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5화
#25.
마검 루시와 대화를 나누고 있는데.
“휴! 몸무게가 1킬로그램은 줄어든 기분이야!”
일을 마친 루나가 수풀에서 나타나며 외쳤다. 그녀의 표정은 다시 태어난 것 같은 상쾌함이 가득했다.
“와, 진짜 장난 아니었어! 아직도 뒤가 얼얼하다니까?”
“…….”
동생의 말에 솔라는 질렸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친남매 사이라지만, 저게 어떻게 18살 먹은 숙녀의 입에서 나올 수 있는 말인가?
‘남매끼리는 원래 저런가?’
모르겠다. 지구에서의 그는 외동이라 동생은 없었으니까.
[…….]
그는 손에 들려 있던 마검 루시를 의식했다.
마검은 딱히 반응이 없었다.
‘천박해! 어떻게 저런 천박한 언행을!’
단지 겉으로만 반응이 없을 뿐, 윈테이라와 동기화된 루시는 속으로 리나라는 마녀를 흉봤다. 아까 똥, 똥, 거릴 때부터 충격받았지만 이 정도였을 줄이야.
“그나저나 아까부터 누구랑 대화를 나누던 가야?”
다시 빗자루에 올라탄 루나가 솔라에게 다가와 물었다. 수풀에서 쪼그려 앉은 상태로 들을 건 다 듣고 있던 모양이다.
“마검이랑 대화를 나누고 있었어.”
솔라는 빗자루에 탄 동생을 올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이 마검, 에고 소드야?! 아까 얼핏 들렸던 여자 목소리가 그럼!”
솔라의 대답에 루나가 눈을 번쩍 빛낸다. 그러더니 빗자루를 내려 가까이 다가왔다.
“우와아!”
루나는 오라버니의 어깨에 왼손을 올려 중심을 잡았다.
다른 오른손으론 솔라가 들고 있는 마검의 검면을 만졌다.
‘손은 씻은 거겠지? 마법으로라도.’
솔라는 자신의 어깨와 마검에 닿은 동생의 손이 찝찝했다.
“늘 느끼는 거지만 진짜 차갑다!”
루나는 검면을 만지며 중얼거렸다. 솔라가 손에 들고 있거나 패용 중일 때에는 다른 사람이 만져도 춥거나 얼지 않았다. 그저 얼음 같은 차가운 촉감만 느낄 정도.
“근데 왜 이렇게 조용한 거야? 뭐라고 말 좀 해 보면 안 돼?”
루나는 쫑알거리며 윈테이라의 검면을 톡톡 건드렸고.
[날 그 더러운 손으로 만지지 마라, 마녀야!]
참다 못한 루시가 루나에게 차갑게 경고했다.
“내 손이 더럽다니! 무슨 소리야!”
차갑고 적대적인 마검의 반응. 루나가 인상을 썼다.
말하는 마검이라고 해서 반가웠는데 말투를 보아하니 마음에 안 든다.
[더러운 것을 더럽다 하지, 뭐라 하겠는가? 어서 손 치워라!]
루시는 아직도 검면에 손을 대고 있는 루나에게 말했다.
“오라버니, 이 마검 좀 이상해.”
루나는 마검의 주인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녀는 솔라의 왼쪽 어깨에 여전히 손을 올려놓고 있었다.
“……너, 볼일 보고 손은 씻었어?”
솔라는 그런 여동생을 향해 굳은 얼굴로 물었고.
“손? 손을 왜 씻어? 묻은 것도 없는데.”
루나가 의아한 눈으로 되묻는다. 여전히 그녀의 양손은 각각 솔라와 마검에 닿아 있다.
[손 치워!!]
“손 치워!”
여왕과 방랑 기사가 동시에 외쳤다.
마법으로 퇴색되었던 중세 판타지의 중세가 모처럼 확 느껴졌다.
“씨이…… 냄새도 안 나는데! 난 손 안 쓰고 마법으로 뒤처리한단 말이야!”
인벤토리에서 꺼낸 물바가지에 돼지기름으로 만든 비누로 손을 씻고 있던 루나가 억울하다는 듯 말했다.
“저 루시라는 마검이 별난 거야! 오라버니도 너무 깔끔 떤다니까!”
동생의 해명이 들렸지만 솔라는 무시했다.
‘아아! 솔라가 내 편을 들어 줬어!’
한편 루시는 엄청나게 기뻤다. 저 불길한 마녀보다 자신의 말을 더 믿어 준 것 같았기 때문이다.
물론 솔라는 위생적인 부분 때문에 반응한 것이지만.
그는 쪼그려 앉아 손을 씻고 있는 루나를 가리키며 루시에게 말했다.
“저 아이의 이름은 루…… 리나, 리나 샬루트다. 내 여동생이고.”
동생을 소개하던 솔라는 멈칫했다.
‘굳이 루나의 본명을 말할 필욘 없겠지.’
아직 이 마검에 대해 잘 모른다. 신중해서 나쁠 건 없다.
‘그러고 보니, 내가 이 검을 착용하고서 루나라고 몇 번 불렀었는데?’
문득 마검 루시를 패용하고서 동생을 불렀던 때가 떠올랐다.
[알고 있다, 리나 샬루트. 그대 이름은 로안 샬루트.]
그의 소개에 마검 루시는 딱히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솔라는 앞으론 단둘이 있을 때도 리나라고 부르기로 결심했다.
‘루나라는 애칭을 1황녀 루나시르네로 연상하는 사람은 없겠지만……. 아니다. 혹시 모른다. 영악한 재상은 눈치챌지도.’
습관으로 루나라 말했다가 정체가 탄로 날 수 있으니.
속으로 그렇게 결심한 솔라는 시선을 돌려 마검 루시를 보았다.
“그동안 아무 말도 안 하고 듣기만 했던 건가?”
지루하고 답답해서 어떻게 참았을까? 사람과 정신세계가 달라서 상관없었을까?
[나라고 매번 깨어 있지는 않아. 잠들어 있을 때도 많다.]
“그런가? 잠도 자다니. 마치 사람 같군.”
우우웅.
그 말에 흠칫한 루시가 마검을 우웅 떨었다.
잔잔한 소란을 뒤로하고 셋은 여정을 떠났다.
마녀 루나는 빗자루를 타고 뽈뽈 날았고, 기사 솔라는 검은 말을 타고 이동했다.
둘 다 속도는 빠른 편. 목적지와의 거리는 멀지도 가깝지도 않지만 언제 볼카 요새가 함락될지 모르기에 서둘러야 했다.
“그러니까 아무 기억도 없다는 건가?”
[그렇다.]
말을 타면서도 솔라는 심심하지 않았다. 마검 루시와 이런저런 얘기를 나눌 수 있었기 때문이다.
방금 솔라는 마검에게 정체를 물었다. 어디서 무슨 목적으로 만들어졌고 어떻게 하늘에서 내려온 것인지 등등.
이에, 루시는 기억이 안 난다는 식으로 답했다.
“기억이 없단 말이지?”
[그렇다.]
마검의 대답에 솔라는 미심쩍었지만 일단 넘어갔다.
[나를 잡자마자 고통에서 해방되었다고 그랬나?]
이번에는 마검이 질문을 한다. 마검과 동기화된 루시는 조심스레 솔라의 저주부터 살폈다.
[그 저주에 대해 자세히 알 수 있을까? 어쩌면 내가 해주 방법을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육안으로 봐야 제대로 알 수 있을 거 같아.’
루시는 최대한 솔라의 몸을 관찰했지만, 윈테이라를 통해서는 제약이 많았다. 그래서 문답식으로 최대한 그의 문제를 파악하기로 했다.
“기억이 없다며?”
[……지식은 가지고 있다. 기억에 없는 것은 나 자신에 대한 기억이다.]
기억상실증 걸린 마검이라니, 황당할 뿐이다.
“마나를 사용하면 더위와 뜨거움이 몰려오는 저주야.”
[지금은 괜찮은 건가?]
“덕분에, 물론 너랑 떨어져 있으면 다시 재발하지만.”
[그런가? 어쨌든 도움이 됐다니 다행이다.]
그 말에 루시는 엄청난 보람을 느꼈다.
우우웅.
그녀의 감정을 표현이라도 하듯 마검이 부르르 진동했고 은은한 빛을 냈다.
[아직 완전히 해주된 것은 아니지 않나?]
“그렇지.”
[해주 방법을 아는가?]
“아직은 몰라.”
막연히 마왕을 죽이면 되겠거니와 같은 추정만 있을 뿐이다.
[언제부터 그 저주를 느낀 거지?]
“막 루한에 왔을 때부터? 그때부터 슬슬 아프다가 사령술사와 싸우고 나서 극심해졌지.”
루시의 질문에 솔라는 순순히 답해 줬다. 마검이 가진 지식이라면 혹여나 다른 방법이 있을까 했다.
‘루한에 오자마자?!’
솔라의 말에 루시는 의문을 가졌다.
‘오스키에 오기 전부터 그랬다고?’
루시는 솔라의 저주가 사령술사와 싸우고서부터 걸렸던 것으로 알고 있었다. 하지만 당사자에게 직접 들으니 아니었다.
‘회귀 전에 나눴던 솔라와의 대화에서는 이런 내용은 없었는데?’
그녀는 생각을 거듭했고.
‘몸이 불편했던 걸 숨겼던 거였어! 원래 있던 저주가…… 이번 삶에선 사령술사와의 싸움으로 더욱 악화된 거야!’
그녀다운 결론을 돌출했다.
‘나란 여자는…… 그것도 모자라 사지로 가라는 명령까지 내렸으니. 과거에도 지금도…….’
가슴이 미어진다.
[…….]
거대한 죄책감에 루시는 감히 말을 잇지 못했다.
‘왜 말이 없지?’
갑자기 마검이 조용하자, 솔라는 시선을 허리로 향했다.
“루시, 자나?”
‘기면증까지 가진 마검인가?’라고 생각하면서 루시를 불렀다.
[아니, 안 잔다.]
마검의 어조에는 변함이 없다만, 이상하게 힘이 빠져 보였다.
[너의 저주는…… 잘 모르겠다. 설원의 힘을 쓰는 마법사나 마녀에게 가서 확인해 보는 게 나을 것 같다.]
‘역시 직접 확인해 봐야 저주의 정체를 알 수 있겠어.’
루시는 속으로 안타까워했다. 고민에 고민을 거듭한 끝에 그에게 선택지를 담은 서신을 보냈는데, 기어코 그는 볼카로 가기로 결심한 것이다.
“뭐, 루한의 여왕께서 설원의 대마녀시니까. 나중에 알현했을 때 여쭈어 보지.”
당장 해결할 수 없음에도 솔라는 개의치 않았다.
“루시, 마법과 관련된 지식이 많다고 했었지?”
그는 오히려 다른 게 궁금했다.
[그렇다. 궁금한 게 있으면 뭐든 물어보거라.]
“그럼 차원 이동이나 마왕의 저주에 대해서 아는 게 있나?”
[차원 이동? 마왕의 저주?]
솔라의 질문에 루시는 최선을 다해 자신의 지식을 뒤졌다.
‘솔라의 저주는 마왕과 연관이 있는 건가? 그런데 차원 이동은 뭐지?’
그의 물음에 루시는 머릿속의 지식을 풀로 가동했다. 하지만 명확히 이거다, 싶은 정보는 없었다.
공간 이동은 알아도 차원 이동은 모르겠고, 설원의 저주는 알아도 마왕의 저주는 모른다.
‘차원 이동은 기껏해야 몇몇 신화나 경전 속에 있는 내용들뿐이야. 마왕의 저주도 경전에서 본 거 같지만 솔라와 비슷한 저주가 아니야.’
[모르겠다. 미안하다.]
루시는 도움이 못 된다는 죄스러운 마음에 목소리를 떨었다. 하지만 마검으로 전환되는 목소리에는 어떠한 감정도 담겨 있지 않았다.
솔라는 루시의 사과에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 지금 당장은 루시, 네가 있으니까.”
[!!]
그 말에 루시는 미안함을 동반한 강렬한 감동에 어지러움을 느꼈다.
‘바로 차원 이동과 마왕의 저주에 대해서 조사하자!’
자신을 향해 미소 짓는 솔라. 더욱 가슴이 미어진 루시는 굳은 결심을 했다.
‘루한의 모든 역량을 동원해서라도!’
1황녀를 찾는 것에 이어서 차원 이동과 마왕의 저주에 대한 조사가 국책 사업이 되어 버렸다.
‘슬슬 동기화를 마쳐야겠어.’
얼핏 해를 보니까 여왕의 직무를 수행해야 할 시간이 가까워졌다.
[로안 샬루트.]
그녀는 동기화 해제하기 전에 솔라에게 진지한 어조로 말했다. 그래 봤자 마검으로 들리는 목소리는 그대로지만.
[마녀 리나 샬루트를 조심해라.]
“리나가? 무슨 소리지?”
[매우 수상하다. 사령과 음영의 기운이 강하다. 어쩌면 너의 저주가 심해진 것은 저 마녀 때문일 수도 있다.]
미래에 저 마녀가 죽음의 대마녀가 될지 모른다고 해 봤자 그는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오히려 자신만 이상한 마검 취급받겠지.
‘최대한 자주 동기화해서 견제할 거지만, 솔라도 경계심을 가져야 해!’
루시는 솔라의 심해진 저주의 배후에 저 어린 마녀가 있을 거라고 거의 확신했다.
‘루나에게서 그림자 핵과 사령술을 느낀 건가? 과연 마검이군.’
“알고 있어.”
루시의 경고에 그는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너도 알고 있으니 앞으로 주의…… 알고 있다고?]
“그래, 알고 있으니 걱정 안 해도 돼.”
담담한 그의 대답에 오히려 당황한 것은 루시다.
[그런가? 대단하군, 로안 샬루트.]
루시는 당황하다가도 솔라의 능력을 떠올리고는 납득했다.
‘역시 솔라야!’
그리고 괜한 자랑스러움을 느꼈다.
‘이런 남자가 나를 위해서 마지막까지!’
자랑스럽고 고마우면서 더욱 미안했다. 가슴이 미어지는 감동이 밀려왔다.
그녀는 최대한 티가 안 나게 미어지는 감정을 억눌렀다.
‘슬슬 가 봐야지.’
태양의 위치를 본 루시는 동기화를 해제하기로 마음먹었다.
그와 더 있고 싶지만, 이따 밤을 노려야지.
[로안 샬루트, 난 이만 가 봐야겠다.]
“가다니?”
[실언이다. 잠들 시간이다.]
“언제쯤 일어나지?”
[밤에.]
“그때 보지.”
영원히 이별하는 것이 아니기에 솔라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 로안 샬루트.]
그렇게 루시가 잠드는가 싶더니, 다시 그를 부른다.
[잠들기 전에 마지막으로 궁금한 게 있다. 진짜 마지막이다.]
“말해 봐.”
[전에 여왕이 영지와 작위를 내린다고 했을 때, 기뻐하지 않았던 이유. 그게 궁금하다.]
갑자기?
뜬금없는 루시의 질문에 솔라가 고개를 갸웃한다.
[그대의 표정이 유독 안 좋아 보였었다. 그래서 궁금했을 뿐이다.]
루시는 황급히 질문의 이유를 덧붙였다.
‘에고 소드면 인간의 감정이나 생각 같은 거에 관심이 있을 수도 있지.’
마치 인공지능 로봇이 인간의 생각과 감정을 관찰하는 것처럼.
“루한의 여왕님은 제국과 황족을 증오한다고 들었어. 그런 나에게 이런 선물을 내린다는 것부터가 마냥 긍정적으로 볼 수 없었지. ……함정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질문의 이유를 나름 해석한 솔라는 대충 대답해 줬다.
[함정이라니, 결코 아니다!]
루시가 급히 말했다.
“……?”
솔라의 표정이 의아해지자, 루시는 추가로 덧붙였다.
[어…… 그, 그! 마검의 예지, 그래, 예지력 같은 거다! 내가 확실히 느끼는 것인데, 함정은 아니다. 오히려 아주 좋은 느낌이 든다!]
“그런가? 어차피 당장 갈 일은 없을 테니까.”
루시의 말에 솔라는 피식 미소 지었다.
[……!]
금발, 금안의 남자가 짓는 미소는 너무나 아름다웠다.
그 미소를 본 여왕은 심장이 녹는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