 이상적인 것은 솔라를 보내는 것뿐이지만.
‘그에게 그렇게 죄를 짓고서! 속죄도 못 할망정 또 죄를 지으라고?!’
여왕은 정말로 내키지 않았다.
만약 솔라를 그쪽으로 보내게 된다면?!
‘암흑대공!’
회귀 전, 그녀가 솔라에게 마지막으로 내린 시련은 암흑대공의 암살이었다.
솔라시우스는 그녀의 명을 받아들였고…….
결국, 실패했다.
피투성이가 되어 간신히 목숨만 붙은 채 왕궁으로 돌아왔던 그의 모습이 떠올랐다.
쿵쿵쿵쿵쿵.
심장이 뛰었고 헛구역질이 치민다.
‘그를 보내게 되면…… 그랬다가 그가 잘못되기라도 한다면…… 나는…… 나 자신을 향한 혐오를 감당할 수 있을까?’
한시라도 빨리 솔라를 직접 보고 싶었다.
한시라도 빨리 그가 걸렸다는 저주를 육안으로 살펴보고 해주하고 싶었다.
‘무엇보다 그가 변경백에서 활약하면…… 유리아, 그 변경백의 여기사와 만나게 될 수도 있어. 그녀는 솔라와 깊은 인연이 있던 여인! 리나라는 여자보다 더 위험해!’
너무 불안했다. 언제 솔라가 변경백에서 회귀 전의 인연을 만날지 모른다.
―하지만 루시, 만약에 태양샘 반지가 제국에 넘어간다면? 회귀 전의 비극과 똑같은 일이 그대로 반복될 텐데?
그 불안함과 별개로 또 다른 자신이 계속해서 속삭였다.
―너도 알잖니? 루시, 이 일을 해결할 남자는 오직 솔라밖에 없다는 걸.
아직 완전히 소멸하지 않은. 과거의 어리석은 루시가.
“…….”
여왕의 고심은 깊어져만 가고.
“폐하, 기사 로안 샬루트를 볼카 요새로 보내소서.”
재상은 여왕의 속도 모르고 계속 같은 말만 반복한다.
“…….”
맞은편의 섭정은 그런 재상을 말없이 노려봤다.
“말이 되는 소릴! 로안 샬루트는 망명 황족이자 방랑 기사로 아직 주군을 정하지 않았다! 그가 거절하거나 실망해서 타국으로 떠나면 어쩌려고 그러나!”
여왕은 여공작을 차가운 눈으로 응시하며 말했다.
“하지만 당장은 그를 볼카로 보내는 것밖엔 방법이 없사옵니다. 루한을 떠나지 않고 폐하의 명을 거절할 수 없는 더 큰 보상을 약속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더 큰 보상?”
“예, 더 큰 보상 말입니다.”
“이미 작위와 영지까지 하사하기로 했는데 여기서 더 큰 보상으로 뭘 준단 말인가?”
“그거야 천천히 생각해 봐야지요. 정 안 되면 백지수표라도 내주면 되는 게 아니겠습니까? 그가 설령 과한 요구를 한다면 저 아리아 데스모가 함께 분담하겠습니다. 땅이든 권력이든 돈이든 뭐든 말입니다.”
재상의 붉은 눈이 의미심장하게 빛난다. 그녀의 말을 들은 대신들이 웅성거리더니 재상의 눈치를 보며 외치기 시작했다.
“폐하, 저희도 분담하겠습니다! 기사 로안 샬루트를 볼카로 보내소서!”
“그가 땅을 원한다면 소신들 또한 영지 중 일부를 기증하겠습니다! 폐하! 기사 로안 샬루트를 볼카로 보내소서!”
아리아의 말에 그녀에 편에 선 대신들이 너도나도 분담하겠다고 나섰다.
“폐하, 기사 로안 샬루트를 볼카 요새로 보내소서. 그는 상급 마녀와 마법사를 쉽게 죽인 사령술사를 척살한 기사입니다.”
“폐하, 기사 로안 샬루트를 볼카 요새로 보내소서. 그의 실력이라면 분명 큰 도움이 될 겁니다.”
이제는 재상을 따르는 대신 모두가 함께 목소리를 내고 있었다.
심지어 섭정과 함께 선 대신들도 나쁘지 않다고 여기는지 딱히 반대하지 않았다. 그저 여왕과 섭정의 눈치만 볼 뿐.
‘아리아 데스모……!’
루시푸르네는 무표정한 얼굴로 재상을 두 눈에 담았다.
그녀가 재상을 살려 두는 이유는 제국과 악황후 때문이다.
만약 재상을 처리하면, 악황후 옥타나는 또 다른 방법으로 수작을 부릴 게 분명하다. 그렇게 되면 회귀의 이점을 쓰지 못한다.
하지만 지금만큼은 저 가증스러운 마녀를 얼려 버리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