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6화
#26.
솔라에게서 마지막 대답을 들은 뒤, 루시는 동기화를 끝냈다.
방금까지 들판을 달리던 시야가 암전되었다.
여왕 루시푸르네는 감았던 눈을 떴다.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다양한 감정이 절로 어우러진 심장 박동 소리가 고요한 침실을 울렸다.
회귀 후 솔라와 처음 대화를 했다.
그 과정에서 더 큰 죄책감과 미안함도 있었지만, 그 반대되는 감정도 느꼈다.
‘그랬던 거구나! 확실히 함정으로 보일 수도 있었어. 내가 좀 더 세심했어야 했는데…….’
루시는 솔라가 마지막으로 한 대답을 듣고서 크게 안도했다.
‘소문을 내자. 내가 황족을 무조건 싫어하지 않는다는 소문을!’
다행히도 루시에겐 감당할 수 있는 사유였다.
답답했던 마음속 한구석이 뻥 뚫린 기분을 느꼈다.
시원하게 편해진 마음속으로 훈훈한 봄바람이 흐르는 듯했다.
여왕은 눈을 감고 방금까지 나눴던 솔라와의 대화를 음미했다.
‘루시……. 날 루시라고 불렀어! 내 말을 신뢰해 주기도 했고!’
특히 마검의 이름으로 자신의 애칭을 붙여 준 것.
물론 루시라는 이름은 루한은 물론 대륙에서 아주 흔하다. 평민들은 이름으로 쓰고 귀족들은 애칭으로 쓴다.
그러나 아무렴 어떠리. 우연이지만 참으로 축복 같은 우연 아닌가.
그와 대화를 나누는 것은 또 다른 행복이었다. 그의 숨결과 체온을 느끼던 것과는 다른 느낌. 영혼이 살찌고 구름 위를 걷는 기분이 이런 걸까.
계속 미소가 지어지고 양 볼에는 홍조가 끊임없이 떠오른다.
평소엔 거의 보지 않았던 거울도 자꾸 보게 된다.
“폐하, 섭정 루카스 에버가든 대공이 알현 왔습니다.”
침실 문에서 베네사의 목소리가 들렸다.
“알았다. 곧 갈 테니 어서 거리를 벌리거라.”
‘마침 잘됐어. 섭정께 차원 이동과 마왕의 저주와 관련된 서적을 전부 긁어 오라고 해야지.’
루시는 여왕의 의무를 하러 알현실로 향했다.
* * *
마검 루시가 잠들고 딱히 할 게 없었던 솔라는 박차를 가해서 질주하듯 변경백의 주도를 가로질렀다.
루나 또한 그런 오빠와 경주라도 하듯 빗자루를 최고 속력으로 몰았다.
덕분에 두 남매는 해가 질 때쯤 변경백의 외곽으로 들어올 수 있었다.
“외곽이라서 그런가, 공기마저 살벌하네?”
외곽에 들어서자마자 루나가 인상을 찌푸렸고.
“노숙할 때 불침번도 서야 할 거야.”
솔라는 좀 더 긴장을 세웠다.
“그럴 순 없지, 오라버니! 해지기 전에 마을로 가자! 외곽에서 노숙하는 건 진짜 싫다고!”
루나는 오빠를 재촉했다.
그녀는 이자벨의 폭주 당시, 혼자서 외곽에서 노숙을 했던 경험이 있다. 각종 결계와 알람 마법, 불침번 역할의 언데드 몇을 세워 놓았지만 괴로웠다.
밤사이에 셀 수 없이 알람이 울리고 결계가 작동했다. 불침번으로 세워 놓은 언데드 또한 시간 단위로 재소환해야 했다.
‘잠은커녕 노이로제에 걸릴 지경이었단 말이야!’
그때 기억을 떠올린 루나는 어깨를 부르르 떨고는 다시 한번 재촉한다.
“맨카야! 어서어서 뛰어!”
이번엔 솔라가 맨해튼카페에게 재촉했다. 동생 입장에서 느끼는 것이지만, 오라비의 작명 센스가 별로라고 생각했다.
말도 그렇고, 저 마검도 그렇고, 심지어 예전 자신의 이름도 그렇고.
“뭐 해? 갑자기 왜 멈춰?”
그렇게 재촉하는데, 갑자기 솔라가 속도를 줄이더니 그 자리에 섰다.
푸르릇.
맨카는 잔뜩 경계하며 투레질하고.
“…….”
솔라시우스는 진지한 눈으로 어딘가를 응시했다.
쿠웅, 쿵-!
끄아아악!
꺄악!
잠시 후, 루나의 귀에도 심상치 않은 소리가 들렸다.
“몬스터군. 이쪽으로 오고 있어. 다섯 정도가 쫓기고 있고.”
솔라가 나직이 말했고.
“트롤의 괴성이야. 그리고 한 마리가 아닌데? 최소 네 마리 이상.”
루나는 몬스터의 종류를 맞췄다.
스르릉.
솔라는 전투에서 주로 사용하는 검을 뽑았다. 전에 오스키에서 선물받았던 숫돌 마법이 인챈트된 드워프제 검이다.
루나 또한 나름의 마법을 준비했다. 오라버니의 실력을 잘 아는 그녀는 전투보단 보조 역할을 맡기로 했다.
화르륵.
빗자루를 보드처럼 탄 루나는 양손에 화염구를 생성했다. 트롤은 재생이 빠르기 때문에 상처 부위를 불로 지져야 했다.
쿠웅, 쿠웅, 쿠웅.
나무 부서지는 소리와 함께 저 앞에서 사람들이 튀어나왔다.
‘기사?’
제일 앞 두 사람의 복장은 판타지풍 판금 갑옷에 서코트를 입은 기사였다. 그것도 방랑 기사나 평기사 따위가 아닌 변경백의 정규 기사.
쿠아아악!
뒤이어 그들을 쫓고 있던 트롤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현재까지 보이는 숫자는 네 마리.
솔라는 말에서 내렸다.
그리곤 검을 아래로 끌듯이 하고서 트롤 무리를 향해 달렸다.
파아앗.
검에서 광휘가 흐른다.
‘?!’
달리던 솔라는 맞은편에서 달려오는 한 기사와 눈이 마주쳤다.
투구는 잃어버렸는지 얼굴이 그대로 드러났다.
‘여기사?’
굉장히 드문 여기사다. 솔라는 짧은 감상을 뒤로하고 오히려 더 빠른 달리기로 트롤을 향해 돌진했다.
“……!”
분홍 머리를 짧게 친 미모의 여기사가 달리던 발을 멈춰 세우곤 뒤를 돌아봤다.
헐떡이는 숨을 내쉬면서, 여기사의 분홍색 눈동자가 놀란 눈빛으로 트롤을 향해 달려드는 방랑 기사를 담는다.
서걱-!
광휘의 궤적과 함께 트롤의 목이 잘렸다.
제일 선두에 있던 트롤의 머리가 떨어졌다.
워낙 갑작스러운 절명. 이별한 몸과 머리는 현실을 바로 받아들이지 못했고 5초 정도 마저 뛰다가 무너진다.
광휘를 몸에 두른 방랑 기사는 마치 마실이라도 나온 듯 여전히 꿈틀거리는 트롤 사체의 등을 밟고 위에 섰다.
다른 트롤 세 마리가 본능적으로 저 작은 인간을 노려본다.
함부로 달려들진 않는다. 오직 본능으로 가득 찬 몬스터도 아는 것이다.
스르릉.
금발, 금안을 한, 터무니없이 가벼운 차림의 방랑 기사가 은은한 빛을 발현하고.
해가 지는 검고 붉은 하늘 아래서 땅 위의 해님처럼 빛난다.
파앗.
놈들이 오지 않자, 솔라시우스가 먼저 달려든다.
“!!”
세 마리의 트롤은 본능적으로 몸을 떨었다. 본능적으로 몸을 돌렸고 등을 보이며 숲속으로 도망치려 한다.
하지만 놈들의 등으로 사람 주먹만 한, 빛으로 된 포탄이 작렬했다. 원거리 스킬, 빛의 추적 세 덩어리가 쏘아졌고, 바위처럼 질기고 두꺼운 트롤 셋의 등가죽을 허무하게 뚫었다.
그러고서도 힘과 화력을 잃지 않고 트롤의 심장부터 내장 전체를 불태웠다.
쿠워억! 쿠욱!
불사신 같은 재생 능력을 보인다고 해도 한계는 있는 법.
목이 단번에 잘리고 심장과 내장 전체가 불타 버리면 그 잘난 재생도 불가능하다.
놈들은 입에서 피와 뜨거운 연기를 뿜으며 쓰러졌다.
3미터에서 4미터 언저리의 괴물 네 마리가 숨을 거두는 데는 1분도 걸리지 않았다.
“저 검에 깃든 광휘는 오러?!”
“못해도 익스퍼트 최상급에서 마스터야……. 저렇게 젊은 나이에……!”
이를 지켜본 모두가 더 이상 커질 수 없는 눈으로 입을 쩍 하니 벌렸다.
재생을 대비하여 양손에 화염구를 만들었던 루나가 말없이 화염구를 거둔다.
태양은 아직 완전히 저물지 않았지만, 숲이라서 그런지 어둠은 좀 더 빨리 찾아왔다.
일몰이 어둠을 내려 대지를 감싸도 주변은 어둡지 않았다.
광휘의 여운이 반딧불처럼 트롤의 사체와 숲 주변을 맴돌았다.
은은히 빛나는 검을 든 남자는 그 중심에서 뒤를 돌아보더니 이렇게 말했다.
“노숙을 해야겠다, 리나야.”
말도 안 되는 무용을 뽐낸 솔라시우스가 처음으로 한 말이었다.
이세계로 와서 몬스터를 잡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하지만 태광휘는 지구에서 질리도록 몬스터를 잡았다. 세 보는 것도 잊었을 정도로.
의외로 솔라시우스의 기억에는 몬스터 사냥이 거의 없었다. 황궁에서 유년기를 보내고 청년기를 요정의 숲에서 보냈으니, 어쩌면 당연하다. 제국군도 거뜬히 막는 세계수의 가호 아래서 몬스터가 설칠 리는 없을 테니.
‘나쁘지 않네.’
마검 루시를 얻고서 처음으로 태양 이능을 부담 없이 써 봤다.
비록 파괴력은 오리지널보다 덜했지만, 그렇기 때문에 훨씬 정밀하게 싸울 수 있었다. 만약 오리지널이었다면 트롤의 사체는 이렇게 깔끔하지 못했겠지.
고개를 돌려 주위를 둘러보니 다섯의 인영이 두려움과 경외를 담아 자신을 보고 있다.
‘기사 둘에 병사 셋이었군.’
자세히 보니 다섯 모두 기사는 아닌 모양. 하긴 정규 기사 다섯이면 트롤 네 마리는 충분히 상대했을 것이다.
“그나저나 희한하네? 트롤이 이렇게 무리 지어서 다녔나? 게다가 이 트롤들, 평범한 트롤이 아니야. 돌연변이? 아니면 마법으로 강화한 건가?”
동생 루나시르네가 빗자루를 타고 뽈뽈뽈, 솔라 옆으로 다가왔다. 호기심 많은 마녀답게 트롤의 사체를 관찰한다.
관찰하는 루나의 검은 눈동자에 빛이 어렸고 초롱초롱한 눈으로 솔라를 바라본다. 이 트롤의 사체를 채집해도 되냐는 듯 눈으로 물었다.
솔라는 그런 동생을 보곤 소리 없이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어린 마녀는 생일 선물을 받은 아이처럼 환하게 웃었다. 그리고 자신만의 방법으로 트롤의 피를 뽑고 가죽과 힘줄을 분해하기 시작했다.
사령술사라서 그런지 손동작에 망설임이 없고 능숙하다. 귀여운 어린 마녀의 도축 행위는 뭔가 이질적이다.
“그…… 도와줘서 감사하오.”
담담한 눈으로 동생의 백정 짓을 구경하는데,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고운 여성의 목소리. 나름 있어 보이려고 낮게 무게를 줬지만 딱히 티는 안 난다.
“우리가 가져도 되겠지?”
솔라는 뒤를 돌아보면서 동생이 도축 중인 트롤 사체를 가리켰다.
“물, 물론이오!”
쇼트커트한 분홍 머리에 분홍 눈동자가 인상적인 여기사가 고개를 끄덕인다. 그녀 뒤에 있던 다른 기사가 솔라의 말투가 마음에 안 드는지 인상을 굳힌다.
하지만 눈앞의 여기사가 이들 중 제일 높은 신분인지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나는 유리아 폰 문라이트라고 하오. 여기는 미하일 카바스 경. 병사들은 한슨, 욥, 잭으로 모두 변경백의 정예병이오.”
솔라는 무심한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고. 미하일이라는 기사는 경계 어린 시선을 보낼 뿐이다. 그 외 세 명의 병사는 자신들의 투구를 벗으면서 공손히 예를 표했다.
“로안 샬루트요. 저기 있는 마녀는 리나 샬루트.”
솔라 또한 자신과 트롤 루팅에 정신없는 동생을 소개했다.
“로안 샬루트라고 하면, 그 사령술사를 척살한!”
“단신으로 거대 도적단을 전멸시킨 오스키의 학살자!”
솔라의 소개에 뒤에 있던 병사들이 웅성거렸다. 처음 솔라를 보고 인상을 썼던 기사도 놀란 표정. 여기사 또한 분홍색 눈을 크게 떴다.
그의 이름이 제법 알려졌는지 다섯 모두 아는 눈치다.
“그대의 업적은 이미 변경백 전체에 널리 퍼졌지. 이렇게 직접 만나게 되어 영광이오.”
여기사 유리아가 떨리는 눈으로 악수를 청한다. 솔라는 그녀가 내민 손을 무심히 보다가 이내 손을 잡았다.
뒤에서 트롤 피범벅이 되어 도축에 여념 없던 루나가 이때만큼은 시선을 돌려 오라버니와 여기사를 보았다.
‘뭐지? 오라버니와 저 여기사. 함께 있으니까 제법 어울리는데?’
오라버니와 여기사가 악수를 하자, 여동생은 의미심장한 눈길을 보냈다. 자신의 오라버니는 정말 잘생겼다. 어지간한 미녀도 옆에 서면 빛을 잃을 정도. 하지만 저 분홍 머리 여기사는 오라버니 옆에서도 빛을 잃지 않았다.
“이름이 유리아 폰 문라이트라고 했던 거 같은데?”
솔라는 악수를 하던 손을 놓고서 입을 열었다.
“그렇소. 나는 변경백 문라이트 후작 각하의 딸이기도 하오. 하지만 후작가 영애이기 이전에 기사요.”
유리아는 가문을 소개하면서 속으로 긴장했다. 보통 여기사라고 하면 이상하게 본다. 미모까지 더해지면 더더욱 음흉한 눈을 한다. 새끼 양을 노려보는 늑대들처럼 당장이라도 어떻게 해 보려는 용병과 방랑 기사가 한둘이 아니다.
배경인 문라이트 후작가를 밝혀야만 얌전해진다. 그때부터는 어떻게든 눈에 잘 보이려고 굽신거리고 비굴해진다.
그랬기에 유리아는 침을 꿀꺽 삼키고 눈앞의 금발, 금안의 방랑 기사를 응시했다.
‘일단 처음 나를 봤을 때 별 반응이 없었어.’
로안 샬루트라는 망명 황족 기사에 대한 유리아의 첫인상은 신선했다. 지금까지 보아 온 방랑 기사 중에 이런 남자는 처음이다.
여기사인 그녀를 봐도 무시하거나 음흉한 시선을 보이지 않는 모습. 오히려 저 기사의 동생이라는 마녀가 뒤에서 난리다.
하지만 자신의 배경을 듣고도 이런 반응을 이을 수 있을까?
자, 너는 어떻게 반응할 거지?
유리아는 침을 삼켰다. 눈앞의 기사가 여타 방랑 기사들처럼 행동한다면 실망이 클 것 같았다.
“그렇군.”
그리고 솔라시우스는 여전히 무심한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놀라는 눈빛도 아첨하는 어조도 어느 것 하나 없었다.
오히려 유리아가 당황할 정도로.