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여왕의 EX급 방랑기사-24화 (24/212)

제24화

#24.

갈림길.

루한의 왕궁이 있는 왕도 윈테라와 제국과 국경을 맞댄 문라이트 변경백을 나누는 갈림길.

많은 생각이 들고 그만큼 망설여지는 갈림길이다.

갈림길 앞에 선 솔라는 더더욱 원작에서의 일들이 떠올랐다.

―루시, 루시를 부탁해요.

원작 플레이 중에 받았던 부탁이 제일 먼저 떠오른다. 두 번째 시련인 세계수의 묘목을 구하던 중에 받았던 부탁이었지.

게임상에서 NPC가 했던 부탁이지만, 솔라시우스와 합쳐진 태광휘는 가능한 이 부탁만큼은 들어주고 싶었다.

마왕을 무찌르고 여왕 루시푸르네의 저주를 풀어 주는 딱 그 정도까지만.

하지만 이를 위해서는 여왕의 마음을 열어야 했다.

‘여왕 측근으로 있는 재상이 배신자인 것도 밝혀야 하고, 회귀자일지 모를 섭정도 조심해야 한다.’

추가로 해야 할 필수 업무도 있었다.

‘그런데 꼭 여왕을 만나서 그 히스테리를 체험할 필요가 있을까?’

본명 솔라시우스, 로안 샬루트이자 빙의인지 소환인지 믹스인지 모를 상태의 태광휘는 고민했다.

게임을 할 때 겪었던 짜증 나는 스트레스가 떠올랐다.

후반부에 오해가 풀렸지만 오해가 풀리기까지의 과정은 너무도 고통스러웠다.

모니터로 제3자의 시각으로 봤으니까 견뎠던 거지, 스킵으로 넘기면서 플레이했으니까 그런 호감도를 올렸던 거지, 만약 그걸 직접 4D로 체험했다면 진즉에 손절 치고 루한을 떠났을 것이다.

그 정도로 여왕의 히스테리는 심했었다.

‘차라리 여왕이 회귀자였다면.’

마지막에 봤던 여왕은 그나마 우호적이었거늘.

하지만 딱히 생각해 봐도 여왕이 회귀자라는 심증은 섭정 회귀자설보다 낮다.

하아…….

솔라는 한숨을 내쉬었다.

“헤헤, 여왕님은 어떤 분일까? 대마녀라는데 가까이 가면 정말 얼어 버릴까?”

저 앞에는 슬슬 본격적으로 왈가닥 기질을 보이는 동생 루나가 있다.

루나의 몸은 왕도 방향 길에 치우쳐 있었다. 한시라도 화려한 왕도와 아름다운 왕궁과 여왕을 보고 싶은 모양이다.

“오라버니? 왜 그래? 똥 마려워?”

그가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서 있자 의아한 눈으로 뒤를 돌아본다.

“…….”

그런 동생을 본 솔라는 시뮬레이션을 돌려 봤다. 저 왈가닥과 히스테리 여왕이 만난다면?

‘루시와 루나, 두 여자 사이에서 호감작을 하라고?’

거기에 제국 첩자인 재상과 회귀자일지 모를 섭정이 사은품으로 추가된다.

‘만약 섭정이 회귀자가 맞는다면? 본래 역사와 달라진 나의 행보를 경계할 것이다.’

인벤토리에 보관 중인 여왕의 서신이 생각났다.

미간을 찌푸렸다. 눈살을 구겼다.

“함정일 가능성이 커.”

깊은 한숨과 함께 혼잣말이 튀어나왔다.

어쩌면 영지와 작위를 주겠다면서 왕궁으로 초대하는 것 자체가 거대한 함정일 수 있다.

가면 안 된다!!

머릿속에서 경고등이 강하게 빛났다.

솔라는 허리에 찬 푸른색 검과 자신의 오른손을 번갈아 보았다.

‘마왕, 지구에서도 없앤 놈이다. 부작용도 이 마검 덕분에 해결되었고.’

지구에서의 오리지널 태양 이능이 봉인됐지만,

‘태양샘 반지가 있으면 약화된 이능도 해결될 것 같단 말이지.’

추측건대 떠오르는 해결 방법이 하나 있었다.

‘여왕이 내리는 첫 시련이 태양샘 반지를 구해 오라는 시련이었어. 하지만 이번에도 원작과 똑같은 시련이 내려질까?’

알현하러 오라는 여왕의 명령을 씹고 그냥 혼자서 하기 VS 히스테리 여왕, 배신자 재상 그리고 회귀일지도 모를 섭정과 만나기.

그는 둘 중 어떤 게 리스크가 클지 생각했다.

‘어차피 결과만 좋으면 되는 거 아닌가?’

그의 고민은 길지 않았다.

“무조건 전자다.”

여왕을 굳이 만나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만나 봤자 서로 감정만 상한다. 나중에 마왕을 없애고서 한 번 들려서 저주만 해주해 주자. 태양 이능을 완전히 회복하고 태양샘 반지랑 세계수 묘목까지 합치면 여왕의 저주를 해주할 수 있을 터.’

여왕과 밀당할 바엔, 원작에서 찾지 못했던 히든 피스와 인연을 공략하자.

이 허리춤의 푸른색 마검처럼. 눈앞의 1황녀처럼.

그는 쥐고 있던 말의 고삐를 돌렸다.

“어? 오라버니 어디 가?! 진짜 똥 마려웠어?”

루나는 빗자루를 타고 뽈뽈 날아서 솔라의 뒤를 쫓았다.

방향은 남쪽.

‘일단 볼카 광산으로 가서 태양샘 반지를 구하자. 정 지원이 필요하면 문라이트 변경백의 지원을 받는 게 낫겠어. 변경백과 그의 딸은 적어도 말은 통했으니까.’

솔라는 다른 갈림길. 왕도와 반대되는 길로 되돌아가려고 했다.

크웽, 크웽.

그때, 하늘 위에서 어디선가 들어 본 울음소리가 들렸다.

이어서.

“멈추시오!”

저번에 본 선전관이 그리핀을 타고 나타나 솔라와 루나의 앞을 막았다.

‘…….’

선전관을 본 솔라의 표정이 굳는다.

‘설마 내 생각을 눈치챈 건가?’

그의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선전관은 그리핀에서 정중히 내렸다.

“폐하의 명이오!”

그리곤 솔라가 뭐라 반응하기도 전에 다짜고짜 비단으로 된 두루마리를 꺼내 펼쳤다.

“지금 제국의 암흑대공과 암흑군단이 문라이트 변경백의 최남단, 볼카를 침공했다. 놈들은 그곳에 있는 태양샘 반지를 노리고 있다.”

선전관이 낭송한 명령서의 첫 줄.

솔라와 루나는 눈을 크게 떴다.

“이를 막는 볼카 요새는 매우 위태로운 상황이다.”

둘은 예를 표하는 것도 잊고 벙찐 얼굴로 서 있었고, 선전관은 딱히 이를 신경 쓰지 않았다.

나비의 날갯짓이 커지고 커져, 이제는 암흑대공과 암흑군단마저 움직인 모양.

“제국에서 온 명예로운 기사 로안 샬루트여, 그대에게 선택권을 주겠다. 하나, 지금 바로 볼카로 가서 제국의 위협으로부터 루한을 지킬 것인지, 둘, 아니면 이대로 왕궁으로 와서 짐을 알현할 것인지. 만약 볼카로 바로 가게 된다면 이미 약속했던 것보다 더 큰 보상을 내릴 것이다. 그대가 원하는 어떤 소원이든 들어줄 것을 마나에 맹세하겠다.”

선전관의 낭송이 끝났다. 선전관은 제일 마지막 문장을 가장 힘있게 읽었다.

“선택권 말이오?”

그러나 정작 솔라는 마지막 구절보단 ‘선택권’이라는 단어에 집중했다. 그 명령밖에 할 줄 모르는 여왕이 선택권이라니 신선했다.

“그렇소.”

“바로 볼카로 가겠소.”

솔라는 고민도 하지 않고 답했다.

우웅!

그의 말에 허리에 있던 푸른색 마검이 우웅 하고 떨었다.

“나랑 상의도 없이!”

옆에 있던 루나도 반발하지만, 그는 무시했다.

“잘 생각했네! 여기 폐하의 서신을 받게.”

선전관은 그에게 두루마리를 건넨 뒤, 바로 그리핀을 타고 하늘로 올랐다.

시국이 시국인지라 선전관과 그리핀은 매우 바빠 보였다.

예상치 못한 상황. 솔라 또한 어리둥절하다.

‘잘되긴 했는데…….’

왕궁으로 오라는 여왕의 명을 어기는 게 찝찝하긴 했었다.

그러나 이제는 당당히 갈 수 있게 되었다.

“뭐야, 뭐야? 우리 그럼 왕도로 안 가는 거야?”

얼빠진 얼굴의 루나가 빗자루 위에서 솔라의 어깨를 흔들며 물었다.

“그래, 다시 왔던 길로 되돌아가야겠다.”

솔라시우스는 담담한 얼굴로 흑마 맨해튼카페를 몰고 남쪽 길로 향했다.

“아이 씨! 우리가 무슨 똥개도 아니고! 똥개 훈련도 이렇게 안 시키겠다! 그리고 오빠는 왜 1번 고른 건데!”

“말만 고르라는 거지, 이미 답은 정해져 있었어.”

“그 여왕님 마음에 안 들어! 무슨 정신병 있나 봐!”

그런 오라버니의 뒤를 쫓으며, 동생 루나가 여왕을 대놓고 씹었다.

“설마 우리보고 암흑대공 무찌르고 태양샘 반지 가져오라는 소린 아니겠지? 에이~ 만약 그러면 미친년이지.”

그곳에 가서 단순히 지원만 하다 오라는 것으로 이해한 모양이다.

여동생의 말을 들은 솔라는 피식 웃었다. 본래 왈가닥이긴 했지만 마녀와 함께 자라면서 좀 더 입이 거칠어진 모양이다.

우우웅.

여왕을 향한 루나의 뒷담화에 허리춤의 푸른색 검이 부르르 떨었다.

‘그나저나 선택지라니. 그냥 명령을 내려도 됐을 텐데? 그 히스테리 여왕답지 않아.’

그가 아는 여왕이라면 당당하게 암흑대공도 잡고 암흑군단도 무찌르고 태양샘 반지도 가져오라고 명령했어야 했다.

‘섭정이 개입한 건가?’

솔라의 눈이 깊어졌다.

“그런데 오빠, 똥 안 싸? 마려운 거 아니었어?!”

그렇게 생각에 잠겨 있는데 루나가 불쑥 다가와 물었다.

“……난 배 아프다 한 적 없다.”

숙녀와 거리가 먼 동생의 언행에 솔라는 눈살을 찌푸리며 답했다.

“오라버니가 안 마려워도 내가 마려워서 안 돼! 잠깐 좀 멈춰 봐! 근처에서 망 좀 보고.”

“…….”

* * *

솔라시우스는 검은 말 맨해튼카페에 앉아서 멍하니 경치를 보고 있었다.

푸른 하늘에 녹음 가득한 대지.

도저히 전쟁 중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 경치다.

‘얘는 변비인가?’

그러다가도 꽤 오래 걸리는 동생이 있는 방향을 보며 인상을 썼다.

저기 수풀 가득한 곳. 분명 꽤 떨어진 거리지만 어째 냄새가 나는 거 같은 기분도 들었다.

그는 기다리는 동안 허리춤의 푸른색 마검을 꺼내 들었다.

이 검을 보고 있으면 불멍 때리는 것처럼 멍 때리기가 참 좋다.

거대한 보석을 예리하게 다듬은 것 같은 이 검은 보고만 있어도 예술 작품을 감상하는 기분도 든다.

“넌 이름이 뭐지?”

검을 감상하던 그는 불현듯 물었다.

얼핏 듣기론 몇몇 마검에겐 에고가 있다고 했다. 얘도 어쩌면 있지 않을까? 종종 부르르 떨면서 공명하는 걸 보면 없진 않을 것 같았다.

“너 정도 되는 마검이면 분명 이름이 있을 텐데?”

그가 말을 걸자, 마치 알아듣기라도 하는 듯 푸른색 마검에서 우웅 하는 진동으로 반응을 보였다.

“이름이 없으면 내가 지어 줘도 될까?”

솔라는 검에게 말을 걸듯 부드럽게 물었고.

[……응.]

“……?”

전혀 예상치 못한 목소리가 들리자 미간을 찡그렸다.

[이름을 지어 주다니. 그것도 나쁘지 않은 것 같도다.]

여성의 목소리. 하지만 억양이 자연스럽지 않은 게 지구의 TTS 느낌이 강하다.

“네가 말한 건가?”

황당함 묻은 황금색 눈동자가 윈테이라를 향했다.

[그러하다.]

다시 한번 푸른색 마검이 부드럽게 공명하면서 목소리를 냈다.

목소리가 들릴 때마다, 검에 박힌 마석에서는 빛이 은은하게 반짝인다.

“왜 이제야 말한 거지?”

[……나도 마음의 준비가 필요하니까.]

“??”

마검의 알 수 없는 대답.

[어쨌든 이름을 지어 준다니, 기대가 크다.]

억양은 자연스럽지 않지만, 반응은 사람과 대화하는 기분이 들었다.

“원래 이름은?”

[몰라도 된다. 아니, 없었다. 그러니 이름을 지어다오.]

보아하니 본래 이름이 있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마음에 들지 않았나 보다.

“…….”

솔라는 검을 들고서 생각에 잠겼다.

엑스칼리버, 네일링, 뒤랑달 등등, 머릿속에 수많은 이름이 떠오른다.

‘에어컨, 휘센, 캐리어도 있긴 하지만.’

전부 눈앞의 검과 어울리지 않는다.

‘여자 이름이 좋겠어.’

마검의 목소리가 여자 목소리다. 그는 괜찮은 여자 이름을 생각했다. 지구에서 그리고 이곳에 와서 알게 된 여자들의 이름을 떠올려 보았다.

‘하필 왜 그 여자가 떠오를까?’

그러다 문득, 솔라의 머릿속에 누군가가 떠올랐다. 어쩌면 이 검과 가장 비슷한 여자, 루한의 여왕 루시푸르네가.

‘딱히 좋아하진 않아. 꺼리는 것에 가깝지. 그런데 개인 감정과 별개로 가장 잘 어울릴 것 같군.’

루한의 여왕을 좋아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녀의 이름이 이 검과 굉장히 어울리긴 했다.

‘하지만 대놓고 여왕의 이름을 썼다간…….’

무기나 영물에 유명한 인물의 이름을 붙이는 것은 흔하지만, 그것도 선이라는 게 있다.

루한에서 성녀 취급받는 여왕의 이름을 그대로 쓰면? 그것도 망명 황족이. 어떤 반응이 올지 짐작도 안 간다.

그러나 방법이 아주 없는 것도 아니다.

‘풀 네임만 안 쓰면 되겠지.’

생각을 마친 솔라는 입을 열어 검의 이름을 말했다.

“……루시.”

루시푸르네의 애칭이기도 한 루시라는 이름을.

“네 이름은 루시다.”

루시푸르네는 쓰면 안 되지만, 루시는 상관없다. 현재 이 나라에서 여왕을 애칭으로 부를 수 있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 아니, 한 명 있다. 섭정.

그렇다 해도 상관없다.

‘루시라는 이름은 아주 흔하니까.’

누군가가 “이 마검 이름이 뭔가요?”라고 물었을 때 ‘루시’라고 답한다면 상대방은 “굉장히 평범한 이름이네요”라고 답할 것이다.

[…….]

그가 지어 준 루시라는 이름에 마검은 반응이 없다.

우우웅.

몇 초 후, 휴대폰 진동 비슷한 울림과 함께 마석에서 빛이 깜빡였다.

[……루시?]

“그래, 루시. 별론가?”

[아니. 전혀 아니다. 그런데 왜 루시인가?]

“……별 이유는 없어. 그냥 너랑 잘 어울릴 것 같더군.”

번쩍번쩍.

마검 전체에서 은은한 빛이 깜빡였다.

[마음에 든다. 루시. 그래, 루시라고 불러 다오.]

마검은 루시라는 이름이 마음에 드는지 기뻐하는 기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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